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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주 한잔
장수들을 돌려보낸 후 손대남과 이언세를 부른 나는 병사들의 사기가 어떤지 물어보았다.
“병사들의 사기도 문제지만 좌수영 아전들도 사기가 높지는 못합니다. 좌수영에 있던 이들은 좌수사 영감이 전선을 이끌고 출정한 것을 직접 목격했을 것인데 전선들이 돌아오지 못했고 좌수사 영감의 생사도 모르고 있으니 그들이 왜구들을 두려워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이언세의 대답을 들은 나는 생각보다 상황이 심각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장수들이 병사들을 지휘해 전투를 지휘한다면 전투와 전선 운용에 필요한 행정과 보급 업무는 아전들이 담당한다. 아전들이 적극적으로 협조하지 않으면 전투나 전선을 운용하는데 문제가 발생할 수도 있는데.‘
“그러면 큰일이 아닌가. 장수들의 사기를 간신히 올려놓았는데 아전들도 왜구를 두려워해서야 제대로 전투를 벌일 수 있겠나.“
답답한 마음에 짜증을 부리며 말하자 이언세는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좌수영의 장수와 아전들이 왜구들을 두려워하는 것도 나쁜 일은 아닙니다.“
‘응 이게 무슨 개소리지? 적을 두려워하는 게 나쁜 일이 아니라니. 이언세 이양반이 헛소리하는 사람은 아니었던 것 같은데.‘
할 말을 잊은 내가 자세히 설명해 보라는 얼굴로 이언세를 노려보자 이언세는 오히려 차분한 얼굴로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저희 녹도진은 좌수영 예하의 속해 있습니다. 지금은 만호 나리께서 좌수군을 지휘하고 계시지만 좌수영에 있던 저들은 내심 만호나리의 지휘를 받는 것이 마음에 들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이언세의 말을 들으며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맙소사 이와 중에 밥그릇 싸움인가. 아니야. 그보다는 좌수영 소속이라는 자존심 때문이겠군. 좌수영 소속 장수가 지휘관이 아니라 좌수영 예하의 녹도진 만호인 내가 지휘관이 되었으니 기분 나쁘다는 소리군.‘
“사람 사는 곳은 어디나 마찬가지군. 조선이라 좀 나을 줄 알았더니.“
“예 만호나리 무슨 말씀이십니까?”
무심결에 속으로 생각하던 것이 입 밖으로 나오자 이언세는 무슨 소리인지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을 하며 나를 바라보았고 손대남 역시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니 잠시 당황해서 헛소리를 했다. 전투를 앞두고도 자존심을 내세우는 저들이 한심해서 그런다.“
무심코 나온 말에 놀란 나는 황급히 변명을 하며 이언세를 바라보았다. 계속 말하라는 뜻으로 내가 바라보자 이언세는 다시 입을 열었다.
“예 이런 때에 만호 나리께서 녹도전선 한 척으로 왜선들의 추격을 물리치셨고 큰 전과까지 올리셨던 과정을 저들이 자세하게 알게 된다면 어떻겠습니까. 녹도군이 어떻게 왜선들의 추격을 뿌리치고 좌수영으로 귀환했는지 자세한 사정까지는 좌수영에 있던 저들은 모르고 있을 것입니다.“
이언세의 대답을 듣고도 이해가 가지 않았다.
“장수들은 이미 이틀 전의 상황을 알고 있다. 방금 전에 장수들이 모였을 때 왜구들 보다 아군이 화력에서 우위에 있다는 것을 설명하면서 우리 녹도군이 어떻게 싸웠는지 설명했는데 그것으로 부족하다는 말인가?“
내 말을 들은 이언세는 잘됐다는 듯이 밝은 얼굴로 말했다.
“잘 하셨습니다. 일이 쉬워지겠습니다. 아전들이 원하는 것은 무사히 좌수영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왜구들이 두렵기는 하지만 이미 좌수군이 이미 한번 패한 이상 왜구들과 싸우지도 않고 귀환하면 처벌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을 아전들도 모르지는 않을 것입니다. 왜구들과 전투를 피할 수 없는 이때 만호나리께서 왜구들을 상대로 싸워서 승리하실 수 있는 명장이라는 것을 확신한다면 아전들은 무사히 돌아가기 위해서라도 불만을 억누르고 만호나리의 명에 복종할 것입니다.“
“그럴듯하군. 좋은 생각이야.”
‘아무리 자존심이 강해도 목숨보다 중요할리는 없겠지 좋은 생각이다. 왜구들에 대한 두려움까지 이용할 생각을 하다니 이언세 대단하다. 아전으로 놔두기에는 아까운 인재야.‘
아전과 장수들의 상태를 이해한 나는 이번에는 병사들의 사기를 물었다.
“아전들은 그렇다 치고 병사들의 사기는 어떠한가. 당장 내일이라도 전투가 벌어질지도 모르는데 병사들도 왜구들을 두려워하고 있다면 큰일이야.“
손대남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쓴 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병사들의 사기도 좋지는 않을 것입니다. 왜구들을 두려워하는 것 보다 이번에 출정한 것 자체가 병사들의 생계를 어렵게 만드는 일이니 말입니다.“
‘산 넘어 산도 아니고 이번에는 생계문제야. 들을수록 환장하겠네.‘
이번에도 답답한 소리지만 그냥 지나칠 수 없는 문제였다.
“무슨 소리인가. 생계가 어렵게 된다니?.”
“이번에 동원령이 내려지면서 군역으로 복무할 차례가 아닌 장정들 까지 소집됐습니다. 농사를 짓거나 바다에 나가 물고기를 잡으며 처자식들을 부양해야할 장정들이 생업을 내려놓고 수군으로 동원됐으니 군사들 대부분은 소집된 것에 불만을 품고 있을 뿐만 아니라 집에 남아있는 처자식들의 생계까지 걱정하고 있을 것입니다. 군사들은 왜구들은 어떻게 되던 간에 하루라도 빨리 집으로 돌아갈 생각뿐일 것입니다.“
조선시대에 수군은 천역으로 여겨져서 기피대상이었다는 것을 떠올린 나는 그렇지 않아도 수군으로 복무하는 것에 불만이 있었을 군사들이 생업까지 포기하고 동원됐으니 사기가 낮을 수 밖에 없다는 것을 이해했다.
‘조선 시대에 수군역을 지기 위해서는 자신이 먹을 식량 자루까지 짊어지고 수영으로 찾아가야 했다고 했지. 해안가의 장정들로는 충분한 수의 병력을 확보하지 못해 광주같이 내륙지역의 고을에서 수군으로 장정들을 징집하는 경우도 있었고.‘
사정을 들으니 병사들의 사정도 이해하지 못할 것은 아니었지만 당장 왜구들을 물리치지 못하면 군사들도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는 신세였다.
“군사들의 처지도 딱하지만 지금은 어떻게든 왜구들을 토벌해야 한다. 내일 당장이라도 전투가 벌어질지 모르는데 이대로는 안 되겠어. 아전과 군사들의 사기가 이래서야. 어떻게 왜구들과 싸울 수 있겠나. 아전과 군사들의 사기를 올릴 방법이 없겠나?“
내가 묻자 이언세는 어쩔 수 없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까짓것 탁주 한 동이만 주십시오.”
“탁주라니 그게 무슨 말인가?.”
“사내들이 허심탄회하게 이야기를 나누는 데는 술이 제일입니다. 탁주 한 동이만 주시면 좌수영 전선으로 건너가 아전들을 만나보겠습니다. 좌수영의 아전들과는 이전부터 안면이 있었으니 술 동이를 들고 가면 반가워 할 것입니다.“
단순한 방법이지만 다른 도리가 없었으니 어쩔 수가 없었다.
“아전들에게 우리가 어떻게 싸웠는지 알려주겠다고 했었지? 술을 한잔 하면서 대화를 나누면 한결 부드럽게 이야기를 나눌 수 있겠군. 좋은 생각이야 그런데 술 한 동이로 가능하겠나?”
반쯤 농담이 섞인 질문에 이언세는 가볍게 웃으며 대답했다.
“싸우러 나와서 취할 수는 없으니 한 동이로 끝내도록 하겠습니다.“
손대남도 이언세의 의견에 찬성하며 자신의 의견을 말했다.
“좋은 생각입니다. 화포장 이동구에게도 명을 내려 좌수영의 화포장들과 대화를 나누게 하시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화포장이 좌수영의 화포장들에게 지난 전투의 무용담을 들려주면 좌수영 화포장들도 자신감을 가질 것입니다. 왜구들과 싸워도 이길 수 있다고 말입니다. 화포장들을 통해 좌수영의 포수들에게도 녹도군의 무용담이 전해지면 좌수영 군사들도 만호 나리를 존경하게 되고 만호 나리의 명을 따를 것입니다.“
“군사들이 가장 원하는 것은 살아서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라고 했지? 좋아 화포장과 군사들에게도 지난 전투의 전과를 알려주게 내가 지휘하면 왜구들을 토벌하는 것도 어려운 일이 아니라고 말이야.“
“예 알겠습니다.”
“예 만호나리”
힘차게 대답하는 손대남과 이언세를 보면서 이들이 내가 생각하고 있었던 것 보다 유능한 인재들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좋은 생각이다. 병사들을 일일이 만나서 설득하는 것이 아니라 아전들과 화포장을 통해서 포수와 병사들에게 까지 영향력을 끼치게 만들다니 손대남, 이언세 둘 다 충직하고 머리도 좋은 것 같다. 이런 유능한 인재들을 부하로 만났으니 정말 다행이다.‘
나는 손대남과 이언세를 바라보면서 든든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좋아 저녁밥을 먹고 난 후 좌수영 전선으로 건너가도록 하게. 술은 충분히 필요한 만큼 가져가도 좋다. 그리고 화포장을 보내는 것도 좋은 생각이다. 화포장 이동구에게도 명을 내리겠다.“
손대남, 이언세와 의논을 마친 나는 오후에는 격군들을 쉬게 하고 바람과 해류를 타는 것으로 배를 몰았다. 바람과 해류를 타고 남쪽으로 나아가던 함대는 아직 해가 남아있는 늦은 오후에 남해의 한 무인도에 정박했고 일찌감치 밥을 지어 병사들에게 저녁밥을 먹였다.
저녁 식사가 끝난 후 이언세는 군사들의 손에 술동이를 들려서 좌수영 전선으로 건너갔고화포장 이동구 역시 술동이를 들고 좌수영 전선으로 향했다. 선창에 자리를 잡은 이언세가 아전들을 불러 모으자 술 한잔하자는 소리에 아전들은 단 한명도 빠지지 않고 선창으로 모였다. 아전들이 모이자 모두에서 탁주잔을 돌린 이언세는 자신이 먼저 한잔 들이마신 후 아전들과 이런 저런 잡담을 주고 받다가 천천히 녹도군의 전공을 자랑하기 시작했다.
“화포가 불을 뿜으니까. 왜구고 뭐고 소용이 없더라니까. ‘펑’ 하고 큰 소리가 나면서 조란환이 날아가는데 그 다음은 뭐 눈 뜨고 못 볼 지경이야.“
이언세가 하던 말을 멈추고 목이 타는 듯 잔을 들어 탁주를 벌컥벌컥 소리를 내며 마시자 이언세의 말을 듣고 있던 아전 중 하나가 답답하다는 듯이 말했다.
“그래서 어떻게 됐는데. 속 타서 사람 숨넘어가는 꼴 보고 싶지 않으면 어서 읊어.“
“아 그 친구 성미 급하기는.”
아전들의 재촉에도 불구하고 느긋하게 탁주를 마신 이언세는 넉살좋게 사람 좋아 보이는 웃음을 지으며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화포가 불을 뿜으니까. 조란환이 날아가더니 그 다음에는 왜선 갑판위에 남아있는 것이 없더란 말이야.“
“남아있는 게 없다니 왜선에 왜구들이 가득했다고 하지 않았어?.“
또 다른 아전이 이언세에게 묻자 이언세는 아전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래 왜선의 갑판위에 왜구들이 가득했지 왜검이며. 창이며 갈고리가 달린 밧줄까지 들고 전선으로 올라오려고 전선을 노려보던 왜구들이 줄잡아 50명은 넘어보였단 말이야. 그런 왜선을 향해 화포를 쐈단 말이야. 그것도 조란환을 가득 채워서 지자총통에 조란환을 100발씩은 채워서 쐈을 거야. 왜구들에게 조란환을 가득 채운 화포를 6문이나 쐈으니 어떻게 됐겠어?.“
“지자총통을 6문이나 끔찍했겠군.”
이언세에게 재촉을 했던 아전은 생각만 해도 무섭다는 듯이 몸서리를 치자 이언세가 맞장구를 치며 말했다.
“그래 아주 끔찍한 장면이 눈 앞에 펼쳐졌지 뭐야. 왜선 갑판위에 빽빽하게 버티고 있던 왜구들 가운데 두발로 서있는 놈들이 하나도 없었다니까. 전부 쓰러졌고 왜선은 붉게 물들어 있었어. 왜구들 피가 갑판위에 바닷물처럼 흘렀다니까.“
이언세의 말을 듣던 아전은 놀란 표정으로 이언세에게 말했다.
“정말 대단하군. 대단해. 왜구들은 포악하고 잔인하기가 따를 자가 없고 흉포하기로 유명한 야인들도 왜구들에게는 비할 바가 아니라고 하던데.“
“왜구들은 잔인할 뿐만 아니라 몸이 날쌔고 칼을 귀신같이 잘 써서 왜구들이 전선위로 올라와 칼을 휘두르면 용맹한 장수들도 상대하기 어렵다고 하더군. 하지만 우리 조선수군은 화포가 있단 말씀이야. 왜구들이 전선에 올라오기 전에 화포를 쏴서 섬멸해 버리면 그만이야. 아무리 날쌔도 철환을 피할 수는 없는 법이니까.“
이언세가 자신 있다는 듯이 주먹을 휘둘러 가며 말하자 좌수영의 아전들은 이언세의 말에 공감하며 그렇다고 외쳤다. 이언세는 얼마 남지 않은 탁주를 아전들의 잔에 따라주며 말했다.
“자 우리에게 판옥선과 화포가 있는 이상 왜구들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어. 그리고 우리 만호 나리는 녹도전선 1척으로도 수십 척의 왜선들을 농락하고 사상자 하나 없이 무사히 철군하신 명장이시니 이번 싸움도 우리가 이길 것이 분명해. 아무염려 말고 한잔씩 마시자. 마시고 오늘밤은 푹 자고 내일은 힘내서 싸우자.“
“마시자” “싸우자”
이언세의 장담에 자신감이 생긴 아전들은 기분 좋게 탁주를 마시고 자리에서 일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