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병조판서 정언신 대감
내 대답을 들은 선조의 눈빛이 빛나는 것
같았다.
“오호라 그래 목숨이라도 걸 수 있다.”
“예 그렇사옵니다. 신과 함께 왜구의 창칼에
맞서서 싸운 군사들이며 왜구들에게
약탈당하고 능욕당한 백성들 가운데는
군사들의 가족들과 지인들도 있나이다.
좌수군 군사들은 왜구들을 참살하라는
명령에 기뻐하고 왜선을 향해 주저하지
않고 판옥선을 몰아가는 강병들이니
신이 그들이 아닌 누구를 믿을 수
있겠나이까.“
선조에서 외치다시피 대답한 후
그 자리에서 고개를 숙였다.
‘목숨이라도 걸 수 있다는 말은 과했나.
시험하듯 말하는 선조의 말에 너무
흥분했어. 과했던 것 같아도 어차피
쏟아진 물이고 여기서 약한 모습 보여서
좋을 것은 없을 것 같으니
이대로 밀고 나가자‘
이대로 강하게 나가기로 마음을 먹고 나니
오히려 마음이 편해졌다. 굳게 마음먹고
고개를 들어 선조를 바라보니 선조는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한눈에 봐도 내가 한 말을
되세 기며 머리를 굴리고 있는 것이 꼬투리
잡을 것을 찾고 있는 것 같았다.
“전하 장계에도 올렸으나 전하를 뵙게
되었으니 직접 아뢰겠습니다.
왜구들은 이번에 새로운 화약병기를
가져왔습니다.
승자총통과 비슷한 병기인데 그 위력이
굉장하고 왜구들을 심문한 결과 아군의
총통보다 사용하기도 편리해서 앞으로
왜의 총통을 주의하여야 할 것 같사옵니다.
전하“
“장계는 읽어보았다. 하나 총통은 이미 우리
조선에서도 충분히 보유하고 있으니 왜구들이
총통 몇 정 가지고 있는 것을 걱정할 필요는
없다고 본다.“
선조가 별일 아니라는 듯이 대답하자 나는
한결 진지한 태도로 말했다.
“왜구들의 총통은 휴대하고 다니기가 편리한
것이 그 특징이고 포수가 원하는 때에
정확하게 방포할 수 있으니 승자총통보다
정확하게 적군을 저격할 수 있사옵니다.
좌수영의 전선이 왜의 총통들도 싣고 올
것이니 전하와 조정 대신들 앞에서 왜 총통의
위력을 시험할 수 있도록 윤허해 주소서 전하“
선조에게 부탁하면서도 나는 크게 기대하지
않았다. 다만 대화의 주제를 화승총 이야기로
변화시키고 장수들과 군사들에 대한 신뢰를
묻는 질문이 더 이상 나오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었다.
“좌수사가 그렇게 까지 청한다면 좋다.
총통의 시범을 허한다.“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전하”
의외로 선조가 순순히 화승총의 시범을
허락하자 잠시 당황했다.
‘이게 무슨 일이지? 조선은 임진왜란이
발발하기 이전까지 화승총에 대한
관심이 없었는데‘
“왜의 총통은 왜인들이 방포하는 것인가?.”
잠시 멍하니 있던 나는 선조의 질문에
화들짝 놀라며 급히 대답했다.
“아니옵니다. 전하 소장이 직접 총통을
다룰 것입니다. 포로들을 심문해 왜 총통의
사용방법을 알아냈으니 소장이 직접 시범을
보이도록 하겠사옵니다. 전하“
‘포로들에게 화승총을 줬다가 엉뚱한
일이라도 벌어지면 큰일이지 내가 직접
시범사격을 보여야겠다.‘
“그리하라 과인이 좌수사에게 듣고 싶은
이야기도 많고 묻고 싶은 것도 많지만
벌써 시간이 늦었구나. 오늘 나누지 못한
이야기는 총통의 시범을 보인 후 다시
나누기로 하자 좌수사는 이만 물러가
여독을 풀도록 하라“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전하”
물러나라는 말에 나는 선조에게
다시 한번 절한 후 자리에서 일어나
편전에서 물러났다.
‘선조와의 첫 대면인데 너무 흥분했던 것
같다. 선조와 대신들 앞에서 화승총
시범을 보이게 된 것은 다행인데 그 일
말고는 한 것이 없네. 둔전에 대한
이야기는 꺼내지도 못했고 선조에게서
쌀이나 비단이라도 좀 받아 가면
좋겠는데. 생계도 내던지고 녹도진과
좌수영에서 복무하고 있는 군사들에게
보리라도 좀 나눠주려면 뭐라도 좀
받아가야 할 텐데‘
경복궁을 벗어나기 위해 발걸음을
재촉하면서도 머릿속에서는
이런 생각들이 떠나지 않았다.
‘혼자서 고민해봐야 답이 없는 일들이니
우선은 좀 쉬자 한양에 달리 아는 사람은
없을 것 같고 이운룡 장군도 저녁에나
만날 수 있을 것 같으니 한성부로 가서
밥 먹고 한숨 자자‘
며칠간이나 말을 달린 피로나 풀
생각으로 한성부로 가려던 나에게
관원 한명이 다가왔다.
“전라좌수사 이대원 영감이십니까?”
“그렇소만 누구신가?”
“소인은 병조좌랑 최몽한이라 하옵니다.”
병조의 관원이라면 조선의 국방부
소속이었다.
“반갑소. 그래 병조좌랑께서는 내게 무슨
볼일이 있으시오?“
“병판대감께서 좌수사 영감을 찾으십니다.”
“병판대감께서.”
병조판서라면 국방부장관이다. 국방부장관이
찾는 다는데 가지 않을 수는 없는 일이다.
“병판대감께서 기다리시게 할 수는 없지
어서 안내하시오.”
“따르시지요.”
최몽한이 안내한 곳은 병조의 관아가 아닌
왠 기와집이었다. 최몽한은 기와집의 대문
앞에서 외쳤다.
“이리 오너라.”
잠시 후 문이 열리며 하인 하나가 모습을
드러내자 최몽한은 하인에게 외쳤다.
“전라좌수사 영감이시다. 병판대감을 뵈러
오셨으니 안으로 모셔라“
“예”
“안으로 드시지요. 이곳은 병판대감의
집입니다.”
“알겠소이다.”
안내하는 하인을 따라 집안으로 들어간 나는
사랑방으로 안내됐다.
방 안으로 들어가자 잠시 후 하녀가 다과와
차를 가져왔고 나는 정언신을 기다리며 차를
마셨다.
정인신은 오후가 늦어서야 퇴청한 듯
사랑방으로 들어왔다.
“어서 오시지요. 병판대감”
“자리에 앉게 손님을 불러놓고 기다리게
해서 미안하네.“
말로는 미안하다고 했지만 정인신의 말이나
행동에서 미안해 보이는 기색은 전혀 없었다.
나는 정언신이 자리에 앉기 까지 기다렸다가
천천히 자라에 앉았다.
1527년생인 정언신은 이미 60이 넘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정정했고 목소리도 힘찼다.
문과에 급제한 문신이지만 1582년 니탕개의
난이 일어나자 선조는 정언신을 함경도
도순찰사로 임명해 난을 진압할 것을 명했고
정언신은 신립, 이일, 이순신, 김시민, 이억기
등의 장수들을 이끌고 난을 진압했다.
녹둔도에 둔전을 설치하고 병사들을 주둔시키게
한 것 역시 정언신이었으며 니탕게의 난이
진압된 후 함경도 관찰사로 육진의 방어태세를
점검했다. 병조판서로 승진하기 전에 이미
전라도 도사와 경기도 관찰사를 역임한
정언신은 행정은 물론 군사문제에도 익숙한
실무형 관료였다.
“시장할 테니 우선 저녁부터 먹지 한성에는
어제 올라왔다고 했나? 어디에서 묵고 있나?“
“한성부 객사에서 묵었습니다.”
“갑자기 상경했으니 묵을 곳이 마땅하지
않았겠지 본가는 평택으로 알고 있는데
한성에 친척이 없으면 한성에서 지내는
동안 내 집에서 묵도록 하게 방은 많으니“
“감사합니다. 병판대감”
뜻밖의 호의에 놀랐다. 아무리 병조판서라지만
생판 남인 사람을 자기 집에서 여러 날 묵게
하다니 잠시 후 반주를 곁들인 저녁상이
들어오자 정언신은 손수 주전자를 들어 잔을
채워주었다.
“많이 드시게 왜구들을 토벌하고 좌수영 업무
까지 맡았으니 그동안 정신이 없으셨을 테니“
“감사합니다. 잘 먹겠습니다.”
상에는 흰쌀로 지은 밥이 그릇에 고봉으로
담겨 있었고 쇠고기 무국에 고기산적과
나물 그리고 김치가 올라와 있었다. 판서의
저녁상으로 보기에는 검소해 보일 정도였지만
정성스럽게 만든 음식으로 보였고 음식의 양도
적지 않았다. 정언신이 수저를 드는 모습을
보고 수저를 든 나는 따듯한 국물을 떠 마시는
것을 시작으로 천천히 식사를 시작했다.
정언신을 의식해 고봉밥을 모두 비우고 그릇에
남은 국물을 마시던 나는 정언신의 밥상을
바라보고 놀랐다.
‘조선인들은 현대 한국인들 보다 부식이 적었던
만큼 주식인 밥을 많이 먹었다고 했었지 아무리
그래도 정언신의 나이가 60이 넘었을 텐데 적지
않은 나이에 조선의 기준으로 충분히 고령인
나이인데도 고봉밥과 반찬을 전부 비우다니
대단하구나.‘
상위의 음식을 전부 비운 정언신은 주전자를
들어 잔을 채워주며 말했다.
“잘 드셨는가? 부족하면 말하게”
“아닙니다. 맛있게 잘 먹었습니다.”
내 대답에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인
정언신은 잔을 비우더니 상을 내가게 하고는
자세를 바로 했다.
“오늘 좌수사를 내 집으로 부른 것을 함께
나눠야 할 이야기가 많기 때문이네“
“짐작하고 있었습니다. 말씀하시지요. 대감”
“젊은 친구답게 시원시원하군. 좋아 좌수사가
올린 장계의 내용은 내 알고 있네.
구체적으로 돌산도에 둔전을 설치하려는 목적은
무엇인가?“
“우선은 시산도와 손죽도를 떠나온 백성들의
생계를 위해 밭을 만들려는 것입니다. 또한
둔전을 설치하여 군사들이 교대로 순찰을
돌며 농사일이 바쁜 농번기에는 좌수영의
군사들을 둔전에 투입할 것이니 둔전이
설치되는 섬의 방비가 자연히 튼튼해
질것입니다. 저는 돌산도 뿐만이 아니라
절이도를 비롯해 둔전을 경작할 만한 땅이
있는 섬은 좌수영과의 거리와 환경을 고려해
둔전을 설치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특히 절이도는 섬 안에 넓은 초지가 있어서
목장을 설치했었지만 왜구들의 습격과 관리의
어려움으로 인해 군마들을 철수시킨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절이도에도 둔전을 설치하고 농사일과
순찰을 위해 군사들이 배치된다면
왜구들의 습격을 걱정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둔전이 순조롭게 운영된다면
좌수영의 군량과 군비를 감당할 수 있을
것입니다. 물론 둔전만으로 군량과 군비를
모두 감당할 수는 없겠지만 버려진 땅을
갈아엎어서 곡식과 채소를 심고 바닷물을
퍼 올려서 소금을 굽는다면 군량미 수급과
군비확보에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전라도와 함경도에서 현장을 경험한 정언신
대감은 내 의견을 이해하지 못할 인물이
아니었지만 소금이라는 말에 얼굴을
찌푸렸다.
“둔전의 유용함은 나도 잘 알고 있네 하지만
소금을 굽는 것은 둔전을 만드는 일과는
차원이 다른 일이야. 좌수사도 알고 있을
것이네 소금가마는 왕실 종친들의 주요
수입원이라는 것을 말이야“
“좌수영에 소금을 굽는다고 해도 좌수영에서
직접 소금을 상인들에게 판매하지는
않겠습니다. 군사들의 식량으로 사용하고
군사들이 잡은 생선을 염장하는 목적으로
사용할 뿐 소금 자체를 유통시키는 일은
없도록 하겠습니다. 그래도 안 되겠습니까.
병판대감?“
소금을 판매하지는 않겠다는 말에
정언신은 얼굴에 가볍게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젊은 친구가 보통이 아니군. 좌수사
자네는 명장일 뿐만 아니라
목민관으로써의 재능도 보이는군 그래“
“과찬이십니다. 대감 그만큼 절박하여
사정하는 것입니다.“
“둔전을 설치하는 계획은 주상전하께서
결정하시겠지만 내 긍정적인 방향으로
전하께 아뢰어보겠네 장담할 수는 없지만
좋은 소식을 기대해 보게“
“정말로 감사합니다. 대감”
나는 그 자리에서 정언신 대감에게 엎드려
절했다. 둔전의 설치를 승인받지 못하면
좌수영에서 지내고 있는 주민들의 생계를
해결하는 일부터 당장 걱정인 상황이다.
우선은 둔전이 설치되어야 다른 일도
시작할 수 있었다.
“너무 고마워하지는 말게 이제 부터는
더욱 중요한 이야기를 나눠야 하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