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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 바다.
이언세가 아전들과 탁주를 마시며 입담을
펼치는 동안 녹도진의 화포장 이동구는
좌수영의 화포장들과 술잔을 나누며
지난 전투의 경험을 들려주고 있었다.
“왜선들이 좌우로 바짝 따라붙었지 뭐야.
바로 그때 만호 나리께서 방포하라고
명을 내리셨지 뭐야 그래서...“
“그래서 어떻게 됐는데?
빨리 말해 보게”
이동구의 말에 푹 빠져 있던 화포장이
재촉하자 이동구는 능글맞게 웃으며
일부러 천천히 입을 열었다.
“콰앙~ 하고 지자총통이 일제히 불을
뿜었지 녹도전선에 장비하고 있던
지자총통이 일제히 불을 뿜었으니
어땠을 것 같은가?“
이동구에게 빨리 말하라고 재촉하던
화포장이 이동구에게 대답하듯이
말했다.
“지자총통을 모두 방포했다고?
녹도전선은 총통을 12문 장비하고
있지 않은가.
그런데 12문을 동시에 방포했단
말인가?“
이동구는 입을 크게 벌리고 웃으며
말했다.
“그렇지 12문을 한 번에 그것도 전선에
달라붙으려고 접근한 왜선들에게 시원하게
쐈지.“
이동구의 말을 들은 화포장들은 놀라서
입을 다물지 못했다.
직접 총통을 다루는 화포장들은 총통의
위력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조선의 총통 중에서 천자총통 다음으로
큰 대형화포인 지자총통을 12문이나
그것도 근거리에서 방포했다는 말에
화포장들은 비록 적이지만 왜구들이
불쌍하다는 생각까지 들 정도였다.
“왜구들이 뼈도 못 추렸겠군. 그래
자네도 그 장면을 봤나?“
화포장의 질문에 이동구는 고개를
저었다.
“화포장은 총통을 방포했으니 다시
총통을 장전해야지 구경할 시간이
어디 있나. 그래도 나중에 다른
병사들에게 이야기를 들었지.
방포한 후에도 왜선에서 살아남은
왜구들이 있으면 사살하기 위해
사부들이 각궁을 준비하고 있었는데
방포한 직후 사부들이 왜선을 내려다
보니 좌우 양면에서 달려들던 왜선
2척 모두 갑판위에 두발로 서있는
자들이 없었다고 하더군.
그뿐만이 아니라“
이동구가 잠시 말을 멈추자 화포장들은
숨을 참는 표정을 지으며 이동구를
바라보았다.
“왜선의 갑판에 붉다 못해 검은 색으로
물들어 있었다고 하더군. 왜구들의 피가
고여서 말이야“
이동구가 말을 마친 후에도 화포장들은
놀라서 입을 열지 못했다.
이언세와 이동구가 아전들과 병사들의
사기를 높이기 위해 수고하는 동안 나는
손대남 함께 손죽도를 탈환할 작전을
짜고 있었다.
“내일 날이 밝는 대로 협선을 보내
손죽도를 정탐할 것이다.
적선들이 포구에 그대로 정박해 있다면
모든 전선들 동원해 적선들이 바다로
나오지 못하게 봉쇄하고 총통으로 공격할
것이다.
문제는 적선들이 이미 손죽도를 떠났을
경우다. 적선들이 손죽도를 이미 떠났다면
어떻게 해야 할 것 같은가?“
손대남을 바라보며 묻자 손대남은
난처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적선들이 포구에 정박해 있다면 우리의
전력으로 적선들을 봉쇄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닐 것입니다. 그러나 이미 적들이
바다로 나왔다면 추격하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아쉽지만 손대남의 의견이 정확했다.
“맞는 말이야 적선들이 바다로 나왔다면
추격하는 것은 어렵다. 이 넓은 바다에서
적선을 찾는 것도 쉽지 않고 무엇보다
적선은 아군의 판옥선 보다 속도가 빠르다.
작정하고 도망치려고 한다면 아군 전선으로
적선을 따라잡는 것이 불가능해.“
나는 나도 모르게 얼굴에 인상을 쓰며
말했다.
“우선은 적선들이 손죽도에 정박해 있을
것으로 예상하고 계획을 세워야 할 것
같습니다.
적선들이 이미 손죽도를 떠났다면 그때는
다른 방법이 없으니 말입니다.“
왜선들이 손죽도에 없다면 아마도 일본
특히 왜선들이 출발한 고토열도로
돌아갔을 가능성이 높았다. 그러나 나는
전선들을 몰고 고토열도로 진격할 수는
없었다.
‘왜구들에 대한 정보도 없는 상태에서
어떻게 왜구들이 고토열도 출신인지
알았냐고 심문이라도 당하면 끝장이다.
더구나 판옥선은 대양항해에 적합하지
않아.‘
“좋아 적선들이 손죽도에 남아있을
경우를 예상하고 작전을 세운다.“
손대남과 의논을 하면서도 나는 속이
쓰리는 것 같았다.
‘역시 조선수군의 전력으로는 한계가
많구나. 당장 왜구들이 고토열도나
일본 혼슈로 도망치면 추격할 방법이
없으니 갤리온 몇 척만 있었어도
고토열도 까지 추격하는 것은
일도 아닌데‘
“왜구들은 노략질을 하고 사람들을
납치하기 위해 조선으로 쳐들어왔습니다.
이번에 전선을 18척이나 끌고 온 것을 보면
왜구들이 손죽도만 노략질하고 돌아갈 것
같지는 않습니다. 다른 섬을 더 노리기
위해서라도 벌써 왜로 돌아갔을 것 같지는
않습니다.“
손대남의 의견에 나는 동의했다.
“나도 같은 생각이야 관선이 18척이면
왜구들의 수는 2000명이에 가까울
것이니 손죽도 같은 섬 하나 만으로
만족할리는 없지 어쩌면 다른 곳을
약탈하기 위해 이미 손죽도를 떠났을 지도
모르겠는데“
‘실제 역사에서 정해왜변 당시 왜구들은
이대원을 살해한 후 해안가 지역을 약탈하며
완도까지 쳐들어간다. 가리포 첨사가 눈에
화살을 맞았고 조선 수군의 전선들이
왜구들에게 나포됐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봐서는 전라우수군도 왜구들과 전투를
벌였지만 왜구들에게 패하고 전선까지
빼앗긴 것이 분명한데 원래 역사대로
왜구들이 완도지역으로 이동했다면
손죽도로 진군하는 것이 헛수고가
될 수 있다. 그렇다고 무턱대고 완도로
진군할 수도 없고 왜구들이 정확이 언제
완도로 진격할지 알 수 없으니
답답하구나.‘
한국에서 봤었던 정해왜변에 대한 기록을
떠올려 봤지만 왜구들이 남해안의 섬들과
해안지역들을 약탈했다는 내용만 기억날
뿐 왜구들의 경로와 시간대 별 움직임은
생각나지 않았다.
‘다른 방법이 없으니 어쩔 수 없지
좌수사와 좌수군 병사들을 구출하겠다고
우후에게 다짐했으니 우선은 손죽도로 가자
왜구들이 노략질 하러 가면서 포로들 까지
끌고 다닐 것 같지는 않으니 좌수군 병사들과
같은 포로들은 손죽도에 남아있을 가능성이
높다.‘
고민 끝에 결정을 내린 나는 손대남에게
말했다.
“왜구들이 이미 손죽도를 떠나 다른 지역으로
이동했을 가능성도 있으니 우리 좌수군의
출정목적은 왜구들에게 붙잡혀 있는 우리
병사들과 백성들을 구출하고 왜구들에게
나포된 전선을 되찾는 것이니 우선은 계획대로
손죽도로 진군하겠다.
이곳에서 왜 와의 거리가 가깝지도 않으니
왜구들이 다른 곳을 약탈하기 위해 떠났어도
우리 병사들을 끌고 다니지는 않을 것이다.
아마도 손죽도에 병사들과 백성들을 감금해
놓고 일부 병력을 남겨 놓았을 가능성이 크다.
우선은 손죽도로 진군해 왜구들을 섬멸하고
우리 병사들과 백성들을 구출하겠다.“
“현명하신 판단이십니다.”
내가 손대남과 함께 왜구들을 상대할
작전을 의논하고 있었을 때 전선의
군사들은 대부분 잠을 자고 있었다.
하루 종일 배를 타고 온 군사들은
저녁밥을 먹기가 무섭게 자리에 누워
잠이 들었고 경계를 맡은 군사들만이
창과 활을 들고 전선의 갑판에 서서
차가운 겨울을 바람며 맞으며 경계근무를
서고 있었다.
때마침 불어오는 바닷바람에 손이
시려오자 녹도진 수군 임광정는
들고 있던 창을 내려놓고 두 손을 비비며
투덜거렸다.
“잠도 자지 못하고 이게 무슨 고생이야”
“그러게 말일세. 이 바다 한 가운데에서
누가 쳐들어온다고 밤새도록 경계를
서라니“
임광정 옆에서 경계를 서던 박언필
역시 몸을 웅크리며 투덜거렸다.
이들은 녹도진이 있는 흥양현 출신
수군들로 해안가 출신인 탓에 집안 대대로
수군 군역을 감당하고 있었다.
수군 군역은 일반군역에 비해 복무 일수도
길뿐만 아니라 수군 군역 기간 동안 따로
숙소가 없이 배안에서 생활하는 등
힘들고 불편한 점이 많아 대부분의
수군 병사들은 수군으로 복무하는 것에
불만이 많았다.
평소에 이미 불만이 쌓여있던 이들은
밤에 경계근무까지 서게 되자 서로
맞장구를 쳐가며 불평불만을 늘어놓았다.
이들이 불평하는 소리가 점점 커지자
이들과 좀 떨어진 곳에 서있던 병사가
이들을 말렸다.
“그만하게 만호 나리가 어떤 분이신지
벌써 잊었나. 만호나리가 아니었으면
우리는 이미 죽은 목숨이었어.“
이들과 같은 마을 출신에 나이도
이들보다 훨씬 많은 강영남이었다.
평소 형님으로 모시던 강영남이 나서서
말리자 임광정과 박언필도 더 이상
불평을 늘어놓을 수 없었다.
“뭐 만호 나리가 잘못했다는 것이
아니라 춥고 졸리기도 하니까.
그러는 것 아닙니까.“
“그래 잠 못 자고 피곤해서 그러지
만호 나리께 불만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임광정과 박언필이 변명을 늘어놓자
강영남이 가볍게 웃으며 이들을
다독였다.
“다 같이 힘들기는 마찬가지 아닌가.
한 시진(2시간)마다 번을 교대하기로
했으니 교대할 시간이 한 식경(30분)
정도만 더 근무를 서면 될 것이네.
조금만 참으세.“
“예 형님”
“예”
강영남과 말을 마친 후 왠지 부끄러운
마음에 바다로 눈을 돌렸던 임광정의
눈에 무엇인가 보였다.
“저게 뭐지 뭔가 다가오는 것 같은데?“
“무슨 소린가? 뭐가 다가오고 있다고.”
임광정의 말에 경계를 서던 병사들이
임광정이 있는 곳으로 모였다.
“저쪽에 불을 비춰보게 뭔가가 움직이고
있어.“
수군 병사들 특히 해안가 지역 고을에
사는 병사들은 대부분 어부들이고
바다에 익숙한 사람들이다.
다른 군사들도 무엇인가 움직이는 것이
있다는 것을 보고 횃불을 들었다.
임광정이 가리키는 곳으로 횃불을
흔들자 주변이 잠시 밝아보였지만
아직은 거리가 있어서 정확히
보이지는 않았다.
“안되겠다. 어서 군관나리께 알리자.”
강영남이 군관에게 보고하자고 하자
다른 병사들도 일제히 동의했다.
“군관나리를 모셔오겠네.”
병사 중 한명이 선실로 내려갔고
다른 군사들은 여전히 횃불을 휘두르며
다가오는 물체의 정체를 밝히기 위해
노력했다.
작전계획을 세우다가 잠시 쉬고 있던
나와 손대남은 선실로 찾아온 병사의
말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무엇인지 알 수 없는 것이 전선으로
다가오고 있다는 말이냐?”
“정확히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배가
아니고서는 이 바다에 떠있을 수가 없지
않겠습니까.“
경계근무를 서고 있던 병사들이 전선으로
다가오는 물체를 발견했단 소리에 놀란
나는 환도를 들고 손대남과 함께 갑판으로
올라갔다.
“배가 확실한 것이냐”
“소인 이 바다에서 평생을 살아왔습니다.
크기는 정확히 모르겠으나 배가
확실합니다.“
경계를 서고 있던 병사들은 전선으로
다가오고 있는 물체가 배라고 확신했다.
상황이 심상치 않다고 느낀 나는
손대남에게 명령을 내렸다.
“지금 즉시 군사들을 깨우고 전투를
준비하라. 그리고 사부들은 화전을
준비하게 하라“
“예”
역시 손대남은 유능한 장수였다.
긴급 상황인 것을 깨달은 손대남은
군말 없이 전투 준비를 지시했고
사부들을 집결시켜 화전을 준비할 것을
명령했다.
병사들이 전투를 준비하는 동안
나는 바다를 보며 생각에 잠겼다.
‘우선 상대의 정체를 파악해야 한다.
난파선이나 길을 잃은 어선이면
다행이겠지만 혹시라도 왜구들이
기습을 시도하는 것일 지도 모르니.‘
왜구들은 기습에 능하고 접근전이
특기였다. 아직 손죽도 까지의 거리가
상당하기는 하지만 왜선은 판옥선 보다
속도가 빠른 만큼 왜구들이 기습을
시도하는 것도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다.
녹도전선에서 떠들썩하게 전투를 준비하는
동안에도 다른 전선에서도 소식이
전해졌는지 병사들이 갑판으로 올라와
횃불을 들었다.
녹도전선은 물론 좌수영 전선에서도
군사들이 전투준비를 마치자 나는
손대남에게 명령을 내렸다.
“이곳으로 다가오는 배를 향해 화전을
쏘아라.“
“화전을 말씀이십니까.”
불화살을 쏘라는 말에 손대남이
확인하듯이 묻자.
나는 내가 실수했다는 것을 깨닫고
재빠르게 말했다.
“쏴라 배를 불태우라는 말이 아니다.
화전을 다가오고 있는 배의 위로 쏴서
불빛으로 배의 정체를 밝힐 수 있도록
하라“
“예~”
전선의 갑판 곳곳에 횃불을 달아 전선으로
다가오는 것은 무엇이든지 환히 보이게
불을 밝혔고 손대남을 비롯해 엄선된
사부들이 정체불명의 배를 향해 화전을
날렸다.
다섯 발의 화전이 하늘을 나르며 어두운
바다를 밝게 비췄고 곧 불빛에 바다위에
떠있는 배의 모습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