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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우수사 원호 - 수정본
“과찬이십니다. 영감. 육진에서 야인들을
먼저처럼 쓸어버리신 영감의 무용은
소장 역시 잘 알고 있습니다.
소장이야 말로 방어사 영감을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영감이라니 낯간지럽네. 그냥 장군이라
부르시게“
신립은 기분이 좋은 듯 호탕하게 웃으며
친근하게 굴었다.
나는 신립에게 장단을 맞춰주며 천천히
신립을 살펴보았다.
‘역시 장수답게 덩치가 상당하군. 나도
조선인치고는 키가 크고 체격도 좋은
편이지만 신립은 나보다 더 크네
180cm는 되어 보이는데. 어께도 넓고
대충 봐도 어깨와 팔이 전부 근육이야
이미 마흔이 넘었을 텐데 대단하다.‘
신립을 살펴보던 나는 쌀을 싣고 온
전선들을 생각하고는 신립에게 물었다.
“장군 저 전선들은 무엇입니까?
장군께서 타고 오신 전선들입니까?“
“아니 나는 말을 달리는 것을 좋아해
말을 타고 왔네. 저 배들은 전라우수군의
전선들이네 주상전하께서 전라좌수군에
쌀을 내리셨네. 전라감영과 전라병영에
비축되어 있던 쌀을 우수군의 전선으로
운반해왔지.“
“아예 그렇군요.”
나는 태연하게 대답했지만 선조의 속셈이
무엇인지 궁금했다.
‘선조가 좌수군 병사들에게 쌀을 내리겠다고
했으니. 쌀을 보낸 것은 알겠는데 왜 하필
전라우수군을 통해 보냈지 그냥 좌수군
전선들을 부르거나 조운선으로
수송하지 않고‘
“선전관이 이미 한성을 출발했다고 하니
내일은 좌수영에 도착할 것이야
장졸들에 대한 포상은 내일 어명을 받은
후에 하기로 하고 오늘은 같이 술이나
한잔 하세. 우수사도 좌수사 자네를
기다리고 있으니. 오늘은 셋이서 함께
술이나 마시지.“
전라우수사 원호가 기다리고 있다는 말에
나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예 어서 가시지요.”
전라우수사 원호는 1533년생으로
1546년생인 신립보다 13살이나 많았지만
둘은 같은 해인 1567년 무과에 급제했고
1583년에 일어난 니탕개의 난에서는 함께
싸운 전우였다.
신립과 함께 동헌으로 향하자 흰 수염을
길게 기른 노장이 동헌 주변을 거닐고
있었다.
“원수사 여기 이수사가 왔네.”
신립이 먼저 나서서 원호에게 말을 걸었다.
“이수사 만나서 반갑소이다. 나는 전라우수사
원호요.“
“전라좌수사 이대원입니다.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우수사 영감“
“영광은 무슨 전라좌수군이 왜구들을
무찔러 준 덕분에 이번 전란이 신속히
마무리된 것을 잘 알고 있소.
수고하셨소이다. 좌수사 영감“
내가 원호와 주고받는 인사말이 길어지자
신립이 나섰다.
“자 이야기는 자리에 앉아서 천천히 하도록
하고 우선은 들어가 술이나 한잔 하세
저녁때도 다됐는데 셋이서 술상을 앞에 놓고
좌수사의 무용담을 듣지.“
신립이 이렇게 나서자 어쩔 도리가 없었다.
내가 앞장서 이들을 방으로 안내했고
원호도 신립의 뒤를 따라 방으로 향했다.
상석을 신립에서 양보하고 아전들에게
술상과 저녁상을 준비하도록 한 후
자리에 앉은 나는 원호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신립을 보며 생각에 잠겼다.
‘전란이 끝난 지도 얼마 되지 않았는데
더구나 방어사로 내려온 장수가 술을
찾다니.‘
술상이 나오자 신립은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비록 초면이지만 이수사 같이 용맹한
장수를 만났으니 내 기쁘기가 그지없네.
이수사가 나 그리고 원수사와 벗이
된 것도 기념하고 이수사가 왜구들을
물리친 것을 축하하는 자리라고 생각하고
함께 잔을 드세“
신립의 말에 나는 놀라서 대답했다.
“아닙니다. 제가 장군과 벗이라니요.
저는 신립장군과 우수사영감을 평소에도
존경해왔습니다. 존경하는 분들과 함께
자리하고 저에게는 큰 영광입니다.“
“겸손이 너무 과하시네. 무엇이든지
과하면 좋지 않은 법이니 오늘은 그만하고
함께 잔을 드세“
내 말이 마음에 들었는지 과하다는 말과는
달리 신립은 웃는 얼굴로 잔을 들었다.
신립에 이어 원호와 나도 잔을 들면서
저녁식사를 겸한 술자리가 시작됐다.
신립은 무장답게 말술이었다.
술 주전자를 세 번이나 비웠다가
다시 채워졌고 기어이 네 번째
주전자를 비우고 나서야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무래도 내가 몸이 허해진 것 같군
겨우 이정도 마셨다고 고단하게 느껴지니
말이야. 미안하지만 오늘은 내 먼저
일어나겠네. 원수사와 이수사는 천천히
즐기시게.“
“예 장군”
나는 황급히 장졸들을 불러 신립을 객사로
안내하도록 했다.
신립은 기분이 좋은지 객사로 가는 중에서
큰소리로 웃으며 장졸들에게 말을 걸었다.
그렇게 신립이 일어나 자리가 어색해질
무렵 전라우수사 원호가 말을 걸었다.
“신장군을 이해하게 워낙 호탕하고 시원한
성격이라 저러는 것이니“
“아닙니다. 저는 평소에도 원수사 영감과
신립장군을 존경해 왔습니다.“
내 대답을 들은 원호는 가만히 나를 바라보며
웃었다.
“좌수사가 왜구들을 물리치고 이번 전란을
끝냈다는 소식을 듣고 어떻게 일개 만호가
전란을 끝냈었는지 궁금했었는데 내가
오늘에서야 궁금증을 풀었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원호는 나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사람들은 자네가 용감하게 싸워서
왜구들을 물리친 것으로 알고 있겠지.
아 자네라고 부르는 것을 이해하게
품계도 같고 나이는 내가 아버지
연배이니.
소문에는 자네가 항우 같이 용맹하고
흔들리는 배에서도 왜구를 쏴서 맞추는
명궁이며 직접 적선에 뛰어들어 왜구들의
우두머리를 제압했을 정도로 검술에도
능하다고 하더군.
소문을 듣고 나도 그렇게 생각했었네.“
원호의 말을 들으며 나는 표정관리에
여념이 없었다.
‘뭐야 이거. 소문이 그렇게 났다고?
찬란하도록 유치하게 소문이 났네.
원호의 표정을 보니 웃으면 안 될 것
같은데‘
“우수사 영감 모두 헛소문입니다.”
“그래 모두 헛소문인 것을 알겠네.
자네를 보니 알겠어. 자네에 대한 소문은
모두 헛소문이었어.“
원호는 진지한 표정으로 나를 보며 말했다.
‘아니 이게 무슨 말이야?’
“바로 지금 자네의 모습 자네의 표정을 보면
알 수 있네. 자네는 용력과 무예실력만 믿고
적진에 뛰어드는 장수가 아니라는 것을
말이야.“
나는 온몸에 냉수마찰을 한 것처럼
소름이 돋았다.
“우수사 영감께서는 저를 어떻게
보셨습니까?”
내 질문에 원호는 가소롭다는 듯이
나를 바라보며 대답했다.
“오늘 아주 잘 보았네. 자네가 나와
신립장군을 쉴 세 없이 바라보며
판단하는 것을 말이야.
자네의 모습을 보면 자네가 어떻게
왜구들을 무찔렀는지 알겠네.
아마도 용맹에 의지하지 않고 지략을
펼쳤겠지. 오늘 자네의 모습을 보니
4척의 전선으로 8척의 왜선을
때려잡았다는 자네의 전공도 이제는
이해가 가는군.
칭찬하는 것이니 오해하지 말게
조선에는 자네 같은 장수도 필요해 물론
신립 같은 맹장도 필요하지만 말이야.“
나는 원호의 대답을 들으며 나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거 뭐야 조선인들 특히 대감들은 다들
관상을 보시나. 어째 이양반도 속에
능구렁이가 한 마리가 들어있는 것 같네‘
그런 내 모습을 바라보던 원호는
느닷없이 나에게 말했다.
“역시 좌수사 자네 인재는 인재로군.”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우수사 영감”
어느새 심신이 지친 나는 이제는 더 이상
놀랄 일도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원호는 내 예상을 뛰어넘었다.
“자네같이 어린 나이의 장수가 오늘 같은
일을 겪은 다음에는 우쭐거리거나 아니면
겁을 먹고 지나친 겸손을 펼치는 것이
보통이지 그런데 좌수사 자네는 이번에도
다른 사람들과는 전혀 다른 반응을 보이는군.
마치 안심했다고 느끼는 것 같군.
내가 아직도 자네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모양이야.“
“아닙니다. 영감. 영감께서 저를 너무 높이
평가해 주셔서 놀란 나머지 얼이 나가
있었습니다. 안심하다니요. 아닙니다. 영감.“
이번에는 아까보다 더욱 놀랐다.
‘원호. 임진왜란 초기에 전사하는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이 정도로 날카롭고 섬세한
장수였단 말인가. 진주가 진흙 속에 빛을
숨기고 있었구나.‘
정해왜변 당시 이대원과 녹도수군을 물리친
왜구들을 남해안 일대를 약탈했을 뿐만
아니라 전라우수군을 기습공격하고 전선
4척을 탈취해 갔다. 전란이 끝난 후
전라우수사 원호는 패전의 책임을 지고
파직 당했고 강진으로 유배를 갔다가
유배에서 풀린 후 고향으로 돌아갔다.
고향에서 조용히 지내고 있던 원호는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지역의 의병과
관군들을 수습해 왜군이 진격하는 길목에
진을 치고 왜구들을 저지했고 그 공으로
강원도 조방장에 임명됐다.
강원감사의 명으로 진군하던 중 왜의
대군(왜군 중에서도 전투력이 막강하기로
유명한 시마즈의 군대였다.)을 만나
전투 중에 전사하고 만다.
내가 원호에 대해 놀라고 있었을 때 원호는
천천히 잔을 들어 술을 한잔 마시고는
아까와는 다른 인자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이제야 좌수사 자네가 사람처럼 보이는군.
알고 있나 자네는 신립 장군을 바라볼 때도
방금 전까지 나를 바라볼 때도 계속 염탐하고
살피는 눈이었어. 이제야 사람 같은 눈을 하고
나를 바라보는군.“
나는 당황한 나머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정말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그런 내 모습이 마음에 들었는지 원호는
이전보다 여유있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이제야 자네에게 어른 노릇을 할 수 있겠군.
좌수사 내말을 들어보겠나?“
“우수사 영감 말씀하시지요. 경청하겠습니다.”
원호는 가볍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그래 내가 자네보다 인생도 더 오래 살았고
관직에도 더 오래있었으니 무관 선배의
조언이라고 생각하고 듣게 좌수사 자네는
너무 빨리 당상관에 올랐네. 붉은색 전포를
입고 천군만마를 호령하는 것은 무관이라면
누구나 소망하는 것이지만 자네는 불행히도
너무나 빨리 승진했어. 그것이 자네의 불행이야
알겠는가?“
“어찌해야 할지 조언을 구합니다. 영감”
당황하지도 않고 조언을 구하는 내 모습에
원호는 껄껄 웃으며 말했다.
“역시 인재는 인재야 다른 장수였다면
빨리 승진한 것이 자랑이지 왜 불행이냐며
노발대발 했을 텐데. 좋아 언제 어떤 방식이
될지는 모르지만 자네가 좌수사직에서
내려올 때는 결코 좋은 모습은 보이지
못 할 것이야. 세상일이 그래. 심하면
파직 당할지도 모르고 파직이 아니라도
품계는 몇 단계 아래로 떨어지겠지
좌수사로 제수되기 이전에 만호였었지?
만호보다도 강등되기 쉬울 것이야.
그 이유는 알겠는가?“
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짐작하고 있었습니다. 길어도 내년에는
좌수사 자리에서 물러나게 되지 않을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역시 인재야 내 20년간 관직에 있으면서
자네같이 침착하고 냉정한 장수는 처음보네
특히 자신의 자리를 이렇게 정확히 보는 것은
자네보다 나이와 경륜이 많은 장수들도
쉽지 않은데 말이야.“
나에 대해서 감탄을 하던 원호는 잠시 후
진정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자네 같은 인재가 뜻을 펼치지 못하게 되는
것은 조선에도 불행한 일이라고 생각되어
말해주는 것이니 오해는 하지 말게 알겠는가.?“
“예 사심 없이 듣겠습니다. 부디 우수사 영감의
조언을 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