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0
계단을 내려가며 20명 남짓한 인원으로 저들을 어떻게 막나 고민하는 중위는 미처 모르고 있었다.
지금 밖에 오는 병력의 목적이 자신들의 섬멸이나 체포가 아니라는 것을. 그리고 자신들이 양민학살을 했거나 말거나 관심도 없다는 것을.
“형님. 형님!”
생각에 빠진 그를 깨운 것은 옥상에서 보초를 서던 녀석이었다. 놈은 계단을 몇 개씩 뛰어넘으며 달려 내려오고 있었다.
놈의 급한 모습에 중위는 침입이 시작되었나 싶었다.
“뭐야? 놈들이 진입했어?”
하지만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대답하는 녀석의 말은 중위의 예상과 전혀 달랐다.
“아뇨. 놈들 하는 짓이 이상합니다. 서쪽, 남쪽, 동쪽에 장갑차 한 대씩 서 있기만 하고요, 트럭은 전부 북쪽으로 올라갔어요. 저쪽 1단지 너머로 가서 뭐 하는지는 안 보입니다. 확인하려면 직접 가봐야 해요.”
“다른 움직임은?”
“그게… 저쪽에 대로에 서 있는 큰 크레인차 있잖아요? 두 대. 그걸 몰고 가버렸는데요? 장갑차 두 대도 같이 갔어요. 그 자리에는 박격포 전개해 놓고요.”
“뭐? 가? 어디로?”
“자기들 온 길로 가던데요?”
“완전히 갔어? 그걸로 여길 밀고 들어오려는 같지도 않고? 아니지. 들어올 거면 그냥 장갑차로 밀고 들어오면 되지. 그걸 쓸 이유가 없지.”
“그러게요?”
턱을 쓰다듬으며 생각에 잠겼던 중위가 다시 물었다.
“헬기는?”
“그게 크레인이랑 같이 갔어요.”
“그렇단 말이지… 가서 내 총 가져와. 그리고 다섯만 무장하고 내려오라고 해.”
말을 마친 중위는 계단을 달려 내려가며 생각했다. 놈들의 목적이 자신들이 아닐지도 모른다 싶었다. 하지만 확인이 먼저였다. 그리고 공중에 헬기가 없는 지금이 그 확인의 적기였다.
1층에 내려온 중위의 귀에 들려오는 소리는 아무것도 없었다. 사람 소리는 고사하고 단지를 포위했다는 장갑차의 엔진음도 들리지 않았다.
‘정말 공격이 목표가 아닌가 보네. 크레인은 자기네가 쓰려고 가져간 건가?’
잠시 생각을 하던 그의 귀에 위에서 뛰어내려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전투조끼와 방탄모까지 챙겨 입은 놈들 다섯이 내려왔고 그중 한 녀석이 중위에게 소총과 조끼, 방탄모를 건넸다.
3월의 사태 이후 처음으로 써보는 방탄모를 받아 든 중위는 기분이 묘했다.
“방탄모까지 쓸 일이 있을 줄이야…….”
“그러게 말입니다. 군인들하고 싸우게 될 일이 있을 줄은 몰랐습니다.”
“아니야. 그동안 운이 좋았어. 저들 아니어도 다른 탈영병 하고 싸울 수도 있었는데 그동안 너무 편했지.”
앞장서는 중위를 따라 다섯이 조심스럽게 걸음을 옮겼다. 속보로 전진한 그들은 이미 입주가 끝난 1단지와의 경계를 이루는 팬스의 쪽문에 도달했다. 그 너머는 좀비가 된 입주민들이 있는 구역이었다.
“상민이는 여기서 문 잠그고 대기해.”
“네.”
한 명을 대기시키고 잠긴 문의 빗장을 풀려는 중위에게 바로 뒤의 한 녀석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좀비 나와서 총 쏴야 할 경우 어쩝니까? 저 놈들 들을 텐데.”
“상관없을 것 같아. 저놈들은 우리가 여기 있는 거 알아. 그런데 목적이 침입은 아닌 거 같거든. 그러면 총소리 나도 무시하겠지.”
“106동 옥상까지는 가야 하는데 위험하지 않겠습니까? 놈들 목적이 침략이 아니면 차라리 장갑차에 가서 물어보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그럴지도 모르지. 하지만 아직 확실하지 않잖아. 일단 정찰부터 하자. 여기 좀비들 그동안 많이 잡았으니까 일단 가 보자고.”
“그래도 아파트 내부에는 들어가 본 적이 없는데…….”
“괜찮아. 어차피 집 안에 있는 놈들은 밖으로 못 나와. 따라와.”
* * *
크레인 두 대를 기지로 보낸 이진성 일행은 다른 한 대가 있는 북서쪽 블록으로 향했다. 활짝 열려 있는 공사차량 진출입로를 통해 들어간 그곳은 사진에서 본 대로 아직 황량했다.
겨우 서너층 올라간 동이 두 개에 나머지는 아직 제대로 시작도 안 한 곳이었다.
트럭에서 내린 20명의 병사는 숨어있는 좀비가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 흩어졌다. 수색할 곳은 얼마 되지도 않았다. 간이 현장 사무실과 조금 올라간 두 개 동 뿐이었다.
이진성의 코에 들어오는 냄새는 없었다. 근처에서는 오직 남쪽의 아파트 단지에서 풍겨오는 약한 냄새뿐이었다. 그 냄새마저도 지상에서 움직이는 것은 하나도 없었다.
“대위님. 여기는 한 마리도 없어요. 굳이 수색할 필요 없는데?”
“그렇습니까? 그래도 상관없습니다. 밖에 나와서는 저렇게 해서 조금 긴장하는 편이 낫습니다. 안 그러면 사고 날 수 있습니다.”
병력에 관한 일은 이대위 소관이니 그저 고개만 끄덕인 이진성과 이택진은 수색이 끝나길 기다렸다. 그리고 수색은 금방 끝났다.
“깨끗합니다. 핏자국 조차 없습니다.”
“일부 약탈의 흔적이 있습니다만, 공사장비들은 정리되어 있습니다.”
“각자 위치로. 경계 철저히 한다. 좀비뿐만 아니라 무장한 인간의 공격도 있을 수 있다. 긴장 풀지 말도록 한다. 알겠나?”
“네. 알겠습니다.”
경례와 함께 삼삼오오 흩어지는 병사들을 뒤로하고 이택진은 저 안쪽에 덩그러니 서 있는 크레인으로 향했다. 동시에 팬스 해체 작업을 할 십여 명의 사람들은 팬스로 달려갔다.
이진성은 그 모습을 잠시 바라보다 길 건너 남쪽의 아파트로 시선을 돌렸다.
“저쪽 사람들이 오판하고 덤비지 않았으면 좋겠는데요.”
“쉽게 그러진 못할 겁니다. 장갑차 세대가 블록을 포위했고, 박격포도 전개했습니다. 탈영병이라면 이미 상황 파악 끝냈을 거고, 아니라면 덤비기보다는 숨기를 택하겠죠.”
“그랬으면 좋겠는데, 세상에는 워낙 또라이들이 많아서…….”
* * *
옥상에서 길 건너 아래 공사장을 내려다보던 중위는 사람들의 목적이 자신들이 아님을 확신했다. 트럭에서는 병력뿐만 아니라 민간인들 내렸다. 그리고 그들은 병사들의 수색이 끝나자마자 저마다 장비를 챙겨 들고 팬스로 달려갔다.
“저 사람들, 저거 뜯으러 왔나 봐요?”
“그런가 보네. 그런데 평택 미군기지에서 저런 게 왜 필요하지? 그리고 왜 미군은 보이지도 않는 거야?”
“트럭은 저만큼이나 와 놓고 내린 사람은 몇 안 되네요?”
“그러게. 빈 트럭이 오진 않았을 텐데, 안 내리고 뭐하나 몰라.”
중위는 궁금한 것 투성이지만 그렇다고 밑의 사람들과 접촉할 생각은 없었다. 자신들과 적대시 하지만 않으면 저들이 뭘 하든 상관없었다. 그저 조용히 볼일 보고 빨리 가 주길 바랄 뿐이었다.
“저기 저 도끼든 남자는 초인인가 봐요.”
그들이 보기에 험비에서 내린 민간인 하나는 도끼 하나 들고 서서 주위를 휘휘 둘러보기만 할 뿐 다른 일은 하지 않았다. 그는 옆의 장교 한 명과 뭐라고 계속 대화만 하고 있을 뿐이었다.
“저기는 초인이 귀한가? 달랑 한 명 따라온 거 보니…….”
“그래서 그렇게 전단 뿌리고 있나 봐요.”
“장갑차만 없었어도 어떻게 해 보겠는데 말이야.”
“그러게 말입니다.”
중위는 눈 앞에 보이는 험비와 트럭이 부러웠다. 그것들만 있다면 자신들의 활동이 훨씬 편해질 것 같았다. 또한 박격포도 있다고 들었다. 그건 차량보다 더 탐이 났다.
한 명 있는 진화자는 그들에게 별 문제는 아니었다. 사살하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상대의 병력이 얼마나 되는지 아직은 알 수 없었다. 더군다나 맨몸으로 소총만 들고 장갑차를 상대할 수는 없었다.
“에이. 욕심부리다 저세상 가느니 그냥 살던 대로 살아야지. 니들은 여기 있어. 계속 감시해. 저녁때 교대 보내 줄게.”
“네. 그런데 형님. 우리 그냥 저 사람들 따라 가면 안됩니까? 여름이야 그렇다 치지만 겨울은 어떻게 여기서 보냅니까?”
“그때 가 봐야지. 우리가 저기 가서 그동안 한 짓 알려지면 어떻게 되겠냐? 군법대로 하면 총살이야 총살. 우리 다 죽는 거야.”
“이 판국에 설마 법대로 하겠어요?”
“안 하면 좋지만 하면 어쩔래?”
끙~
모두는 입을 닫고 다시 시선을 아래로 돌렸고 중위는 털레털레 계단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 * *
최 선생이라는 진화자는 나무판자로 대충 만든 테이블을 톡톡 두드리며 생각에 잠겨 있었다. 그런 그녀의 주위에는 일곱 명의 진화자만 있을 뿐이었다. 나머지 일곱은 어디론가 가고 없었다.
한참을 생각하던 최 선생이 눈앞의 남자에게 들었던 얘기를 되물었다.
“여기 침범하러 온 것 같지는 않다고요?”
“네. 둘러싸고만 있지 아무것도 안 하고 있답니다. 병력 대부분은 북쪽 공사장으로 갔고요.”
“여기에 사람이 있는 것은 안다. 하지만 싸우러 온 것은 아니다. 단지 경계만 하고 있다는 건데…….”
다시 생각에 잠긴 그녀가 입을 닫았다. 나머지 일곱도 입을 닫고 그녀의 생각이 끝나기만을 기다렸다. 그들 사이에는 힘의 논리에 의한 서열관계가 분명했다. 그리고 서열 간에는 강력한 권위가 지켜지고 있었다.
이미 군기는 다 빠져 민간인이나 마찬가지인 탈영병들과는 많이 다른 분위기였다. 군대는 이미 친밀하지만 사회적 규율에 의한 위계로 돌아갔던 조직이었다. 사회적 규율이 사라진 그 조직은 빠르게 친목집단으로 바뀌었다. 그 안에서 서열을 정할만한 개인적 능력의 차이는 거의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진화자 집단은 서로 모르는 사람들이 모였다. 어쩌다 힘의 논리가 적용되기 시작하더니 그 현상은 집단의 경향으로 굳어져 점점 더 공고해지고 있었다.
“이번에 군인 수를 좀 줄입시다.”
한참만에 입을 연 최 선생의 말은 사람들의 상상 밖이었다.
“네? 갑자기 왜……?”
진화자들은 아무 능력도 없이 단지 총이라는 무기를 가졌다는 것 하나로 자신들과 동등하게 서려는 군인들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세상이 끝장나는 동안 한 것도 없었고, 그 이후에는 약탈과 살인을 일삼던 군인들이었다.
진화자들에게 필요한 것은 그들이 가지고 있는 화력이었지 군인 자체가 아니었다. 자신들 중에도 군대를 갔다 온 사람들은 그들만큼 총을 쏠 수 있었다. 더군다나 신체능력은 훨씬 좋았다.
여태 서로 충돌해 봐야 좋은 꼴 보지 못할 것이 분명해서 가만있었다. 하지만 지금 외부에 와 있는 저 군인들과 내부의 군인들이 충돌만 일으켜 준다면 자신들은 어부지리를 얻을 수 있었다. 더군다나 저 밖의 군대는 침공의 뜻이 없는 것으로 보인다는 것이다. 군인들의 피해만으로 일이 끝날 수 있었다.
최 선생의 설명을 들은 사람들은 고민에 빠졌다. 저들이 이곳 군인 수를 반만 줄여줘도 자신들은 온전하게 이곳을 통치할 수 있었다. 하지만 충돌 후 저들이 이곳을 점령하거나 소개하지 않을까 걱정이었다.
비록 여러모로 불편하기는 하지만 지금 세상에 이만큼 안전하면서 넓은 곳은 많지 않다고 믿는 그들이었다. 전단의 내용대로 평택 기지가 훨씬 살기 좋다고 해도, 그들은 불편하지만 마음대로 일탈하면서 살 수 있는 이곳이 더 좋았다.
전단을 보고 기지로 가자고 하는 진화자도 있었다. 평소에 살인은 하지 않았던 다섯이었다. 하지만 그들의 의견은 다수결에 의해 묵살되고 있었다.
“군대가 점령은 안 하겠죠?”
“그럴 이유가 없어 보이잖아요?”
“자기들 따라가자고 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이곳이 좋다고 하면 어쩌겠어요? 강제로 잡아갈 이유는 없잖아요? 군대가 들어오면 일반인들과 접촉만 못하게 하면 됩니다. 그리고 겉도는 다섯 명, 그들도 접촉 못하게 하고요.”
“그들이라면 지금도 박 씨랑 이 씨가 붙어 감시 중입니다만…….”
“그럼 됐어요. 일단은 어떻게 저들을 충돌시킬지부터 생각해 봐요. 단 우리가 관련되었다는 것은 끝까지 모르게 할 방법으로.”
약간의 시간이 지났다. 진화자 중 하나가 손을 들었다. 군인 출신 진화자로 항상 약탈의 선봉에 서서 살인과 강간을 일삼던 놈이었다.
“저쪽 동쪽 보초서고 있는 놈이 저랑 친한 놈입니다. 놈을 꼬셔서 이쪽에서 사격하게 만들겠습니다.”
“입막음은 자신 있어요?”
“녀석은 전투 중에 죽을 겁니다. 그리고 입은 확실하게 막힐 겁니다. 흐흐흐.”
음흉하게 웃는 놈을 따라 최 선생도 따라 웃었다. 그리고 그 둘을 따라 나머지도 킬킬거리기 시작했다. 그런 그들에게 최 선생이 미소와 함께 조용하게 말했다.
“웃고만 있지 말고 움직여요. 빨리.”
사람들은 화들짝 놀라며 부랴부랴 일어나 방을 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