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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여립 - 수정본
“어찌할까요? 아버님”
옥남의 질문에 정여립은 웃으며 말했다.
“어찌해야 할 것 같으냐? 이런 글을 받고도
곡식을 보내지 않으면 왜란을 겪은 피난민들을
외면했다는 소리를 듣게 될 것이다.
서신의 내용이 맹랑하나 하지만 피난민들을
구휼하는데 쓰일 것이니 곡식을 보내는 것이
좋겠구나.“
“쌀을 보낼 준비를 하겠습니다. 쌀 100섬이면
좌수사도 불만은 없을 것입니다.“
“아니다. 기왕에 보낼 곡식인데 인색하다는
소리를 들을 필요는 없지“
정여립의 말에 옥남은 놀라서 물었다.
“쌀 100섬이 적다는 말씀이십니까?
그럼 얼마나 보내야 한다는 말씀이십니까?
아버님“
“피난민들이 굳이 쌀밥을 찾겠느냐?
피난민을 구휼한다고 했으니 보리도
괜찮을 것이다.
보리로 1000섬을 준비하거라.“
“1000섬을 말씀이십니까?”
정여립의 말에 정옥남은 놀랐다.
아무리 보리라고 해도 1000섬은
적은 양이 아니었다.
“좌수사가 나에게만 서신을 보냈겠느냐?
호남지역에서 이름난 부자들에게는
모두 서신을 보냈을 것이다.
곡식을 보내지 않은 이는 인색하다는
소리를 듣게 될 것이고 적게 보낸 이는
쩨쩨하다는 평가를 받게 될 것이다.
기왕에 보내기로 마음먹었으면 넉넉하게
보내고 인심이 후하다는 소리를 듣는 것이
좋겠지.“
정여립은 관직에서 물러났지만 아직도
많은 사람들을 거느리고 있었고 인근지역에
명성이 자자한 유지였다.
그런 정여립은 자존심 때문에라도
인색하다는 소리를 들을 수 없었다.
“예 알겠습니다. 아버님 곡식을
준비하도록 하겠습니다.“
정옥남이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하자
정여립이 옥남을 잡았다.
“아니다. 이번 기회에 내가 좌수영으로 가
직접 좌수사를 만나보는 것이 좋겠다.
좌수군이 이번에 왜구들을 물리쳤으니
좌수사와 좌수영의 군사들도 위로하는 것이
좋을 것 같구나.“
좌수영으로 직접 행차하겠다는 정여립의 말에
옥남은 잠시 할 말을 찾지 못했다.
“내가 직접 가보는 것이 좋겠어. 보리 외에도
쌀 300섬과 무명 100필 그리고 소 5마리와
돼지 10마리를 준비 하거라. 술도 잘 빚은 술로
몇 병 준비하고“
정옥남은 정여립의 말에 너무 놀라 말까지
더듬거리며 대답했다.
“전라좌수사는 아직 어리고 관직에 들어선지
얼마 되지도 않는 애송인데 아버님께서 직접
만나실 필요가 있으십니까?
아버님 소자가 다녀오도록 하겠습니다.“
옥남의 대답을 들은 정여립은 호통을 쳤다.
“이런 못난 놈”
정여립이 옥남에게 호통을 치는 것은
드문 일이었다. 정여립의 호통에
주눅이든 옥남은 기어가는 목소리로
정여립에게 물었다.
“왜 그러십니까? 아버님”
“네 눈에는 좌수사가 약관을 간신히 넘긴
애송이로만 보이느냐?“
“그럼 애송이가 아니라는 말씀이십니까?”
옥남이 아까보다는 큰 목소리로 묻자
정여립은 한심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좌수사는 그 나이에 이미 무과에 합격해
전란 전까지 만호의 지위에 있었다.
그것만 봐도 능력있는 무장이라는 것을
알 수 있지 더구나 일개 만호가 좌수사가
왜구에게 전사한 전란을 수습하고 왜구들을
물리쳤다. 내 말대로 약관을 겨우 넘긴
나이에 너라면 어떻겠느냐 그렇게 할 수
있겠느냐?“
정여립의 질문에 옥남은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정여립은 그런 옥남을 바라보고 혀를 차며
말을 이었다.
“그리고 좌수사는 엄연히 정3품 당상관이다.
나이는 비록 어려도 정3품의 당상관을
애송이라고 할 수 있겠느냐“
“소자가 어리석었습니다.
아버님 용서해 주십시오.”
옥남이 엎드려 빌자 정여립 사나운 눈초리로
옥남을 바라보며 말했다.
“못난 놈. 앞으로 나이만 보고 사람을
평가하지는 말아야 할 것이다. 알겠느냐?“
“예 아버님”
“좌수영으로 갈 것이니 차질 없이
준비하도록 하거라.
너도 나와 같이 갈 것이다.“
“예 아버님”
옥남이 방을 나간 후에도 정여립은
못마땅한 듯 혀를 찼다.
잠시 후 마음이 진정된 정여립은 정언신
대감이 보낸 서신을 펼쳐들고 천천히
읽어 내려갔다.
그 글에는 정언신 대감이 한성에서 이대원을
만난 이야기가 적혀 있었다.
‘정언신 대감이 새파란 젊은이를
이렇게 까지 호의적으로 보시다니 흔치않은
일이야.
비록 나이는 어리지만 나라를 지키겠다는
마음이 기특하고 부하를 아끼는 장수이며
나이에 걸맞지 않게 생각이 깊고 능력도
있으니 좌수사를 맞기기에 부족하지 않은
장수라니 전라좌수사 이대원 어떤 인물인지
궁금하군.“
좌수영에 구휼미를 보낼 생각을 하다가
정언신이 보내온 서신을 떠올린 정여립은
직접 좌수영으로 찾아가 이대원을 만날
생각을 했다. 갑자기 결정한 일이지만
차라리 잘 된 일이라고 생각도 들었다.
‘아무리 관직에서 물러났지만 좌수사와
아무 일면식도 없는 내가 갑자기
좌수사를 찾아가면 사람들의 오해를
살 수 있어. 이미 관직에서 물러난
사람이 군사를 지휘하는 병마절도사나
수군절도사를 찾아가는 것 자체가
위험한 일이지
더구나 좌수사는 어린 나이에 당상관에
올랐으니 남들의 시기를 받거나 모함을
받기가 쉽지 그런 좌수사를 아무 용건도
없이 찾아간다면 나까지 오해를 받을 것이
분명해. 하지만 좌수사가 먼저 구휼미를
청했으니 구휼미를 가져가면서 좌수영을
방문하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지
좌수영을 방문한 김에 왜구들을 물리친
좌수군을 위로하는 것 역시
사대부로써 능히 해야 할 일이고
말이야.‘
정여립이 직접 좌수영을 방문할 생각을
하고 있었을 때 나는 좌수영에서
도자기를 굽는 도공들을 만나고 있었다.
내 명령에 따라 이언세가 찾아온
도공들이었다.
조선시대 전라도 영암과 강진은 관요와
민요가 산재해 도자기의 제작이 활발하던
지역이었고 특히 강진은 고려시대 청자를
제작하던 지역이었다.
고려에서 조선으로 넘어오면서 조선에서
생산되는 자기는 백자가 주를 이뤘지만
청자 역시 제작되고 있었다.
한국에서 역사책에 빠져있었을 때
조선에서도 17세기까지 청자가
제작되었다는 기록을 봤었던 나는
이언세에게 실력 좋은 도공들을
찾아볼 것을 명하면서 특히 청자를
제작하는 도공을 찾아올 것을
강조했었다.
이언세는 강진과 영암일대 관요와 민요를
수소문해 청자를 제작하는 도공과 자기를
만드는 도공들 중 실력이 우수한 이들을
찾아 좌수영으로 데려왔다.
나는 내 앞에 앉아 있는 도공들을 바라보며
물었다.
“너희 중에 청자를 만드는 이가 있다고
들었다. 누구냐?”
내 앞에 앉아 있는 도공들 중에서
가장 나이 들어 보이는 백발의 도공이
대답했다.
“소인입니다. 영감마님. 소인이 청자를
굽고 있습니다.”
“언제부터 청자를 만들었는가?”
“소인 철들기도 전에 아비의 일을 도우며
청자를 구웠습니다. 소인의 아비도 자기를
구웠었고 소인의 할아버지도 자기를
구웠습니다.“
도공의 대답을 들으며 나는 얼굴에 미소가
지어졌다.
‘3대째 청자를 만들었다니 실력은 믿을 수
있겠구나.‘
“가져온 청자가 있느냐?
네 솜씨를 보고 싶구나.”
“소인이 만든 청자 이옵니다.”
도공은 병사의 도움을 받아 상자에서
청자를 꺼냈다.
도공에게서 청자를 받아든 나는
넋을 잃고 청자를 바라보았다.
‘아름답다. 모양이나 형태는 내가 알던
고려청자와는 좀 다르지만 아름다워‘
백자와는 다른 푸른빛이 청자를 더욱
빛나 보이게 만들었다.
‘여기서 조금만 더 광택을 낼 수 있으면
보석으로 만들었다고 해도 믿을만한
작품이다.‘
나도 모르게 들뜬 가슴을 진정시키며
조심스럽게 청자를 내려놓은 나는
도공에게 물었다.
“청자의 모양은 내가 원하는 대로
만들 수 있느냐?“
“소인 청자를 빚고 굽는 일로 일생을
보냈습니다. 어떤 모양이라도
영감마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만들 수 있습니다.“
도공의 대답을 들으며 나는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혹시 청자의 색을 더욱 진하게 만들
수는 없느냐?”
“그것도 가능합니다. 말씀하시는 대로
만들어 바치겠습니다.“
나는 나도 모르게 입이 길게 찢어졌다.
‘대박이다. 이건 대박이야 청자를
일본상인이나 유럽 상인들에게 보여주면
초석과 조총이 문제가 아니야
데미컬버린과 갤리온도 구입할 수 있겠다.‘
나는 간신히 표정을 관리하고 도공에게
물었다.
“한 달 동안 청자를 최대한 많이 만들어
오너라. 이것 보단 조금 작게 만들어도
좋단. 단 튼튼하게 만들어야 하고 색은
더 진하게 만들어야 한다.“
“소인과 소인의 자식 놈들 셋이 청자를
굽고 있습니다. 영감마님께서 말씀하신
데로 청자를 구워오겠습니다.“
‘도공과 자녀 셋이 청자를 만들고 있다고?
그럼 겨우 4명이잖아. 안 돼 너무 적어
만드는 사람이 적으면 청자제작 기술이
단절될 수도 있고‘
“청자는 몇 개를 만들어오던지 내가
다 사들일 것이다. 대가는 쌀이든지
면포든지 원하는 것으로 주마.
혹시 일손이 더 필요하지는 않느냐?
내가 일꾼을 붙여주면 청자를 만드는데
도움이 되겠느냐?“
“일손을 붙여주시면 청자를 굽는 일이
수월하기는 할 것입니다. 청자를 구울
장작도 패야하고 청자를 빚을 흙도
날라야 하니 힘쓸 일은 많습니다.“
도공의 대답에 나는 속으로 잘 됐다고
외쳤다.
“좌수영에 속한 공노비 중에서 젊고
힘 좋은 자로 두 명을 보내주마 좌수영에
속한 노비이니 다치지만 않도록 신경 쓰고
밥 먹는 것과 잠자는 것만 보살펴 주거라
무슨 일이든 네 마음껏 일을 시키고
재주가 있는 것 같거든 청자 만드는 일도
가르쳐 보거라.“
“감사합니다. 영감마님”
일꾼을 보내주겠다는 말에
도공은 절을 하며 감사 인사를 했다.
청자를 만드는 도공과 이야기를 마친 후
다른 도공들과도 이야기를 나누었다.
청자를 만드는 이 외에 다른 이들은
백자를 만드는 도공들이었다.
이들이 만든 백자도 살펴보았다.
청자보다 화려해 보이지는 않았지만
희고 깨끗한 느낌을 주는 것이
청자와는 다른 매력이 느껴졌다.
‘이것도 대박이다. 청자와 백자를 유럽
상인들에게 보여주면 물건이 없어서
못 팔 것이 분명해. 자기만 수출해도
돈 문제는 걱정 없겠다.‘
나는 애써 침착한 표정을 지으며 그들에게
내가 그린 그림을 나눠주고 그림의 모양대로
자기를 만들어 올 것을 명령했다.
“너희도 마찬가지로 한 달 동안 최대한 많은
자기를 만들어 오너라. 몇 개롤 가지고
오던지 모두 내가 살 것이며 대가는 후하게
지불할 것이다. 자기를 만드는 데 필요한
것이 있으면 지금 말하라. 양식이 필요하면
쌀을 내주고 일꾼이 필요하면 노비를 보내
줄 것이다.“
내 말을 들은 도공들은 놀란 표정을 지었다.
아마도 나 같은 높으신 분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이든지 말해보라는 파격적인 대우를
받은 것은 처음이었을 것이다.
“괜찮으시면 저희도 일손이 필요합니다.”
“맞습니다. 장작도 패야 하고 흙도
골라야 하니 일손이 있으면 자기를
더 많이 구울 수 있습니다.“
잠시 고민하던 도공들도 일손을 보내줄
것을 요청했다.
“좋다. 너희 모두에게 노비를 각각 2명씩
보내도록 하겠다. 너희의 일을 돕겠지만
그들은 좌수영 소속의 노비인 것을 잊지는
말거나. 너희 모두에게 쌀 한 섬씩과 면포
두필씩을 내릴 것이니 가져가도록 하고
한 달 후에 자기를 가져오는 것을 잊지
말거라“
도공들은 일제히 엎드려 절하며 알겠다고
외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