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8
평택 자치구
평택 시청을 정리하고 어느덧 한 달 가까운 시간이 지났다.
그동안 기지의 진화자는 40명 가까이 늘었다. 꾸준히 뿌린 전단을 보고 제 발로 온 사람들과 평택의 여기저기를 쑤시고 다니며 찾아낸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들어오는 대로 특기 별로 나뉘어 훈련받았다. 평택시청에서 몇 명을 잃으며 훈련이 부족함을 절감했던 것이다.
교관인 관장과 김현희, 알렉스는 사람들을 혹독하게 다루어 나갔다. 초기에 일부 불만이 있었지만, 평택 시청 원정 이후 돌아다니는 소문이 신입들의 훈련 태도를 바꾸는 데 일조 했다.
방패술 훈련을 받는 사람들은 진화 전에도 힘에는 자신 있던 자들이다.
일부는 40대 아줌마의 지도에 건성이었고, 성깔있는 사람들은 한 번씩 대들기도 했다.
그러던 것이 과장된 무용담이 전해지면서 확 달라졌다.
“얘기 들었어?”
“뭐?”
“그 방패 아줌마. 저번에 혼자 까만눈 잡은 거.”
“그거? 나 졸라 놀랐잖아. 맨날 웃고 다니는 아줌마가 그런 엄청난 사람인 줄 몰랐거든. 방패술 훈련 때 농땡이 피고 그랬는데…….”
“와. 난 전에 한번 대 들었는데…….”
평택시청 원정 이후 마냥 사람 좋던 아줌마는 무시무시한 사람으로 인식이 바뀐 것이었다.
“상관없잖아요? 훈련 태도도 전보다 좋아졌고.”
“좋아지긴 했지. 그런데 내가 얼굴이 화끈거린다.”
“에이. 이러나저러나 거의 잡긴 했었어요. 내가 총 안 쐈어도 이미 배도 뚫었고.”
비록 상당한 데미지가 쌓인 상태에서 김현희가 상대했고, 마무리는 장동건이 했지만, 지휘부는 그 소문을 바로잡지 않았다.
무용담과 더불어 사람들이 힘자랑을 못 하게 만든 것이 하나 더 있었다.
그녀의 또 한 번의 진화 이야기가 퍼지며 초집중 태도로 바뀐 것이다.
김현희는 기절 후 이틀 만에 깨어났었다. 다시 한번 몸살을 겪었고 깨어난 그녀의 근력은 두 배 이상으로 증가되어 있었다.
자신의 몸에 흐르는 파워를 시험해 본다고 한 대 때린 병실의 콘크리트 벽에는 커다란 구멍이 뚫렸다. 그 이야기를 비밀로 해 주기를 요청했으나 어느새 기지에는 소문이 파다했다.
김현희 외에 사람들이 가장 조심하는 사람은 관장이었다. 얼마 전 관장이 열몇 명의 진화자를 초주검으로 만든 사건 때문이었다.
관장은 사람들의 훈련조 조장을 인선했었다. 인선 기준은 그가 느끼는 기의 크기였다.
객관적인 어떤 설명도 없이 정해진 조장과 조원의 구분에 일부 반발이 있었다.
조원으로 구분된 사람 중 몇은 조장을 인정하지 못했고 또 다른 일부는 관장 자체를 무시했다.
“씨발. 영감이 지가 뭐라고.”
“내 말이. 기준도 없이 지 마음대로 조장을 뽑고 지랄이야.”
“그것도 그건데 그 영감이 뭔데 교관을 하네 마네야?
“그러게. 내가 한 대만 치면 그냥 뻗을 거 같은데.”
결국 십여 명의 사람들이 관장에게 몰려갔다. 인선의 불공정함을 호소했지만, 말투와 분위기에는 관장에 대한 무시가 담겨 있었다.
“그래서 어떻게 하면 좋겠소?”
관장의 물음에 사람들은 실력을 검증하기를 원했다. 대련을 통한 조장과 교관 선발을 요구했다.
“그럽시다.”
관장은 가타부타 말없이 그들의 요구에 동의했다. 그리고 그들을 끌고 연병장으로 간 관장은 모두의 기가 막히는 한마디를 내뱉었다.
“전부 한꺼번에 덤비시오. 무기도 쓰시오.”
말은 금방 기지 전체에 퍼졌다.
“영감이 미쳤나 봐.”
불만 없던 나머지 진화자들의 일반적인 반응이었다.
“간만에 구경거리 생겼다.”
이진성 일행의 반응이었다.
연병장에는 사람이 구름같이 모여들었다. 진화자 뿐만 아니라 근무가 없는 병사들, 심지어 민간인들까지 모여들었다.
한쪽에서는 누가 이길지 내기까지 걸렸다. 동탄에서부터 온 대부분은 관장에게 걸었지만 혹시나 싶어 신입이 이긴다는 데 건 사람도 있었다.
대련은 오래 걸리지 않았다. 전부가 거품을 물고 자빠지는데 고작 20여 분이 걸렸을 뿐이었다.
“관장님이 가지고 놀았네.”
“더 빨리 끝낼 수도 있었는데 못 쓰러지게 하는 거 봤어요?”
“엿 먹어 봐라. 이거지. 은근히 뒤끝 있다니까.”
“그래도 어디 부러뜨리거나 하지는 않았잖아. 많이 봐준 거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돌아가는 이진성 일행의 대화는 옆에 있던 사람들에게 들렸고 다시 사람들에게 퍼져 나갔다.
“좋아. 관장님은 인정하겠어. 하지만 조장 선발은 인정 못 해.”
며칠 후 병상에서 일어난 사람 중 넷이 다시 조장 문제를 걸고넘어졌다.
그들은 조장으로 선발된 사람과의 대련을 원했고 관장은 그것도 응해줬다.
그리고 그들은 이번에는 부러지고 베인 상처를 안고 다시 병원에 입원해야 했다.
관장이나 김현희와 다르게 소문의 중심에 선 사람이 하나 더 있었다.
“성녀님. 제가 꿈에 썩은 이가 빠졌습니다. 좋지 않은 일이라도 있을까요?”
“성녀님. 이것 좀 드셔 보세요. 닭찜 좀 했어요.”
평택에서의 이적 후 장혜진을 섬기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었다.
망해버린 세상에서 피폐해진 마음은 어딘가 기댈 곳이 필요했다. 그런 그들에게 당장 가까이에 있는 기적의 증거가 있었다.
개념만 있는 종교보다 실재하는 성스러움이었다.
장혜진도 그것을 즐기는 듯했다. 사람들에게 실제로 점괘 같은 것을 내려 주기도 했다.
그게 맞는지 틀리는지 알 수 없었지만, 뭔가를 듣는 것 자체로 사람들은 안정을 얻었다.
그렇게 그렇게 기지는 사람 사는 냄새를 풍기며 안정화 되어 가던 어느 날 새벽이었다.
쾅~
회의실 문이 떨어질 듯 열리며 이진성이 뛰어 들어왔다. 그를 따라 줄줄이 나현주와 관장 등 사람들이 들어섰다.
회의실 안에는 이 대위와 도만수가 침통한 표정으로 사람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살인사건이라고요?”
들어선 이진성이 자리에 앉지도 않고 물었다.
“그렇다네. 살인이야.”
도만수가 씹어 뱉듯 말했다.
“누가 왜요?”
“그게… 진화자가 일반인을 패 죽였어.”
“그건 들었어요. 그러니까 왜?”
“지금 군인들이 취조 하고 있네만 대충 나온 얘기는 말이지…….”
심문 결과에 의하면 그 진화자는 평소에 자신들이 일반인에 비해 별다른 대우를 받지 못하는 것이 불만이었다고 한다.
자신들은 특수계층이고 지배자가 되어야 하며, 일반인들은 그들을 위해 봉사해야 한다고 다른 진화자에게 설파하고 다녔다는 것이다.
자신이 기지에 오기 전에는 사람들을 노예처럼 부리고 살았는데 기지에 오고부터 그러지 못한 것에 불만이 많았다는 것이 주변 진화자들의 증언이었다.
거기에 더불어 진화자 사이에도 동탄 파와 농협파, 신규 합류 파가 나뉘어 은근한 알력이 있다는 것이었다.
“아니, 파벌이 있었다고요? 꼴랑 몇 명이나 된다고 파벌이야?”
기가 막힌 장동건의 외침에 도만수가 말을 이었다.
“우습지만 조사해 보니 어느 정도 사실이더군. 박두식 팀장을 중심으로 동탄에서 온 사람들끼리 친하고 농협에서 온 사람들은 그 사람들대로 따로 놀더군.
거기에 평택시에서 온 사람들은 텃세라도 느꼈는지 그 사람들끼리 뭉치는데 거긴 또 두 덩어리야.”
“지랄을 한다.”
김현희의 나직한 외침과 함께 모두의 얼굴이 굳었다.
“훈련 중에는 그런 분위기 못 느꼈는데…….”
관장이 고개를 갸웃했다. 다시 한번 생각해 봤지만 훈련 중에 그런 분위기는 전혀 없었다.
“자네 서슬이 시퍼런데 그런 티를 내겠는가? 그나저나 어쩌면 좋겠나?”
말을 마친 도만수는 이진성을 바라봤다. 진화자의 명목상 대표는 이진성이다. 도만수는 조직을 제대로 정비할 필요를 느끼고 있었다.
“벌을 주긴 줘야죠. 그런데 어떤 벌을 줘야 할지…….”
“내 생각을 말해도 되겠나?”
“그럼요. 당연하죠.”
“일단 이번 건은 좀 과하다는 말이 나올지라도 일벌백계 하는 것이 좋다고 보네. 본보기를 단단히 보이지 않으면 또 다른 일이 생길지 몰라. 그리고…….”
말을 끊고 자신을 바라보는 모두를 둘러본 도만수가 잠시 쉬고 말을 이었다.
“조직을 제대로 빨리 정비하세나. 확실한 위계를 세우고 법률과 같은 규정을 만들어야 해. 이대로 점점 인원이 늘면 이런 식으로 공동체 생활하듯 하면 결국 한계에 봉착할 거야.”
“조직이라면 지금도 있잖아요.”
“아니. 진화자 몇 개 조 나뉜 거 말고 기지 전체의 대표도 정하고 실질적인 지도부가 있어야 한다는 말이네.”
“기지 전체라면… 군까지 아우르는 조직 말인가요?”
이진성은 말하며 이재규를 바라보았다. 그는 동탄에서 이재규의 야망을 들어 알고 있었다.
지도자가 되기 위해 사람들을 끌고 평택 기지로 온 이재규였다.
“자네가 뭘 생각하는지는 아네. 이번 일이 생기기 전부터 이 대위랑 논의 하던 것이 있네. 유명무실한 군이라는 이름을 버리는 것이 첫 번째고 진화자와 일반인의 통합 조직이 두 번째네. 아직 완성된 안이 만들어지진 않았지만, 조만간 될 거야.”
“통합 조직이라면 그 대표는 누가 하는 건가요? 이 대위님인가요?”
나현주의 물음에 도만수가 즉시 대답했다.
“그렇다면 힘을 가진 진화자 조직이 반대하겠지. 전체의 대표는 진화자가 하는 것으로 하고 이 대위는 내부 행정의 장이 되는 것으로 했네.”
“저기… 지금 그런 것 보다는 살인범의 처리 문제부터 결정해야 하는 거 아닌가요?”
조직 이야기가 불편한 이진성이 화제를 돌렸다.
“그것도 연관이 되어 있어. 법률도 정해야 한다고 했잖나. 그 안에 권력자는 진화자가 자신의 힘을 부당하게 사용해 일반인을 죽였을 때는 사형으로 처분하는 것을 초안으로 만들었네만… 어떤가?”
모두는 생각에 잠겼다. 사형에 반대할 생각은 없었다. 권력이나 육체적 힘의 우월을 남용해 반항하지 못하는 사람을 죽였다면 죄의 경중을 따질 이유가 없다는 것에는 다 공감했다.
“사형을 내릴 거면 이번에 과하게 하고 말고 할 것도 없잖아요?”
“그건 말이지… 진성 군 자네가 공개 처형을 해 줬으면 하는데 어떤가?”
“네? 공개처형이요? 왜요?”
“두 가지 이유가 있네. 아까 말한 조금 과하더라고 일벌백계라는 의미가 하나고, 사람들에게 이진성이라는 사람의 위치를 각인시키는 것이 또 하나.”
“그래도 제가 처형하면 오히려 나쁜 이미지만 생기는 거 아니에요?”
“아닐세. 지금 세상에서 리더의 강력한 무력은 덕목이네. 현재 선정 관장과 현희 씨, 현주 씨에 대해서는 모든 사람이 두려움을 가지고 있지.
하지만 자네는 아니네. 자네의 진짜 무위를 본 사람들조차도 자네의 유한 성격 때문에 어려워하질 않아.”
“꼭 어려워하게 할 필요가……?”
“있지. 평온한 세상이라면 모르지만, 지금은 있어. 더군다나 폭탄 같은 사람들이 파벌과 알력이 있는 지금이라면 더더욱”
회의실의 사람들은 도만수의 의견에 동의했다. 힘이 있는 사람들이 불만이 있다면 위험했다. 불만을 해소 못 해준다면 찍어 누를 필요가 있었다.
“알겠어요. 썩 내키지는 않지만 그렇게 하도록 하죠.”
자신의 손에 피를 묻히는 것을 수용한 이진성이 대답하자 가만있던 이재규가 입을 열었다.
“한 가지 더 말씀드릴 게 있습니다. 이것도 좀 더 시간이 지나 얘기하려고 했는데 이 사건이 터지고 보니 사람들의 화를 푸는 데 도움이 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사람들의 시선이 모였다. 무슨 말을 하려고 서론이 긴가 싶었다.
도만수가 고개를 끄덕하자 이재규가 말을 이었다.
“세종에서 연합 훈련 제의가 왔었습니다. 훈련 장소는 동탄으로 세종의 병력과 우리 진화자들의 시가전 훈련입니다.”
“참가해서 내부 불만을 외부로 돌린다는 고전적인 계획인가요?
“그렇습니다. 원래는 진성 씨와 지휘부의 참가를 요청받았는데 신입을 전부 투입하는 것 어떨까 합니다.”
“나쁘지 않은데요?”
안 그래도 실전훈련이 필요한 시점이었다. 더군다나 처형 때문에 신입들이 불안감을 가질 수도 있다. 그런 잡다한 생각을 못 하게 하는 효과도 예상되었다.
“그럼 처형은 언제?”
“그건 동탄으로 출발하기 전으로 하죠. 미리 해서 사람들 불안하게 할 필요는 없으니까.”
“알겠습니다. 그럼 제가 세종이랑 용인쉘터랑 협의해서 세부 계획을 잡겠습니다.”
이재규의 말을 끝으로 회의장을 나서는 사람들의 표정은 어두웠다. 다양한 사람이 들어오면 알력이 생길 것을 예상했지만 너무 빨랐다.
“아저씨. 괜찮죠?”
“뭐… 그런대로. 범죄자 죽이는 건데 뭐.”
“그래요. 그렇게 생각해요. 맘 쓰지 마요.”
“이걸로 좋아지면 되는 거지 뭐.”
억지로 미소짓는 이진성을 살포시 안아준 나현주가 떠오르는 해를 보며 말했다.
“앞으로 미래는 저 해처럼 밝을 거예요. 그러니까 웃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