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5
“저보다 명인님이 살아 계셔서 다행입니다. 어떻게 사셨습니까?”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사람이 살아있다는 것이 반가우면서도 놀라운 관장이었다.
“나? 그냥 잘 먹고 잘살았지.”
“그러니까 어떻게 잘 먹고 잘살았느냐고요? 집에 식량도 없던데.”
“먹을 거? 뒷산에 가면 먹을 거 천지야. 배고프면 캐 먹고 따먹고 그러면 돼.”
산과 들에 자생하는 풀과 열매 등을 먹고 살았다는 것이다. 인적이 완전히 끊겨 자신이 먹을 것은 충분하다 못해 넘친다는 말이었다.
거기에 텃밭도 있어 약간의 작물도 기른다고 했다.
“제자 두 분은 어디에?”
두 제자는 사태 발발 후 자신들의 가족을 찾아 집으로 떠났다고 했다.
“그럼 1년 넘게 혼자 지내셨습니까? 집안이 너무 깨끗하던데, 직접…?
관장이 알기에 그는 그렇게까지 깔끔한 사람이 아니었다. 두 명의 제자라도 있었다면 시켰다 치겠지만 그것도 아니었다.
“말도 말게. 할 일이 없으니 그게 소일거리네. 이것저것 만들다가 요즘은 재료도 마땅찮고 그래서 미친놈처럼 온종일 청소만 하고 있네.”
마치 뭔가를 만들지 못해 좀이 쑤신다는 듯 몸을 부르르 떨며 말하는 명인을 보다 문득 자신이 홍수진을 잊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 저랑 같이 온 사람이 있습니다. 수진씨, 이리 와 보세요.”
명인은 그녀와 반갑게 인사하고 두 사람과 함께 집으로 자리를 옮겼다.
“미안허이. 대접할 게 마땅찮아.”
어디서 숯과 화로를 꺼내와 물을 끓이고 차를 내린다고 부산을 떠는 것을 보면서 관장은 궁금한 것을 물었다.
“저 아랫마을은 왜 저 모양이랍니까?”
“그게 말이지…….”
설명에 의하면 마을 한 가구에서 좀비가 나왔고 그 덕에 산 사람은 다 도망치고 남은 것은 시체와 놈뿐이었다.
시체는 썩어서 그것들을 파먹는 쥐까지 꼬여 동네가 엉망이 되어갔다.
그러던 중 지난해 가을의 어느 날, 밖에 나갔던 좀비가 안 돌아오기 시작했다. 그래서 명인은 위생을 위해 동네 전체에 불을 놓았다는 이야기였다.
“여전히 화끈하십니다.”
“흐흐. 내가 좀 그렇지.”
“바리케이드에 꽂혀 있는 놈들은 뭡니까?”
“그것들은 어쩌다 한 번씩 산에서 들에서 나온 놈들이야. 근처에 왔다가 날 보고 달려들다 꼬치가 된 것들이지.”
바리케이드 얘기가 나오자 명인은 신이 나서 떠들기 시작했다. 언제 어떻게 만들었고 그걸로 몇 놈이나 잡았는지 침을 튀기면서 얘기하는 것이 길어지자 관장이 말을 끊었다.
“알겠습니다. 잘 지내셨다니 다행입니다.”
말이 끊기자 괘씸한지 얼굴을 찌푸리던 명인이 관장에게 물었다.
“그나저나 자네는 어떻게 지냈나?”
관장이 자신의 이야기를 시작했다. 자기 와이프와 딸에게 일어난 일부터 누구를 만나 어떤 일을 했는지 장시간에 걸쳐 모두 말해 줬다.
“대단하구먼. 그럼 자네가 지금 전설의 검기를 쓸 수 있다는 말인가?”
“그게 검기인지 아닌지는 저도 모르겠습니다. 하여간 뭔가 강력하고 날카로운 기운이 검에 모이기는 합니다.”
명인은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물었다.
“한번 볼 수 있겠나?”
“잠시만요.”
검을 뽑아 든 관장이 의식을 집중했다. 몸 안에 퍼져있는 강력한 기운을 한곳으로 모은다는 생각과 함께 그것을 검으로 밀어 넣는 생각을 했다.
손끝이 찌리리 하는 느낌이 왔다. 바로 얼마 전에 느꼈던 그 느낌이었다.
진화 전보다 훨씬 빠르고 쉬웠다. 관장 자신도 들고 있는 검을 신기하게 바라봤다.
검을 분명하게 둘러싼 어떤 빛. 그리고 그 빛에서 풍기는 무엇이든 베어 버릴 것 같은 살벌한 기운이 마냥 신기했다.
“빛이 그전보다 강해진 거 같아요.”
홍수진이 놀라며 말했다. 실내라고 하지만 대낮이었다. 그런데도 그 존재를 알아보기에 충분할 만큼 빛은 강해져 있었다.
“이게 검기라는 것인가?”
황홀한 표정으로 관장의 검을 바라보던 명인이 주위를 둘러보더니 한쪽 구석의 돌덩이를 들고 왔다.
아이 머리 정도의 크기였다. 까만색의 윤기가 도는 것이 대충 봐도 대단히 단단해 보였다.
“이거 한번 잘라 보게.”
뭔가를 보여달라고 갈망하는 초롱초롱한 눈으로 부탁하는 명인의 청을 거절할 수 없어 관장은 검을 움직였다.
빠르지도 않고 강하지도 않았다. 그저 가볍게 내리그었을 뿐이었다.
돌은 소리 없이 두 동강 났다. 그 모습에 턱이 빠져라 입을 벌린 명인이 돌을 집어 한참을 단면을 살피더니 소리쳤다.
“자네. 이게 뭔지 아나?”
관장은 당연히 몰랐다.
“이게 이 사태를 가져온 바로 그 운석이네. 그중에 철광석이 포함된 놈이지. 떨어지면서 돌과 철이 녹아 하나가 되었던 놈이야. 깨지지도 않던 놈을 검으로 자르다니!”
잔뜩 흥분해 조각난 운석과 관장의 검을 바라보던 명인이 다시 소리쳤다.
“이걸 잘게 잘라 줄 수 있겠나? 요만한 크기로?”
명인은 손가락 두 마디를 집으며 손을 내밀었다.
“뭐 하시려고요?”
“이걸로 자네 검을 만들걸세. 그 기운을 온전히 담을 수 있는 검. 내 평생의 역작을 만들걸세.”
희열을 가득 담고 외치는 명인은 이미 제정신이 아니었다. 그동안 침만 흘리고 있던 재료를 가공할 방법이 생긴 것이다.
다른 대부분 운석은 그냥 돌이었지만 명인의 것은 아니었다. 우연히 철성분이 대부분인 그것을 손에 넣었지만 깨지지도 녹지도 않는 그것을 그저 바라만 보고 있어야 했다.
“자네가 조각만 작게 내준다면 녹일 수 있네. 그럼 내 그걸로 검을 만들어 줌세.”
안 그래도 관장이 온 목적이 검의 확보였다. 생각지도 못한 횡재를 하게 된 것이다.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얼마나 걸리겠습니까?”
“녹이는데 하루, 만드는데 이틀.”
“그렇게 빨리 가능하시겠습니까?”
“가능해. 가능하니까 말하지 내가 헛소리하겠나?”
“기계도 없이 어떻게…?”
“기계가 왜 없나? 공방에 있잖나?”
“전기가 없는데요?”
“전기는 왜?”
무슨 소리냐는 얼굴로 묻는 명인의 물음에 관장은 당황했다. 그 얼굴을 보고 그제야 관장이 모른다는 것을 생각한 명인이 설명했다.
“아. 자네 여기 마지막으로 온 게 꽤 오래전이지? 재작년에 기계를 전부 디젤엔진 동력으로 바꿨네. 전기 기계로는 원하는 힘이 안 나와서 말이지.”
용광로는 기름을 때는 것이다. 만드는 데 문제가 전혀 없다는 말이었다. 더군다나 기간은 단 사흘. 기다렸다 받아 갈 수 있었다.
관장이 기쁜 마음으로 모든 기를 끌어 올려 운석을 토막 치기 시작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였다.
그의 기감에 뭔가가 걸렸다. 집에서 약 50m 정도.
사람의 기가 아니었다. 불쾌하면서 난폭한 기운. 느껴본 적이 없는 것이었다.
잠시 그쪽을 바라보던 관장이 명인에게 물었다.
“저쪽으로 50m 정도에 뭐가 있습니까?”
“거기? 거기는 텃밭 있는데, 왜?”
“텃밭이요? 그쪽에 지금 사람 아닌 뭔가가 움직입니다.”
“사람만 느낀다며?”
“저도 모르겠습니다. 이런 적이 없었는데 이번 진화의 영향 같습니다. 지금 기를 끌어 올리고 나서 느껴지네요.”
관장은 일어섰다. 무엇인지 모를 것이 느껴졌는데 확인해야 했다.
여전히 검에 기를 밀어 넣으면서 기감을 유지한 채 밖으로 나가는 관장을 따라 홍수진과 명인이 따라나섰다.
“저걸 느끼신 건가요?”
홍수진이 물었다. 풀을 헤치고 작은 숲을 지나온 셋이 바라보는 곳에는 검붉은눈 한 마리가 있었다.
어디에서 왔는지 알 수 없는 놈이 그곳에 명인이 설치한 올무에 발이 걸려 버둥대고 있는 것이다.
나무 뒤에 숨어 놈을 바라보는 관장은 놈의 몸에서 피어오르는 기를 분명히 느끼고 볼 수 있었다.
놈의 눈과 같은 색의 검붉은 기운. 그리고 방에서 느꼈던 그 불쾌한 기운.
“나 이제 좀비의 기도 느끼나 보오.”
스스로도 신기한 관장이 놈을 바라보고 있자 명인이 나직하게 말했다.
“올린 기를 내려 보게.”
관장이 검기를 만들고서 놈을 느꼈다고 말했다. 놈이 언제부터 저곳에 있었는지 알 수 없지만 검기를 올리기 전부터 있었다면, 기를 내리면 감지 못한다는 말이었다.
“안 느껴지네요.”
명인의 추측은 맞았다. 관장이 기를 내리자 느낌은 이어지지 않았다.
“그래도 보이는 것은 여전합니다.”
진화에서 깨어난 후 처음 보는 좀비였다. 그래서 사람 기의 색을 볼 수 있게 되었지만 좀비의 것까지 볼 수 있다는 생각은 하지 못하고 있었다.
“신기해요. 그럼 이제 진성 씨처럼 좀비들도 감지할 수 있는 거잖아요?”
홍수진이 눈을 빛내며 말했다.
“기를 올렸을 때만 그렇소. 그런데 계속 그 상태로 다니기에는 무리라서…….”
“그래도 그게 어디예요. 앞으로 또 더 나아질지도 모르고.”
그녀의 말이 맞는다 생각하면서 다시 한번 기를 끌어 올린 관장은 주위에 또 다른 놈들이 있는지 살폈다.
“다른 놈들은 없소. 저놈은 처리하고 갑시다.”
홍수진이 활을 들었다. 그리고 날린 화살은 버둥대는 놈의 눈을 뚫고 들어갔다.
“허. 이 처자도 대단하이. 저렇게 움직이는 놈의 눈을 노리고 쏜 건가?”
명인은 놀랐다. 양궁 활을 보고 그냥 그런가 보다 하고 있었는데 실력이 상상 이상이었다.
“궁술은 대단합니다. 다만 활과 화살이 받쳐주지 못해 파괴력이 떨어져서 탈이죠.”
홍수진 대신 관장이 그녀에 관해 설명하기 시작했다. 양궁 선수 출신 진화자로 최근 어느 정도 궁술을 보이는지 자세하게 말했다.
“그 화살 좀 보세.”
명인은 받아든 화살을 살폈다. 이택진이 나무를 깎아 만든 화살. 촉으로 구리를 씌웠지만 약하다는 것은 한눈에 알 수 있었다.
“따라 와 보게.”
화살을 보던 명인이 갑자기 뒤돌아 가기 시작했다. 그를 따라 두 사람이 간 곳은 다시 공방이었다.
공방의 제일 안까지 들어간 명인은 주머니에서 열쇠 꾸러미를 꺼내 한쪽의 문을 열었다.
“거기는 완성품 보관소 아닙니까?”
“그렇지.”
관장도 들어가 본 적이 있는 곳이다. 주문 제작한 검을 보관하는 방이었다.
기분 나쁜 쇳소리와 함께 열린 문으로 들어간 명인이 촛불을 켜자 벽에 걸린 수십 자루의 검이 보였다.
그리고 다른 벽 한쪽에는 검이 아닌 다른 무기들이 있었다. 거대한 도, 날카로운 삼지창, 기타 이상한 무기들도 많이 보였다.
“이건 다…….”
“사태가 터지고 이거저거 만들었지. 할 일이 없잖은가?”
그러면서 구석에 있는 커다란 궤짝에 다가간 명인이 다시 자물쇠를 따고 뚜껑을 열었다.
특별한 물건만 넣어 놓는 궤짝이었다. 허리를 숙여 뭔가를 덜컥거리더니 하나의 길고 까만색의 물건을 끄집어냈다.
“이리 와 보게.”
홍수진은 자기를 부르는 명인의 손짓에 따라 그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명인이 넘겨주는 물건을 받았다.
“뭔지 알지?”
활이었다. 통짜 쇠로 된 활. 시위가 걸리지 않은 채 1자로 미끈하게 뻗은 몸은 새까만 색에 은은한 광택을 가지고 있었다.
“이걸 걸어 보게.”
받아 든 것은 시위였다. 자세히 보니 머리카락 정도의 철사 수십 가닥을 꼬아 만든 것이었다.
절대 끊어지지 않을 것 같은 그 시위를 한쪽 끝에 걸어서 당겼다.
활은 좀처럼 굽어지지 않았다. 홍수진이 힘을 끌어 올렸다. 그제야 활은 서서히 굽어지고 그녀는 겨우 활에 시위를 걸 수 있었다.
그녀에 눈에 보이는 활은 환상적이었다. 묵직한 무게와 함께 강력한 탄성. 은은한 광택에서 오는 고급스러움. 자세히 본 활의 면에는 물결치는 듯한 무늬까지 들어가 있었다.
“너무 멋져요.”
그녀의 감탄을 들으며 명인이 다시 궤짝에서 꺼내 든 것은 강철 화살이었다. 촉은 날카롭게 갈려 칼로 쓸 수 있을 정도였다.
“전부 100대네. 가벼워서 들고 다니는 데 무리는 없을 걸세.”
100대의 화살이 5kg도 안될 것 같았다. 강철 화살을 어떻게 그렇게 가볍게 만들었는지 신기해하는 홍수진을 명인이 잡아끌었다.
“쏴 봐야지?”
밖으로 나간 홍수진이 화살 한 대를 시위에 걸었다. 천천히 당기는 시위에 활이 굽기 시작했다. 힘을 다해 끝까지 당긴 시위를 놓자 화살은 엄청난 파공성을 내며 날아갔다.
그녀가 겨냥한 것은 150 밖의 소나무. 화살은 지름 30cm의 소나무를 관통하고 그 뒤 나무에 반 정도 뚫고 나갔다.
“저 바위에 쏴보게.”
명인이 가리킨 바위는 180m 정도 떨어진 산 입구에 있었다. 숨을 고르고 다시 날린 한 대의 화살은 폭음과 같은 소리를 내며 바위를 깨고 박혀 버렸다.
“대단해요.”
바위를 뚫는 위력에 놀란 홍수진과 관장을 바라보던 명인이 웃으며 말했다.
“그걸 쏜 자네가 더 대단하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