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조선 수군이 되었다-47화 (47/223)

────────────────────────────────────

────────────────────────────────────

해야할일 - 문단정리된 편

‘그래 이원익 영감에게도 서신을 보내자

올 봄에 평안도에서 가뭄과 돌림병으로

많은 백성들이 목숨을 잃을지도 모르니

영감께서는 어떻게 백성들을 구휼해야 할지

방도를 생각해보시라고’

나는 자리에 않아 서신을 적었다.

‘선조가 주시하고 있을지도 모르니

오리영감에게 보내는 서신은 내 이름을

적지 말고 익명으로 보내는 것이 좋겠다.’

3명의 임금이 영의정으로 임명한 오리영감

이원익은 학문의 깊이는 물론 실무에도

능한 관료였기에 임진왜란 직후의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광해군이 믿고

영의정 자리를 맡겼고 당색으로는 동인

동인이 북인과 남인으로 갈라진 이후에는

남인이었지만 조정 신료들 사이에서도

인망이 두터웠기에 인조반정 이후

집권한 인조와 서인도 이원익을 영의정에

임명했다.

‘안주의 백성들을 구휼하는데 성공하는 것이나

임진왜란 중에 영의정을 맡은 것만 봐도

이원익은 위기에 강하고 실무에도 능한

인물이니 글만 아는 책상물림들 보다는

100배 낫지 이번 기회에 이원익에게 서신을

보내서 연결고리를 만들어 놓자’

당장 고토열도 정벌을 준비하고 있었지만

머릿속에서는 항상 북해도와 임진왜란을

생각하고 있었던 나는 북해도의 타케다

가문을 정벌하고 오시마 반도를 점령한

이후의 일도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오시만 반도를 점령한

이후에도 최소한 3년은 조선으로 부터의

보급이 필요해 당장 식량만 하더라도

16세기의 북해도는 대부분 미개척지야.

다케다 가문이 얼마나 밭을 만들어

놨을지는 몰라도 당장 내가 거느리고 갈

군사들과 오시마 반도를 점령하면서

확보하게 될 포로들 그리고 돌산도의

왜인들 까지 계산하면 적어도 몇 천명

단위일 텐데. 당장 이들이 북해도에서

자급자족 할 수는 없을 거야.

대장장이와 목수 같은 장인들을 데려가려고

해도 이들이 대장간을 차리고 일을 하려면

시간이 걸릴 것이고 필요한 도구와 재료도

당장은 북해도에서 구할 수 없는 것이

많을 테니. 최소한 3년은 식량, 옷감, 농기구

같은 각종 도구들을 조선에서 보급 받아야해’

조선에서의 보급을 생각하자 정여립의 가치가

더 크게 느껴졌다. 그러나 정여립을 통해서만

북해도에서 자급자족할 수 있을 때까지

보급이 가능할 것 같지는 않았다.

북해도를 정벌하는 데 동원할 군사들과

포로들 외에도 옹기장이, 도공, 대장장이,

목수 등 장인들도 데려갈 생각을 하고 있었던

나는 무엇보다 이들을 먹이고 입히는 일을

걱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5000명만 있다고 하더라도 1년에 먹는

곡식이 2만섬이 넘어 정여립을 통해서

조선에서 보급을 받을 수 있으면 좋겠지만

조정에 들키지 않고 매년 2만섬 이상의

곡식과 수 천 필의 무명 그리고 각종

도구들을 3년간이나 보내주는 것은 아무리

정여립이라고 해도 쉽지 않을 거야.

정여립을 통해 최대한 보급을 받고 정여립의

힘으로 불가능한 경우에는 어쩔 수 없지만

조선과 무역을 한다.’

고민 끝에 내가 생각한 방법은 조선과의

무역이었다.

‘물론 조선과의 무역에 내 이름과 신분을

드러낼 수는 없지 항복한 왜인이나

북해도에서 포섭한 아이누인을 내세워

일본에서 독립해 북해도에 따로 나라를

세웠다고 주장하며 우연을 가장해

조선에 무역을 제안해야지.’

물론 조선에서 욕심내지 않을 만한 상품이

없다면 조선과의 무역은 어려운 일이었다.

유교를 근본으로 삼았던 조선은 상업과

공업을 천하게 여겼고 무역에도

소극적이었다.

‘물론 듣도 보도 못했던 놈들이 갑자기

나라를 세웠다고 나타나서 무역을 하자고

하면 조선에서 상대해 주지 않겠지만

북해도에는 유황이 있단 말씀이야.’

북해도를 거점으로 삼으려고 하는 이유 중에

하나가 바로 북해도에 있는 유황광산이었다.

북해도에는 노천온천과 더불어 유황광산이

있으니 유황을 쉽게 채취할 수 있기 때문이다.

‘조선에서 유황광산을 개발하는데 성공한 것이

1660년대이니 지금의 조선은 유황을 전량

수입하던 시기야. 유황은 명 아니면 일본에서

수입해야 하는 데 명과 일본 모두 유황이

화약의 원료인 것을 알고 있으니

조선이 원하는 만큼 대량으로 수출할 리가

없지. 화약을 만들기 위해 유황을

밀수입했다는 기록이 남아있을 정도니

조선이 유황을 확보하기 위해 얼마나

노력했었는지 알 수 있지

이런 상황에서 아무리 듣보잡인 나라라도

유황을 보여주면서 무역을 하자고 하면

과연 거절할 수 있을까.’

나는 유황을 미끼로 조선이 무역을 제안할

속셈이었고 조선이 북해도와의 무역을 승인할

것을 자신했다.

‘역사기록을 보면 조선이 화약과 염초를

확보하기 위해 얼마나 노력했는지

알 수 있지 임금이 직접 염초의 생산량을

확인하고 도성에 화약이 얼마나

남아있는지 확인 했을 정도니까.‘

화약을 만들기 위해서는 유황과 염초가

필요했고 그나마 염초는 민가의 마루 아래,

담벼락 아래, 부엌바닥의 흙을 닥닥 긁어서

어떻게든 제조할 수 있었지만 유황은

다른 방법이 없었다.

16세기 까지 조선은 유황을 전량 수입에

의존해야 했다.

‘돈으로 달라고 하는 것도 아니고 유황을

수출하는 대금으로 쌀과 보리, 비단, 면포,

농기구, 철괴 그리고 황소를 달라고 하면

오히려 좋아할 것 같은데 유황을

안정적으로 확보하기 위해 정기적으로

거래하자고 할지도 모르지.’

오시마 반도를 점령하고 거점을 만드는 일이

쉽지는 않겠지만 내가 생각하기에 북해도는

넓은 영역과 인근의 바다 그리고

지하자원까지 여러 가지로 가능성이 많은

곳이었다.

‘처음 3년만 고생하면 된다.

3년이면 충분히 밭을 만들어서 식량도 자급할

수 있고 북해도 인근 바다에서 어업도

가능하다. 바다가 있으니 소금도 만들 수

있고 원시림이 울창한 지역이니

전선을 건조할 목재도 충분하지.

산속에서 살고 있는 사슴과 동물들도 사냥하면

고기와 가죽을 얻을 수 있고 특히 곰이

많은 것으로 알고 있는데 웅담은 물론

곰 가죽도 조선과 무역하는데 좋은 상품이

될 거야. 광산을 개발하는 것이 어렵기는

하겠지만 북해도에는 석탄, 철, 금, 은 등의

지하자원도 풍부하다.’

아직 고토열도 정벌도 끝내지 못한 상황에서

앞으로 해야 할일도 많았고 무엇부터 해야

할지도 모르겠지만 목표가 분명했기에

불가능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할일은 많지만 아직 시간도 충분하다.

지금은 아직 1587년 2월 올해 안에

고토열도를 정벌하고 정여립과 손을 잡으면

빠르면 내년 중에 북해도에 진출할 수 있다.

오시마 반도를 점령하고 거점을 만드는데

성공하면 3년간 식량생산과 광산개발을

추진하고 빠르면 1591년 부터는

본격적으로 전쟁을 준비할 수 있다.

1592년 4월 13일(양력 5월 23일)

왜군이 조선에 상륙하니 준비할 시간이

넉넉하지는 않지만 아무것도 못할 정도의

시간은 아니다.’

물론 내가 개입해서 임진왜란이 일반적인

조선의 승리와 일본의 패배로 끝날

것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그러나 조선 정확히는 조선인들이 최소한의

피해만 입고 전쟁이 끝날 수 있도록 만들고

싶었고 전쟁기간도 내가 알고 있는 역사보다

짧게 끝내고 싶었다.

흔히 알고 있기로 임진왜란은 조선이 전쟁에

대한 대비가 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에

임진왜란 초기에 일방적으로 왜군에게

밀렸다고 알고 있기 쉽지만

당시 역사에 대해 조금만 안다면 조선이

전쟁에 대한 대비를 아예 안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일본 전국을 통일한 후

대마도주를 통해 일본에 조선의 사신들을

보내줄 것을 요청했었고 조선은 통신사의

파견을 거부하다가 히데요시와 대마도주

소 요시토시의 끈질긴 요청으로 결국 1590년

일본에 통신사를 파견한다.

통신사가 일본에 다녀온 후 통신사의 정사였던

황윤길은 일본이 전쟁이 벌일 것이라고

주장했으나 부사인 김성일은 그렇지 않다고

주장해 조정에서 전쟁의 위협이 없다고

본 것으로 알고 있지만 당시 정황을 보건데

조정에서도 전쟁에 대한 대비를 하고 있었다.

그 증거로 왜군이 조선에 상륙할 경우 맞서

싸우는 거점이 될 경상도와 전라도 지역의

성들을 대대적으로 보수하고 증축했으며

북방에서 여진족을 상대로 활약했던 장수들을

수군으로 내려 보냈다.

종6품 정읍현감이었던 이순신은 정읍현감에

부임한지 불과 2년 만에 정3품 전라좌수사에

임명됐으니 너무나 빠른 승진이라서 조정에서

반대하는 주장이 나왔을 정도였다.

이순신 뿐만 아니라 전라우수사 이억기 역시

북방에서 활약했던 장수였고 원균을

경상우수사로 임명한 것 역시 북방에서

활약했었다는 이유에서였다.

이렇게 나름 조선에서도 전쟁에 대한 대비를

했지만 불행히도 당시 일본의 군비와 병력은

조선과 차원이 달랐다.

조선에서는 성벽의 보수와 증축도 지방

양반들의 반발과 부역에 동원된 백성들의

생계가 어렵다는 이유로 반대 여론이 높았고

북방에서 활약했던 장수들을 수군절도사로

내려 보내 놓고도 군비를 증강하거나

그 이상의 대책은 없던 반면에

일본은 1587년 규슈정벌과 1590년 오다와라

정벌로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사실상 전권을

장악해 전쟁준비가 착착 진행되고 있었고

히데요시는 이미 규슈정벌 당시 자신의

직할군과 자신의 명으로 출병한 다이묘들의

병력을 합해 20만이 넘는 병력을 지휘해

규슈의 시마즈 가문을 정벌하면서 20만

대군의 운용과 보급에 대한 경험을 쌓았고.

이때의 경험은 오다와라 정벌에도 이어져서

관동지역에서 최대 영토를 보유하고 있던

다이묘 호조가문을 정벌하는데도 10만

이상의 대군이 출병했다.

호조가문은 성안에 군량을 쌓아놓고

농성전을 벌였지만 10만 명이 넘는 대군을

거느리고 있던 히데요시는 병력의 우세를

살려 호조가문의 성들을 하나씩 포위해

함락시키는 방법으로 호조가문을 몰락시켰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규슈정벌과 오다와라

정벌에서 얻은 경험으로 조선에 20만 이상의

병력을 출병시킬 수 있다고 자신했고

실제로 성공시켰다.

군사의 수뿐만 아니라 전투력과 화력의

차이를 계산하면 지상군 전력으로는

조선군이 왜군을 감당하기 어려웠다.

조선군의 경우 육진과 북방을 제외하면

대부분의 군사들이 일 년에 몇 달 군역을

마치고 다시 집으로 돌아가 농가를 짓는

농민들이지만

일본은 오닌의 난(1467년)이후 전국시대가

벌어지면서 농민들도 전쟁이 나면 다이묘의

병사로 소집돼 창을 들고 전장에 나가는

일이 빈번하게 발생했다.

오랜 전란은 병사들에게 전장을 경험하게 했고

장수들은 전투지휘를 경험하게 만들었으며

병사들의 무장상태 역시 높아지게 만들었다.

규슈정벌과 오다와라 정벌에 동원된 군사들은

히데요시의 직할군과 다이묘들의 영지군에

따라 차이는 있었지만 전체 병력 중에서

조총병의 비율이 최소 10%에서 최대 30%에

달했을 정도로 잘 무장되어 있었다.

전국시대를 겪으면서 일본의 다이묘들은

군비를 마련하기 위해 광산개발을 적극적으로

시도했고 그 와중에 이와미 은광 등 세계적인

생산량을 자랑하는 광산들도 개발되면서

금과 은의 생산량이 비약적으로 증가했다.

전국시대 와중에 토지의 생산량을 높이기 위한

모내기가 도입되면서 토지의 생산량도 증가해.

16세기 일본의 수확량은 1800만석이 넘었다.

매년 1800만석 이상을 수확하는 토지와

여기에서 거두는 세금 그리고 광산에서

채굴되는 막대한 금과 은을 바탕으로

일본은 이미 16세기에 조선에 20만 이상의

병력을 출병시킬 수 있는 군비를 갖추고

있었다.

조선과 일본의 군비를 비교해보며 조선의

테두리 안에서는 임진왜란을 대비할 수

없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던 나는 순간

조선에서도 대비할만한 방법들이

떠올랐다.

‘아 그러고 보니 할 일이 또 있었네.

염초밭에서 염초를 제조하는 일과

돌산도에 만들고 있는 염전에서 천일염을

만드는 일도 틈틈이 확인해야지.

북해도에 거점을 만든 이후에는 염초밭

만드는 방법과 천일염 만드는 방법을

정리해서 조선조정에 넘겨야지 아니

조정에만 보내면 사장될 수도 있으니

전라좌수영와 전라우수영, 경상우수영과

경상좌수영, 그리고 충청수영에도

보내야겠다.

그럼 누구 한명이라도 시험해보겠지.

아직 조선에서는 염초밭을 만든 적이 없으니

염초밭만 만들어도 큰 도움이 될거야.’

내가 북해도를 점령한 후 조선과의 무역으로

유황을 제공하고 조선에서 염초밭만

만들어도 조선의 화약생산량은 비약적으로

증가할 것이 분명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