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5
기적
“너 이 새끼. 송준길!”
“어? 형?”
“너였냐? 어째 목소리가 어디서 들은 거 같더라니.”
밖으로 나온 이재규는 거지꼴의 중위 얼굴을 보고 깜짝 놀랐다. 육사 1년 후배로 한때는 친하게 지냈던 송준길이었다.
대위 진급에 물먹고 뜸해져 한동안 보지 못했는데 이렇게 만난 것이었다.
3월에 평택 시청으로 출동한 것까지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 이후는 자신도 패잔병이나 마찬가지 신세로 동탄으로 들어가면서 누가 어떻게 되었는지 알 수도 없었고 신경도 쓰지 않았다.
그렇게 이재규의 뇌리에서 그는 잊혔었다.
송준길은 평택시 동쪽 한 지점을 막으러 출동했다가 자신의 소대원 전부를 데리고 탈영했다고 했다.
그 이후 멀리 가지도 않고 지금의 자리로 흘러들어왔으며, 그곳으로 흘러들어오는 사람 또는 약탈 나가서 데리고 온 사람들과 함께 지금까지 살아왔다는 것이다.
그가 보낸 다섯 명에게 대충의 상황은 들어 알고 있는 이재규였다. 이제 남은 인원으로 150명이 넘는 사람을 관리하며 사는 것은 불가능했다.
송준길과 함께 자리를 옮긴 이재규는 자신과 함께 갈 것을 종용했다.
“야. 사람들 다 데리고 나 따라가자.”
“어디? 미군기지? 난 못가.”
“너까지 다섯 남은 거라며? 이 인원으로 어떻게 살아? 여기 관리나 하겠냐?”
“아 그런 게 아니야. 하여간 못가.”
“왜?”
심각한 얼굴로 망설이던 송준길은 한숨을 푹 내쉬며 조용히 말했다.
“씨바. 형이니까 말이지만 내가 그동안 좀 지저분하게 살았어. 거기 갔다가 군법회의라도 넘어가면 난 죽어.”
“군법회의? 뭔 놈의 군법회의?”
“내가 한 짓거리 거기 상부 귀에 들어가면 그냥 두겠어? 아무리 세상이 이렇게 됐어도 벌은 줄 거 아냐?”
“뭔 소리야? 무슨 상부?”
“거기 지휘부 있을 거 아냐? 대위가 현장에 나온 거 보면 거기 별들 많이 있겠네.”
심각하게 말하는 그의 모습에 이재규는 웃음이 터지는 것을 참아야 했다.
“너 뭔가 많이 오해한다?”
“뭔 오해?”
“거기 내가 책임자야. 나보다 높은 계급은 미군 소령 하나 있는데 걔네는 시설관리 밖에 안 해.”
“뭔 소리야? 어떻게 형이?”
이재규는 동탄에서 자기가 어떻게 지냈고 또 미군기지로 어떻게 가게 되었는지를 간략하게 설명했다.
“뭐야? 형도 탈영병이야? 거기도 다 그런 놈들만 있는 거고?”
“엄밀히 말하면 패잔병이지. 지금 군대가 제대로 남아 있는 곳은 한 군데도 없어. 다 새로 조직되고 있는 상황이야.”
“하여간 형도 누구한테 통제받는 상황은 아니란 거잖아?”
“그렇지. 그러니까 쓸데없는 걱정 말고 나 따라가자.”
“거기 초인들은? 그 사람들도 형이 통제해?”
“진화자? 아니. 그 사람들은 자기들끼리 살지. 협력관계라고 해야 하나?”
“서로 알력은 없고?”
“그런 거 없어. 저 사람들 마음만 먹으면 우리 같은 것들은 한순간에 쓱싹이야. 알력은 무슨.”
“에이 그건 아니다. 그래도 총이 있는데.”
“맞춰야 총이지. 못 맞추면 장난감이지.”
이재규와 송준길이 바라보는 진화자의 능력 기준치는 너무도 달랐다. 이재규의 기준은 이진성 일행이었다. 자신도 진화자이고 자신 정도의 사람이 훨씬 많다는 것을 알지만 그들은 고려의 대상이 아니었다.
그의 생각에 이진성, 관장, 나현주와 장동건이 마음만 먹는다면 기지 내 병력 모두를 처치할 수 있었다. 그런 마당에 알력은 꿈도 꿀 수 없는 일이었다.
기지의 상황을 좀 더 자세하게 들은 송준길은 생각에 잠겼다. 남은 인원으로 그 전과 같이 살기는 불가능한 것은 분명했다.
그렇다고 선뜻 이재규를 따라가고 싶지도 않았다. 간다면 편하고 풍족하게 살기는 하겠지만 자유는 줄어든다.
몇 달이지만 일탈의 단물을 빨았다. 더불어 좀비 사냥의 짜릿한 긴장감도 즐기고 있었다. 그만두기는 아쉬웠다.
“형. 여기 민간인 중에 가고 싶은 사람들만 데리고 가라. 난 우리 애들이랑 여기 있을래.”
“왜? 여기서 어떻게 살려고? 너 이 새끼. 하던 짓 계속하면서 살고 싶어 그러냐?”
“뭐… 그런 것도 있긴 한데 그게 전부는 아니고, 여기서는 왠지 살아있는 느낌이라고 해야 하나? 긴장 속에서 느끼는 어떤 재미가 있어. 와일드한 어떤 거. 난 이제 규범으로 컨트롤 되는 사회에서는 못 살 거 같아.”
“허… 지랄을 한다. 와일드 뭐? 니가 언제부터 그렇게 마초였다고?”
“나도 몰랐는데 그게 또 짜릿한 맛이 있네?”
“그래서 여기서 계속 살겠다?”
“응. 그래서 말인데…….”
송준길은 이미 통신에서 말한 대로 그곳을 평택시의 전초기지로 제공함에 덧붙여 자신들이 별동대로 상주하면서 관리하겠다고 제안했다.
그 대신 일상용품과 가구, 가전제품과 식량의 공급을 요청했다. 더불어 전기 공사할 기술자의 지원이 필요하다고 했다.
공사용 발전기는 그곳에도 있었지만, 집과 연결되어 있지는 않았다. 발전기와 자신들의 아지트가 있는 동의 전기 선로를 연결해야 했다.
이재규의 생각에 그 제안은 나쁘지 않았다. 전초기지의 확보로 평택시 남부지역에 영향력을 뻗을 수 있다. 어차피 거점을 만들면 물품 공급은 해야 한다.
송준길이 해 준다면 병사 몇 보내 놓는 것보다 안심할 수 있다. 작전 시 자신이 지휘하지 않아도 되는 이점도 있다.
“나쁘지 않아. 그런데 통신 시설은 구축해야겠어. 그리고 니가 헛짓거리 못 하게 관찰 보고할 병사 하나는 상주 시킬 거야.”
“아, 형!”
민간인 중에는 반 정도가 남기를 원했다. 그들 중 소수는 지은 죄가 있어 가기를 거부했지만 대다수는 그곳에 가서도 노역이나 하고 사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 때문이었다.
어차피 노역할 것이라면 사는 게 불편해도 더 적은 군인이 있는 이곳이 낫다는 오해가 그들 사이에 퍼졌고 그 결과로 반 정도가 남겠다는 것이었다.
그런 오해는 그들에게 펜스철거를 돕게 한 것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저쪽의 공사 완료와 주택확보 후 이주 때문에 일단 공사를 도우라고 한 것이 오해를 불러일으킨 것이다.
하지만 이재규도 이진성도 굳이 사람들을 설득할 마음은 없었다. 이곳이든 그곳이든 안전구역에서 살아남아 좀비의 수를 늘려주기만 않으면 그만이었다.
장갑차 한 대와 병사 열이 남고 나머지는 기지로 철수했다. 좀비 습격 시 공사인력의 보호는 송 중위의 책임하에 군인과 다섯의 진화자가 맡기로 하고 필요하면 지원하기로 한 것이다. 안전구역이 확실하기에 한 결정이었다.
* * *
“다녀올게요.”
장혜진은 콧노래를 부르며 험비에 올랐다. 험비 뒤로는 밥과 몇 가지 반찬을 잔뜩 실은 트럭이 대기하고 있었다. 평택시의 펜스철거 현장에 가져갈 것들이었다.
그곳 인원이 공사에 투입되면서 식사의 지원이 필요했다. 그들이 보유한 쌀이 적기도 했고 제대로 취사된 음식을 먹고 있지도 못했다.
밭의 작물은 향후 상주 인원이 먹을 것만 놔두고 다 뽑아와 일부 심고 일부 반찬으로 만들고 있었다.
그 취사와 수송, 현지 인원의 위무를 장혜진이 관리하는 것이었다. 그동안 기지에서 꼼작도 못 해 답답하던 장혜진이 자원한 일이었다.
그녀가 없어도 되는 일이지만 크게 위험할 것도 없어, 따라다니라고 수뇌부는 허락해 줬다.
바람이나 쐬게 하려고 가라고 했더니 그녀는 지치고 불안해하는 사람들을 제법 위로하고 있었다.
이제 스물이나 될까 싶은 어린 아가씨가 웃으며 노인과 아이들을 챙기니 분위기가 나쁠 수 없었다.
그러기를 닷새째. 동북쪽 블록의 펜스를 철거하는 날이었다.
공사는 순조로워 해가 지기 전에 모두 끝낼 수 있어 보였다. 그것까지만 하면 전초기지로 쓸 송 중위가 살던 블록만 남기고 세 블록의 모든 펜스를 다 뜯어내는 것이었다.
그동안 전기와 통신 시설 공사까지 마친 이택진과 기지에서 온 사람들은 즐거운 마음으로 막바지 작업에 박차를 가하고 있었다.
“혜진이 왔네? 어서 와”
점심을 가지고 도착한 차에서 내리는 장혜진을 본 노인 몇이 반갑게 맞이했다. 그를 신호로 사람들이 일손을 놓고 밥을 먹기 위해 차로 모이기 시작했다.
군인과 기지에서 온 인부까지 200이 좀 안 되는 인원이었다. 간이 배식대 주위는 바글바글했다. 밥을 타서 배식대 근처 흙바닥에 아무렇게나 앉아 식사하는 모습이 노숙자 급식소 같았다.
“드실 만 하세요? 오늘은 반찬이 좀 그렇죠?”
“할아버지. 다리 아픈 건 좀 어떠세요?”
“어머. 지훈아. 왜 동생 걸 뺏어 먹어? 밥 더 있어. 먹고 싶은 만큼 먹어도 된다니까 그러네.”
장혜진은 그런 사람들을 헤집고 다니며 부족하지는 않은지, 아픈 곳은 없는지 묻고 다녔다.
이택진과 송준길은 흐뭇한 얼굴로 장혜진의 그런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혜진이가 오길 잘했어요. 사람들 얼굴이 달라.”
“그러게 말입니다.”
“며느리 삼으면 딱 좋겠구먼.”
“하하. 삼으시지 그러세요?”
“그게… 그랬다가는 날 쏴 죽일 놈이 하나 있어서 말이지.”
몇 마디 농담 후 다시 남은 펜스로 시선을 돌린 둘은 앞으로의 일에 대해 다시 논의했다.
그리고 잠시의 시간이 지났다. 사람들 사이를 헤실거리며 돌아다니던 장혜진이 갑자기 한자리에 우뚝 서 사방을 돌아보기 시작했다. 그런 그녀의 얼굴은 점점 굳어갔다.
보육원에서 느꼈던 바로 그 감정이었다. 저번에 기지에 좀비가 침입할 때 느꼈던 바로 그 불안감이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그 강도가 훨씬 컸다.
급하게 주위를 둘러본 그녀의 눈에 50m 정도 앞의 현장사무소 간이건물이 들어왔다.
하지만 이내 고개를 저은 그녀는 다시 시선을 돌려 70m 정도 떨어진 아파트 하나를 바라봤다.
겨우 3층까지 올라간 그것은 외벽도 없이 각 층의 바닥과 계단만 만들어진 상태였다.
입술을 질끈 깨문 장혜진이 이택진에게 달렸다. 이택진과 송준길은 갑자기 달려오는 장혜진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녀의 표정은 울음이라도 터트릴 것 같았다. 무슨 일인가 의아한 둘에게 달려온 그녀는 뜬금없는 말을 쏟아냈다.
“대피해야 해요. 놈들이 오고 있어요. 사방에서 와요. 어서요. 서둘러야 해요.”
“혜진 양. 진정해요. 놈들이 오다니?”
“좀비가 온다고요. 사방에서 엄청난 불길함이 몰려온다고요.”
점점 사색이 되어가는 장혜진의 모습에 둘은 난감했다. 갑자기 좀비라는데 그 얼굴이 너무 심각했다.
영문을 모르는 송준기와 달리 이택진은 그녀에 대해 들어 알고 있었다. 저번에 기지에 놈들이 침입했을 때 회의실에 있던 그녀가 사이렌이 울리기 전에 미리 경고한 것도 들었다. 어째야 하나 고민하는 그의 귀에 다시 그녀의 목소리가 들렸다.
“저쪽 가건물에 다 못 들어가죠? 그럼 저 아파트에라도 가야 해요.”
이택진은 일단 그녀의 말을 믿기로 했다.
“저 길 건너 안전지대에 갈 시간도 없어?”
전초기지의 펜스 안으로 들어가면 되지만 그 입구가 지금 위치에서 가깝지 않았다.
펜스 수송용과 밥 가져온 것까지 전부 네 대의 트럭이 있지만 두 대는 이미 펜스가 가득 실려있었다.
두 대로 사람을 실어 나를 시간이 있는지 물어본 것이다.
“놈들 위치는 모르겠어요. 시간이 얼마나 있는지도 모르겠지만 몇 분 안 될 거 같아요.”
몇 분도 없다면 트럭은 한 번밖에 못 간다. 이택진은 빠르게 결단을 내렸다.
“송 중위님. 설명은 나중에 할 테니까 일단은 사람들 피신시켜 주세요. 밑져야 본전이니까 어서!”
이택진마저 알 수 없는 소리를 하는 통에 송준길은 더 황당했지만 둘의 분위기를 봐서 그 말에 따르는 게 좋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즉시 옆에서 밥 먹던 병사에게 지시를 내렸다.
“너희 둘, 트럭에 가능한 한 많이 태워 신속하게 안전구역으로 간다.”
“너는 50명 정도 저 간이사무실로 인솔하고, 너랑 너는 나머지 전부 저 아파트 3층으로 인솔해. 서둘러.”
그리고 이택진과 송준길도 식사 중인 사람들 사이로 달려들었다.
밥을 먹던 사람들은 갑자기 달려온 병사들의 지시에 놀랐다. 즉시 식사를 중단하고 차량에 탑승하라는 사람이 있고 자신들을 따라 달리라는 사람도 있었다.
어떻게 해야 하나 우왕좌왕하면서 피 같은 시간은 흘러갔고, 그 모습을 바라보는 장혜진은 피가 마르는 것 같았다.
그리고 잠시 후, 모두는 원하지 않는 소리를 들었다.
저 너머 서쪽 길목을 막고 있던 장갑차의 기관총 소리가 들리기 시작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