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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좌수사
변협과 신립을 방어사로 출병시키기로
결정한 직후 선조가 문득 깨달았다는
듯이 말했다.
“과인이 중요한 일을 잊고 있었구나.”
조정의 대신들은 선조의 말에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고
영의정 노수신이 나서서 선조에게
물었다.
“무엇을 말씀이십니까. 전하”
노수신의 질문에 선조는 당연한 일을
묻는 다는 듯이 대답했다.
“전라좌수영 말이다. 전라좌수사 심암이
왜구들에게 패해 이미 전사하였는지
포로로 잡혀있는지 알 수도 없지
아니한가?
전라좌수사가 공무를 볼 수 없으니
전라좌수군이 어찌 왜구들을 토벌할 수
있겠는가?“
“전하 너무 심려 마시옵소서. 녹도만호가
전선과 군사들을 이끌고 출정하였다 하니
곧 승전보가 올라올 것이옵니다.“
노수신의 대답에 선조는 잘됐다는 듯이
말했다.
“그렇지. 녹도만호가 좌수군 군사들을
이끌고 왜구들과 전투를 벌이고 있으니
녹도만호를 전라좌수사에 제수하겠다.“
뜻밖의 명에 대신들은 당황했다.
종4품 만호 그것도 22세의 젊은 장수를
정3품 수군절도사에 임명했으니
조선에서는 보기 드문
파격적인 승진이었다.
대신들이 놀라서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었을 때 이조판서 이산해가
불가하다고 나섰다.
“전하 전라좌수사를 새로이 세워
좌수군을 바로잡으시려는 전하의 뜻은
지극히 당연하신 일이오나 녹도만호는
아직 경험도 부족할 뿐만이 아니라
만호가 곧바로 좌수사에 오른다면
우후를 비롯해 좌수군 장수들 가운데는
부하였던 만호를 하루아침에 상관으로
모시게 되니 장수들은 물론 좌수사도
서로 불편할 것이옵니다.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이산해의 발언이 끝나기 무섭게 다른
대신들도 일제히 통촉해 달라고 외치며
선조의 뜻에 반대했다.
이산해의 발언은 다른 대신들이 듣기에도
타당한 말이었다. 다른 군영의 장수도 아닌
전라좌수영의 만호가 곧바로 전라좌수사가
된다면 좌수영의 장수들 특히 만호보다
품계가 높은 첨사와 부사 그리고 우후는
부하였던 만호를 상관으로 모시게 된다.
좌수영의 장수들이 시기하는 것은 물론
신임 좌수사도 상관이었던 부하장수들을
지휘하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이산해를 비롯한 조정의 대신들은 일제히
안 된다고 외쳤지만 선조는 그런 대신들을
비웃듯이 바라보며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럼 전라좌수군의 장수들 중에서
녹도만호 외에 군사들을 이끌고
왜구들과 싸우고 있는 장수가 있느냐?
우후는 본래의 임무가 자리를 비운
좌수사를 대신해 좌수영을 지키는 것이니
그렇다 쳐도 만호보다 품계가 높은
장수들은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이냐?
순천부사(종3품)와 사도첨사(종3품),
방답첨사는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고
녹도 만호 혼자서 군사들을 이끌고
출병한 것이냐?“
선조의 질문에 대신들은 입을 열지 못했다.
대신들의 입을 다물게 한 선조는 만족한 듯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확정을 지었다.
“왜구들과 싸우고자 하는 장수에게 군사를
맡기는 것이 마땅하다. 지금 좌수군을
이끌고 왜구들과 싸우고 있는 장수는
녹도만호 뿐이니 녹도만호 이대원을
전라좌수사에 제수한다.”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전하”
왜구들로 인해서 전쟁을 겪고 있는
상황에서 전라좌수사의 자리를
비워둘 수도 없으니 대신들도 더 이상
선조의 뜻을 막을 수는 없었다.
대신들은 마지못해 고개를 숙였고
선조는 대신들의 반대를 누르고
자신의 의지를 관철시킨 것이
만족스러웠다.
선조가 녹도만호 이대원을 전라좌수사에
임명하자 병조판서 정언신이 입을 열었다.
“전하 전라좌수영의 수군이 이미
출병하였고 전라우수영과 전라감영의
군사들도 곧 출병할 것이니
왜구들을 토벌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닐 것이옵니다.
다만 걱정되는 것은 이미 전라좌수군의
피해가 적지 않은 듯하고
왜구들이 침범한 전라도 일대는 한성과
거리가 멀어 정확한 상황을 파악하기가
어려우며 전장의 장수들이 전황을 한성에
보고한 후 전하의 명을 기다리기 까지
시간이 걸릴 것이 걱정이옵니다. 전하“
정언신이 말을 마치자 선조는 정언신에게
물었다.
“그럼 병판의 의견은 어떠한가?
병판은 대책을 가지고 있는가?“
선조의 질문에 정언신은 기다렸다는 듯이
대답했다.
“전하 신을 전라도로 내려 보내 주옵소서.
신이 직접 내려가 좌수영의 상황을 파악하고
다시는 이런 일이 반복되지 않도록
좌수영을 정비하겠사옵니다. 전하“
정언신이 전라도로 내려갈 것을 자청하자
선조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병판의 주장에도 일리는 있다.
병판이 전라도로 내려가면 일은 잘 하겠지.
그러나 아직 전란이 끝난 것도 아닌데
병판을 내려 보내는 것은 마음에 내키지
않는데.‘
잠시 고민한 후 결정을 내린 선조는
정언신에게 말했다.
“아직 난이 끝나지도 않은 전장으로
내려갈 것을 자청하다니.
그 마음이 갸륵하지 않을 수 없다.
병판의 충성심을 과인이 잊지 않을
것이다.“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전하”
“그러나 아직 난이 끝나지도 않은 지금
병판이 조정을 비우고 전장으로 나가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병판은 조정에서 병판의 공무에 집중하라“
정언신을 전라도로 내려 보내지 않겠다고
선언한 선조는 대신들이 다른 말을 꺼내기
전에 바로 말을 이었다.
“우참찬 김명원을 전라도순찰사로 삼아
전라도로 내려 보낼 것이다.
김명원은 왜구들을 물리치고
전라좌수영을 정비하는데 최선을 다해야
할 것이다.“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전하”
선조는 정언신 대신 김명원을
도순찰사로 임명해 왜구의 토벌과
좌수영의 정비를 명령했다.
정언신은 자신이 직접가지는 못했지만
선조가 김명원을 전라도로 내려 보내는
것으로 자신의 의견을 절반은 들어준
셈이니 어느 정도 만족했고.
선조는 대신들의 주장에 흔들리지 않고
자신의 뜻을 관철시켰으니
이날의 조정은 선조와 정언신 모두에게
만족스러운 자리였다.
그날 오후 동헌에서 공무를 보고 있던 나는
흥양현과 발포진으로 보낸 서신의 답장을
받았다.
서신을 확인한 내가 실망스러운 표정으로
서신을 접자 이언세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안 좋은 소식입니까.”
“우리가 출정한 후 좌수군 우후가
좌수군의 전선들과 병력을 모두
좌수영으로 집결시켰다고 하는군.
흥양현감도 발포만호도 모두 전선을
이끌고 좌수영으로 갔다는 소식이야.
흥양현에서는 현감의 허락 없이는
군량과 화약을 내줄 수 없다는 군
발포진에서도 같은 이유로 지원을
거절했고.“
내가 실망한 기색을 보이자 이언세는
나를 위로하려는 듯 말했다.
“너무 걱정하실 것 없습니다.
군량도 열흘 치는 남아있고
화약도 전투 서너 번은 더 치를 수
있을 만큼 넉넉하게 있습니다.“
“그래 어차피 큰 기대는 없었어.
그런데 우후가 전선과 군사들을
좌수영으로 집결시켰다니 의외로군
우후가 전선을 이끌고 바다로 나올
생각일까?“
나는 우후가 좌수군의 전선과 병력을
집결시켰다는 소식에 신경이 쓰였다.
‘만약 우후가 직접 출병한다면 일이
복잡해진다.
우후는 나보다 품계가 높을 뿐만 아니라.
좌수사가 부재중인 현재 좌수사 대신
군의 지휘권을 행사할 명분도 있으니
만약 우후가 직접 출병한다면 나도
우후의 명령에 따라야 한다.‘
나는 우후가 직접 출병하는 것을 걱정하고
있었지만 이언세의 생각은 달랐다.
“우후 나리가 직접 출병할 생각이셨으면
만호 나리에게 전선과 군사를 맡기지는
않으셨을 겁니다.
아직 전란이 끝나지 않았으니 군사와
전선을 직접 손아귀에 쥐고 계시려는
생각이시겠지요.“
이언세의 말을 들은 나는 그의 생각이
그럴 듯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맞아 우후에게 전공을 세울 야심이
있었다면 나에게 전선과 군사들을
맡겼을 리가 없어.
우후가 직접 출정하려고 했겠지.
오히려 전공을 보고하기 위해 수급과
포로들을 보낸 것이 우후에게 야심을
심어주게 될지도 모르겠군.
우후가 헛된 욕심을 가지기 전에
손죽도로 출정해야겠어.‘
나는 이언세에게 출정준비를
서두를 것을 명령했고
다음날 아침 밝기 무섭게 전선에 올라
손죽도를 향해 출발했다.
“벌써 아침 해가 환하군.
너무 늦게 출발한 것은 아닌지 모르겠네.“
전선의 망루에서 함대의 출정을 지휘하던
나는 전선들이 바다로 나오자 망루에서
나와 갑판 위에 서서 하늘을 올려다봤다.
계절상으로 겨울이었지만 다행히 하늘은
맑았고 햇살도 눈부실 정도였다.
잠시 하늘과 바다를 바라보던 나는
이언세에게 손죽도에 도착하기 까지
걸리는 시간을 물었다.
“손죽도 까지는 얼마나 걸릴 것
같은가?”
“바람도 좋고 물살도 잔잔하니
3시진(6시간) 안에는 도착할 것
같습니다.“
6시간이나 걸린다는 말에 나는
이언세에게 다시한번 물었다.
“겨울이라 해가 짧은데 3시진이나
걸린다니 해가 지기 전에는
도착할 것 같은가?“
이언세는 어쩔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어려울 것 같습니다. 이곳 바다는
저희에게는 익숙한 곳이니 손죽도 까지
전선을 몰고 가는 것은 어렵지 않지만
시간은 어쩔 수 없습니다.
손죽도에 도착할 때는 해가 지고 난
다음일 것입니다.“
그 대답을 들은 나는 다시 생각에 잠겼다.
‘야간에 도착한다면 바로 전투를
벌이기는 어려운데‘
잠시 고민하던 나는 생각나는 것이
있어서 다시 물었다.
“해가 진 다음에도 손죽도로 배를 몰 수
있겠나?“
이언세는 어려울 것이 없다는 듯이
대답했다.
“예 나리 저를 비롯해서 타공은 물론
격군들 까지 저희 좌수군은 인근 바다에서
잔뼈가 굵은 놈들입니다.
왜까지 나간다면 몰라도 손죽도 까지는
해가진 다음에도 충분히 방향을 잡을 수
있습니다.“
이언세의 대답에 어쩔 수 없다고 판단한 나는
명령을 내렸다.
“우선은 최대한 빨리 손죽도로 향한다.
속도를 늦출 수는 없지만 격군들이 지치지
않도록 주의하도록 하라“
“예 알겠습니다.”
“군량은 충분하니 병사들을 배불리 먹여라.
점심도 저녁도 병사들이 배불리 먹을 수
있도록 넉넉히 준비하라.“
“예 만호 나리”
이언세에게 명령을 내린 나는 그 길로
선실로 들어왔다.
전투가 아닌 항해 중에는 이언세에게
배를 맡겨도 큰 문제가 없었다.
선실로 들어와 자리에 앉은 나는 또다시
생각에 잠겼다.
‘손죽도에 도착할 때는 이미 한밤중일
가능성이 높아 밤에 도착한다.
이것을 이용할 방법이 있을 것 같은데‘
나는 생각 끝에 왜구들을 섬을 가둘
생각을 했다.
‘손죽도는 작은 섬이다. 배만 불태워 버리면
왜구들이 섬에서 빠져나올 방법이 없다.
손죽도에 도착하는 즉시 관선을 찾아
불태워버리면 왜구들은 꼼짝없이 섬에
갇히게 된다. 왜구들을 가둬놓고 천천히
요리해 주마‘
마음을 결정한 나는 손죽도에 도착하기 전에
조금이라도 더 쉴 생각으로 자리에 누웠다.
전투가 벌어지기 전에 최상의 컨디션을
유지하는 것도 군인 특히 지휘관에게는
중요한 일이었다.
흔들리는 배에 누워서 쉬는 것도 어느새
적응이 됐는지 서서히 잠이 들려고 할 때
선실 밖에서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만호 나리 손대남 군관이 도착했습니다.”
나는 아쉬움을 감추지 못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알았다. 곧 나갈 것이다.”
“예 나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