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9
갑작스러운 살인 사건은 아이러니하게 내부 균열의 불씨를 미리 발견하게 하는 계기가 된다.
사람들은 그 불씨를 끄기 위해 바빴다. 진화자 간의 알력을 제거하고 융합할 방법을 고민했다.
수백 명의 생활을 규율할 법률도 구체화해야 했고 기지와 평택시를 세력권으로 하는 조직의 체계도 잡아야 했다.
“죽어라 굴리면 됩니다. 그러다 보면 전우애도 생기고 그런 겁니다.”
이재규의 장교다운 생각이었다. 거기에는 알렉스도 동의했고 관장도 동의했다.
“현재 우리 규모에서 민법은 느슨하게 가도 된다고 보네. 상행위가 있는 것도 아니니 상법은 천천히 해도 되고 형법이 가장 우선이지. 형벌은 엄하게 세우겠네. 기존 우리나라 형법은 너무 느슨했어.”
“그러세요. 단 특혜 보는 경우가 없게 만드셔야 합니다. 같은 죄를 지었으면 같은 벌을 받는 게 정의라고 봅니다.”
“그렇지. 가능한 감형도 없게 하겠네. 징역 5년에서 10년 이런 고무줄 형량은 말도 안 되네.”
“의회 없이 만드는 법입니다. 다 만든 다음에 주민동의 투표는 해야 할 겁니다.”
“그렇겠지.”
법률 제정 TFT를 맡은 도만수도 많은 사람의 의견을 수렴하며 하나하나 조항을 만들어나가고 있었다.
전초기지의 송준기도 뻔질나게 기지에 드나들었다. 이택진이 다시 가서 화상회의 시스템까지 갖춰 줬지만 답답하다고 일부러 차를 몰고 왔다 갔다 하는 그였다.
“시청 소각 및 청소는 이미 완료됐고요, 요즘은 집들 문 따고 들어가서 내부 정리 중입니다.”
“거의 없죠?”
“네. 있어도 거의 가사 상태입니다.”
“지소장님이 처음에 무리하게 문 따고 안 들어가서 그래요. 동탄은 처음에 쓸데없이 문 따고 들어가 다 풀어놔서 좀비 숫자만 늘려 놓고 말이지...”
숭준기의 전초기지가 평택 남부지소로 명칭 되면서 송준기는 지소장이 되었다. 정식 조직이 되었고 장비와 인력의 지원도 늘었다.
버려진 승용차를 타고 다녔던 그는 지급받은 험비를 직접 몰고 기지로 왔다 갔다 했다.
기지에서 파견된 인원도 20명이었다. 기존인원과 그들은 거주지를 그들이 있던 공사 중 아파트에서 바로 앞 입주아파트로 옮겼다.
단지 내 모든 집을 따고 들어가 남아있던 좀비를 싹 정리하고 발전기를 옮기고 선을 연결한 것은 물론이었다.
“이번 달 내로 시청에서 반경 5km는 정리 가능합니다. 그리고 기지로 오는 길의 차량 잔해 정리도 90% 완료되었습니다.
또한 임시방벽도 사고 없이 순조롭습니다.”
이미 정리한 지역 내로의 새로운 유입을 가능한 방해하기 위해 가지고 왔던 크레인 다섯 대가 모두 가서 차량방벽을 쌓고 있었다.
정리지역이 넓어지면 다시 옮겨야 하는 임시 방벽이었다. 차량을 대충 쌓는 것으로 충분했다.
회의는 매일 이어졌고 동탄 실전훈련에 대비한 훈련의 강도는 높아갔다.
누구는 머리는 쥐어짜고 누구는 흙먼지 속에서 구슬땀을 흘리는 동안 어느덧 한 달여의 시간이 쏜살같이 지났다.
수장은 이진성으로 변함없이 가기로 했다. 다른 사람이 하고 싶어 하지도 않았거니와 현재 무력에서 최고가 이진성이라는 점에는 이견이 없었다.
조직도 어느 정도 정해졌다.
―행정무력부 이재규 부장
―기획재정부 도만수 부장
―건설산업부 이택진 부장
―훈련경비부 김현희 부장
―보건과학부 박인화 부장
“이거… 이렇게 조직해 놓고 보니까 새삼 대단한데요?”
사람들은 인식하고 있지 못했지만, 평택기지의 구성원은 대한민국 어디에도 없는 사람들이었다.
어쩌다 보니 평택기지로 모인 것이었지만 그 안에는 대한민국 최고 레벨로 추정되는 진화자들이 있었다.
세종시와 다른 쉘터들에서 수집한 정보에 의하면 다른 곳의 진화자들은 많아 봐야 두 번 정도의 진화자가 대부분이라는 것이다.
또한 그 두 번도 이진성의 두 번째와 세 번째 사이 정도의 능력으로 추정되고 있었다.
“기획재정을 사채업자가 하는 건 좀 그렇지만... 크크크.”
“뭐 이놈아?”
장동건과 허구한 날 티격태격하는 도만수는 괜히 돈을 많이 벌었던 것이 아님을 증명하듯 치밀했다. 거기에 연륜을 바탕으로 한 미래계획은 합리적이었다.
“세계 최고 좀비 과학자들한테 감기 주사 맞는 건 좀 오버 아냐? 흐흐흐.”
세계 최고의 생물학자들이 보건과 의료를 담당하고 있었다.
거기에 평생을 엔지니어로 실무경험을 쌓은 이택진과 군 내에서 일 하나는 잘하기로 소문났던 이재규 역시 빠지는 인물은 아니었다.
끝내 자리를 고사한 관장은 교관과 기동타격대 대장을 겸임하기로 했다. 기동타격대에는 원래의 이진성 일행과 알렉스 일행이 포함되었고 박두식과 홍수진, 몇 명의 신입이 배속 받았다.
기동타격대가 출동하지 않을 때는 이진성 일행 다섯과 알렉스, 박두식 각자가 팀장으로 휘하에 5~7명의 진화자와 20명씩의 일반 전투원을 지휘하는 것으로 편성했다.
일반 전투원은 군조직을 해체하면서 지원자 중에 선별했고 평소에는 농사와 산업에 종사하다 유사시 출동하는 형식이었다.
좋은 일도 있었다. 세종에서 청와대에 푸쉬해서 평택을 자치구로 인정하는 공식문서를 받아낸 것이다.
다행히 변이하지 않아 비록 청와대 지하 벙커에서 하는 것 없이 숨만 쉬고 있는 대통령이지만 어쨌건 대통령의 사인이 있는 문서를 받은 것은 중요했다.
대한민국 최초의 자치구로 공인된 평택기지의 영역은 공식적으로 화성, 오산, 안성, 천안, 아산시 포함하고 있었다.
이재규는 가능한 티 안 날 정도의 양념을 팍팍 쳐가며 이진성 일행에 대해 세종에 보고해 왔다. 세종에서 큰 관심을 가지고 지켜본다는 것을 알고 있는 그는 크게 두 가지 목적으로 약간의 과장을 포함해 세종에 알려주며 자치구 인정을 협의해 온 것이다.
첫째는 자치구를 이끌어갈 충분한 능력이 있는 사람들이 있다는 어필이었다.
두 번째의 노림은 나중에라도 감히 어떻게 해 볼 생각을 하지 말라는 경고였다.
정치적 수완이 좋은 이재규의 노력이 결국 빛을 발해 최초의 공식 자치구라는 타이틀을 얻어 낸 것이다.
세종에서 온 공무원에게 공식문서를 받은 이재규는 지휘부에 알리고 이진성을 찾았다.
“축하드립니다.”
“왜 저한테 축하하세요. 이 부장님이 수고하신 덕분인데. 부장님이 축하받으셔야죠.”
“그런가요? 그럼 저도 축하해 주세요. 하하. 저 오늘 기분 좋습니다.”
이재규는 캠프 험프리스의 지도자 위치를 포기한 자신의 결정에 만족하고 있었다.
뱀 대가리를 포기했더니 용은 아니어도 이무기의 모가지 정도는 된 것이다.
“좋은 일도 있는데 창고 좀 풀어도 되지 않을까요? 기획재정부장님?”
먹을 것 좀 내놓으라는 압박에 도만수는 껄껄 거리 대답했다.
“소하고 돼지 좀 잡지. 많이는 안돼. 맛만 볼 정도야. 그 정도로 만족하게.”
“형. 이럴 때 사람들 앞에서 연설이라도 해야 하는 거 아냐?”
“연설은 무슨. 됐다.”
“아니에요. 아저씨. 이제 공식적으로 출범하는 건데 그런 거 하는 것도 필요해요. 사람들한테 뭔가 자부심을 주는 것, 꼭 필요하다 봐요.”
장동건과 나현주가 부추기고 나섰다. 다른 사람들도 모두 동의하고 이진성을 재촉했다.
“아. 알았어요. 할게요. 하면 되잖아요. 단 당장 말고 훈련 가는 그날 해요. 처형도 그날이니까 처형 후에 하는 거로 해요.”
* * *
마침내 동탄으로의 훈련 출정 날 아침이 밝았다.
기지는 분주했다. 겨우 40명도 안 되는 훈련 인원의 준비는 이미 끝나 있었지만, 아침부터 세종에서 들어오는 1개 대대 병력을 맞이하느라 바빴다.
보병이 500이 넘고 전차 5대에 군수지원 차량까지 수십 대의 차량이 줄줄이 들어오고 있었다.
“반갑습니다. 어서 오십시오.”
이재규와 이진성은 회의실로 들어서는 손님들을 맞았다.
“이 대위. 아! 이제는 그냥 이재규 부장님인가? 오랜만이야.”
“중장님도 안녕하셨습니까? 더 젊어지셨습니다?”
“예끼. 이 사람아. 자네야말로 얼굴 좋아졌어.”
“안녕하십니까. 이 부장님.”
“안녕하세요. 최 차관보님도 어서 오세요. 그렇게 와 보고 싶어 하셨는데 소감이 어떠세요?”
“아직 아무것도 못 봤는데 소감이랄 게 있겠습니까? 하하.”
중장 계급의 군복을 입은 사람과 양복을 말끔하게 입은 사람과 인사한 이재규는 그들을 이진성에게 소개했다.
“인사하세요. 이쪽은 김지훈 중장님. 그리고 이분은 기재부 최상태 차관보님.”
“아. 처음 뵙겠습니다. 김지훈입니다.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안녕하세요. 최상태입니다. 전차관보입니다. 지금은 백수입니다. 하하.”
“안녕하세요. 이진성입니다. 반갑습니다. 세종에서도 조직개편 하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차관보님은 곧 영전하신다고 들었는데요.”
“영전은 무슨요. 다 망가진 정부에 빈 장관 자리를 하나 채우는 건데요. 아. 이런 말은 들은 적 없는 겁니다. 하하.”
중앙정부 3급 공무원이었던 사람 답지 않게 소탈한 모습을 보이는 차관보와 전형적인 군인 인상의 중장과 인사한 이진성은 자리에 앉아 가벼운 담소를 나눴다.
“축하드립니다. 우리나라 최초의 공식 자치구 인정받으신 거요.”
“감사합니다. 앞으로 많이 도와주시기 바랍니다.”
“에이. 평택자치구에서 저희 도와주셔야죠.”
사람은 이진성을 깍듯하게 대우했다. 공식적으로 자치구의 최고책임자임을 인정해 주는 것이었다. 또한 그 대우에는 그동안 전해들은 이진성과 그 일행의 능력에 대한 존중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런데 아직 자치구 대장의 명칭과 지위는 결정 안 된 겁니까?”
이재규의 물음에 차관보는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아시지 않습니까? 저기 계신 양반들이 좀 그런 거… 하하.”
“아니. 어차피 만날 일도 없는 사람들이 왜 그러는지. 참나.”
세종에서는 앞으로 늘어갈 자치구의 지위에 대해 아직도 논쟁 중이었다.
명목상으로라도 중앙정부의 밑에 둬야 한다는 파와 그따위가 무슨 소용이냐 실질적인 지위를 주는 게 낫다는 파가 나뉘어 싸우고 있었다.
그런데 그렇게 싸우는 사람들이 과연 자치구의 통치권자를 만날 일이 그들의 남은 삶에서 한 번이나 있을까 싶었다.
“어차피 어느 정도 규모가 되는 곳에만 공식 자치구 지위를 인정할 것이기 때문에 도지사 정도의 지위로 인정하자는 안으로 모이고 있습니다. 명칭도 지사로 하는 거로 하고요.”
정치적인 문제가 논의되는 동안 김지훈 장군은 말없이 차만 마시고 있었다. 그러다 어느 정도 얘기가 마무리되는 듯싶어지자 입을 열었다.
“이번 훈련에서 통탄의 점령까지 하자고 하셨는데 가능하겠습니까? 거기가 면적대비 인구밀도가 꽤 높은데요.”
세종에서는 새롭게 조직한 대대의 훈련을 주목적으로 평택에 제안해 왔었다. 점령까지는 무리라고는 판단 때문이었다. 그것을 평택에서는 간 김에 점령까지 가능하다며 작전의 확대를 요구했었다.
평택의 자신감과 충분한 설명에 작전은 점령으로 결정되었지만, 중장은 여전히 의구심이 남아있었다.
“네 충분히 가능합니다. 인구밀도, 아니 좀비 밀도가 높기는 합니다만 역으로 한곳에서 많은 놈을 잡을 수 있다는 말도 됩니다. 그리고 정벌 후 상주 관리 인원이 많이 필요하지도 않고요.”
이진성의 말에 중장이 다시 물었다.
“네. 그렇게 자신하셔서 그렇게 하기로 했지만, 과연 그 많은 놈을 잡을 수 있냐는 거죠. 추정치가 5만 이상입니다. 저희는 그 정도 숫자를 동탄 같은 좁은 지역에서 상대한 적이 없어서...”
“그래봐야 아파트 단지 하나에서 최대 5000 정도 아닙니까? 이 병력이면 충분합니다. 계획대로 저희 전투 방식만 따라 주신다면요.”
중장은 얼마 전에 본 평택의 작전계획을 생각했다.
포격을 동반한 무기에 의한 개활지 정리, 아파트와 건물에 대한 포격, 그 이후 진화자들을 중심으로 한 보병의 시가지 전투, 최종적으로 진화자들의 건물 내 정리.
세종에서는 여태 전차포격은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다.
개활지에서 전차 포격은 가성비가 나오지 않았고 건물은 파괴할 생각조차 하지 않았었다.
건물과 시설은 정벌 후 자신들의 소중한 자산이 된다는 생각에 절대 보호 대상이었다.
그 때문에 전차는 그저 놈들을 깔아뭉개는 것에나 쓰였지만 전차에 깔려 죽을 만큼 느린 놈들도 별로 없었다.
“건물… 꼭 파괴해야 합니까? 그거 다시 지으려면 얼마나 시간이 걸릴지 모르는데.”
“다 끝난 얘기 아닙니까? 솔직히 건물 있어도 살 사람도 없는데 놔둬서 뭐 합니까?”
약간의 짜증이 섞인 이진성의 대꾸에 중장은 입을 닫긴 했지만, 여전히 아쉬움이 남는 얼굴이었다.
분위기가 조금 가라앉자 이재규가 나섰다.
“나가 보실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