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9
폭풍
깊은 밤, 암컷 밑에서 꾸벅꾸벅 졸던 장동건이 머리를 때리는 뭔가에 놀라 눈을 떴다. 급하게 사방을 둘러본 그의 눈에는 여전히 경계태세에 있는 사람들의 정지된 모습이 보일 뿐이었다.
“벌써 사흘짼데 어째 소식이 없냐.”
암컷의 잘린 팔다리와 뚫린 배는 이미 거의 나아 있었다. 온몸을 파고들었던 기관포탄은 회복 과정에서 살에서 밀려 나왔다.
방금도 하나의 탄이 떨어지면서 장동건을 깨운 것이다.
“그나저나 저것들 생명력은 경이롭다. 정말.”
장동건은 방금 떨어져 내린 탄두를 주워들고 그것과 암컷을 번갈아 봤다. 암컷도 그런 장동건을 향해 으르렁거리며 이빨을 세우고 있었다.
“야 이 쌍년아. 눈 안 깔아?”
그는 옆에 있던 긴 작대기를 들어 암컷을 쿡쿡 찔렀다. 심심하기도 하고 눈깔을 치켜뜨고 으르렁거리는 마음에 안 들기도 해서 준비한 물건이었다.
욕하고 괴롭힌다고 말을 들을 리도 없건만 장동건은 암컷이 그르렁거릴 때마다 찔러댔고, 그러면 암컷은 발광을 시작했다.
“하하. 적당히 하세요. 그러다 떨어지겠어요.”
장동근 근처의 진화자들은 그 모습을 은근히 즐기고 있었다. 몇몇은 자기들이 직접 해보기도 했다.
암컷의 발악이 심해지자 많은 사람의 시선이 그쪽으로 쏠렸다. 국기게양대가 보이는 위치의 사람들에게는 이미 익숙한 모습이었지만 무료한 경계 중 유일한 재밋거리였다.
돌아볼 것도 없이 소리만으로 무슨 일인지 알아챈 이진성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저 자식. 또 저러고 있네.”
그의 옆에서 하품하던 박두식이 뒤를 힐끗 돌아봤다.
“그래도 한 번씩 저래 주면 덜 심심하고 좋지. 우리 지사님은 맘에 안 드나 봐요?”
“안 그래도 1호를 좀 과하게 자극한 게 아닌가 싶은데 저러니까 괜히 찜찜해서요.”
이진성은 암컷의 모습을 보는 것이 편하지는 않았다. 자신이 이성을 잃고 만든 결과물을 보는 것 같았다.
분명 그 당시 이성을 잃은 것이 아님을 알고 있지만, 분노에 잠식되었던 것은 사실이었다.
‘아무리 화가 나도 정신 똑바로 차리자. 제발.’
다시 스스로 다짐하며 뒤를 무시하고 전방만을 애써 주시하는 그였다.
하지만 같은 모습을 보며 화를 참지 않고 슬슬 이성을 잃어가는 존재가 그의 앞 머지않은 곳에 있었다.
이진성으로부터 불과 150m 정도 거리의 한 건물 옥상이었다. 그곳에서 공중에 달린 채 버둥거리는 암컷의 모습을 보는 1호의 얼굴은 점점 일그러져 가고 있었다.
마치 잘 보라는 듯 조명까지 환하게 밝혀 놓았다. 그곳에서 작대기로 암컷을 희롱하는 장동건은 이미 1호의 뇌리에 선명하게 박혀 있는 인간이었다.
도주 과정에서 끈질기게 따라붙었던, 그리고 눈 하나를 잃게 만든 바로 그 인간, 1호는 장동건을 보면서 증오에 찬 울음소리를 나직하게 흘렸다.
1호의 시선이 이진성에게 향했다. 그리고 표정은 장동건을 볼 때보다 더욱 일그러졌다.
몇 번을 싸웠고 아직 결판을 못 낸 지겨운 인간이 이진성이었다. 1호의 눈에 살기가 진하게 피어올랐다.
그르르르
낮은 소리로 분노를 표출한 1호가 건물 내부로 내려갔다. 그 안에 있던 덩치 까만눈과 다른 일곱의 까만눈이 1호를 맞았다.
놈들을 이끌고 건물을 나선 1호는 다시 남쪽으로 움직였다. 점점 시청사에서 멀어진 놈들은 약 500m 정도 떨어진 한 건물로 소리 없이 스며들었다.
그곳은 검붉은눈, 빨간눈의 좀비들이 가득 차 있었다. 놈들은 1호 무리가 들어오자 썰물처럼 물러서 길을 텄다. 1호는 그 사이를 지나 이미 깨진 창문을 통해 다시 밖으로 나갔다.
놈들은 극도로 조심해서 이동했다. 저만치 헬기가 있다 싶으면 건물 내에서 꼼짝을 안 하고 기다렸다.
들어갈 구멍이 없는 건물을 지날 때는 은밀하고 신속했다. 그런 식으로 조심스럽게 전진해 나간 그들이 도착한 곳은 시청사의 서쪽, 나현주가 멀리 보이는 한 건물이었다.
크르르
1호가 자기를 따라온 놈들을 향해 몇 번 그르렁거리고는 다시 건물을 나섰다. 하지만 그곳에는 까만눈 한 마리가 남아 나현주를 노려보기 시작했다.
계속해서 움직인 1호 무리는 까만눈을 한 마리씩 떨구면서 진행했다.
북쪽의 관장이 보이는 아파트 안에도, 동쪽의 김현희가 보이는 가정집에도 하나의 까만눈을 남겼다.
또한 그들이 보이지는 않지만, 시청사가 바로 보이는 위치에도 하나씩을 남기는 것을 잊지 않았다.
다시 처음 이진성을 바라보던 위치까지 1호가 돌아왔을 때는 이미 새벽녘이었다.
다섯을 뿌리고 남은 것은 1호와 덩치 그리고 다른 까만눈 둘. 넷은 탐조등 불빛을 등지고 인간들의 앞으로 한참 나와 서 있는 이진성을 다시 노려봤다.
잠시의 침묵 후, 마침내 1호가 몸을 세웠다. 활처럼 몸을 뒤로 꺾은 놈의 눈에 밤하늘에 떠 있는 하현달이 들어왔다. 놈은 그 달을 향해 마치 늑대처럼 울부짖었다.
멀찍이 건물 안에 숨어있던 좀비들이 달리기 시작했다. 도로를 달리는 놈, 건물 옥상에서 옥상으로 뛰는 놈, 창을 통해 문을 통해 건물을 통과하는 놈들이 시청사를 향해 몰려들기 시작했다.
***
1호의 소리를 들은 이진성은 소리 난 쪽으로 목이 부러질 듯 고개를 돌렸다. 보이는 것은 없었다. 오로지 소리만 들릴 뿐이었다.
“동건아. 들었지?”
<당연히. 근데 안 보여. 어딘지 알아요?>
“나도 안 보여.”
이미 바렛을 들고 소리 난 방향을 훑고 있는 장동건도 놈을 발견하지는 못하고 있었다.
모든 사람이 놈의 소리를 들었다. 각 진지를 차지하고 있는 병사들은 손가락을 방아쇠에 걸고 사방을 살피기 시작했다. 진화자들도 저마다 무기를 들고 긴장감을 높혀갔다.
“씨발.”
밀려오는 놈들을 가장 먼저 눈치 챈 것은 이진성이었다.
놈들이 400m 안으로 들어왔을 때 그의 코로 들어오는 냄새는 마치 엄청난 냄새의 벽이 밀려오는 것 같았다.
어느 방향 하나 빠지는 곳이 없었다. 360도 어디에서도 놈들은 오고 있었다.
“전원 전투 준비. 모든 방향에서 좀비 밀려옵니다. 거리 350. 숫자 불명.”
이진성으로서도 숫자가 가늠되지 않았다. 건물 안으로 들락날락 하는 것들 때문에 더욱 그랬다. 대충 느껴지기에 5,000. 하지만 더 많을 것 같았다.
드르르륵
하늘의 헬기가 가장 빨랐다. 아파치의 기관포와 로켓탄이 불을 뿜었다. 하지만 수가 너무 많았다. 더군다나 건물이라는 방해물 때문에 죽일 수 있는 놈들은 얼마 되지 않았다. 그리고 헬기가 커버하기에 범위가 터무니없이 넓었다.
선회하는 아파치와 수리온에서는 탄피가 비 오듯 떨어져 내렸고 한 번씩 헬파이어가 날았다. 그런데도 놈들의 파도는 줄지 않고 밀려들었다.
건물 옥상의 기관총 진지들이 사격을 시작했다. 기관총과 소총이 불을 뿜었다.
도로의 진지에서도 놈들이 불빛 안으로 들어오자 총탄이 날아갔다.
장갑차와 전차도 각자의 자리에서 불벼락을 쏟아 냈다.
* * *
상황실로 잠에서 깬 장군과 도만수가 달려들었다. 그곳은 이미 시장통이었다.
그들이 들어오자 바로 보고가 이어졌고 장군과 도만수는 상황판을 노려봤다.
“예측을 훨씬 웃도는 숫자로 보입니다.”
도만수가 입술을 깨물었다. 보고에 의하면 추정치가 1만을 넘고 있었다.
현재 불빛으로 보이는 지역에 들어온 놈들에 대한 집계였다. 눈대중한 집계로 오차는 크겠지만 하여간 5천은 훨씬 넘는 것이 분명했다.
문제는 불빛 뒤에서 계속 들어오고 있다는 것이다. 어쩌면 1만을 훨씬 넘어 2만 3만이 될 수도 있었다.
“탄알은 충분한가요?”
묻는 도만수에게 장군이 답했다.
“명중률에 따라 다르죠. 지금 같아서는 부족합니다.”
어디를 봐도 좀비여서 쏘는 대로 죽는 것 같았지만 실상은 달랐다. 한발에 죽어 나가는 놈도 있었지만, 건물이라는 지형지물을 이용하는 탓에 대부분 탄은 엄한 건물을 맞추고 있었다.
“전차는 건물 파괴를 우선하는 게 좋겠습니다.”
“저도 같은 생각입니다.”
포탄으로 달리는 놈들을 잡아봐야 큰 도움이 되지도 않았다. 차라리 건물을 때려 내부 놈들을 죽이고 파편을 길에 뿌리는 게 나았다.
전파된 명령으로 다섯 대의 전차포는 놈들이 밀려오는 길옆의 주택과 건물들로 향했다.
고정된 거대한 목표물을 쏘는 것은 훨씬 쉬웠다. 포탄과 함께 콘크리트가 터지고 유리가 뿌려졌다.
그런 곳을 지나는 놈들의 발길은 잠시라도 늦춰지고 있었다.
“진지 4개소 피습.”
상황병의 다급한 외침이 울려 퍼졌다. 이어서 여기저기서 기관총 진지와 경비초소의 피습이라는 보고가 터져 나왔다.
건물 옥상의 진지도 안전하지 못했다. 놈들은 내부의 계단으로 또는 외벽을 타고 어떻게든 올라왔다.
비록 모래주머니와 베어낸 가로수 토막, 또는 다른 장애물을 쌓아 만든 진지였지만 밀려드는 놈들을 당해내지는 못했다.
그나마 진화자가 나가 있는 진지는 조금은 나았다. 하지만 그런 곳들도 진화자의 능력에 따라 시간이 다를 뿐 하나둘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시간이 지나며 포탄이 떨어진 전차는 보급이 불가능했다. 이미 좀비에 둘러싸인 전차가 보급을 위해 청사 내부로 들어가면 그곳으로 좀비들이 따라 들어갈 수 있었다.
어쩔 수 없는 전차는 놈들을 쫓아다니며 깔아뭉개려 했다. 하지만 그렇게 운이 나쁜 놈들은 얼마 되지 않았다.
보급 상황은 헬기도 마찬가지였다. 이미 미사일과 기관포탄, 로켓탄은 떨어졌다. 그렇다고 내려앉아 채울 상황이 아니었다.
그저 상공을 배회하며 상황을 관측하고 지휘부에 알려 줄 뿐이었다.
* * *
이진성은 이미 좀비 떼 안에서 놈들을 도륙하고 있었다.
뒤의 병사들과 진화자들이 조금이라도 편하려면 자신이 앞에서 얼마라도 줄여 줘야 했다. 해일같이 밀려오는 놈들에 비해 티도 안 날 만큼이지만 그거라도 잡아 줘야 했다.
놈들 사이로 들어간 이진성은 양 떼 사이의 호랑이 같았다. 비록 대부분은 이진성을 피해 안쪽으로 지나쳐갔지만 그러지 못한 놈들은 사지가 잘려나가고 몸통이 두 쪽이 나며 자빠져야 했다.
이진성을 중심으로 양쪽으로 갈려 지나가는 놈들에는 총탄이 날아들었고 그 총탄을 벗어난 놈들에게는 진화자들의 공격이 퍼부어졌다.
그 상황은 나현주, 김현희, 관장의 위치도 마찬가지였다.
막 한 놈의 배를 가르고 척추를 두 동강 낸 이진성은 놈의 뒤에서 번개처럼 뻗어오는 손을 가까스로 피해냈다. 번쩍이는 은빛의 비늘이 있는 피부. 까만눈이었다.
피하면서 아직 회수되지 않은 놈의 팔을 향해 도끼를 내리찍던 이진성은 소름이 돋으며 등골이 싸늘해짐을 느꼈다.
이유는 몰랐다. 단지 본능에 따라 몸을 옆으로 틀었다. 그리고 그곳으로 그의 옷을 찢으며 뻗는 또 다른 까만눈의 손이 하나 튀어나왔다.
“둘이냐?”
놈의 손을 찍어가는 그의 귀에 나현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까만눈 한 놈 접근 중.>
이어 관장의 목소리도 들렸다.
<여기도 하나.>
김현희도 마찬가지였다.
<여기도야.>
이진성만 둘이었다. 그것도 1호와 엄청난 덩치의 고릴라 같은 놈.
“왜 나만 둘이야?”
이미 이진성의 주위로 다른 좀비는 존재하지 않았다. 두 까만눈만 무서운 공격을 퍼붓고 이진성은 가까스로 피해내고 있었다.
덩치의 파워는 무지막지했다. 놈의 빗나간 주먹이 바닥의 아스팔트를 때리면 자국이 남을 정도였다.
덩치의 주먹을 피하고 1호의 손톱을 도끼로 마주 찍는데 장동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형. 안 보여. 조금만 버텨봐요.>
좀비떼의 벽에 가려 이진성의 모습을 볼 수 없는 장동건은 청사 안으로 달렸다.
완전히 파괴된 현관을 지나 겨우 흔적만 남은 계단을 올랐다. 발을 디디자 우수수 무너져 내리는 덕에 떨어질 뻔도 했다.
그런 계단을 아슬아슬하게 올라 도착한 2층은 무너진 벽에 막혀 들어갈 수 없었다.
“썅.”
3층으로 향하는 계단은 중간이 완전히 끊어져 있었다. 끊어진 구간은 약 3m. 장동건은 최대한 뒤로 물러났다.
으아악
소리 지르며 도움닫기를 한 그가 바닥을 박찼다.
‘으잉?’
느낌이 달랐다. 다리에서 뭔가 폭발하는 듯했다. 몸이 떠오르는데 머리가 천정을 찍을 뻔했다.
놀란 그는 몸을 말아 가까스로 천정을 피하고 착지했다. 그리고 자신이 한 것에 놀라야 했다. 끊어진 구간을 훨씬 지나 2층과 3층의 중간에 도착해 있는 것이다.
‘나 8m 정도 뛴 거야?’
진화 후 변한 자신의 다리에 놀란 장동건이 다시 뛰었다. 힘을 밀어 넣자 한 번에 계단의 반을 뛰어올랐다.
‘와 씨. 죽인다.’
스스로 감탄하며 계단을 오른 그가 달려가자 저만치 혼자서 고군분투하는 이진성의 모습이 보였다.
달리면서 그는 바렛을 들어 올렸다. 그가 무너져 내린 남쪽의 끝에 도착했을 때 굉음과 함께 대물저격탄은 날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