# 99
이택진이 크레인을 요구한 지 닷새 후, 회의실에는 박 준위와 이 대위, 이진성, 도만수, 이택진이 모여 앉았다. 그들은 벽면 모니터에 뜬 몇 장의 사진을 보는 중이었다.
사진은 평택 시청 동쪽의 비전 2동 아파트 건축 현장을 담고 있었다. 크게 田 자 형태의 구역의 나뉜 네 블록이었다.
남서쪽 블록의 북쪽에 위치한 아파트는 이미 완공 후 입주까지 했는지 조경된 나무와 주차된 승용차들이 보였다. 그곳 바로 남쪽으로는 거의 완성 단계의 아파트 몇 개 동이 서 있었다.
북서쪽 블록은 아직 많이 올라가지 않았지만 한참 올라가다 멈춘 현장이었고 동쪽의 남, 북 두 개 블록은 거의 터파기 공사만 완료한 것 같아 보였다.
“저기 보이는 저 크레인이면 되는 겁니까?”
이대위가 사진 위로 레이저 포인터를 움직이며 물었다. 사진에는 전부 5대의 크레인 특장차가 보였다. 북서쪽 블록에 한대, 남서쪽 블록에 두대, 두대는 동쪽 블록과 서쪽 블록 사이의 도로상에 있었다.
“네. 전부 50톤짜리로 보이네요. 저 비싼 게 저렇게 버려져 있다니… 세상 참.”
비싼 거 얘기가 나오자 도만수가 혀를 끌끌 찼다.
“저것만 버려졌나? 세상이 다 버려졌네.”
“하긴 그러네요.”
크레인이 확인되자 박 준위가 일어서 모니터로 다가갔다. 그리고 남서쪽 블록의 남쪽 공사장 사진을 확대해 달라고 컴퓨터 앞의 병사에게 요청했다.
“여기를 보시면 말입니다. 이거 아무래도 밭 같아 보이지 않나요?”
확대된 사진의 한쪽에는 파란 풀이 꽤 넓은 지역을 차지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것들이 차지한 땅은 분명하게 네모 반듯했고 중간중간 고랑으로 보이는 맨땅도 보였다. 사람 손을 탄 것이었다.
이 대위는 이미 본 사진이었다. 놀라는 사람은 이진성과 도만수, 이택진 셋이었다.
“그러네. 밭으로 보이네요. 저기 사람이 산다는 말인데…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요? 밭이 꽤 커 보이는데 저 정도 관리하려면 적지는 않아 보이지 않으세요?”
이진성의 말에 이택진이 대답했다.
“경작하는 거는 매일 관리만 하면 몇 명이면 되는데, 저 정도 식량이 필요하다면 저 안에 꽤 많은 사람이 있다는 얘기죠.”
“어느 정도나 있을 것 같으신데요?”
“글쎄요. 못해도 50명 이상? 많으면 100명 이상?”
“그렇게 나요?”
박 준위가 끼어들었다.
“저 위에서 한참을 정지해 있었는데 사람은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그 정도 사람이라면 구조요청을 위해 몇 명이라도 나왔어야 하지 않을까요?”
그 대답은 도만수가 했다.
“만약에 구조를 원하지 않는다면 오히려 숨을 수도 있겠지.”
“무슨 말씀이세요?”
“범죄자 집단일 수 있겠지”
이재규도 한마디 거들었다.
“보통 사람이라도 탈영병이나 기타 군 조직에 당한 경험이 있다면 숨을 수 있죠.”
거기에 이택진은 또 다른 의견을 붙였다.
“아니면 저기에 있는 게 탈영병이어서 숨었을 수도 있겠네요.”
탈영병이라는 말에 이진성은 석수역과 안산에서의 탈영병들이 생각났다. 몇 명만으로도 분명히 위험한 존재인데 이미 정착할 정도면 강한 무력이 있을 것 같았다.
“만약에 저기에 50 이상의 무장한 탈영병이 있다면 많이 위험하지 않을까요?”
“그렇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벌써 7월 25일입니다. 총알은 없을 수도 있어요.”
희망적인 의견을 낸 이재규의 말에 사진을 보던 이택진이 다시 어두운 의견을 냈다.
“글쎄요. 저길 봐. 팬스로 둘러 쌓여 있잖아. 어쩌면 저기는 처음부터 Anti Zombie Field 였을지도 몰라요. 그럼 총알은 얼마 쓰지 않았겠죠.”
최악의 경우 전투를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쪽에서는 이동 가능한 병력이 거의 없었다. 공격수단은 장갑차와 헬기인데 놈들이 건물 안에 숨으면 효과 없는 소모전만 할 뿐이다.
도만수가 이택진에게 넌지시 물었다.
“세대면 안 되겠나?”
이택진은 잠시 생각하더니 아쉬운 얼굴로 대답했다.
“다다익선이지만 굳이 위험을 감수할 이유는 없습니다.”
“그럼 그렇게 하세. 필요 없는 충돌은 피하세. 그리고 이대위 자네는 장갑차랑 트럭이랑 보내서 우리가 세력이 크게 보이게 해 주게. 트럭은 전부 호로 뒤집어쓴 놈으로.”
“알겠습니다. 장갑차에 105mm 포 달린 놈도 같이 보내겠습니다. 트럭은 10대면 되겠죠?”
“헐헐. 그 정도면 되지 않겠나?”
이택진이 트럭도 간다는 말에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럼 저 팬스도 뜯어 올까요? 저것들만 다 걷어 올 수 있으면 기존 팬스도 다 보강할 수 있겠는데…….”
이택진의 말에 일행은 지도를 돌아봤다. 전체 둘레가 거의 4km에 달하는 블록이었다. 거기에 田 자 안쪽 길에도 팬스가 있으니 도로의 길이만 6km 가까이 되는 것이다.
그 길 전체에 팬스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사진상으로 보기에 팬스의 총연장은 거의 3km 이상 되는 것 같았다.
“그럼 일단 저 남서쪽 블록 빼고 나머지는 뜯어 올까요? 시간은 얼마나 걸리겠습니까? 병력을 얼마나 빼야 할지 봐야 해서요.”
“음… 가서 확인해 봐야 알겠지만 저기와 저기라면 사흘에서 나흘 정도면 될 것 같습니다.”
“사나흘이라... 경비병력으로 20명이면 되겠습니까?”
“없는 살림에 그 정도면 감지덕지죠. 흐흐”
이 대위는 자신도 함께 가겠다고 했다. 만약 그곳에 있는 것이 탈영병 집단이면 그래도 장교인 자기가 가는 것이 낫다는 판단이었다.
진화자 중에서는 이진성만 따라가는 것으로 결정 봤다. 다른 사람들은 공사장 경비 지원과 신입 진화자 훈련 등으로 일이 바빴다. 혹시라도 필요하면 헬기로 몇 분 만에 올 수 있으니 큰 상관은 없었다.
다음날 아침 일찍 출발한 행렬은 활강포 장갑차를 선두로 진행했다. 목적지는 38번 국도를 접하고 있다.
저번에 농협에 갈 때 기지에서 나가 45번 국도를 타고 올라 38번과 만나는 지점에서 좌회전했었다.
이번에는 같은 곳에서 우회전 직진만 하면 된다.
교차로까지는 저번에 뚫어 놓은 길이었다. 순식간에 그곳까지 도달한 행렬은 우회전하면서부터 길을 막고 있는 차량을 밀어내야 했다.
간혹 포를 쏴가며 전진한 그들은 거의 한 시간 만에 약 4.5km를 전진해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었다.
신기한 것은 평택시 구역에 들어가면서 길을 막고 있는 차량이 급격하게 줄어 목적지 근처는 그냥 뻥 뚫려 있다는 것이었다.
“시내 사람들은 거의 빠져나간 후에 국도가 막혔나 봐요.”
“아니면 막힌 길 때문에 포기하고 집으로 돌아갔거나.”
“많이 빠져나갔기를 빌어요. 그럼 시내에 좀비도 적을 테니까”
험비에서 밖을 내다보며 잡담하던 이진성과 이택진의 눈에 저 앞에 사진에서 봤던 택지가 보였다. 아파트 단지를 지나 갑자기 나온 거대한 공터였고 그 공터 너머에는 또다시 아파트 단지가 보였다.
“좀 편한 사람들이 있었으면 좋겠는데…….”
“그럼 헬기 보고 전단보고 나왔겠지…….”
* * *
“형님. 헬기가 또 왔습니다”
“이런 쓰벌. 도대체 여긴 뭐 먹을 게 있다고 자꾸 오고 지랄이야? 또 이 전단 뿌리냐?”
“이번에는 안 뿌리고 그냥 공중에 떠 있기만 한데요?”
“뭐? 우리가 여기 있는 거 눈치챘나?”
38번 국도를 접하고 있는 서남쪽 블록의 한 아파트의 실내에는 제법 많은 사람이 있었다. 비록 완공이 된 것은 아니었지만 사람들이 있는 곳은 내외벽 공사와 창호공사까지 모두 끝난 곳이었다. 방에 문도 달려 있었다.
그런 곳의 한 곳에서 두 남자가 박 준위의 헬기에 대해 얘기하고 있었다. 두 사람의 머리와 수염은 지난 3월 이후 한 번도 자르지 않았는지 지저분하게 자라 있었다. 군용 전투화를 신고 군복 바지를 입었지만 상의는 사제 반팔티였다. 그런 그들의 옆에는 k2 소총이 놓여 있었다.
그 방의 밖에는 그런 비슷한 복장의 인원이 10여 명 더 있었다. 그리고 그들이 있는 곳의 한쪽 구석에는 탄통 10여 개가 쌓여 있었다.
그곳으로 비슷한 복장의 젊은 남자 하나가 뛰어 들어와 아까의 두 남자가 있던 방으로 달려 들어갔다.
“형님. 큰일 났습니다. 장갑차가 오고 있어요. 육공 트럭도 오고요”
“뭐? 뭔 개소리야?”
“진짜예요. 장갑차도 우리 꺼 아니에요. 미군 거예요. 그중에 하나는 포신도 달려 있어요”
“뭐야? 이것들 진짜 미군기지에 있는 놈들이야? 전단 구라 아니고 진짜였어?”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요. 저것들이 우리 잡으러 온 거면 어떻게 해요?”
“아니. 이판국에 탈영병 몇 명 잡아서 뭐 한다고 저 지랄이야?”
형님이라고 불리는 남자는 한쪽 구석에서 자신의 군복 상의를 집어 들고 일어섰다. 옷에는 중위 계급장이 달려 있었다.
“어디 가시게요?”
“씨불. 전쟁할 판이잖아. 위층에 최 선생한테 가 봐야지.”
“총질할 판에 그 사람들은 뭐 하게요? 초인들이 총앞에서도 초인이래요?”
“새끼야. 그럼 우리만 총 맞고 있을래? 저것들도 뭐라도 해야 할거 아냐?”
방을 나와 현관문을 향하는 중위는 눈에 보이는 놈들 아무나 들으라는 듯이 말했다.
“야. 밑에 민간인들 밖으로 못 나가게 잘 통제해라. 살려달라고 뛰쳐 나가면 복잡해진다. 알지?”
“알겠습니다”
“알겠습니다? 이것들이 빠져가지고. 알겠습니다만 하면 그것들이 가만있냐? 당장 튀어 가란 말이야. 빨리 안 움직여?”
“알겠습니다”
다시 알겠습니다를 외친 나머지 놈들이 후다닥 튀어 나가는 꼴을 보며 중위는 다시 외쳤다.
“총은? 총 안 가져가고 뭐하냐? 총은 모셔뒀다 팔아먹을 거냐?”
후다닥 다시 들어와 총을 챙겨나가는 놈들을 보며 중위는 한숨을 푹 내쉬고 밖으로 향했다.
중위가 도착한 위층의 집에는 이미 열다섯의 사람이 모여 있었다. 그들은 중위가 들어가자 자기들끼리 하던 얘기를 급히 멈추고 입 닫고 중위에게 자리를 피해 줬다.
‘이것들. 이미 작당을 끝냈군’
중위는 그들의 가운데 앉은 40대의 여자에게 다가갔다. 여자는 날렵하면서도 탄탄해 보이는 근육질의 몸이었다. 그녀의 옆에는 소방 도끼가 하나 서 있었다.
“최 선생님. 이번에는 심각합니다. 아예 병력을 끌고 왔나 봐요.”
“그런데요?”
“그런데요 라뇨?”
“그렇잖아요. 우리는 외부 약탈 때 좀비만 상대하고 다른 위협은 군인이 처리하는 거 아닌가요?”
“그렇긴 하지만 지금은 특수상황 아닙니까? 저희가 당하면 여러분은 무사하겠습니까?”
“무사하지 않을 이유가 있나요? 전단에 보면 우리 같은 사람 원하는 것 같던데?”
“정말 그렇게 생각하세요? 지금까지 수십을 죽였는지 수백을 죽였는지 모를 여러분을 저들이 그냥 받아줄까요?”
“호호. 저들이 그걸 무슨 수로 알죠? 우리가 입 닫으면?”
“아. 최 선생님, 또 왜 이러실까? 어차피 여기서 왕 노릇 하는 거 좋아서 저쪽에 가실 생각도 없으시면서. 원하는 게 뭡니까? 말을 해 보세요. 우리 공생 관계 아닙니까? 서로 빈정상해서 싸워봐야 좋을 거 없어요. 둘 중 한쪽은 다 죽는 겁니다.”
“호호호. 누가 싸우자고 하나요? 같이 잘 먹고 잘 살아야죠.”
“그러니까 원하는 걸 말해 보세요.”
“좋아요. 그럼 이렇게 해요. 우리가 이 안으로 진입하는 놈들 있으면 다 처리하겠어요. 실내 전투는 우리가 군인들 총보다 더 효율적이니까요.”
“대가는요?”
“지금 받는 식량의 50% 증가.”
“50이라고 하셨습니까?”
“네. 50”
“장난해요? 다른 사람은 다 굶으라고요?”
“굶기는 누가 굶어요? 우리 빼고 중위님 식구 빼고도 150명 이상이에요. 그들이 먹는 거 조금씩만 줄여주면 되는데?”
“허, 그 사람들 안 그래도 먹을 거 부족해서 일하다 픽픽 쓰러지는데 거기서 뭘 또 줄여요?
“그럼 밖에서 먹을걸 더 구해 오면 되죠. 하여간 우리 배분량은 그렇게 해 줘요.”
“20”
“안돼요 50”
“30”
“40”
“35”
“OK 35”
최 선생이라는 여자를 한번 노려본 중위는 말없이 뒤돌아 그곳을 나왔다.
‘확 다 죽여 버리고 투항해버릴까?’
이내 중위는 고개를 저었다. 자기 자신도 못지않은 살인 경험이 있다. 그럴 수는 없었다.
“씨불. 그동안 재미있게 잘 살았는데…….”
어두운 표정으로 계단을 내려가는 발걸음은 무겁기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