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8
뛰어가려던 관장이 멈칫했다.
‘지금 가면 검기를 몇 분 못쓴다.’
검기 없이 싸울 수도 있지만, 자신에게는 검기라는 더 좋은 무기가 있었다.
“지금 누가 추격하고 있소?”
관장의 질문에 병사는 몇 마디 교신을 했다.
“이 진성 지사님과 나현주 씨, 장동건 씨, 장진 하사가 따라가고 있다고 합니다.”
“까만눈은 몇 놈이나 도망쳤는지 아시오?”
“확인하겠습니다.”
다시 이곳저곳과 교신하던 병사는 현재 도주 중인 놈은 둘이라고 했다.
하나는 남쪽으로 빠져나가려다 집중되는 기관총탄 세례에 결국 방어력이 무너져 상처를 입고 김현희에게 끝장났다는 것이다.
북서쪽으로 도주하는 놈들은 북쪽의 이진성에게 막혀 있다 건물 사이의 샌드위치 패널 가벽이 무너지면서 그곳을 통해 빠져나갔다는 말도 전했다.
“하나가 비는데? 동쪽은 어떻게 됐소?”
“그쪽으로 온 까만눈은 없었다고 합니다. 일반 좀비가 몰려왔지만 전부 제거됐답니다.”
누구의 눈에 띄지 않고 도주하기는 어려웠다. 공장 지붕으로 기어올랐다면 모를까 그게 아니라면 길은 전부 막혀 있었다.
혹시라도 폭격으로 뚫린 건물이 있어 그리로 들어갔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 관장이 병사에게 말했다.
“남은 병력은 건물 내부로 침입한 흔적을 찾도록 해 주시오. 찾으면 진입하지 말고 나한테 알려 주도록 하고.”
관장은 자신과 함께 있던 병사들과 전진하며 건물을 살폈다. 일단 서쪽 도로의 좌우 건물에 뚫린 곳은 보이지 않았다.
‘포위망을 빠져나갔으면 골치 아픈데.’
길을 막은 사거리를 벗어났다면 숨을 곳은 엄청나게 많아진다. 공장 부지가 작지도 않았고 건물도 수십 채가 산재해 있었다.
공중의 헬기가 운동장을 중심으로 점점 외곽으로 벗어나며 선회하고 있지만 발견되는 것은 없는 것 같았다.
전차를 제외한 장갑차도 포위망을 벗어나 각 건물과 건물 사이를 헤집고 다니기 시작했다.
그런 헬기와 장갑차에서 운동장으로 시선을 돌린 관장의 눈에 들어온 광경은 참혹했다.
미사일이 만든 수많은 크레이터는 어느새 피와 빗물이 들어찬 웅덩이가 되어 있었고 그 주변은 조각난 고깃덩이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그런 광경을 둘러보며 새 소식을 기다리는 관장의 귀에 홍수진의 외침이 들려왔다.
“이것 좀 보세요.”
관장이 돌아보자 홍수진은 어서 와보라고 손짓하고 있었다.
“무슨 일이오?”
“이거 혹시 까만눈 아닌가요?”
홍수진이 있는 곳은 운동장 가장자리의 아스팔트 위. 그 주위로도 많은 고깃덩이가 널려 있었다.
관장은 설마 까만눈이 폭사했을까 생각하며 홍수진에게 다가갔다. 놈들의 민첩성과 방어력이면 직격탄에 맞지 않는 한 데미지를 입지 않는 것을 알고 있었다.
도착한 곳에는 하반신만 겨우 남은 시체 하나가 있었다. 상체가 있어야 할 자리는 시커멓게 그을린 것이 제대로 직격당한 것으로 보였다.
미사일에 맞은 것은 아니었다. 그랬다면 하체가 남아 있을 수 없다. 전차포에 직격당한 것이 분명한 놈이었다.
“허. 이렇게 재수가 없는 놈도 있나 보네.”
남은 하체의 피부로 보아 까만눈이 분명했다. 불에 그슬려 그 특유의 은은한 광택은 보이지 않았지만, 피부색이 달랐다. 그리고 찔러본 감촉도 일반 좀비의 그것이 아니었다.
“어느 놈은 체조선수처럼 움직이던데 이놈은 어쩌다 전차포를 맞고 뒈지나?”
워낙에 쏟아져 내리는 미사일과 포탄이었기에 직격탄을 맞은 놈들은 많았다. 하지만 까만눈 중에 그런 놈이 있으리라고는 기대하지도 않았었다.
뜻밖의 횡재에 쓴웃음을 지은 관장이 옆에 있던 병사에게 말했다.
“까만눈은 모두 파악됐소. 공장 내 일반 좀비 존재만 확인해서 정리해 주시오. 그건 군인들에게 맡기겠소.”
그리고 홍수진을 돌아봤다.
“여기 있으시오. 산속에서는 활이 별 소용없으니까.”
소용이 없지는 않았다. 이제 나무를 관통하는 파괴력을 가진 그녀였다. 얼마든지 숲에서도 놈들을 잡을 수 있지만, 굳이 그녀까지 갈 필요는 없다는 게 관장의 생각이었다.
“그럼 전 여기서 병사들 보조할게요.”
“그러시오.”
순순히 그런다는 홍수진을 뒤로하고 관장은 다시 병사에게 물었다.
“지금 추격대는 어디 있소?”
“이미 산속으로 깊이 들어갔다고 합니다. 공중에서는 보이지 않고 발자국으로 찾아 가셔야 할 겁니다. 이거 가지고 가세요.”
비에 젖은 산에 100에 가까운 좀비가 달렸고 그 뒤에 또 사람들이 달렸다. 흔적은 분명히 충분하게 남아 있어야 했다.
자신의 헤드셋을 벗어주는 병사에게서 그것을 받아 착용한 관장은 놈들이 향한 북서쪽으로 달려나가기 시작했다.
* * *
이진성, 나현주, 장동건은 장진의 인도에 따라 산속을 달리고 있었다. 그들이 쫓고 있는 것은 두 마리의 까만눈. 나머지 일반 좀비는 산에 들어서기 전에 반 정도가 죽었고 산속에서 도주하면서 장동건과 병사들의 총알에 거의 쓰러졌다.
일부 흩어지는 놈들이 있었지만 많지 않은 숫자였다. 일행은 놈들을 무시하고 오로지 까만눈만을 쫓아 달렸다.
산속을 달리기를 10여 분 쯤. 어느새 까만눈 둘이 포함된 놈들의 선두는 시야에서 사라졌다.
빗속에서 놈들의 냄새는 많이 약했다. 산속에 들어서자 이진성의 탐지거리는 150m 남짓으로 확 줄어들기까지 했다.
그리고 그때부터 장진이 선두에서 놈들이 남긴 흔적을 따라 달려야 했다.
가면서 병사들은 후발대를 위해 계속해서 흔적을 남겼다. 땅을 파거나 물건을 버리거나 여의치 않으면 사람이 두엇 남기도 했다.
“이쪽입니다.”
놈들은 한 방향으로만 달리지 않았다. 능선을 따라가다 또 계곡을 따라가고, 어떤 곳에서는 이유 없이 방향을 바꾸기도 했다.
그런 놈들의 흔적을 장진은 신기하게도 금방금방 찾으며 놈들과의 거리를 좁히고 있었다.
한 번씩 놈들의 꼬리가 보이면 어김없이 장동건의 총알이 날아가 꼬리를 잘랐다.
어쩌다 무슨 생각인지 한둘 남아 숨어 있던 놈들이 달려오는 일행에게 달려들기도 했다.
그런 무모한 놈들은 당연하게 이진성의 도끼에 두 쪽이 나거나 나현주의 발길에 터져나갔다.
“잠시만요.”
장진이 멈춰 선 채 좌우를 살피며 왔다 갔다 하기 시작했다.
“왜요?”
“놈들이 갈라졌습니다. 이쪽으로 다섯, 저쪽으로 하나.”
이탈하는 놈들은 무시해 오던 장진이 고민하는 모습에 이진성이 물었다.
“다섯 쪽으로 가면 되는 거 아닌가요?”
“그게 선두의 둘 중 하나가 저쪽으로 혼자 갔습니다. 놈이 까만눈 같은데...”
두 까만눈이 갈라졌다면 자신들은 둘 중 하나를 택해야 한다. 주저할 시간도 없었다.
장진이 가리키던 방향을 바라보던 이진성은 빠른 결단을 내렸다.
“많은 쪽으로 가요. 그쪽이 더 중요한 놈 같아요. 까만눈들의 우두머리가 그쪽에 있으면 좋고 아니어도 최소한 하나는 잡는 거고.”
일행은 다시 달렸다. 그 잠깐의 지체로 거리가 좀 더 벌어지긴 했지만 장진은 귀신같이 흔적을 찾아냈다.
다시 5분 정도가 지났을 때 일행의 헤드셋에 관장의 목소리가 들여왔다.
<지금 산에 접어들었소. 놈들 시체를 따라가는데 이대로 가면 되오?>
장동건이 달리면서 대답했다.
“네. 그대로 오시면 돼요. 오시다 보면 시체 없는 곳에는 어떤 식으로든 흔적이 있을 거고요, 병사들도 군데군데 있으니까 오시기 어렵지 않을 거예요.”
<어디까지 간 거요?>
“저희도 몰라요. 그냥 한참 왔어요. 기다릴까요?”
<아니오. 그러다 놓치면 어쩌려고. 계속 가시오.>
관장의 마지막 말과 함께 선두의 장진이 손을 들고 멈췄다. 멈춰선 그가 관목 사이로 몸을 숨기면서 전방을 가리켰다.
“저놈들 저기 못 올라가 가네?”
놈들은 항아리 모양으로 된 작은 분지에 들어서 있었는데 그 둘레가 제법 가팔랐다. 비에 젖은 그곳은 나무도 없이 진흙과 풀만 있어 놈들은 오르려다 미끄러지고만 있었다.
까만눈 하나에 검붉은눈 넷. 까만눈은 암컷이었다.
“저거 임신했네요.”
1년이 넘는 야생생활에서 옷이라고는 남아 있지 않은 놈의 배와 유방은 나현주의 말대로 볼록했다. 확실하게 임신상태임을 알 수 있을 정도였다.
인기척을 느낀 네 검붉은눈이 까만눈을 보호하려는 듯, 놈을 뒤로하고 앞으로 나서 그르렁거리기 시작했다.
“동건아. 저것들 처리해 줘.”
하지만 그 용기에도 불구하고 미간을 뚫고 들어가는 장동건의 총탄에 넷은 뒤통수를 터트리며 그대로 자빠져야 했다.
놈들을 쓰러뜨림과 동시에 장동건은 까만눈의 눈알을 맞추기 위해 총을 쐈다. 하지만 바짝 긴장하고 있는 놈은 번개같이 움직이며 눈동자에 총을 맞는 것을 피했다.
더군다나 총알이 계속 얼굴로 날아오자 어느 순간부터 얼굴을 옆으로 돌려 버렸다.
몸에 맞는 총알은 소총의 파괴력으로 치명상을 주지 못하고 피만 나는 정도였다.
“역시 저놈들을 소총으로 잡는 건 운빨이 맞아야 하나봐.”
중기관총이 아닌 소총으로는 놈의 방어력을 무력화하는게 불가능했다. 탄창 하나를 비우고 총을 내린 장동건이 두 손을 들며 이진성과 나현주를 바라보았다.
두 사람이 알아서 하라는 뜻이었다.
“그러지 뭐.”
이진성, 나현주의 협공과 장동건의 견제라면 까만눈 하나 정도 잡는 것은 어렵지 않다. 두 마리가 같이 있었다면 관장을 기다리는 것이 나았지만 하나였다. 더군다나 임신한 암컷이니까 아무래도 움직임이 둔할 수밖에 없었다.
나현주가 달리는 속도를 실어 점프해 놈의 어깨를 내리찍어 갔다. 이진성은 동시에 놈의 무릎으로 도끼를 휘둘렀다.
도끼를 피하자면 어깨가 찍히고, 어깨를 피하려면 도끼에 찍혀야 했다.
놈은 피하지 않았다. 어깨에 내리꽂히는 나현주의 발을 그냥 맞으면서 그녀의 정강이를 뜯어내려는 듯 날카로운 손톱을 찍어 올렸고, 날아오는 도끼는 허벅지로 맞으며 이진성에게 발을 날려왔다.
쩡 쩡
둔탁한 두 번의 쇳소리와 함께 그 충격을 몸으로 흡수한 놈의 반응에 두 사람은 간발의 차이로 몸을 빼며 다시 공격해 들어갔다.
임신한 암컷이라고 해도 까만눈은 까만눈이었다. 평택농협에서 잡은 어린 암컷하고도 달랐다. 몸을 때렸을 때 돌아오는 반탄력이 훨씬 강했다.
둘은 최대의 파워를 집중했다. 공략법은 이미 알고 있다. 놈의 방어력을 약하게 하려면 10초 이내에 최소 20곳 이상을 최대파워로 가격해야 한다. 평택농협의 생포한 어린 암컷에게서 알아낸 그것을 하는 것이다.
방어력이 생긴 타격 부위를 피해서 전혀 다른 곳을 가격해서 방어력을 분산시키고 그것이 임계점을 넘으면 전체의 방어력이 약해지는 것. 그것을 위해 둘은 놈의 좌우 또는 앞뒤에서 정신없이 몰아치고 있었다.
장동건은 그 와중에 놈의 눈만을 노리고 있었다. 단 한 번만 눈을 뚫으면 끝인데 좀처럼 기회는 오지 않고 있었다. 어쩌다 놈의 고개가 장동건을 향할 때는 이진성이나 나현주의 머리가 가렸고, 그게 아니면 눈은 안 보이는 쪽을 향했다.
간혹 한발씩 총알을 날려 놈의 손이나 발 공격을 방해하는 게 장동건이 하는 일의 전부였다.
두 사람이 놈을 두드리는 소리는 마치 착암기로 쇠를 두드리는 듯했다. 임신한 놈의 피부는 더 단단한 것인지 아니면 놈이 원래 그런 것인지 소리가 더 큰 것 같았다.
소음 속에서 기회를 노리는 장동건과 혹시 없어진 한 놈이 올까 주위를 경계하는 장진의 귀에 마침에 퍽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진성이 놈의 등을 길게 갈라낸 것이다. 그는 등을 가름과 동시에 나현주의 발이 놈의 옆구리를 때리는 것을 보면서 도끼를 아래로 돌려 정강이를 찍어갔다. 타격지점의 분산이 드디어 먹힌 것이었다.
꺄아악~
놈이 소리치며 반격에 더 열을 올렸지만 한번 상처가 나기 시작한 놈은 점점 더 수세에 몰릴 수밖에 없었다. 그러면서 둘의 공세는 더욱 강해졌고 놈은 다시 더욱 어려워져 갔다.
빠가각 소리와 함께 나현주에게 왼손목이 꺾인 놈은 다시 뒤로 물러서며 날카로운 비명을 질렀다. 산이 떠나가라 지르는 소리에 모두는 귀가 먹먹할 정도였다.
흙벽을 등지고 발악하는 놈의 몸에 하나둘 상처가 쌓이기 시작했다. 마침내 손목이 부러진 왼팔이 팔꿈치에서부터 뒤로 꺾이고 유방 한쪽에 도끼가 박혀 들었다.
마무리가 멀지 않았다. 이진성과 나현주는 최후의 일격을 위해 공격을 몰아쳤다. 나현주의 킥에 놈의 무릎이 꺾였다. 이진성이 드러난 놈의 목에 도끼를 내리찍어 갔다.
크아악~
갑자기 들리는 소리와 함께 위에서 떨어져 내리는 뭔가에 둘이 다급하게 몸을 뺐다. 몸을 빼는 두 사람을 아슬아슬하게 스치고 땅에 깊숙이 박힌 손톱의 주인은 없어졌던 또 하나의 까만눈 그놈이었다.
“씨벌.”
두 눈을 부라리며 두 사람을 향해 몸을 일으키는 놈은 그동안 볼 수 없었던 1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