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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자의 사정
“내 생각이 짧았군. 왜구들에게 시달렸을
백성들의 심정을 헤아리지 못했어.
우선은 둔전을 경작할 후보지를 몇 군데
골라보고 그중에서 주민들이 지낼만할
곳을 결정하도록 하지. 정 상황이 여의치
않으면 주민들을 시산도로 돌려보내는
방법도 있으니 말이야.
포로들은 백성들의 눈에 보이지 않도록
계속 옥에 가둬놓고 말이야.“
내가 결정을 내리자 손대남은 별다른
이의가 없었다. 이언세 역시 고개를
끄덕인 후 자신의 생각을 말했다.
“지금이 둔전을 준비하시기에 적당한
계절입니다. 아직 겨울이니 우선 백성들이
지낼 집을 짓고 봄에 땅이 풀리면 바로
밭을 일구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집을 짓는 다는 말에 나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맞아 지금은 겨울이지 주민들이 지낼 집을
생각하지 않았구나. 이곳이 조선에서는
따뜻한 편에 속하지만 바닷가야 바닷바람은
차고 매서운데 주민들을 그냥 노숙하게
할 수도 없고 집부터 지어야겠다.‘
“중요한 문제인데 잘 말해 주었네.
이번에 손죽도에서 돌아온 백성들을
돌산도나 절이도에 정착시킨다면
백성들이 지낼 집을 짓는데 시간이
얼마나 걸릴 것 같은가?“
이언세는 어렵지 않게 대답했다.
“백성들 가운데 가족이 모두 무사한 경우가
드문 만큼 우선은 큰 집을 몇 채 지어서
가까운 사람들 끼리 모여 살게 하는 것이
백성들이 지내기에도 편리하고 안전할 것
같습니다. 작은 집을 여러 채 짓는 것보다
큰 집을 한 채 짓는 것이 시간도 절약되고
자재도 훨씬 적게 듭니다.“
“그래서 집을 몇 채나 지어야 할 것 같은가?
시간은 얼마나 걸리고?“
이언세의 설명이 길어지니 나도 모르게
성질을 부렸다.
“여인과 아이들이 10명 정도 모여서 지낼
수 있는 집이 10채 가족단위로 지낼
백성들을 위해서 작은 초가집이 10채
정도면 백성들이 겨울을 보내기에는
충분할 것 같습니다.
좌수영의 군사들과 목수들만 붙여주신다면
두 달 안에 집을 짓도록 하겠습니다.“
이언세의 대답을 들은 나는 생각보다 짧은
시간이라 믿기지 않았다.
“정말 두 달 만에 집을 모두 지을 수
있겠나?”
이언세는 별것 아니라는 투로 자신만만하게
대답했다.
“기와집을 짓는 것도 아니고 백성들이 지낼
초가집 짓는 일입니다. 목재만 준비되어
있으며 한 달 안에라도 가능한 일입니다.
다만 기둥으로 쓸 나무를 베야하고
겨울이라 작업속도가 더딜 것 같아
두 달을 말씀드렸습니다.“
“군사들 대부분이 군역을 서지 않을 때는
나무를 하고 농사를 짓는 놈들입니다.
이런 일에는 익숙하니 염려하지 마십시오.“
손대남도 별일 아니라는 듯이 자신 있게
말했다.
‘역시 군인들이 작업에 익숙한 것은
조선시대도 마찬가지구나.
집 걱정은 안 해도 될 것 같다.‘
잠시 생각하던 나는 손대남과 이언세에게
말했다.
“좋아 둔전을 행할 장소가 결정되는 대로
바로 집을 지을 테니 필요한 준비를
해놓게“
“심려 놓으십시오.”
손대남과 이언세는 자신 있다는 듯이
이구동성으로 대답했고 나는 그들을 보며
나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이 사람들만 있으면 조선에서도
못할 것이 없겠다.‘
둔전에 대해 의논한 후 나는 녹도진을
떠올렸다.
“내가 좌수사로 부임했으니 녹도만호는
아직 공석이네 곧 다른 장수가 만호로
부임하겠지만 그때까지는 녹도진의 일도
내가 봐야 할 것 같아. 그래서 말인데
다른 장수가 만호로 부임하기 전에
녹도진에 하옥되어 있는 포로들과 노획한
병장기들을 좌수영으로 이송하는 것이
어떨까?“
내 물음에 손대남은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좌수사 영감 포로들과 병장기를
좌수영으로 이송하시는 것은 신중히
판단하시는 것이 좋으실 것 같습니다.“
손대남이 이유 없이 반대할 사람이 아닌
것은 그동안의 경험으로 잘 알고 있었다.
나는 손대남에게 물었다.
“그게 무슨 말인가 자세히 말해보게?”
손대남은 말하기를 주저하다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우후 나리를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우후가 나를 좋게 보지는 않겠지
부하였던 사람이 하루아침에 상관이
되었으니.“
손대남은 낮은 목소리로 조심스럽게
말했다.
“절이도에서 승전했다는 소식을 들은
후 우후 나리가 전공을 욕심을 냈다고
합니다.“
‘전공을 욕심내? 그럼 왜 직접 전장으로
나가지 않으셨을까?‘
우후가 전공 욕심을 냈다는 말에
나는 가볍게 웃으며 대답했다.
“우후가 직접 출정이라도 했었나?“
뜻밖에 손대남은 진지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예 좌수군의 모든 전선을 이끌고 직접
출정하려고 했다고 합니다.“
“무슨 소리인가 자세히 말해보게”
내가 놀란 표정으로 묻자 손대남은
말을 아끼며 대답했다.
“조천군이 당시 좌수영에 있었으니
조천군 군관에게 직접 들으시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좋다 조군관을 불러오라”
“예 영감”
잠시 후 녹도진 조천군이 불려왔다.
“그래 어떻게 된 일이냐?”
조천군은 절이도 해전의 경과를 보고하기
위해 좌수영에 도착했을 당시의
상황을 자세히 설명했다.
“수급들과 노획한 병장기들을 본 우후
나리께서는 전공을 세울 기회로 보신 것
같습니다. 영감께서 쓰신 서신도 다 읽지
않고 전공부터 확인하려고 했고 영감께서
어디에 계신지 소인에게 물으셨습니다.
그래서 소인이 영감께서는 손죽도로
출정하셨다고 하자 직접 좌수군의
전선들을 이끌고 출정하겠다고 장수들을
소집하셨습니다.“
우후의 행적을 보고 받은 나는 어이가
없었다.
‘우후가 직접 출정하려고 했다니
손죽도로 진군하는 것이 조금만
늦었어도 우후에게 군사 지휘권을
넘겨줄 뻔 했구나.‘
나는 십년 감수했다는 생각을 하면서
조천군에게 물었다.
“녹도진에서 발포진과 흥양현에 지원을
요청하자 우후가 전선과 군사들을 모두
좌수영으로 집결시켰다고 했었지.
좌수군의 전선들과 군사들이 모두
좌수영에 집결해있었을 테니
우후가 명령만 내리면 바로 출정할 수
있었겠지 그래서 좌수군 전선들이
출정했나?”
내 질문에 조천군은 우습다는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예 우후 나리는 출정명령을 내렸습니다.
그런데 정작 장수들은 순천부사와
발포만호만 출정이 가능하다고 했을 뿐
다른 장수들은 출정을 준비할 시간이
필요하다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어찌된 사정인지 짐작할 수 있었다.
왜구들의 규모가 크다는 보고를 들은
우후는 좌수군의 전선과 병력들을
좌수영에 집결시켰지만 직접 나가
싸울 생각은 없었을 것이다.
우후가 그런 마음가짐으로 좌수영을
지휘했으니 장수들이 그런 분위기를
느끼지 못했을 리가 없었다.
‘너무 풀어져 있었던 거야.
이미 손죽도에서 한번 생사의 고비를
경험했으니 장수들은 물론 군사들도
전장으로 나가기를 꺼렸을 것이고
우후가 출정할 생각이 없다는 곳을
장수들이 몰랐을 리가 없지.
장수들이 그런 분위기를 느끼고
마음 놓고 있었으면 자연히 군사들의
기강도 해이해져있었을 거야.‘
“장수들의 대답을 들은 우후는 노발대발
하면서 다음날에는 출정할 수 있도록 하라고
호통을 쳤다고 합니다.
그 덕분에 좌수영 전체가 난리도
아니었습니다.
한나절 만에 준비를 마치고 다음날
출정하려고 하던 찰나에 선전관이
좌수영에 도착했습니다.“
“선전관이 도착하면서 출정이 취소된
것인가?”
“예 갑자기 나타난 선전관이 만호나리를
아니 좌수사 영감을 찾았으니 우후의
얼굴이 일그러지더군요. 우후는 선전관에게
함께 출정할 것을 권했지만 선전관은 어명을
전하기 전에는 함부로 움직일 수 없다면서
좌수사 영감께서 계신 곳을 알아오라고
우후에게 말했습니다.“
선전관은 왕명을 전달하고 변방의 상황을
임금에게 직접 보고하는 만큼 변방의
장수들은 품계에 상관없이 선전관을 함부로
대할 수 없었다.
조천군의 이야기를 듣고 보내 우후를 믿고
좌수영을 비우기는 어려울 것 같았다.
‘우후가 내 전공과 승진을 시기하고 있겠구나.
아니 아주 배 아프다고 방바닥을 구르고 있을
지도 모르겠네.‘
“어찌된 일인지는 알겠네. 포로들과 노획한
병장기들은 당분간 녹도진에서 계속
관리하도록 하지“
“예 좌수사 영감”
손대남, 조천군, 이언세의 대답을 들은 후
조천군에게 명령을 내렸다.
“조군관은 내일 날이 밝는 대로 녹도전선
1척과 함께 녹도진으로 돌아가게“
“녹도진으로 말씀이십니까.”
조천군이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이 묻자
나는 조천군을 보며 말했다.
“녹도진에 하옥된 포로들의 수가 너무
많아 녹도진의 군사들만으로는 관리하기
어려울 것이야 포로들을 관리하는 일을
조군관이 맡도록 하게 전선의 군사들은
녹도진 방어와 포로들 감시에 투입하고
말이야“
“예 알겠습니다.”
“조군관이 맡은 임무가 막중해 포로들을
관리하면서 그들 가운데 조선말을 하는
자가 있는지 혹은 목수나 화약을 만들 줄
아는 장인들이 있는지 알아보게 특별한
재주가 있는 자들은 선별해서 별도로
관리하도록 하고“
“예 알겠습니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좌수사 영감“
큰일을 맡은 것이 기쁜지 조천군은
힘차게 대답했다.
“그래 열심히 하게”
조천군을 격려한 나는 그들과 함께
몇 가지 사안을 더 의논하고 밤이
늦어서야 그들을 돌려보냈다.
바다에서는 늦은 밤까지 생각에
젖어있기 일쑤였는데 뭍으로 돌아와서도
일에 치여서 밤늦도록 쉬지를 못했다.
그로부터 2일 후 조선의 14대 임금 선조는
신임 전라좌수사 이대원이 올린 장계를
읽고는 도승지에게 명했다.
“당장 전라좌수영으로 선전관을 보내라
전라좌수사 이대원은 즉시 입궐하라 이르라“
“알겠사옵니다. 전하”
도승지의 대답을 들으며 선조는 생각에
잠겼다.
‘이대원이라 참으로 용맹하구나. 좌수사에
제수되기도 전에 이미 왜구들을 토벌하고
전란을 끝내다니 아주 잘됐다. 잘됐어‘
선조가 22세에 불과한 이대원을
전라좌수사에 제수하면서 이대원이
이번 전란을 수습할 것이라고는 기대하지
않았다. 다만 이대원이 전선을 끌고 나가
왜구들과 싸우는 것이 보기에 좋았기
때문이었다. 선조는 왜구들이 조선에
침범해 백성들을 노략질한 것만으로도
조선과 자신의 체통이 떨어졌다고
여겼고 여기에 전라좌수사가 전선들을
끌고 나갔다가 패했을 뿐만 아니라 좌수사
본인도 행방을 알 수 없게 됐으니 망신도
이런 망신이 없었다.
그래서 선조는 자신의 체면을 위해 이대원이
왜구들과 열심히 싸우는 모습을 보여줄
것을 기대하고 있었다.
선조는 이대원이 왜구들과 싸워서
한번이라도 이기고 돌아온다면
좌수군이 패전의 어려움을 이겨낸 것을
선전할 생각이었고 만약 이대원이 또 다시
패하거나 전사한다면 왜구들이 너무 강했기
때문에 패할 수밖에 없었다는 여론을
형성할 수 있었으니 선조에게는 어느 쪽도
나쁘지 않았다.
‘시간만 끌어도 다행이라고 생각했는데
무과에 급제한지 겨우 4년 밖에 안 된
애송이가 전란을 끝낼 줄이야‘
만약 심암이 살아있었다면 패전의 책임을
물어 심암의 목을 베었겠지만 심암이 이미
행방불명 됐기에 선조는 자신의 체통을
지키고 왜변은 자신의 책임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그리고 패전의 책임을
좌수군으로 한정하기 위해 이대원을
좌수사에 제수한 것이다.
‘단순히 왜구들을 토벌한 것도 아니고
전라좌수영에서 올린 장계가 사실이라면
이대원의 전공은 신립이 세운
전공에 비할만하다.‘
선조는 신립과 변협이 전라도로 내려가
왜구들을 토벌할 것으로 예상했었으니
이대원에 교지를 받기도 전에 왜구들을
토벌하고 전란을 끝냈다니 이대원에 대한
호기심이 생겼다.
‘직접 만나보면 알겠지 신립과 같은
호랑이인지 아니면 단순히 운이 좋았던
승냥이인지‘
이대원이 호랑이건 승냥이건 간에
선조는 이대원을 자신의 입맛에 맞게
사용할 자신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