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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수할 기회
“감축 드립니다. 좌수사 영감.”
“감축 드립니다. 영감.”
내가 자리에 앉자 좌수군의 장수들은 내게 연신 축하인사를 했다.
‘선조가 내린 흑각궁 때문이겠지 하필 이런 날에 선조가 흑각궁을 내렸으니 누가 봐도 선조가 고토열도 정벌을 앞둔 전라좌수군을 격려하는 의미로 흑각궁을 하사했다고 생각할거야. 내 생각으로도 그렇고.’
장수들은 연신 축하한다고 인사말을 이었지만 나는 선조가 나와 전라좌수영을 주시하고 있다는 의미로 느껴져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선조가 신경 쓰이고 마음도 편하지 않았던 나는 장수들의 축하인사에 건성으로 대답하며 묵묵히 음식만 입으로 가져갔다.
모처럼의 잔치였지만 내 명령에 의해 관기나 기생들은 보이지 않았다. 음식을 나르고 있는 관비들만 보일뿐 관기나 기생들은 절대로 부르지 못하게 하고 장수와 군사들에게 내리는 술도 제한해서 군사들이 술에 취하지 못하도록 통제했다.
‘모레 출병할 것인데 장수들이 술에 취해서 사고라도 치면 곤란하지 군사들은 말할 것도 없고.’
군의 기강을 위해 또 사고 방지를 위해 술은 제한했지만 음식 특히 고기는 평소보다 넉넉히 준비해 군사들 모두 실컷 먹고 즐길 수 있도록 했다.
장수들과 대화를 나누며 식사를 마친 나는 입가심으로 냉수를 한잔 마신 후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장수들도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났지만 나는 그런 장수들을 손짓으로 말리며 말했다.
“나는 심신이 피곤해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겠네. 지난 한 달간 정벌을 준비하면서 좀 무리한 듯 해 오늘은 이대로 들어가 쉴 것이니 제장들은 이대로 자리를 즐기게.”
“예 좌수사 영감.”
장수들이 일제히 군례를 올리자. 나는 자리를 떠나기 전에 장수들에게 당부의 말을 덧붙였다.
“군사들도 그동안 피곤했을 테니 내일은 오전동안은 군사들을 쉬게 하게. 특별한 일이 없는 한 나도 쉴 것이니. 좌수영과 전선들의 경계만 철저하게 서도록 하고 제장들도 알아서 쉬도록 하게 그리고 날이 좋으면 모레에는 출병할 것이니 내일 오후에는 출병 준비를 마무리 짓도록 하게 특히 각 전선에는 군량과 병장기 그리고 보급물자가 충분히 적제 되어 있어야 할 것이네. 알겠는가.”
“예 좌수사 영감.”
회식자리에서 일거리를 던져주는 직장 상사가 된 기분이었지만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고 전라좌수사의 자리에 오르고 보니 중요한 업무는 두 세 번씩 강조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말을 마친 나는 장수들의 대답을 들으며 천천히 대청에서 내려왔다. 몇몇 장수들이 나를 따라 대청에서 내려오려고 했지만 나는 손을 들어 그들을 제지했고 내가 대청에서 내려오자 내 호위를 맡은 김개동과 몇몇 군사들이 내 뒤를 따랐다. 김개동과 내 호위병들은 잔치에도 참여하지 않았는지 모두들 창과 활로 무장하고 있었다.
나는 떠들썩한 잔치자리를 피해 산책도할 겸 천천히 걸으며 좌수영의 성벽을 한 바퀴 돌았다. 좌수영 안에서는 한참 잔치가 벌어지고 있었지만 성문과 성벽 위에는 경계병들이 배치되어 있었다. 항구에 정박해 있는 전선들에도 최소한의 경계 병력이 남아서 전선을 지키고 있을 것이다. 나는 무장한 체 경계를 서고 있는 군사들의 군례를 받으며 천천히 성벽을 따라 걸었다. 빈틈없이 경계를 서고 있는 군사들을 보며 기회가 될 때마다 항상 경계를 철저히 하라고 장수들에게 강조한 보람이 있는 것 같아 흐뭇한 기분이 들었다.
경계근무로 오늘 잔치에 참여하지 못한 병사들에게는 내일 따로 술과 음식이 제공되고 내일은 오늘 잔치를 즐긴 군사들이 경계를 설 것이다. 성벽을 한 바퀴 돌고 내 숙소가 있는 서헌으로 발걸음을 돌리려다 보니 나를 따르고 있는 호위병들의 수가 처음보다 많이 늘어있었다. 그 가운데 반가운 얼굴이 보였다.
“손 군관.”
녹도만호 이순신이 녹도진에 적응하는 것을 돕기 위해 녹도진으로 돌아갔었던 손대남이 어느새 호위병들 앞에 서있었다.
“그동안 강녕하셨습니까. 좌수사 영감.”
“나야 잘 지내고 있었지. 손 군관은 어떻게 지냈나?.”
반가운 마음에 손대남과 안부 인사를 나눈 나는 한밤중에 성벽을 앞에 두고 안부 인사를 나눌 필요는 없다는 생각이 들어 손대남과 함께 서헌으로 향했다. 서헌으로 향해 걸으며 손대남과 그동안 어떻게 지냈는지 이야기를 나눈 나는 자연스럽게 녹도진 군사들의 이야기를 꺼냈다.
“녹도진 군사들의 사기가 높다고 좌수영 전체에 소문이 자자하네. 정말 수고가 많았네.”
“과찬이십니다. 좌수사 영감. 녹도진 군사들의 사기가 높은 것은 사실이나 저 때문이 아닌 좌수사 영감과 녹도만호 나리 덕분입니다. 영감.”
“녹도만호 이순신이 용맹하고 지혜로운 장수인 것은 내 잘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내 덕이라니 그게 무슨 소리인가?.”
내 질문에 손대남은 당연하다는 듯이 대답했다.
“정말 모르셨습니까. 왜구토벌에 자원한 녹도진의 군사들은 지난 전란 당시 좌수사 영감과 함께 녹도전선을 몰았던 군사들 아닙니까. 그 놈들은 좌수사 영감에 대한 충성심이 대단합니다.”
“그게 무슨 말인가. 나에 대한 충성심이 대단하다니?.”
내 질문에 손대남은 주위를 살핀 후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당연한 일입니다. 지난 전란에서 전임 좌수사 심암이 좌수사 영감과 녹도진 군사들을 사지로 몰지 않았습니까. 그때 좌수사 영감께서 저희를 지휘해주지 않으셨으면 저희는 모두 왜구들에게 도륙당하거나 오도로 끌려갔을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지난 전란에 참전했던 군사들 가운데 그 사실을 모르는 자가 없으니. 녹도진 군사들이 좌수사 영감을 생명의 은인으로 여기는 것도 무리가 아닙니다. 그리고 좌수사 영감께서 녹도전선 1척만으로도 왜구들을 농락하시고 무사히 사지를 벗어나지 않으셨습니까. 녹도진 군사들은 좌수사 영감께서 지휘하시면 절대로 패하지 않는다고 믿고 있습니다.”
손대남의 대답을 들은 나는 녹도진 군사들의 심정이 이해가 되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과분한 기대를 받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군사들이 충성하고 믿어주는 것은 고마운 일이지만 기대가 과하면 곤란한데. 전장에 나가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데 무조건 나만 믿고 잘 될 거라고 생각하기만 해도 전장에서는 곤란하지.’
한편으로는 걱정도 됐지만 출병을 앞두고 있는 상황에서 군사들의 사기가 높은 것은 반가운 일이었다. 나는 손대남의 대답에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물었다.
“그래서 군사들의 사기가 그렇게 높은 것인가. 나를 믿고 있어서?.”
“좌수사 영감을 믿고 있는 것이 가장 큰 이유이기는 하지만 다른 이유도 많이 있습니다.”
군사들의 과한 믿음에 부담감도 느끼고 있던 나는 군사들의 사기가 높은 다른 이유도 있다는 대답이 차라리 반갑게 들렸다.
“그래 그 이유는 무엇인가?.”
“지난 전란 당시 왜구들에게 당한 사람들이 워낙 많지 않습니까. 녹도진과 발포진에서 복무하는 군사들 중에는 시산도와 절이도에서 왜구들에게 당한 친척이나 지인들이 있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손대남의 대답에 나는 모든 것이 이해가 됐다.
‘그렇지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그래도 좌수사 영감 덕분에 이렇게 왜구들에게 복수할 기회라도 생긴 것이 어디냐며 반가워하는 군사들도 많았습니다.”
손대남의 말을 들으니 그 심정을 알 것 같아 가슴이 아파왔다.
‘이미 짐작하고 있는 일이었지만 이렇게 직접 들으니 더 기가 막히고 안타까운 마음이 드는구나. 세상 어디를 봐도 한국 사람들 보다 성실하고 부지런한 사람들이 없다고 하던데. 한국인들의 조상인 조선인들은 얼마나 부지런하고 성실했을까. 녹도진의 아니 좌수영의 군사들 대부분이 먹고살기 위해 가족들의 생계를 위해 평생 허리한번 마음껏 펴지도 못하고 몸이 부셔져라 일만 해온 사람들인데 이렇게 왜구들에게 또는 북방의 여진족들에게 약탈당하고 끌려가고 억울하게 당한 사람들이 얼마나 많았을까. 또 자기 가족이 친척들이 억울하게 끌려간 사람들이 얼마나 많았을까. 그렇게 당하고 복수할 엄두조차 가지지 못하다가 이번에는 복수할 기회라도 있어서 다행이라니. 이것을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있다니.’
나는 군사들의 심정을 생각하다가 눈물이 흐를 것 같아서 애써 눈에 힘을 주며 말했다.
“좌수영에서도 많은 군사들이 자원했지만 녹도진, 발포진의 군사들이 왜구토벌에 자원한 덕분에 출정군을 조직하는 것이 수월했다. 녹도진과 발포진의 군사들이 토벌에 자원한 심정을 항상 기억하고 군사들이 승리를 거두고 돌아올 수 있도록 또 최대한 많은 군사들이 무사히 돌아올 수 있도록 조치할 것이다.”
내 말을 들은 손대남은 황송하다는 듯이 허리까지 숙였다.
“감사합니다. 좌수사 영감.”
‘그래 전투가 벌어지면 아무리 일방적인 전력이라도 아군에서도 사상자가 발생할 수밖에 없어. 사상자가 아예 없을 수는 없겠지만 어떻게든지 최대한 많이 살려서 함께 돌아온다.’
좌수군의 사상자 수를 최대한 적게 만들겠다고 다짐한 나의 머릿속에 한 사람이 떠올랐다.
‘그래 분명히 도움이 될 거야. 처음부터 데려갈 생각을 하기는 했지만 그동안 바쁜 일이 많아서 신경을 못 썼어. 지금이라도 손을 쓰자.’
할 일을 떠올린 나는 손대남에게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사화동을 기억하는가?.”
손대남도 사화동의 신분을 생각해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물론입니다. 좌수사 영감.”
“지금 좌수영 옥사에 사화동과 내가 문초(問招)했던 포로들이 하옥되어 있네. 그들 중에 우선 사화동을 서헌의 가장 큰방으로 데려오게 다른 군사들은 모르게 조용히.”
한밤중에 갑자기 사화동을 데려오라는 말에 손대남은 무슨 일인지 모르겠다는 얼굴이었지만 내 명령을 따랐다.
“알겠사옵니다. 영감.”
“조심히 다녀오게 서헌에서 기다리겠네.”
손대남은 군사 3명을 거느리고 옥사로 향했고 나는 김개동과 군사들의 호위를 받으며 서헌으로 발걸음을 재촉했다.
좌수영 서현에 도착한 나는 좌수영에 찾아온 손님들과 대화를 나누는 장소인 큰 방에 자리 잡고 손대남과 사화동을 기다렸다.
잠시 후 손대남과 군사들이 사화동을 데려오자 나는 손대남에게 명령을 내렸다.
“사화동을 꿇어앉히게.”
“예 좌수사 영감.” “꿇어라.”
사화동이 순순히 바닥에 꿇어앉자 나는 병사들을 밖으로 내보냈다.
“손 군관과 개동이만 남고 너희는 나가거라. 내가 명하기 전까지는 누구도 안으로 들여보내서는 안 될 것이다.”
“예 영감.”
군사들은 방 밖으로 나가 문을 닫았고 내 옆에 서서 나를 호위하고 있는 김개동과 사화동 뒤에 서있는 손대남 그리고 사화동 만이 방 안에 남아있었다. 나는 천천히 사화동을 내려다 보며 물었다.
“너를 찾은 이유를 알겠느냐?.”
내 질문에 사화동은 침착한 모습을 보이며 차분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곧 출병하시는 것 아니십니까. 그래서 소인을 부르신 것이겠지요.”
“제법이구나. 아무도 알려주지 않았을 텐데. 출병하는 것은 어떻게 알았느냐?.”
이번 질문에도 사화동은 침착하게 대답했다.
“옥 안에 있어도 귀와 코를 막고 살지는 않사옵니다. 잔치를 준비하는지 고기 냄새가 진동을 했고 군사들이 모여서 요란한 소리를 내고 있으니 출병을 앞두고 잔치가 벌어진 것이 아니겠습니까. 소인 그 정도 눈치는 있는 놈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