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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여립의 고민
정해왜변을 겪으면서 좌수영 군사들의 전투력을 확인한 나는 전선과 무기들만 충분히 준비된다면 고토열도를 정벌할 수 있다고 자신했다.
‘화포장과 포수 그리고 사부들의 실력은 이미 확인했지 왜구들이 조총으로 무장하고 있다고 해도 후쿠에 섬에 총통과 사부들을 상륙시키는데 성공하기만 하면 좌수군 전력으로 왜구들을 충분히 짓뭉개버릴 수 있다. 왜구들을 발견하는 대로 활과 편전으로 사살하고 왜구들이 달려든다면 현자총통으로 발포한다. 조란환을 장전한 현자총통을 왜구들에게 발포하면 그 위력은 클레이모어(M18A1)에 버금갈 것이 분명해 지금 훈련 중인 총병(화승총 사수)들도 활약할 할 것이 분명하고 말이야. 후쿠에 섬에 남아있을 왜구들의 수는 몇 백 정도에 불과할 것으로 보이니 섬을 완전히 점령하고 조선인들을 구출하는 것도 충분히 가능하다. 조선인들을 구출한 다음에는 돌산도에 있는 포로들의 가족들을 전선에 탑승시키는 것도 잊지 말아야지.’
포로들의 처자식을 구해오는 것은 아무리 왜구들이라도 이산가족을 만들지 않으려는 의도도 있었지만 포로들과 그 가족들을 북해도에 데려갈 노동력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나라건 부족이건 가문이건 간에 사람으로 이루어진 집단이 유지되기 위해서는 필수 조건 중 하나가 바로 인구 즉 머릿수였다. 특히 북해도를 점령한 이후에도 그 땅을 개간하고 임진왜란을 대비해야 한다는 것을 생각하면 지금 돌산도에서 밭을 일구고 있는 포로들이 욕심나지 않을 수 없었다.
‘포로들의 수가 500명에 달하니 그들의 가족들까지 구해온다면 남녀와 아이들 까지 합해서 그 수가 2000명은 넘을 것이 분명해 포로들과 그들의 처자식들을 북해도로 이주시키는 일만 성공시키면 노동력 문제는 어느 정도 해결되는 셈이다. 가족 모두가 이주하는 것이니 북해도에 정착하는 것도 한결 쉬울 거야.’
아직 고토열도 정벌을 시작한 것은 아니지만 내 머릿속에서 포로들과 그들의 가족들의 운명은 이렇게 결정되고 있었다.
전라도 전주 정여립의 자택
정여립은 좌수영에 다녀온 후 조정의 인맥을 동원해 좌수사 이대원에 대해 알아보았지만 만족할만한 대답을 얻지는 못했다. 이대원이 좌수사로 제수된 것은 선조의 독단이었고 그 전까지 이대원은 22세의 젊은 장수에 불과했으니 조정의 대신들에게 이대원의 이름이 알려진 것은 정해왜변 이후였다. 그런 만큼 정언신을 제외한 대부분의 대신들은 좌수사 이대원을 운 좋게 왜구들을 물리치고 좌수사 심암이 전사한 덕분에 공석인 좌수사 자리를 차지한 그야말로 운 좋은 장수에 불과한 것이었다. 대신들의 대답에 실망한 정여립은 대동계원들을 움직여 좌수사에 대해 알아보았다.
“말씀하신 대로 좌수영에 알아보았지만 별다른 것은 없었습니다. 나리”
전라감영의 아전이자 대동계원인 진춘일은 정여립에게 잘 접은 한지를 내밀었다. 진춘일에게 받은 한지를 펼쳐본 정여립은 한지를 읽으며 표정이 묘하게 변해갔다. 진춘일의 말대로 별다른 내용은 없어 보였지만 자세히 보니 좌수사의 행동이 평범하지는 않아 보인 것이다.
“좌수사는 보리밥이나 조밥을 먹는다고 그것도 매끼 항상.”
정여립이 이상하다는 듯이 읽자 진춘일은 맞장구를 치듯이 대답했다.
“예 좌수영의 아전들을 통해 알아보니 좌수사 영감은 매끼 보리나 조가 섞인 밥을 먹는다고 합니다. 그것도 보리나 조의 비율을 쌀과 같은 5할씩 섞은 밥을 즐겨 먹는다고 합니다.”
“장수들과 함께 하는 자리가 아니면 술도 마시지 않고 상에 고기도 올리지 못하게 한다. 찬은 채소와 물고기만 올리라고 했다고.”
“장수들과 함께 마시는 자리가 아닌 이상 좌수사 혼자서는 술을 마시는 경우가 없다고 합니다. 좌수영에서 돼지를 잡을 때도 국을 끓여 병사들에게 먹이고 좌수사 영감의 상에도 고깃국만 올렸을 뿐 찬으로는 채소와 물고기만 올리라고 했다고 합니다.”
“좌수사에 오른 이후 지금까지 한 번도 관기나 관비(官婢)와 동침한 적이 없다고 이것이 사실이냐.?”
“예 그렇다고 합니다. 처자식이 함께 좌수영에 지내는 것도 아닌데 지금까지 관기나 관비에게 수청을 들라고 한 적이 없다고 합니다.”
조선시대에 변방에서 근무하는 무관과 수령들이 관기나 관비와 동침하는 것은 흔한 일이었다. 무관과 수령들이 임지(任地)로 부임하는 경우 가족들은 고향에 남겨두고 단신으로 혹은 시중을 드는 노비 한 두 명만 거느리고 임지(任地)에 부임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고 젊은 무관들은 가족들과 떨어져 있는 동안 관기와 관계를 가지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관비(官婢) 역시 단신으로 부임하는 무관들의 생활을 위해 밥 짓고 빨래와 청소의 목적으로 무관들의 숙소에 배치되지만 무관이 동침할 것을 요구하면 관비의 신분으로 무관의 요구를 거절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관비가 무관의 아이를 낳아도 그 아이는 대를 이어서 관노(官奴)나부관비(官婢)가 될 뿐이었다.
‘아니 사내가 그것도 수군절도사의 자리에 있으면서 여인을 탐하지 않다니. 좌수사가 좌수영에 들어 간지가 벌써 한 달은 됐을 텐데 그동안 한 번도 관기나 관비와 동침하지 않았다.
늙은 노장도 아닌 아직 약관도 치른 지 얼마 안 되는 젊은 장수가 그리고 젊은 사내가 술과 고기를 즐기는 것은 흔한 일인데 평소에는 술과 고기를 입에 대지 않는다니 그것도 장수가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심지어 매일 먹는 밥도 쌀밥을 먹지 못할 형편이 아닌데 매끼 보리와 조가 섞인 거친 밥을 먹는다니 이건 장수가 아니라 수도하는 고승이나 다름없지 않은가.‘
정여립이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흔들자 진춘일은 덧붙이듯이 입을 열었다.
“좌수영에서 절이도와 돌산도에 크게 둔전을 일구고 있다고 합니다. 특히 좌수사 영감은 돌산도에 관심이 많은지 열흘에 한 번씩은 돌산도를 직접 시찰한다고 합니다.”
좌수영에서 피난민들을 구휼하고 포로들의 노동력을 활용하기 위해 둔전을 일구고 있는 것은 정여립도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그런데 좌수사가 정기적으로 돌산도를 직접 방문한다는 보고에 정여립은 호기심이 생겼다.
“돌산도에 둔전을 일구고 있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다. 그런데 돌산도에 둔전을 일구고 있어도 공사다망한 좌수사가 그렇게 자주 들릴 필요는 없을 텐데. 혹시 좌수사가 돌산도에 다른 일이 있는 것은 아니냐?.”
정여립의 질문에 진춘일은 고개를 조아리며 대답했다.
“그것은 알 수 없습니다.”
“알 수 없다니. 그것이 무슨 말이야?.”
정여립은 알 수 없다는 대답에 황당함을 느끼며 물었고 진춘일은 정말 알 수 없다는 투로 대답했다.
“돌산도에는 왜구 포로들이 노역을 하는 곳이라 항상 군사들이 경계를 서고 있다고 합니다. 돌산도로 들어가는 배는 오직 좌수영에서만 출발할 수 있고 돌산도를 출발한 배 역시 좌수영 포구에 정박한다고 합니다. 섬으로 들어가는 배는 몇 차례나 확인을 받은 다음에야 섬에 들어갈 수 있고 섬에서 나올 때 역시 군사들이 몇 차례나 확인하고 조사해서 단 한사람도 허가받지 않은 사람이 섬에 들어가거나 섬에서 나올 수는 없다고 합니다.”
진춘일의 대답을 들은 정여립은 기가 막혔다.
“그 때문이냐? 알 수 없다고 한 것이.”
“예 나리 좌수영의 아전들도 돌산도에 드나드는 사람은 손에 꼽을 정도이고 돌산도에 배치된 군관과 군사들은 아예 돌산도에서 나오지 못하고 있다고 합니다.”
“좌수사가 하는 짓이 아주 대범하구나.”
정여립은 돌산도의 소문만 듣고 좌수사가 역모를 준비하거나 사사로이 군사를 기르고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조정에 몸담았었던 만큼 정여립은 조선의 모든 병영과 수영에 선조의 눈과 귀들이 파견되어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고 좌수사가 이미 그 사실 잘 알고 있을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좌수사는 이미 상경해서 주상전하와 정언신대감과 대면했다. 정언신 대감은 좌수사를 좋게 보셨으니 주상전하의 눈과 귀들에 대해 귀띔해 주셨겠지. 좌수사가 돌산도에서 무슨 일을 벌이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역모는 분명히 아닐 것이야. 만약 돌산도에서 군사를 기르고 있다면 그것 역시 주상전하의 윤허를 받은 것이겠지. 주상전하는 빈틈이 없는 분이시니.’
고심 끝에 정여립은 돌산도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에 관심을 가지지 않는 것이 현명하겠다는 판단을 내렸다.
“돌산도에 대해서는 더 이상 묻지 않겠네. 하지만 좌수사나 좌수영에 대해서는 계속 알아보도록 하게.”
“예 나리 잘 알겠습니다.”
정여립이 이만 나가보라는 눈짓을 하자 진춘일은 자리에서 일어나 정여립에게 허리 숙여 인사를 한 후 방을 나갔다. 진춘일이 나간 후 정여립은 진춘일이 보고한 내용을 되새기며 생각에 잠겼다.
‘지금까지 보여준 것만으로도 능력은 나무랄 데 없고. 군량은 물론 구휼미로 들어온 곡식도 횡령하거나 함부로 썼다는 소문도 들리지 않으니 청렴하기 까지 하구나. 무엇인가 일을 꾸미고 있는 것 같기는 하지만 허튼짓을 할 정도로 어리석은 인물은 아니고’
좌수사가 오리 이원익 영감을 들먹였던 일로 황급히 좌수영을 떠나 자신의 집으로 돌아온 정여립은 그동안 좌수사를 의심하며 여러 가지 방법으로 좌수영과 좌수사에 대해 알아 봤지만 그 결과 전라좌수사 이대원이 범상치 않은 인재라는 사실만 확인했다.
‘아직 혼인만 치르지 않았으면 내 사위삼고 싶은 인재인데 본처가 평택에서 본가를 지키고 있다니 아깝구나.’
속으로는 아깝다는 생각을 했지만 마음속 한편에서는 좌수사에 대한 의심을 아직 남아있었다.
‘좌수사는 무슨 생각으로 그런 말을 했을까? 올해 정말 평안도에 역병이 돌고 가뭄으로 흉년이들까?.’
1587년(정해년) 3월 8일 전라도 돌산도 염전
마지막 저수지 까지 소금물이 가득 찼다는 보고를 받고 우후 김시민과 순천부사 이억기를 그리고 녹도만호 이순신을 거느리고 돌산도로 향했다. 돌산도에서 포로들이 지내는 마을과 포로들의 손으로 일구고 있는 밭 그리고 염초밭을 둘러본 나는 염전으로 향했다. 돌산도에 염초밭과 염전이 있는 것은 몰랐던 이순신과 이억기, 김시민은 많이 놀란 표정이었다. 특히 바닷물을 1차 저수지로 끌어올리는 수차 앞에서는 셋은 눈을 떼지 못했다. 돌산도의 염전이 이런 거창한(?) 시설들을 갖추게 된 것은 순전히 내 책임이었다. 한반도에서 본격적으로 천일제염법이 도입된 것이 한일합방 이후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던 나는 천일제염법 이용한 소금생산을 계획하고 돌산도에 염전을 건설했다. 포로들의 노동력으로 염전을 건설할 생각에 돌산도에 염전 건설을 시작했지만 막상 시작하고 보니 내가 알고 있는 염전의 지식은 TV에서 봤던 염전의 모습과 책에서 봤던 내용이 전부였다. 저수지에서 바닷물을 저장해 놓고 햇볕으로 수분을 증발시켜 소금을 만든다는 것만 알고 있었지 구체적으로 어떻게 저수지를 만들고 얼마나 바닷물을 증발시켜야 하는지 몰랐던 나는 우선 저수지를 파고 정사각형 모양으로 구운 기와로 바닥을 포장해 방수처리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