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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악의 상황을 대비할 때
“만호 나리 좌수영 보다는 녹도진으로 돌아가는 것이 더 가깝습니다.”
아직 무슨 영문인지 모르는 이언세는 녹도진으로 돌아갈 것을 권했지만 손대남은 내가 좌수영을 돌아가자고 한데는 이유가 있을 것으로 생각했는지 진지한 태도로 물었다.
“아직 전투가 끝나지도 않았는데 어찌 좌수영으로 돌아가실 생각을 하십니까?“
설명이 길어진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좌수영으로 돌아가서도 이들의 협조가 필요한 만큼 지금의 상황을 최대한 자세히 설명했다.
“지금 좌수군의 다른 전선들을 봐라 전선들이 지금 뱃머리를 돌리려고 하고 있다. 좌수영으로 돌아가려는 것으로 보이지 않느냐? 분명히 죄수사의 명령이 있었을 것이다. 왜구를 완전히 섬멸하지도 못했는데 배를 돌리는 것은 무모한 행동이다. 더구나 왜구들이 바로 눈 앞에 있는데. 전선들이 뱃머리를 돌리는 동안은 총통을 방포할 수 없으니 왜구들은 곧 좌수군을 공격할 것이다.“
“그럼 큰일 아닙니까.”
이언세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고 손대남은 묵묵히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왜구들을 상대로 죽기로 싸워도 승리하기 어려운데 적군을 코앞에 두고 후퇴하려다가 공격을 받으면 어떤 일이 벌어질 것 같은가. 이번 전투에서 십중팔구 좌수군은 왜구들에게 패할 것이다. 어쩌면 좌수사 영감도 무사하지 못할지 모른다. 패전 소식이 한성에 전해지면 주상전하와 대감들이 어떻게 할 것 같은가?“
주상전하라는 말에 손대남과 이언세의 얼굴이 하얗게 변했다.
“차라리 좌수사가 왜구들에게 전사하거나 포로로 잡혀가면 다행이야. 만약 좌수사가 살아서 돌아온다면 무슨 일이 벌어질 것 같은가. 내 생각에는 패전의 책임을 내게 뒤집어씌우고 선봉인 녹도수군이 함부로 철수하는 바람에 좌수군이 왜구들에게 패했다고 보고할 것 같은데.“
내말을 들으며 손대남과 이언세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그들이 생각하기에도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좌수사 심암은 이미 나와 녹도수군을 사지로 밀어 넣었었다. 심암이 패전의 책임을 피하기 위해 나를 모함하거나 패전의 책임을 덮어씌우는 것은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었다.
‘책임을 물으면 당할 수밖에 없어. 심암이 녹도군을 선봉으로 내보낸 것은 사실이고 내가 왜구들 앞에서 후퇴한 것도 사실이니. 중과부족으로 후퇴했다고 설명해도 지금이 조선시대라는 것을 감안하면 패전한 무능한 장수로 낙인 찍혀서 처형당할 가능성이 높아.‘
내 말을 들은 손대남과 이언세의 표정이 창백해진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녹도만호인 내가 패전의 책임을 지고 처형당한다면 녹도진의 군관인 손대남과 전선의 진무였던 이언세 역시 패전의 책임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었다.
“좌수영으로 가서 어찌하실 생각이십니까?”
“좌수영을 장악하시려는 겁니까? 좌수영에서 좌수사가 돌아오기를 기다리시려고 하십니까?“
그제 서야 자신들이 아직도 사지를 벗어나지 못했다는 것을 깨달은 손대남과 이언세가 서늘한 말투로 물었다.
‘이 사람들 내가 좌수영을 점령하고 좌수사를 어쩌려는 줄 아나보네. 전선 한 척으로 조선에 반란을 일으킬 정도로 내가 무모해 보이나.‘
나는 그들의 반응에 놀랐지만 그들이 지금 상황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있다는 증거로 생각하고 그들에게 대답했다.
“아니다. 우리는 좌수영을 장악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전공을 세우기 위해 좌수영으로 가려는 것이다.“
“전공이요?”
둘 다 의외라는 표정으로 물었다.
“그렇다. 우리가 살아남기 위해서는 확실한 전공을 세워야 한다. 좌수군의 오늘 패전을 상쇄할 수 있을 정도의 전공을 세워야 패전의 책임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다.“
“눈에 보이는 확실한 전공을 세운다면 아무도 녹도군에 책임을 묻지는 못할 것입니다. 그런데 좌수영에는 왜?“
전공이라는 말에 손대남은 내 말을 이해했지만 좌수영으로 가려는 이유를 물었다.
“우선은 기회를 봐서 좌수군의 전선들을 공격하는 왜선의 뒤통수를 칠 것이다. 왜선들이 좌수군의 전선들을 공격하는 동안 우리 녹도군은 남쪽으로 돌아서 왜구들의 뒤쪽으로 들어가 기습공격을 가할 것이다. 이번 공격에 남아있는 화약과 화살을 모두 왜선들에게 사용하고 좌수영으로 돌아가 식량과 화살 그리고 화약을 보충할 것이다.“
내 대답에 이언세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좌수영은 우후 나리가 지키고 계십니다. 우후 나리는 어찌하실 생각이십니까?“
“우후에게는 사실대로 말할 것이다. 좌수군이 패했고 우리는 왜구들을 물리치기 위해 식량과 화약의 지원이 필요하다고 사실대로 말할 것이다. 심암이 이번 전투에서 살아남아 무사히 좌수영으로 돌아간다고 해도 우리가 심암보다 먼저 좌수영에 도착해 식량과 화약을 요청한다면 우후가 내주지 않을 이유는 없을 것이다. 식량과 화약을 보충한 후 재빨리 좌수영을 떠난다. 다시 손죽도로 돌아와 왜구들을 공격할 것이다.“
“식량과 화약을 보충하고 돌아와도 승산이 있겠습니까?”
다시 손죽도로 돌아온다는 말에 손대남이 걱정된다는 말투로 물었다.
“이번 전투에서 좌수군이 패하고 나면 왜구들은 틀림없이 조선수군을 얕잡아보고 방심할 것이다. 손죽도 인근 섬에 전선을 매복시키고 기회를 노리다가 어두운 새벽에 왜선들을 총통과 화전으로 공격할 것이다. 왜구들이 아무리 사납고 날쌔다고 해도 왜선이 모두 불타버리면 손죽도에 발이 묶이게 될 것이다. 왜선들을 불태우는데 성공한다면 우리 녹도군은 이번 전란에서 으뜸가는 전공을 세우게 되는 것이고 선봉의 역할을 못했다는 질책을 피할 수 있을 것이다.“
내 말을 듣고 승산이 있다고 판단한 손대남은 방금 전보다 힘찬 목소리로 말했다.
“좌수영에서 격군들도 교대해야 할 것 같습니다. 하루 종일 노를 젓느라 많이 지쳤을 것입니다. 좌수영에서 출정하기 전에 동원령을 내렸을 테니 이번에 군역을 치르지 않는 장정들도 이미 좌수영으로 소집되었을 것입니다. 그들로 격군들을 교대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손대남의 말에 나는 중요한 사실을 잊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손군관이 중요한 사실을 알려주었다. 좌수영에 동원령이 내려진 것을 까맣게 잊고 있었군. 동원령이 내려졌으니 좌수영은 물론 녹도진에도 이번에 군역을 치를 순번이 아닌 장정들이
소집되었겠지. 잘됐다. 전력을 증강할 수 있겠어.‘
“손군관 아주 좋은 생각이다. 좌수영에 도착하는 대로 우후에게 격군의 교대를 부탁하겠다.“
손대남은 내 칭찬이 쑥스러운지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손대남과 이언세가 내 계획을 이해하고 동의하자 나는 그들에게 재빨리 작전을 설명했다.
‘왜선의 추격을 받으며 좌수군 본대에 합류하기 위해 달려왔을 때 가장 염려했던 것이 좌수군 본대가 왜구들과의 전투를 피하고 철수하는 것이었어. 특전사와 해병대에서 항상 최악의 상황을 대비해야 한다고 배웠지 그 생각이 나서 좌수군 본대에 합류하기 전에 몇 가지 작전을 생각해 놨었는데 오늘은 그 덕분에 사지에서 빠져나갈 것 같구나. 만약 좌수군 본대가 왜구들과 싸우지 않고 그냥 철수한다면 그대로 좌수군 전선들을 따라 녹도군도 철수시킬 작정이었는데 다행히 좌수군 본대에 합류했고 좌수군의 전선들도 관선들을 포격했으니 그대로 전투가 진행됐으면 충분히 왜구들을 물리쳤을 거야. 하지만 좌수사가 저 모양이니 어쩔 수 없지.‘
손대남과 이언세에게는 즉흥적으로 생각해낸 것처럼 말했지만 좌수영으로 귀환하는 것도 화약과 식량을 보충하고 다시 출정하는 것도 본대에 합류하기 전에 생각에 생각을 거듭해 생각해낸 작전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번 전투에서 살아남고 패전의 책임을 피하기 위해서는 이 방법 밖에는 다른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전선의 모든 불을 꺼라 당장 횃불을 꺼라”
나에게서 작전계획을 들은 손대남이 배를 밝히고 있는 모든 불을 끌 것을 명령했다. 갑판 위의 모든 불을 껐고 전선의 하부에서도 격군들이 노를 젓는데 필요한 최소한의 불만 남겨두고 모든 불을 껐다. 이미 해가 지고 있어서 불을 끄자 배는 어둠속에 잠기는 것 같았다.
“최대한 조심히 배를 몰아라. 절대로 직선으로 몰아서는 안 된다. 원을 그리듯이 나아가야한다.“
“알겠습니다. 심려를 놓으십시오.”
이언세는 타공의 옆에 붙어 배를 조심히 몰 것을 신신당부했다.
내가 세운 작전은 단순했다. 관선들의 공격을 피하기 위해 관선들의 진격로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관선들이 좌수군 전선들을 공격한다면 동쪽에서 서쪽 방향으로 진격해 올 것이니 녹도전선이 반시계 방향으로 반원을 그리며 남쪽을 거쳐 동쪽으로 향하게 했다.
날이 어두워지자 갑판위에 횃불을 달아 어둠을 밝힌 좌수군의 전선들 그리고 관선들과는 모든 불을 끄고 어둠에 잠긴 녹도전선은 노 젓는 소리만을 내며 남동쪽으로 움직였다. 그렇게 녹도전선이 어둠속에서 움직이고 있었을 때
“탕” “탕” “탕” “쾅” “쾅” “쾅”
바다에 요란한 총성이 울리며 뒤이어 포성까지 들렸다. 좌수영으로 돌아가기 위해 뱃머리를 돌리고 있던 전라좌수군의 전선들을 향해 왜구들의 관선들이 공격해온 것이다. 좌수군의 전선들이 뱃머리를 돌리는 것을 보고받은 긴시요라는 전선들이 움직이느라 총통을 방포하지 못하는 이때를 호기로 여기고 공격명령을 내렸다. 긴시요라의 명령에 따라 3척씩 모여 대형을 갖추고 공격 명령만 기다리고 있던 관선들은 공격명령이 떨어지기 무섭게 좌수군 전선들을 향해 달려들었고 왜구들은 좌수군의 사기를 꺾기 위해 조선수군이 사정거리에 들어오기도 전에 조총부터 발사했다. 그러나 왜구들의 예상과는 달리 전투는 일방적이지가 않았다. 관선들이 화공에 대비해서 돛을 내리고 노만 저어서 진격했던 탓에 돛을 펼쳤을 때보다는 관선들의 속도가 느렸고 순천전선과 발포전선을 비롯해 좌수군 본진의 외각에 위치하고 있던 전선들은 이미 뱃머리를 북쪽으로 돌리는데 성공해 관선들을 향해 총통을 방포할 수 있었다.
“어서 방포하라“ “쾅” “쾅” “쾅”
관선들이 순천전선을 향해 달려들자 순천부사 변기는 방포할 것을 명령했다. 순천부사의 명령에 따라 총통이 불을 뿜었지만 관선들은 물러나지 않았다. 이미 갑판 위에 세워놓은 방어물을 믿고 달려들었고 애초부터 관선들이 3척씩 모여 대형을 갖춘 이유가 조선수군의 총통에 공격에 대비해서였다. 총통을 방포했지만 관선들은 물러나지 않았고 전선의 사부들은 관선을 향해 활을 쏘았지만 왜구들도 전선을 향해 활과 조총을 쏘며 공격했다. 3척의 관선이 작정을 하고 달려들려고 하니 순천부사 변기는 결단을 내려야 했다.
“왜구들이 전선에 올라타서는 안 된다. 격군들은 노를 저어라 북쪽으로 이동한다.“
“예”
전장을 떠난다는 말에 병사들은 반가워했고 순천전선은 그대로 노를 저어 전장을 벗어났다.
순천전선을 공격하던 관선들은 북쪽으로 떠나는 순천전선이 북쪽으로 떠나는 것을 목격하고도 순천전선을 쫓지 않았다. 이미 전투태세를 갖추고 있어서 반격이 가능한 순천전선 보다 먹음직스러운 먹이가 눈앞에 보였기 때문이었다. 순천전선을 시작으로 좌수군의 전선들이 전장을 이탈해 철수하자 좌수영 상선과 좌수영 소속 전선이 관선들에게 포위되었다. 이들은 좌수군 본대의 중앙에 위치하고 있었기에 외각에 자리 잡고 있던 다른 전선들 보다 뱃머리를 돌리는 속도가 늦을 수밖에 없었고 그 덕분에 관선들이 공격해 왔을 때는 완전히 뱃머리를 돌리지 못한 상태였다. 전선이 자리를 잡지 못해 갑판 측면에 설치된 총통으로 관선들을 조준하기가 어려운 자세가 된 것을 왜구들은 놓치지 않았다. 다른 전선들이 후퇴하는 것도 보내주면서 중앙의 상선과 좌수영 전선을 향해 달려든 관선들은 어느새 이 2척의 전선을 포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