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손죽도 해전
전라좌수사 심암이 왜구들과 싸울 생각이 없다는 것을 확인한 이상 주저할 필요도 고민할 시간도 없었다. 나는 손대남을 망루로 불렀다.
“상황이 다급해졌다. 모든 화포에 화약과 철환을 장전하고 전투준비를 서둘러라 준비는 해놨겠지?“
“예 준비는 되어 있습니다만”
도망치다가 갑자기 전투 준비를 서두르라고 하자 손대남은 무슨 일인지 묻고 싶어 하는 눈치였다.
“좌수사 영감이 나에게 원한을 품은 것은 이미 알고 있을 것이다. 좌수사는 우리 녹도수군과 왜구들이 함께 상잔(相殘)하기를 바랬겠지만. 우리가 적선들의 포위를 뚫고 나오자 심사가 뒤틀린 것 같다.“
내말을 들은 손대남의 안색이 창백해 졌다.
“그래서 전투를”
“오해하지는 마라 아군을 공격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좌수군 본대가 보는 앞에서 적선들에게 화포를 방포할 것이다. 우리 녹도수군이 왜구들과 어떻게 싸웠다는 것을 똑똑히 보여줄 것이다.“
좌수사가 왜구들과 싸울 생각이 없어 보인다는 말을 할 수 없었던 나는 녹도군의 안전을 위해 왜구들을 공격해 전공을 세우겠다는 뜻을 밝혔다. 전공을 세워서 처벌을 상쇄하는 일은
장수들이 흔하게 겪는 일이었다. 내 계획을 이해한 손대남은 밝아진 얼굴로 대답했다
“만호 나리의 명을 따르겠습니다.”
“상황이 다급하니 서둘러서 모든 화포에 화약과 철환을 장전하고 사부들도 편전과 화전(火箭)을 준비하라 그리고 질려포(蒺藜砲)를 비롯한 모든 병기들을 있는 대로 모두 갑판으로 꺼내오라 왜구들에게 다시 한번 뜨거운 맛을 보여줄 것이다.“
“예 알겠습니다.”
손대남이 힘차게 대답하고 군사들에게 명령을 전하기 위해 망루에서 나가자 나는 뒤로 몸을 돌려 녹도전선을 쫓아오고 있는 관선들을 바라보았다.
“돛을 펴고 노까지 저으면서 쫓아오고 있구나. 거리가 점점 가까워지고 있지만 좌수군 본대가 있는 곳 까지는 따라 잡히지 않고 갈 수 있을 것 같다.“
고민 끝에 내가 내린 결론은 왜구들과의 전면전이었다.
‘좌수군이 보는 앞에서 관선들을 공격한다. 그 장면을 좌수사는 물론 좌수군의 장수들이 목격한다면 적을 앞에 두고 도망쳤다는 누명은 피할 수 있겠지 녹도수군의 전력만으로는 왜구들을 전부 당해낼 수 없다는 것이 문제인데. 일단은 왜구들을 좌수군 전선들에 최대한 가까이 유인한다. 바로 눈 앞에 적선들이 보이면 좌수군 전선들도 전투에 참여하지 않을 수 없을 테니.‘
고민 끝에 왜구들과의 전면전을 결정한 나는 전투를 앞둔 불안감 보다는 고민을 끝내고 결정을 내린 후련함을 느끼며 바닷바람을 즐겼다. 돛을 최대한 펼친 녹도전선은 때마침 부는 바람을 타고 힘차게 달려갔다.
“아니 저게 뭐야 녹도전선이 왜 이렇게 까지 달려오는 거지.?“
“왜 속도를 줄이지 않는 거야 설마 좌수사 영감의 명을 어길 생각인가?.“
신호 깃발을 확인했음에도 불구하고 녹도전선이 속도를 줄이지 않고 좌수군의 본대가 있는 곳으로 달려오자 좌수군의 장수들은 이상하다는 듯이 녹도전선을 바라보았다.
“설마 녹도만호가 항명하려는 것은 아닐 텐데 좌수사 영감의 명을 거역하면 참형을 피하지 못할 것이야.“
순천부사 변기가 의아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녹도전선을 바라보았다.
“좌수사 영감도 너무하기는 했지“
오늘 벌어진 일들을 생각하며 변기는 인상을 찌푸렸다. 변기가 봐도 좌수사 심암은 오늘 어이없는 명령을 연이어서 내렸다. 순천부사 변기가 오늘 벌어진 일들을 생각하며 자신도 모르게 얼굴을 찌푸리다가 다시 바라보니 어느새 순천전선에 가까이 까지 접근한 녹도전선이 서서히 속도를 줄이며 돛을 내리는 것이 보였다. 녹도전선이 돛을 내리는 것을 보며 변기는
안심하며 마음을 놓았다.
“그럼 그렇지 녹도만호가 어리석은 짓을 할 리가 없지 곧 상선으로 건너가겠군.“
좌수군의 전선들로부터 대략 200보(약240m) 가량 떨어진 지점까지 다가온 녹도전선은 서서히 속도를 줄이며 방향을 돌려 좌수군의 전선들과 같은 방향을 바라보며 나란히 섰다. 녹도전선이 좌수군 본대가 있는 곳으로 다가오자 좌수사 심암을 비롯한 좌수군의 장수들은 녹도만호가 순순히 좌수사의 명에 따라 좌수영 상선으로 건너와 좌수사를 찾아갈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녹도전선이 완전히 정지한 다음에도 녹도만호는 전선에서 내리지 않았다.
“화약은 정량에 맞게 넣었겠지.”
“예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정확하게 넣었습니다.“
“남아있는 화약도 치울 것 없다. 방포 후 곧 바로 장전할 것이니.“
좌수군 장수들의 생각과는 달리 녹도전선에서는 전투를 준비하고 있었다. 화포장들과 포수들은 총통에 달라붙어 화약과 철환을 장전하고 있었고 사부들은 각자의 전통을 매고 손에는 각궁을 든 채로 좌측 갑판위에 모여 있었다.
“명령이 떨어지면 즉시 화전을 쏘아야 한다. 단 내 명령이 떨어지기 전에 함부로 화전을 날려서는 안 될 것이다. 알겠느냐“
“예~”
사부들이 내 명령에 일제히 대답하자 나는 사부들에게 몇 가지 명령을 더 내렸다.
“편전을 쏘는 사부들은 명심할 것이 있다. 너희들은 우선적으로 적의 장수를 노려야 할 것이다. 적의 장수들은 왜구들 중에서 유독 화려하고 튼튼해 보이는 갑옷과 투구를 쓰고 있을 테니 쉽게 구별할 수 있을 것이다. 알겠느냐.“
“예~”
“편전을 쏘는 사부들은 적장이 보이는 대로 처치하라 내 허락을 구하지 않아도 좋다. 그리고 하나 더 승자총통과 비슷한 무기를 들고 있는 왜구들을 우선적으로 처치하라 그런 무기를 들고 있는 왜구들 역시 내 허락을 구할 것 없이 보이는 대로 처치하라. 알겠느냐.“
“예~”
“이번에 공을 세운 자들은 내 잊지 않고 반드시 포상할 것이다.“
“예이~”
포상하겠다는 말에 대답하는 사부들의 목소리가 더욱 커졌다. 사부들에게 장수들과 조총병들을 우선 저격할 것을 명령한 후 나는 직접 각궁을 들고 시위를 당겼다.
‘어차피 남아있는 화약도 별로 없다. 지자총통은 대형 화포라 화약의 소모량도 엄청나니 앞으로 두 번 정도 더 방포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수적으로 열세인 상황에서 왜구들을 상대로 육박전을 벌이는 것은 자살행위고 포격 이후에도 관선들이 다가오면 활로 저지해야해 상황을 봐서 나도 거들어야지.‘
활을 다뤄 본적은 없지만 활시위를 당길 때는 몸이 기억하는 지 익숙한 느낌이 들어서 깜짝 놀랐다.
‘이거 아직도 적응 안 되네 차차 익숙해져야지 이번 고비만 넘어가면 정식으로 궁술과 검술 그리고 기마술을 익히고 특전사와 해병대에서 훈련했었던 무술과 총검술도 잊지 말고 다시 복습해야지.‘
내가 녹도진의 군사들과 전투를 준비하고 있었을 때 좌수군 상선에서는 난리가 났다.
“녹도만호는 무엇하는가. 감히 군령을 거역하겠다는 말이냐. 당장 녹도만호를 내 앞에 대령하라“
좌수사 심암이 녹도만호를 잡아오라고 고함을 지르자 좌수영의 군관 임홍남이 심암에게 다가왔다.
“녹도전선에서 서신을 보내 왔사옵니다.”
“뭐라 녹도만호가 직접 오지 않고 감히 서신을 보내. 이런 고얀 것. 그래 서신을 가져오라 군령을 거역하고 무슨 소리를 하는지 핑계나 들어보자.“
심암이 성난 목소리로 명하자 임홍남은 심암에게 공손한 태도로 두루마리를 바쳤다. 두루마리를 받아 글을 읽은 심암은 글을 다 읽기가 무섭게 손에 들고 있던 두루마리를 갑판에 내동댕이치며 불같이 화를 냈다.
“뭐라 적선이 다가오고 있으니 녹도전선은 앞장서서 싸우겠다. 용감히 싸워 선봉의 임무를
다하겠다고 이제까지 왜구들에게 도망만 쳤던 무능한 작자가 선봉의 임무를 다하겠다니 이런 고얀 것.”
심암이 녹도만호를 괘씸하게 여기고 분에 못 이겨 몸을 부르르 떨고 있었을 때 갑자기 포성이 울렸다.
“쾅” “쾅” “쾅”
“이게 무슨 소리냐 누가 감히 좌수사인 나에게 허락도 받지 않고 방포한 것이냐.“
갑자기 들린 포성에 놀란 심암이 화를 내며 묻자 우성복이 대답했다.
“녹도전선입니다. 녹도만호가 왜선들을 향해 방포하고 있사옵니다. 좌수사 영감“
녹도만호라는 대답에 심암은 발작하듯이 고함을 질렀다.
“뭐야 녹도만호가 왜구들에게 방포하고 있어.“
심암이 고함을 지르며 자리에서 일어나자 이번에는 임홍남이 다급한 목소리로 말했다.
“영감 왜구들입니다. 왜구들이 가득 탄 배가 녹도전선을 향해 달려오고 있습니다.“
“뭐야 왜구가”
왜구가 들려오고 있다는 말에 심암의 입이 다물어졌다. 다시 자리에 앉은 심암은 어찌할 바를 몰랐다. 녹도전선을 쫓아오던 관선들이 녹도전선으로 부터 300보 (약360m) 거리까지 다가오자 녹도전선의 좌측 갑판에 장착되어 있던 6문의 화포 중 3문의 지자총통이 관선들을 향해 불을 뿜었다. 지자총통에서 발사된 철환은 하늘을 가르며 날아가 선두에서 달려오던 관선에 정확히 명중했다. 정신을 집중해 관선들을 지켜보던 나는 총통의 명중률에 감탄을 금치 못했다.
“대단하다. 정확히 명중했어. 선두 좌측의 왜선 뱃머리에 한발 갑판 위에 한발이 명중했고 우측의 왜선에도 갑판 위에 철환이 명중해 왜구들이 쓰러졌다. 정말 대단하다.“
내가 총통의 명중률에 놀라자 화포장 이동구는 신이 나서 큰 목소리로 말했다.
“소인이 말씀드렸듯이 소인과 포수들은 녹도전선에서 각자의 화포를 잡은 지가 10년이 넘습니다, 군역을 설 때만 배에 오르고 화포를 잡았지만 10년간 만지고 다룬 화포들인데 어떻게 각자 자기 화포의 특징을 모르겠습니까. 어디에 얼마만큼의 흠집이 있는지 까지 잘 알고 있습니다.“
녹도군 화포장들 중 가장 고참인 이동구는 화포장으로써의 자부심이 가득했다.
“수고했다. 방금 방포한 포수들은 서둘러 화포의 포구를 청소하고 화약과 철환을 장전하라 곧 왜구들이 다가올 것이다.“
내 명령이 떨어지자 화포장과 포수들은 총통이 실린 동차를 당겨 총통을 갑판 안쪽으로 끌어당긴 후 포구에 밀대를 밀어 넣어 화약 찌꺼기들을 닦아냈다. 나는 화포장과 포수들이 총통을 청소하는 동안에도 관선들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왜구들과 전투를 결심한 후 나는 이동구에게 지자총통으로 관선을 타격할 수 있는 유효사정거리를 물었다. 내가 알기로는 지자총통의 최대 사정거리는 800보였지만 정밀한 관측 장비가 없는 조선시대에 그것도 실전에서 최대사정거리에 방포하는 것은 화약과 철환을 그냥 바다에 버리는 것과 다름없는 일이었다. 유효사정거리로 200보 정도를 생각하고 있던 나에게 이동구는 놀랍게도 500보 이내에서는 충분히 관선들을 타격할 수 있다고 장담했다. 500보라면 현대기준으로 600m에 가까운 거리였다. 예상보다 2배나 긴 거리에 내가 믿기지 않아서 다시 묻자 이동구는 가슴을 두드리며 장담했다.
“소인을 비롯해 화포장들과 포수들은 각자 맡고 있는 화포를 10년 이상 다루고 있습니다.
각자 자기가 맡은 화포에 대해서는 도사들인 놈들입니다. 화포에 화약을 얼마나 넣어야 철환이 멀리 날아가는지 포구에 철환을 어떻게 넣어야 철환이 부드럽게 굴러 들어가는지 훤히 꿰뚫고 있단 말입니다. 지금처럼 준비하고 있다가 방포하는 것이고 왜선들이 전선을 향해 일직선으로 달려오고 있을 때는 500보 밖에서 쏴도 충분하게 왜선에 명중시킬 수 있습니다.“
이동구가 장담을 했지만 나는 500보 밖에서 방포하는 것이 불안했다. 화약과 철환이 넉넉하지 않은 상황에서 가지고 있는 무기로 왜구들에게 최대한 타격을 입혀야 했던 나는 이동구에게 관선들이 300보 안으로 들어오면 방포하도록 명령했다. 처음 계획은 관선들이 200보 안에 들어오면 방포하는 것이었으니 처음 계획보다 100보의 거리를 더 두고 방포한 것이다. 그리고 그 결과는 매우 만족스러웠다. 이동구를 비롯한 화포장들과 포수들은 자신들의 자존심을 세울 수 있어서 좋았고 나는 왜구들을 상대할 시간을 더 벌수 있었으니 만족했다.
‘생각 같아서는 화포장과 포수들을 더 칭찬해 주고 싶지만 아직 전투가 끝난 것이 아니니 다음에 포상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