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0
연병장에는 사람이 가득했다. 한쪽에는 세종에서 온 군인들이 도열해 있고 다른 한쪽에 기지의 주민들이 나와 있었다.
오와 열을 맞춰 차려자세로 서있는 군인들과는 달라 주민들은 웅성거리며 한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처형을 기다리는 살인자. 그가 연병장 한 곳에 무릎 꿇려 있는 것이었다.
손님들을 데리고 연병장으로 나온 이진성은 연단에 올랐다.
‘와 씨. 초등학교 때 반장선거 이후로 사람들 앞에서 연설이라고 해 본 적이 없는데…….’
눈앞에 보이는 수백의 사람을 돌아보던 이진성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친애하는 주민 여러분. 이미 알고 계시다시피 이곳은 우리나라 최초의 공식 자치구가 되었습니다.
사태 발발 이후 지난 몇 달 동안 목숨의 위협 속에서, 또는 좀비로 변이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두려움 속에서 우리는 살아왔습니다.
가족을 잃고 살던 집도 버리고 나와 힘겹게 생존해 오늘 이곳에 모여 있는 우리입니다.
누구는 동탄을 거쳐 이리로 왔고 또 누구는 다른 곳에서 사선을 뚫고 이리고 왔습니다.
이곳에서도 위협은 계속되었고 우리는 그런 위협을 물리쳐 나가며 이제 안정을 찾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충분한 안전을 확보했습니다. 그리고 생존에 필요한 식량의 안정적인 생산 기반도 마련하였습니다. 또한 우리의 세력권도 넓혀 가고 있습니다.
자치권의 인정은 그런 우리의 노력의 결과를 공인받은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있는 이곳은 현재 우리나라에서 가장 안전하고 편안하며 발전 가능성이 높은 것임을 인정받은 것입니다.”
사람들의 환호가 터졌다.
“올, 형님 잘하는데? 떨지도 않네?”
“아저씨가 대인관계를 못 해서 백수로 산거지 원래는 똑똑한 사람이야.”
“참나. 편들기는.”
연설하는 이진성을 바라보는 나현주의 가슴은 벅차올랐다.
함께 헤쳐 나온 지난 힘들었던 순간들이 생각나며 괜스레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새로운 세상에서 새롭게 시작하는 첫발을 내딛는 그 중심에 이진성을 포함한 자신들이 있다는 것은 감동적이었다.
그런 나현주의 옆에 있는 장동건, 김현희, 관장도 표현은 하지 않았지만, 속내는 모두 같았다.
연설을 듣는 다른 주민들도 저마다의 사연을 생각하며 감정은 점점 고양되어 갔다. 그럼에 따라 환호와 박수는 점점 켜졌고 눈물을 흘리는 사람도 하나둘 나오기 시작했다.
“…그래서, 우리는 앞으로 더욱 번성할 것입니다.
외부의 위협은 물론이고 내부로부터의 위협 또한 일절 용납하지 않을 것입니다.
저희 진화자들은 특별한 사람이 아닙니다. 여러분과 똑같은 사람입니다. 우연히 얻은 능력이 있다고 여러분 위에 군림하거나 하는 일은 있어서도 안 되고 있을 수도 없습니다.”
와~
다시 한번 환호성이 터졌다. 사람들이 우려하는 부분이었다. 힘이 있어야 하는 세상이다. 그 안에서 힘이 있고 없고는 생존의 문제였고 권력의 문제였다.
“…따라서, 오늘의 처형을 통해 저희 진화자가 군림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여러분께 보여드리고자 합니다.”
주민들이 나와 있는 이유였다. 그들은 군인과 진화자가 훈련을 가든 말든 상관없었다.
살인자의 처형이 관심사였고 직접 눈으로 확인하기 위해 나와 있는 것이었다.
연설을 마친 이진성이 단상에서 내려와 살인자에게 다가갔다. 그는 무릎 꿇린 채 다가오는 이진성을 노려보고 있었다.
“개인적인 감정은 없습니다. 아저씨 생각도 이해는 갑니다. 남들과는 차별되는 힘. 군림하고 싶고 더 누리고 싶은 것 사람이니까 그럴 수 있습니다.”
“그런데 왜 나만 비난하는 겁니까? 내가 뭐 그렇게 잘못했습니까? 우발적 실수로 사람 하나 죽이기는 했습니다. 그래도 우리끼리는 서로 보듬어 줘야 하는 거 아닙니까?”
“아저씨의 문제가 그거입니다. 차별화되고 싶은 욕망은 이해 가지만 그것이 용납되면 우리가 사는 곳은 지옥이 될 겁니다. 힘 있는 자가 힘없는 자를 착취하는 곳이 될 겁니다. 진화자 중에서도 서로가 서로를 억압하는 곳이 될 겁니다.”
“그게 어때서요?”
“그 결과가 어떤 것인지 몸소 느끼게 해 드리겠습니다.”
이진성은 살인자의 포승을 풀어주게 지시했다. 그냥 처형이 아닌 싸워서 때려죽이는 것으로 결정한 그였다.
반항의 기회를 주고 압도적 힘의 우위를 보이려는 목적이었다.
물론 그 대상은 처형될 살인자가 아니고 다른 진화자였고 더불어 세종에서 온 손님들이었다.
“힘이 없어 당하는 자의 억울함을 절감하게 해 드릴게요. 무기 써도 좋습니다.”
그의 무기인 철퇴도 넘겨주게 했다.
“씨발. 좆 까고 있네. 니가 뭐라고 개폼을 잡고 지랄이야? 주둥이만 살아서 뭐? 무기 써도 좋습니다? 그래. 한번 니가 억울함을 절감해 봐라.”
무기를 받아든 놈의 태도는 바로 변했다. 어차피 살아날 수 없는 상황. 악에 받쳤다.
“오세요.”
도끼도 들지 않은 맨몸의 이진성은 놈에게 선제공격의 기회까지 줬다.
“죽어! 이 새끼야.”
놈은 철퇴를 돌리면서 달려들었고 이진성은 그 철퇴를 가볍게 피하며 손날을 도끼처럼 날리기 시작했다.
“괜찮겠지?
“에이. 누나는. 설마 걱정하는 거야?”
“걱정 안 해. 저 정도에 무슨 걱정을. 그냥 만에 하나 실수 할까 봐 그런 거지.”
이진성은 철퇴의 공격을 전부 피하면서 놈에게 직접적인 타격을 가하지 않고 있었다.
급소에 한 치 앞까지 갔던 손과 발은 관성을 무시하고 멈췄다가 다시 빠져나왔다.
그때마다 놈은 가슴이 철렁철렁했고 얼굴은 점점 더 사색이 되어 갔다.
“너무 오래 끌어도 가지고 노는 것 같아서 역효관데… 이제 슬슬 끝내주는 게 좋을 텐데 말이오.”
5분쯤 지날 때였다. 이진성은 관장의 말을 듣기라도 한 듯 놈의 왼손을 잡아 꺾어 버렸다.
으악!
부러진 왼손을 덜렁거리며 달려드는 놈은 이번에는 왼쪽 팔꿈치가 반대로 꺾여야 했다. 그다음은 왼쪽 어깨뼈가 박살났다.
“헉헉. 뭐야? 조롱하는 거야?”
“아저씨가 원하는 것이 이런 세상 아닌가요?”
이제는 멈춰선 놈에게 이진성이 다시 달려들었다.
놈은 이진성을 피해 뒷걸음치며 철퇴를 휘둘러 봤지만 정신없는 그 공격은 위협도 되지 않았다.
퍽 소리와 함께 놈은 완전히 뻗었다. 뻗은 놈을 물끄러미 보던 이진성은 놈을 치우라고 지시하고 다시 연단을 향했다.
마지막 이진성의 공격을 제대로 본 사람은 관장과 나현주 외에는 아무도 없었다.
한번 퍽 소리가 나는 것 같았지만, 마지막 일격 전 수십 번의 작은 공격에 놈의 뼈는 한순간에 박살이 났다.
마지막 일격은 그런 놈의 두개골을 깨 뇌를 박살 내 고통을 끝내준 것일 뿐이었다.
“불행하고 안타까운 일이었습니다. 다시는 우리에게 이런 일이 일어나면 안됩니다. 만약 다시 이런 일이 일어나도 이런 식의 야만적인 처벌은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명심해 주세요. 항상 처벌은 공평하고 엄정하게 이루어질 것입니다.
또한 외부의 어떤 적도 우리의 안전을 위협하면 이 꼴이 날 것을 약속드립니다.”
약간의 환호성이 여기저기서 나왔지만 아까 같지 않았다. 대부분은 무거운 침묵으로 발을 돌려 각자의 자리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소리 없이 흩어져 가는 주민들의 뒷모습을 한참 바라보던 이진성이 단상을 내려와 중장과 차관보에게 다가갔다.
“내부 문제로 좋지 않은 모습을 보여드려 죄송합니다.”
형식적 사과에 형식적 답변을 하는 것은 차관보였다.
“아닙니다. 이미 들어 알고 있던 일입니다. 마음이 편치 않겠습니다.”
“뭐 좀 그렇습니다. 그럼 이제 출발하실까요?”
“그러실까요?”
이진성이 지휘차로 쓰일 장갑차로 향했다. 그 뒤를 중장과 차관보가 따랐다.
‘이 사람들이 제대로 봤으려나? 일부러 천천히 하긴 했는데…….’
무력시위가 제대로 되었을지 궁금한 이진성이었다.
‘듣던 거보다 별론가? 겨우 잡은 거 아닌가?’
차관보의 생각이었다.
‘듣던 거 이상이군. 조심하고 경계해야겠어.’
중장은 전혀 반대의 생각을 하고 있었다.
저마다 다른 생각을 하며 장갑차에 오른 셋은 동탄으로 가며 침묵을 지키고 있을 뿐이었다.
* * *
“충성.”
“충성. 오랜만이야. 김진석이.”
“오랜만입니다. 중장님.”
“쉘터에서 꿀 빨고 있다더니 살만 뒤룩뒤룩 쪘네? 너 이래도 되는 거야?”
“그런 말씀 마십쇼. 제가 꿀 빨다뇨. 고충이 많습니다. 흐흐.”
중장과 용인쉘터의 김진석 소장이 인사 나누는 동안 이진성도 쉘터에 남아있던 두 진화자와 인사했다.
“안녕하셨어요. 진표 씨. 수찬 씨. 안 보는 사이에 많이 달라지셨어요?”
“안녕하세요. 축하드립니다. 왕 되셨다면서요? 하하.”
“왕은 무슨. 그런 말씀 마세요. 그나저나 두 분도 이번 훈련 참가하신다고요?”
“예. 안에 있어 봐야 심심하고 또 그때 지하에서 대련 이후 저희도 한 번씩 더 몸살도 했고 해서 이번에 시험도 해 보고하려고요.”
“와. 그러셨구나. 축하드려요.”
“에이. 축하는요. 진성 씨에 비하면 새 발의 핀데.”
“뭐 그런 말씀을. 그럼 잘 부탁드립니다.”
김진석 소장도 이진성에게 다가왔다.
“선수를 뺏겼습니다. 하하”
“네? 무슨 말씀이신지?”
“자치구 말입니다. 경기 남부 자치구는 제가 하려던 거… 아시지 않습니까? 도만수 어르신이 알려 줬지 싶은데 아닌가요?”
“아. 그거. 그거야 저희도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된 겁니다.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죄송은요 무슨. 이제 제 상관 아닙니까? 허허허. 제가 잘 부탁드립니다.”
“아오. 그런 말씀 마세요. 제가 장군님께 잘 부탁드려야죠.”
“그럼 상황실로 가실까요?”
김진석이 일행을 안내한 곳은 이진성 일행이 처음으로 까만눈을 잡았던 사거리 옆의 CGV였다.
안에는 이미 통신 시설과 상황판 등이 준비되어 있고, 쉘터 경비병력이던 군인들이 분주하게 뛰어다니고 있었다.
“언제부터 준비하셨어요?”
“한 일주일 됐습니다.”
“그동안 혹시 까만눈의 조짐은 없었나요?”
“없었습니다. 아무래도 동탄에는 저번 그거 하나 아닌가 싶습니다.”
“그렇다면 훈련은 더 쉽겠네요.”
동탄 지리는 김 소장이나 이진성이 잘 알고 있었다. 거기에 김 소장은 놈들의 군집을 거의 파악하고 있다고 했다.
찾으러 다니지 않아도 된다는 말이었다.
블록 단위로 나뉜 곳은 한 블록씩 외부에서 안으로 정리해 들어가면 쉽게 정리할 수 있다. 그곳에서는 중화기 전술을 다양하게 시험 해 볼 계획이었다.
반대로 구도시 쪽은 병사들의 시가전 연습에 안성맞춤이다. 까만눈만 없다면 충분히 안전하게 진행 가능하다는 판단이었다.
“까만눈만 없다면 한 달 내로 다 끝날 수 있겠어요.”
이진성의 말에 김 소장과 김 중장이 놀라는 눈치였다.
“그렇게 빨리요?”
“빨리라뇨. 쉬지 않고 하면 2주면 될 겁니다. 군인들은 체력회복 시간이 필요하니까 쉬엄쉬엄해서 한 달이지요.”
“가능한가요?”
“저희 평택 시청 몇 시간 만에 정리했어요. 주택가는 수색이 오래 걸리는 거 고려해서 생각한 겁니다.”
“그렇습니까? 저희는 읍 단위 하나 정리하는데도 며칠씩 걸리고 했는데…….”
세종이 건물을 보존하려고 병사와 진화자에 의존해 느린 것도 있었지만 진화자의 수와 질에서 차이가 컸다.
현재 그들이 가지고 있는 진화자가 스물이 조금 안 되는데 그동안 죽어 나간 사람이 서른이 넘었다.
꾸준히 보충되지 않았다면 세종에는 진화자가 한 사람도 안 남았을 수도 있었다.
시작된 훈련은 순조롭게 흘러갔다. 상황실이 있는 CGV를 중심으로 이재규가 주민들을 철수시키면서 다시 좀비들의 손아귀에 떨어진 아파트 단지를 하나하나 정리해 나갔다.
전차의 위력은 대단했다. 5층짜리 상가 건물 정도는 뼈대만 남기고 박살을 냈고, 공사장의 가건물은 그냥 밀어 버렸다.
길에 널려 있는 버려진 차량은 전차로 깔아뭉개 쇳덩이 블록으로 만들어 버렸다. 나중에 정리가 완료되면 크레인으로 쇠의 장막을 칠 재료가 될 놈들이었다.
그렇게 시간은 흘러 첫눈이 올 때 동탄의 목표지역은 모두 정리되었다. 한 달에서 조금 못 미친 때였다.
“다행히 까만눈은 없었네요.”
“네. 덕분에 진짜 충분히 쉬면서도 빨리 끝났습니다.”
훈련의 종합보고 결과는 만족스러웠다.
사망 병 37명, 진화자 2명. 예상보다 적은 손실이었다.
세종은 평택자치구의 능력을 충분히 봤다. 평택도 전차의 효용을 절감했다.
헤어진 양측은 다음 해 계획에 서로의 도움을 넣는 것으로 정신이 없었다.
겨울을 보내고 날이 풀린 3월의 어느 날, 세종에서는 평택에 하나의 공문을 보내왔다.
<세종-평택 연합 작전 계획>
공문의 타이틀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