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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리 영감 - 수정본
좌수영에서 갑자기 돼지 멱따는 소리가
울리자 경계근무를 서고 있던 병사들은
기대감을 감추지 못했다.
“오늘 돼지 잡나?”
“왠 돼지야? 저녁 밥상에는 고깃국이
올라오겠네.“
“비계라도 국에 건더기 좀 들어있었으면
좋겠네.“
“따듯한 고깃국에 탁주도 한잔 있었으면
좋겠는데“
곧 상이 차려졌고 고기가 준비되는 동안
나물과 김치를 안주로 나는 정여립과
술잔을 기울였다.
술잔을 나누는 동안에도 나와 정여립은
쉬지 않고 대화를 나누었고 나는 정여립의
학식과 박식함에 놀랐다.
‘정여립은 통찰력이 뛰어났고 한번 보고 들은
것은 잊는 법이 없었다고 했지. 과연 대단한
인물이다.‘
시간이 넉넉하다면 천천히 정여립과 친분을
쌓고 싶었지만 애석하게도 나에게도
정여립에게도 시간이 별로 없었다.
‘나는 늦어도 4월에는 고토열도를 정벌해야
한다. 고토열도를 정벌한 이후에는 어떻게든
군사를 모아 북해도를 차지해야 하고
북해도를 점령할 군사를 모을 때 정여립의
도움을 받을 수 있으면 한결 일이 쉬워질 것
같은데.‘
정여립의 재력과 배포는 이미 확인했다.
보리라고 하지만 1000섬이나 되는 곡식을
쉽게 내줄 정도의 재력이라면 흔히
말하는 만석꾼 이상의 부를 소유하고
있을 것이 분명했다.
‘정여립이 거느리고 있는 대동계의
인원이 1000명에 달한다고 했지
대동계원들 중에서 장정들만 뽑아
훈련시켜도 큰 힘이 될 것 같은데‘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정여립이 지닌
부와 세력이 탐이 났고 정여립이 죽고
난 후 대동계가 소멸하는 것이 아까웠다.
‘어차피 이대로 시간이 흐르면 정여립은
2년 후 죽는다. 이대로 한번 질러보자‘
마음을 정한 나는 정여립의 잔에 술을
따르며 지나가는 말처럼 물었다.
“죽도선생께서는 우부승지를 지내신
이원익 영감을 아십니까?
“오리(이원익의 호)영감 말씀이시오.?
알다마다. 비록 관직에서 물러났지만
오리영감이야 말로 초야에 묻혀
지내기에는 아까운 사람이오. 그런데
좌수사는 오리 영감을 어찌 아시오?”
“소장이 비록 무과 출신이지만 오리
영감의 학식과 인품은 익히 들어왔습니다.
죽도선생과 함께 오리 영감을 존경해
왔지만 아직 기회가 되지 않아 연을
맺지는 못하고 있습니다.“
내 대답을 들은 정여립은 껄껄 웃으며
말했다.
“역시 좌수사는 사람을 보는 눈이 있으시오.
그 나이에 정3품 당상관에 오른 이유가
있었소.“
잔에 든 술을 들이마신 정여립은 나를
보며 말했다.
“오리 영감이야 말로 초야에 묻혀
지내서는 안 되는 인물이오.
그런 인물을 썩히고 있으니 조정에는
그렇게도 사람 볼 줄 아는 사람이 없는지“
정여립의 말에 맞장구를 쳐주던 나는 일부러
침착한 목소리로 말했다.
“너무 염려마시지요. 죽도선생 올 봄
평안도에 역병과 가뭄이 이어지면 아무리
사람 보는 눈이 없는 조정이라도 어떻게
오리 영감을 아니 쓸 수 있겠습니까?
오리 영감께서 평안도로 올라가시면
평안도를 평안하게 하실 것 아닙니까.“
내 말을 들은 정여립의 눈빛이 날카롭게
변했다. 잔을 내려놓은 정여립은
아무 말도 없이 날카로운 눈으로 나를
노려보았다.
나는 그런 정여립의 눈빛을 받으며
태연하게 잔을 내려놓고 말했다.
“만약 평안도에 돌림병이 창궐하다면
말입니다. 올해는 날씨가 가물 것 같으니
평안도 뿐만 아니라 황해도와 이곳
전라도도 흉년을 면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이러한 때에 돌림병이 창궐한다면 특히
평안도는 사람살기 어려운 곳이 되지
않겠습니까.“
말을 마친 내가 정여립을 바라보자
정여립은 계속 말해보라는 듯이
나를 노려보았다.
‘이양반도 포스가 장난 아니네.
이 자리에서 뒷감당 잘못하면
정여립과의 관계는 영원히 끝나겠는데
어떻게든 수습하든가. 아니면 차라리
내가 정여립을 고발해 정여립의 난을
일으키는 수밖에.‘
마음을 독하게 먹은 나는 정여립을
바라보며 말했다.
“만약에 말입니다. 죽도선생. 올 봄에
평안도에 가뭄과 돌림병이 돌고
오리영감이 안주목사로 안주와 평안도의
백성들을 구제하신 다면 소장에게
선생의 시간을 허락하시겠습니까?“
“언제 얼마나 말인가?”
정여립의 눈빛은 날카로웠지만 목소리는
눈빛과 다르게 온화하고 부드러웠다.
역시 보통이 아니라고 생각하며
최대한 침착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오리영감이 안주목사에 제수되셨다는
소식이 들리면 소장이 기회를 봐서
죽도선생을 찾아뵐 것입니다.
소장에게 한시진만 시간을 주십시오.
한 시진 동안 묻지도 따지지도 마시고
소장이 하는 이야기를 들어주시기만
하면 됩니다.“
“공무에 바쁜 좌수사가 어찌 서생인
나를 찾아오시겠나. 그와 같은 소식이
들리는 대로 내 친히 좌수사를
찾아오겠네.“
“감사합니다. 죽도선생”
“나야말로 좌수사에게 큰 깨우침을
얻고 가네.”
말을 마친 정여립은 이미 자리가 끝났다는
듯이 자연스럽게 자리에서 일어났고 나는
그 모습을 보며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역시 대단히 스스로 찾아오겠다고 해서
나의 방문을 차단했어. 주도권을 잃지
않겠다는 생각이겠지. 예상하지 못했던
상황이었을 텐데 대화를 마무리 지으면서
자연스럽게 자리에서 일어날 구실을
만드는 것을 보니 정말 대단한 사람이구나.‘
나는 웃는 얼굴로 일어나 정여립과 정옥남을
배웅했다.
배웅하면서 보니 소와 달구지를 끌고 온
장정들의 생김새가 일반 하인들 같지가
않았다.
‘딱 봐도 단련된 사람들이다.
손에는 굳은살이 보이고 옷으로
가려졌지만 팔과 다리도 근육질로
보인다.
하인들이 아닌 대동계원들인가?‘
내가 계원들을 살피는 것을 눈치 챈
정여립은 가볍게 웃으며 옥남에게
물었다.
“좌수영으로 끌고 온 달구지가 몇 대며
소가 몇 마리냐?“
“달구지가 14대에 소는 14마리입니다.”
“소 5마리는 좌수사에게 드리기로 했으니
9마리가 남는구나. 달구지와 함께 남은
소들도 좌수사께 드리고 가겠소이다.
좌수사 영감 필요한 곳에 쓰시오.“
“감사합니다. 죽도 선생 다음에 좌수영을
방문하시면 제가 성심성의껏 대접하도록
하겠습니다.“
정여립을 배웅하며 나는 정여립의 처세에
감탄을 금하지 못했다.
‘이미 적지 않은 재물을 주었으면서도
달구지와 소를 9마리나 더 놓고 가다니.
그것도 좌수영을 떠나기 직전에. 이 정도
선물까지 받았으니 이후에 나와 정여립의
사이가 벌어진다면 세상 사람들은 정여립이
좌수사에게 많은 선물을 주며 격려했지만
어린 좌수사가 싸가지가 없어서 정여립과
멀어졌다고 생각할 것 같은데 소 9마리를
놓고 갈 것을 즉흥적으로 결단하는 결단력과
재력도 대단하지만 선물을 주는 방법과
주는 시기 까지 그 모든 것을 계산한 것
같아 더 대단하게 느껴진다.
정여립 가능하면 적대하고 싶지 않은
사람이다.‘
좌수영을 벗어난 정여립 역시 말을 타고 가는
동안 좌수사를 떠올렸다.
‘재물에 대한 욕심이 많은 사람 같지는
않은데. 마지막에 소와 달구지를 놓고
가겠다고 했을 때 반응은 뭐랄까.
재물이 생겼다고 좋아하는 것 같지도
않고 너무 많이 받았다고 부담스러워 하는
것 같지도 않으니 도대체 무슨 생각이지.
좌수사의 표정을 보니 내가 왜 소와
달구지를 놓고 가겠다고 했는지 알겠다는
것 같았어. 나이가 이제 고작 스물 둘에
불과한 애송이가 하는 짓은 닳고 닳은
대신들 같으니 상대하기 어렵군.
그리고 다시 좌수영을 방문하면 성심성의껏
대접하겠다니 내가 다시 좌수영에 온다고
확신하는 것 같은데 설마 좌수사가 말한
잠꼬대 같은 이야기가 실제로 이루어진다는
말인가.‘
정여립은 집으로 돌아가는 내내
전라좌수사와의 대화를 떠올리며
생각에 잠겼다.
정여립이 좌수영을 완전히 떠나자 나는
호기롭게 외쳤다.
“돼지 3마리를 잡아 좌수영의 군사들에게
고깃국을 먹여라. 군사들이 먹고 힘내라고
주고 간 돼지이니 사양할 것 없다.
절이도에도 돼지 2마리를 보내 피난민들과
군사들이 고깃국을 먹을 수 있게 하고
돌산도에도 돼지 2마리를 보내 포로들과
군사들에게도 고깃국을 먹여라.
죽도 선생이 가져온 곡식과 제물은 곳간에
잘 넣어두고 문을 단단히 잠그도록 하라.
소와 남은 돼지들은 외양간에 넣어두고
잘 보살피도록 하라“
“예이~”
돼지 7마리를 잡으라고 했지만 돼지
3마리가 남았고 소가 14마리가 생겼으니
이것만으로도 큰 재산이었다.
군사들은 신이 나서 소를 외양간으로
몰아갔고 돼지 멱따는 소리가 요란하게
들렸다.
명령을 내린 나는 기분 좋게 방으로 들어갔다.
‘됐다. 정여립을 내 편으로 만든다면 여러 가지
문제가 해결될 것 같다. 정여립이 조정의
대신들과 서신을 주고받으며 친분을 유지하고
있으니 정여립을 통해 조정과 선조의 동태를
파악할 수 있고 재력도 대단한 것 같으니
임진왜란을 대비하거나 북해도 정벌을 준비하는
데도 큰 도움이 될 것 같다. 정여립의 재력과
유럽 상인들과의 도자기 무역만 성공적으로
진행되면 앞으로 돈 걱정은 안 해도 될 것 같다.
정여립을 따라온 계원들을 보니 대동계도
단순한 친목모임이 아닌 정여립의 사병성격을
가진 것 같고 계원들을 동원하고 정여립의
재력과 영향력을 동원하면 북해도를 정벌한
군사를 모집하는 일도 의외로 쉽게 해결될지
모르겠어.‘
정여립이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나는 바람에
깊은 대화는 나누지 못했지만 나는 정여립이
다시 찾아올 것을 확신했다.
‘정해년 4월 안주에 역병과 가뭄이 들어
이원익이 안주목사로 제수되고 이원익 영감이
조정으로부터 곡식 1만석 지원받아 백성들을
구휼한 것은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된 사실이다.
내가 조선시대로 오면서 역사에 조금은
영향을 끼쳤겠지만 천지지변에 까지
영향을 끼치지는 않았을 테니 안주에는
전염병이 발발할 것이고 이원익 영감은
안주목사로 제수되겠지.‘
나는 정여립이 4월에는 나를 찾아올 것을
확신하며 기분 좋게 웃고 있던 중 이원익을
떠올렸다.
‘오리 이원익 영감. 이원익도 대단한 사람이지’
1547년 생으로 정해년인 올해 딱 마흔이 되는
이원익은 1569년 과거에 급제해 관직에 들어선
이후 황해도 도사, 사간원 정언 등 외직과
내직을 겸직하며 활약했고 조선시대 요직인
승지에 임명 되 우부승지의 자리에 까지
올라갔으나 왕자사부 하낙이 승정원을 탄핵한
일에 책임을 지고 관직에서 물러났다.
1583년 관직에서 물러나 초야에 묻혀 지내던
이원익은 1587년 안주에 역병이 돌고 가뭄이
들어 안주가 폐촌(廢村)될 지경에 이르자
실무에 능하다는 추천을 받아 안주목사에
제수되었고 안주의 백성들을 구휼하는데
성공한다.
임진왜란 발발이후에는 이조판서와 평안도
도순찰사를 겸직해 선조의 피난길에 앞장섰고
평안도 지역에서 병력을 모으는데 큰 역할을
했다. 1598년 영의정에 올랐다가 1599년
영의정에서 물러나게 되나 그해 다시 영의정에
올랐고 1600년 영의정에서 물러났지만
선조의 사후 광해군이 등극하자 1608년
다시 영의정에 올라 전쟁피해를 복구하고
민심을 안정시키기 위해 노력했으나
광해군에 의해 유배를 가게 되었고
인조반정으로 인조가 즉위하자 인조와
서인은 남인에 대한 회유를 겸해 인망이
있다는 이유로 이원익을 영의정에 제수하니
선조, 광해군, 인조 이렇게 3명의 왕이
영의정에 임명한 보기 드문 인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