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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서를 쓰는 심정으로
출정군을 좌수영에 집결시킬 것을 명령한 후에도 나는 출정군이 사용할 군량과 무기, 화약등의 보급품을 계산하고 확인하는 등 하루하루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출병하기 전날 오후에야 시간을 내서 일정을 비운 나는 방에 들어가 탁자 위에 두루마리를 펼쳐놓고 천천히 먹을 갈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번 고토열도 정벌은 실패할 수가 없어. 하지만 실전이니 만큼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야지.’
선조가 고토열도 정벌을 허락하기는 했지만 나와 독대한 자리에서 허락한 것이지 공식적인 자리에서 정식으로 허락한 것은 아니었다. 만약 고토열도 정벌이 실패하거나 출정군이 피해를 입고 돌아온다면 나는 조정에 알리지도 않고 사적으로 전선과 병력을 출병시킨 죄인이 될 것이고 좌수영의 장수들도 책임을 피하기는 어려웠다.
‘솔직히 나는 어찌돼도 좋아. 어떻게 돼도 나 한 몸 피신할 자신이 있어. 정 상황이 안 좋으면 배를 몰고 남해의 섬이나 오키나와로 넘어가는 방법도 있고. 하지만 지금 좌수영에는 이순신 장군, 이억기 장군 그리고 김시민이 있어 만약 이들이 책임을 지고 관직에서 물러난다. 그것도 임진왜란이 몇 년 남지 않은 이때에 그건 절대로 안 될 일이야.’
만약 고토열도 정벌이 잘못된 상황에서 나까지 사라져 버린다면 선조는 좌수군의 장수들에게 책임을 묻고도 남을 사람이었다. 이순신 장군이 삼도수군통제사에게 물러나신 이후 당한 일들을 보면 관직에서 물러나는 정도로 끝나면 양반이고 어쩌면 고문을 당할 수도 있는 일이었다. 만약 그런 일이 벌어진 후에 임진왜란이 발발한다면 조선은 일본의 속국이 될 수도 있는 일이었다.
‘이순신 장군, 이억기 장군 그리고 김시민이 고문과 형벌을 당해 움직이지 못하는 상황에서 임진왜란이 발발한다. 더구나 임진왜란 당시 경상우수사는 원균이었지. 그러면 대참사가 벌어질 것이 확실하다. 아니 대참사 정도가 아니야 고니시 유키나가와 가토 기요마사가 지휘하는 수 만 명의 왜군이 조선에 상륙해 한성으로 진군해 들어가는 상황에서 왜의 전선들이 남해와 서해를 거쳐 제물포로 진격해 들어가 한강 이북에 왜군을 상륙시키는데 성공하면 그것으로 조선은 끝이다.
역사에서처럼 선조가 평양으로 피신했어도 남해와 서해의 제해권을 왜군에게 빼앗긴다면 한강 이남의 영토를 수복하는 것은 불가능해. 나중에 조선군이 선전하고 명군이 개입해도 한강 이북의 황해도, 평안도, 강원도, 함경도를 지키기에 급급할 것이 분명해.’
나는 어떤 일이 벌어져도 이순신과 이억기, 김시민에게는 피해가 가지 않아야 한다는 심정으로 선조에게 올리는 장계를 썼다. 만약에 고토열도 정벌이 실패할 경우를 대비해서 쓴 장계는 선조와 조정의 대신들에게 모든 것은 내가 독단으로 결정한 일이고 부하 장수들은 어명을 받았다는 내 거짓말에 속아서 내 명령을 따랐을 뿐이라는 내용의 진술서와 같은 장계였다. 마치 유서를 쓰는 심정으로 선조에게 보낼 장계를 쓴 나는 먹물이 잘 마르도록 두루마리를 한쪽으로 치워놓고 다른 두루마리를 탁자위에 펼쳐놓았다.
‘정언신 대감은 모든 사정을 잘 알고 있으니. 조정에 장계가 올라가도 나를 믿어주겠지.’
나는 두루마리 위에 정언신 대감에게 보내는 서신을 적었다. 고토열도 정벌을 준비하면서 겪은 일과 정벌의 목적을 설명하는 내용을 적은 후 서신 뒷부분에는 천일제염법에 대해 설명하고 천일염 염전을 건설하는 법과 천일염 생산에 대해서 간략하게 적은 후 마지막으로 염초 밭을 조성하는 방법에 대해서도 써 넣었다.
‘만약에 이번 일이 잘 못 되도 천일제염법과 염초밭에 대한 지식만 조선에 전해진다면 임진왜란이 발발해도 내가 아는 역사 보다는 훨씬 나은 결과가 나올 거야.’
16세기에 소금은 곧 돈이었다. 천일제염법이 전해진다면 자염을 생산하는 것 보다 저렴한 생산비로 더 많은 소금을 생산할 수 있으니 선조나 조정의 대신들이 허튼짓만 하지 않는다면 국고를 채우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조선이 자랑하는 화포는 화약의 소모량이 많은 무기인 만큼 염초밭을 만드는 것 역시 조선에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전쟁도 돈이 있어야 할 수 있고 화약이 넉넉해야 왜군에게 화포를 발사할 수 있을 것이다.
선조를 믿을 수 없었던 나는 천일제염법과 염초밭 제작에 관한 기술을 장계에 넣지 않고 정언신 대감에게 보내는 서신에 적어 넣었다.
‘정언신 대감이라면 알아서 조선에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이 기술들을 사용하시겠지. 왠지 선조는 국익보다 자신의 이익을 먼저 생각할 것 같단 말이야. 천일제염법이 국익에 도움이 되더라도 선조 자신에게 이익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면 그냥 사장시킬 것 같아.’
조선시대 염전은 왕실 종친들의 이권이 엮여있는 사업이었으니 왕실이나 종친들은 높은 소금가격을 유지하기 위해 천일제염법을 사장시킬 가능성도 있었다.
정언신 대감에서 보내는 서신도 마무리 지은 나는 우선 장계를 적은 두루마리의 먹물이 완전히 마른 것을 확인한 후 두루마리를 말고 끈으로 단단히 묶어서 봉인했다. 정언신 대감에세 보내는 서신도 먹물이 마른 후 단단히 봉인한 나는 좌수군 우후 김시민을 불렀다.
“부르셨습니까. 좌수사 영감.”
김시민이 도착하자 나는 아무 말도 없이 김시민에게 두 개의 두루마리를 내밀었다.
“이것이 무엇입니까. 영감.”
김시민은 당황한 표정을 지으며 두루마리를 받았고 나는 김시민의 눈을 정면으로 바라보며 말했다.
“우후가 잘 보관하고 있게. 절대로 열어봐서는 안 될 것이야. 잘 보관하고 있다가. 내가 좌수영으로 돌아오지 못하게 되면 왼쪽의 두루마리는 조정으로 보내도록 하게 주상전하께 올리는 장계일세.”
“좌수사 영감.”
두루마리가 장계라는 말을 듣자 김시민은 놀란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장수가 전장에 나가는데. 만반의 대비를 하고 가야되지 않겠나. 무슨 일이 있을지 몰라 준비한 것이니. 걱정하지는 말게. 오른쪽의 두루마리는 병판대감이신 정언신 대감에게 보내는 서신이네. 그것 역시 내가 돌아오지 못하게 되면 정언신 대감에게 보내도록 하게. 이번 정벌이 실패하거나 뜻밖의 사태가 벌어진다면 전라좌수군 전체가 조정의 질책을 피하지 못할 것이야. 정언신 대감이 그 서신을 받으신다면 전라좌수군에게 힘이 되어 주실 것이네. 절대로 잊어버리거나 봉인을 열어봐서는 안 되네. 잘 보관하고 있게.”
내 말을 들은 김시민은 감격한 표정으로 두루마리를 공손히 잡으며 대답했다.
“소장 목숨을 걸고 두루마리를 지킬 것입니다.”
김시민의 대답을 들은 나는 기가 차기도 하고 웃음이 나올 뻔 했다.
‘아니 그렇다고 무슨 목숨까지 걸어. 하여간 여기는 조선이 맞아.’
목숨까지 걸겠다는 김시민의 대답에 어이가 없었지만 그래도 기특하다는 생각에 김시민을 격려했다.
“그래 내 우후를 믿기에 맡기는 것이니. 잘 보관하도록 하게.”
“소장이 잘 보관하도록 하겠습니다. 상이 곧 차려질 것이니. 같이 나가시지요. 좌수사 영감.”
‘그래 상이 차려진단 말이지.’
오늘 저녁은 출정군을 위한 잔치가 벌어지는 날이었다. 오늘을 위해 특별히 소와 돼지와 닭을 잡았고 생선과 해산물도 넉넉하게 준비해 생선을 굽는 한편 탕도 끓이고 있었다.
상이 차려진다는 말에 허기가 느껴졌지만 장계와 서신을 쓰면서 신경을 쓴 탓인지 아무래도 잠시 쉬고 싶었다.
“우후는 먼저 나가도록 하게. 나는 잠시 쉬고 싶군. 방에서 쉬다가 사이 차려지면 나갈 것이니 우후는 먼저 가보도록 하게.”
“알겠습니다. 좌수사 영감.”
김시민이 나간 후 나는 그대로 자리에 앉아 눈을 감고 쉬었다. 유서를 쓰는 심정으로 글을 쓴 탓인지 머리가 아프고 피곤함이 느껴졌다.
‘지금까지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최선을 다해서 해왔고 앞으로도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이든 최선을 다할 것이다. 일을 꾸미는 것은 사람이되 일을 이루게 하는 것은 하늘이라고 했지만. 김시민에게 맡긴 서신들이 선조와 정언신 대감에게 전해지지 않도록 최선을 다할 것이다. 그러나 세상일은 언제 어디에서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기에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준비했으니. 저 서신들이 선조와 정언신 대감에게 전해진 다음에는 그야말로 하늘에 모든 일을 맡겨야 하겠구나.’
그렇게 눈을 감고 잠시 생각을 정리하고 있었을 때 갑자기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좌수사 영감.”
‘이거는 뭐 잠시도 쉴 시간이 없군.’
“무슨 일인가?”
휴식시간을 방해받은 나는 짜증난 목소리로 대답했다.
“한성에서 선전관이 내려왔습니다.”
선전관이 왔다는 말에 나는 반사적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선전관이 좌수영에 도착했느냐?.”
“곧 도착한다 하옵니다. 영감.”
“알았다. 곧 나갈 것이다.”
“예 좌수사 영감.”
선전관이 왔다는 말에 나는 당황했다.
‘아니 이게 무슨 일이야. 금부도사가 아닌 선전관이 왔다는 것을 보면 나를 잡아가거나 출병을 저지하려는 것은 아닌 것 같은데.’
황급히 의관을 정제한 나는 방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이미 동헌 앞마당에는 소식을 듣고 장수들이 나와 있었고 나는 좌수영의 장수들을 거느리고 선전관을 기다렸다.
잠시 후 선전관이 좌수영에 도착했다. 선전관을 바라본 나는 반가운 얼굴을 발견했다.
‘이운룡 장군이잖아. 지나번 상경했을 때는 바빠서 만나지도 못했는데 이렇게 만나게 되다니.’
“전라좌수사 이대원은 어명을 받으라.”
선전관의 외침에 내가 앞으로 나가 외쳤다.
“신 전라좌수사 이대원 대령이오.”
마당에는 이미 멍석이 깔려있었고 멍석위에 오른 나는 한성을 향해 절을 4번 올렸다. 내가 절을 마치자 선전관은 두루마리를 열고 교지를 낭독했다. 교지의 내용은 전란 이후 전라좌수군을 수습한 좌수사의 노고를 치하하며 장수들 중에서도 모범을 보인 좌수사에게 특별히 선조가 흑각궁을 하하한다는 내용이었다.
출병을 앞두고 예고도 없이 갑자기 선전관이 도착하자 무슨 일 때문에 왔는지 몰라 긴장하고 있었던 나는. 나의 노고를 치하하고 흑각궁을 내린다고 하자 긴장이 풀리면서 나도 모르게 다리가 풀리는 것이 느껴졌다.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전하.”
다리가 풀릴 것 같아도 그 자리에서 쓰러질 수는 없었다. 기를 쓰고 절을 하며 망극하다고 외친 나는 절을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할 때 다리가 풀리면서 그대로 휘정거렸다.
“좌수사 영감.”
“괜찮으십니까. 영감”
내가 쓰러지려고 하자 장수들은 놀라며 황급히 다가왔고 내 바로 옆에 있던 선전관 이운룡은 나를 붙잡고 부축해 주었다.
“괜찮으십니까. 좌수사 영감.”
이운룡은 걱정된다는 목소리로 물었고 나는 괜찮다는 듯 가볍게 웃으며 대답했다.
“괜찮소이다. 잠시 놀랐을 뿐이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