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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좌수사 심암
“아니 저게 뭐야 도대체 저 꼴이 뭐난 말이냐.”
녹도전선에게 공격을 당한 관선들이 방향을 잃고 뒤쪽의 관선들과 충돌하자 그 광경을 본 긴시요라는 고래고래 고함을 질렀다. 다잡은 고기로 여겼던 조선전선이 일방적으로 공격을 퍼붓고 도망쳤으니 긴시요라가 화를 내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네놈들은 저놈이 도망치는 것이 보이지 않느냐 뭐하느냐 당장 저놈을 쫓아라 모든 전선은 저놈들을 추격한다.“
녹도전선이 좌측으로 방향을 돌려 도망치는 것을 목격한 긴시요라는 당장 추격하라고 고함을 질렀다.
“우선 부상당한 병사들부터 수습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저놈들을 따라 잡는 것은 어렵지 않지만 저놈들은 분명히 조선수군에 합류하려고 할 것입니다.“
긴시요라의 부하인 오쿠야마가 조심스럽게 말했지만 이미 흥분한 긴시요라에게는 쓸데없는 잔소리로 들렸다.
“무사가 부상을 당하는 것은 흔한 일이다. 전선이 침몰한 것도 아니니 다친 놈들은 알아서 섬으로 돌아가 치료하면 될 일이야. 그리고 조선수군. 흥. 겨우 전선 한 척 내보내 놓고 구경만 하고 있는 허수아비들을 이 긴시요라가 두려워할 것 같은가.“
“아닙니다. 허수아비 같은 조선수군은 저희 오도수군의 상대가 되지 못합니다.“
긴시요라가 호통을 치자 오쿠야마는 황급히 머리를 조아렸다.
녹도전선을 추격하라는 긴시요라의 명령은 결국 관선들에게 전해졌고 16척의 관선들은 녹도전선을 추격하기 위해 원을 그리듯이 방향을 돌려 좌측으로 선회했다. 첨저형 전선인 세키부네(関船)가 항해 중에 급격하게 뱃머리를 돌렸다가는 균형을 잃고 그대로 쓰러질 수도 있었다. 반면에 평저선인 판옥선은 속도에서 첨저선에 비해 밀릴지는 몰라도 선회능력에서는 첨저선을 능가했다. 세키부네(関船)의 포위망에서 벗어난 녹도전선은 좌측으로 뱃머리를 돌리며 그대로 달렸다. 첨저선에 비해서 방향전환이 자유로운 평저선의 특징을 살려서 전장을 벗어난 것이다.
“와아 이겼다.”
“왜구들을 물리쳤다.”
“이겼다.”
녹도전선이 세키부네(関船)의 포위망을 벗어나는데 성공하자 녹도전선의 수병들은 환호성을 지르며 좋아했다. 10배가 넘는 적에게 쫓기다가 별다른 피해 없이 무사히 후퇴하는데 성공했으니 수병들이 기뻐할만 했다. 녹도전선이 북쪽으로 방향을 돌려 달리자 전선을 지휘하고 있던 나도 긴장이 풀리는 것을 느끼며 투구를 벗고 땀을 닦았다. 지금은 음력 2월 계절은 아직 겨울이었지만 두정갑을 입고 있는데다가 전투의 긴장감 까지 더해서 온몸에는 땀이 흘렀다.
“아직 저녁을 먹지 못한 병사들은 교대로 저녁밥을 먹게 하고 이대로 북쪽을 향해 달려라 좌수군 본진에 합류할 것이다. 타공은 키에 주의하고 격군들은 교대로 쉬면서 노를 젓게 하라 그리고 화포장과 포수들은 총통을 점검하라“
“예이~”
내 명령이 떨어지자 화병들은 주먹밥을 광주리에 담아 병사들에게 돌렸고 아직 밥을 먹지 못한 병사들은 주먹밥을 입으로 가져갔다. 포수들은 총통의 포구를 청소하고 총통을 점검했다. 병사들이 밥을 먹는 모습을 보면서 배가 고파진 나는 광주리를 들고 다니며 밥을 나눠주는 화병을 불렀다.
“이리로 오너라.”
“예 만호 나리.”
화병은 내가 무서운지 광주리를 들고 쭈뼛거리며 다가왔고 그 모습을 보자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한국으로 치면 함장이 갑자기 취사병을 불렀으니 무섭기도 하겠지.‘
화병이 다가오자 나는 화병에게 손을 내밀었다.
“밥 좀 먹자 나도 하나 다오.”
“예 이걸 말씀이십니까?”
화병이 놀란 표정으로 물었다.
“그래 밥 배고프니 나도 하나먹자”
화병의 반응이 재미있었던 나는 일부러 짓궂게 대답하며 손을 내밀었다.
“이건 병사들이 먹는 밥입니다. 금방 진지를 지어 올리겠습니다.“
화병의 대답에 나는 어이가 없었다.
‘아니 전장에 나와서도 장수들은 따로 밥을 차려 먹었던 건가. 평소에 어떻게 처신했으면 취사병이 이렇게 놀래.‘
예기가 길어지자 화병뿐만 아니라 주변의 병사들 까지 나를 봤다. 병사들은 하나같이 놀란 표정으로 나와 화병을 바라보고 있었다.
‘지금이 조선시대라는 것을 또 깜박했네. 그래 신분부터가 나는 양반. 병사들은 양민이나 천민일 텐데 같은 음식을 먹는 것이 신기하겠지.‘
더 말할 필요가 없다고 판단한 나는 광주리에서 직접 주먹밥을 집어왔다. 화병은 놀란 나머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나를 바라보기만 했고 나는 태연하게 주먹밥을 깨물었다.
“음 이게 먹을 만한데”
보리밥을 뭉친 주먹밥은 소금만 쳤지 별다른 양념이 안 돼 있었지만. 배가 고팠던 상태라 제법 맛있었다.
“만호 나리 여기”
내가 주먹밥을 맛있게 먹자 병사들은 신기하다는 듯이 나를 바라보았고 화병이 나에게 사발을 내밀었다.
“숭늉이구나. 이거 좋지”
밥을 다 먹은 나는 천천히 숭늉을 마셨다. 따뜻하고 구수한 숭늉이 목구멍을 타고 위장 속으로 들어가면서 온 몸에 따뜻한 기운이 퍼져갔다. 주먹밥과 숭늉으로 식사를 마친 나는 한결 기운을 차렸다. 내가 숭늉사발을 화병에게 넘겨주자 이언세가 조용히 다가왔다.
“만호나리 아직도 왜선들이 따라오고 있습니다. 어찌하시겠습니까.“
“뭐 아직도.”
몸을 돌려 뒤쪽을 바라본 나는 관선(関船)들이 쫓아오는 것을 보고 인상을 썼다.
“그새 방향을 돌렸나 보군.”
전선을 추격해 오는 관선의 수가 16척인 것을 보니 총통에 맞은 2척은 손죽도로 돌아간 것 같았다. 나는 잠시 관선들을 바라본 후 이언세에게 대답했다.
“그냥 내버려둬.”
“예 무슨 말씀이신지요?”
“그냥 내버려 두라고 전선 한척으로 놈들 전부를 상대할 수는 없잖아.“
“하지만 그냥 두고 볼 수는 없지 않습니까.”
이언세가 이해되지 않는 표정을 지으며 묻자 나는 별일 아니라는 듯이 태연하게 대답했다.
“어차피 우리는 좌수군 본대에 합류할 것이다.“
내가 말을 마친 후 이언세를 바라보자 이언세는 여전히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다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우리 좌수군의 전선이 모두 몇 척이지?”
“저희까지 12척입니다.”
“왜선들은 판옥선 보다 속도가 빠르고 왜구들은 기습과 검술에 능하지만 왜선에는 화포가 없어 그렇지?“
“예 그렇습니다. 왜선에는 화포가 없다고 들었습니다.”
여기까지 대화가 이어지자 이언세도 알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저희전선만 있다면 모를까 좌수군 본대에 합류한 후에는 왜선들이 함부로 달려들지는 못하겠군요. 철환세례를 맞고 싶지는 않을 테니 말입니다.“
“그래 바로 그거야 왜구들이 무슨 생각으로 쫓아오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곧 좌수군 본대에 합류할 테니 함부로 덤벼들지는 못할 것이야.“
“역시 만호 나리십니다.”
이언세가 감탄했다는 듯이 말하자 나도 모르게 어깨가 으쓱해졌다.
“이 정도는 장수라면 누구나 예상할 수 있는 일이야 별것 아니네.“
“아닙니다. 방금 전에도 무려 10배나 많은 왜선들이 달려들고 있는 사지를 무사히 빠져나오지 않으셨습니까. 무사히 빠져나왔을 뿐만 아니라 총통으로 왜선들을 공격해 전공까지 세우셨으니 만호 나리는 정말 보기 드문 명장이십니다.“
“무슨 명장까지나.”
이언세의 칭찬이 아첨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듣고 있으니 확실히 기분이 좋았다.
‘아첨인줄 알지만 기분 좋다. 이 맛에 간신을 가까이 하게 되나.‘
이언세를 좋은 말로 안심시켜 돌려보낸 후 나는 바다를 보며 생각에 잠겼다.
‘이진무에게 말은 잘해놨지만 사실 어찌될지 걱정되기는 하네. 전라좌수군 전선들과 합류하는 것을 보고 왜구들이 더 쫓아오지만 않으면 좋겠는데 과연 순순히 물러나려고 할지.‘
실제 역사에서는 정해왜변 당시 녹도수군이 전멸했을 뿐만 아니라 전라좌수군은 물론 전라우수군도 왜구들에게 패해 상당한 피해를 입었다.
‘전투가 어떻게 진행됐는지 자세한 상황은 모르겠지만 분명히 녹도만호와 녹도진의 군사들은 좌수군의 지원도 받지 못하고 외롭게 왜구들과 싸우다가 왜구들에게 포위돼서 전멸했고 그 다음에 전라좌수군이 왜구들의 공격을 받은 것 같은데. 기록에는 순천부사가 화살을 맞았다고 했으니 좌수군 함대가 왜구들에게 패한 것은 분명하고 총통으로 무장한 판옥선이 있었는데도 고위 장수인 순천부사가 부상을 당할 정도로 피해를 입었다는 것은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일방적으로 두들겨 맞은 것이 분명하단 말이야.‘
정해왜변 당시 전라좌수사 심암은 아예 왜구들과 싸울 마음이 없었고 전라우수군 역시 왜구들에게 기습을 당해 판옥선을 나포당하는 참패를 겪었다. 당시 왜구들은 조총으로 무장하고 있었지만 화포가 없었고 전라좌수군과 우수군의 전선들이 화포로 무장한 판옥선이었다는 것을 감안하면 도저히 이해가가지 않을 정도의 참패였다.
‘정해년으로 부터 5년 뒤에 일어나는 임진왜란 당시 전라좌수군이 얼마나 활약했는지를 생각해 보면 정해년의 전라좌수군은 아예 싸울 의지가 없었던 것이 분명한데 전라좌수군 전선들과 합류한 후에도 왜구들이 추격해 오면 어떻게 하지. 왜구들이 좌수군 전선들을 향해 달려들면 좌수군 전선들은 맞서 싸우기 보다는 도망칠 생각부터 할 것 같은데.‘
나는 머릿속으로 여러 가지 경우의 수를 생각하며 생각에 잠겼다.
“아니 저런 무도한 자를 보았나. 장수가 전장에 나갔으면 죽기로 싸워야지 적을 눈앞에 두고 도망치다니 그것도 적을 뒤에 달고 오다니 저런 무능하고 어리석은 자를 봤나.“
전라좌수사 심암은 좌수영 상선의 망루에 올라 녹도전선을 바라보며 입에 거품을 물고 있었다. 마음에 들지 않는 녹도만호를 선봉으로 내세워 적들 앞에 내보낼 때만 해도 나이도 어리고 고지식한 녹도만호가 왜구들과 싸우다 동귀어진(同歸於盡)할 것으로 생각했었지만. 녹도만호는 심암이 기대한 만큼 열심히 싸우기는커녕 왜선들을 피해 도망만 치다가 왜선들 까지 뒤에 달고 좌수군 본대가 있는 곳으로 도망쳐오고 있었으니 심암은 속에서 열불이 올라오고 있었다.
“선봉이 적에게 등을 보이며 도망쳐 오다니 이 무슨 추태냐 녹도만호에게 상선으로 속히 출두하라 이르라 내 친히 군율로써 다스릴 것이다.“
적을 눈앞에 두고도 선봉장을 처벌하겠다는 심암의 명에 좌수영의 장수들은 당황했지만 명령은 명령이었다. 좌수영 상선에서 녹도전선을 향해 깃발로 신호를 보냈다. 심암의 명령이 녹도전선에 전달된 후 좌수영 군관 우성복이 용기를 내서 심암을 향해 입을 열었다.
“좌수사 영감 소인이 한 가지 아뢸 것이 있나이다.“
“말해보라.”
“녹도만호가 선봉의 역할을 제대로 감당하지 못했으니 군령으로 다스리는 것은 마땅한 일입니다. 하지만 왜구들이 녹도만호의 뒤를 쫓아오고 있으니. 왜구들과 일전을 치를 준비를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성복의 의견을 들은 심암은 비웃음을 흘리며 대답했다.
“난 또 뭐라고. 자네도 보게 저 왜구들을 녹도전선 한 척을 당해내지 못하고 뒤만 쫓고 있는 머저리들이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녹도만호가 워낙 못난 모습을 보여서 왜구들이 녹도전선을 우습게보고 쫓아오고 있지만 감히 우리 좌수군을 향해 도발할 수 있겠나 우리 좌수군 전선들의 위용만 봐도 꼬리를 말고 도망칠 것이니 너무 염려할 것 없네.“
심암은 이미 다 이긴 싸움이라고 여기는 듯 호언장담을 했다. 우성복은 그런 심암의 모습을 보고 어이가 없었지만 계급이 깡패인 것은 어느 군대나 마찬가지였으니 어쩔 수 없이 고개를 숙이며 뒤로 물러섰다. 심암이 내린 명령대로 깃발 신호가 오르자 녹도전선의 기패관이 상선에서 올린 깃발을 발견하고 심암의 명령을 확인했다. 기패관으로부터 심암의 명령을 전해들은 나는 어이가 없었다.
“뭐야 지금 당장 상선으로 올라오라고. 지금 왜구들이 쫓아오고 있는데 상선으로 올라오라니.“
왜선들이 녹도전선의 뒤를 쫓아 좌수군의 본진이 있는 곳으로 달려오고 있는데도 전투준비는커녕 상선으로 출두하라는 명령에 나는 어이가 없었다.
‘아니 뭐야. 적선들이 쫓아오고 있는 이때에 지휘관을 소환하다니. 좌수사 심암 제정신이 아니구나. 이런 사람이 좌수사로 있었으니 좌수군이 왜구들에게 패했지 여기서 좌수군이 왜구들을 막아 냈으면 전라우수군 까지 나설 필요도 없고 남해안의 해안지역들이 노략질 당하는 일도 없었을 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