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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환
드베로의 대답에 소아르스는 화를 내며 말했다.
“그렇게 대단한 놈들이 갤리온도 모르는 것이 말이 됩니까. 제까짓 놈들이 대단해 봐야. 얼마나 대단하겠습니까?”
드베로는 이제 화도 내지 않고 소아르스를 비웃으며 말했다.
“겐타로가 조선에 대해 설명한 것을 믿지 않는 모양이구나. 조선은 일본보다 작지 않은 나라일 뿐만 아니라 이미 200년 전부터 화약무기를 사용했다고 한다. 조선인들은 200년 전부터 이미 대포를 만들었고 사용했다는 말이다.”
조선인들이 200년 전 부터 화약과 대포를 사용했다는 말에 소아르스는 놀랐다. 유럽에 화약이 전파된 시기는 13세기에서 14세기로 알려져 있으며 본격적으로 유럽 국가들이 전쟁에 화약과 대포를 사용하기 시작한 것은 1400년대 후반이었다. 조선인들이 200년 전부터 화약과 대포를 사용했다면 유럽 국가들이 대포를 본격적으로 사용한 기간과 비교해 봐도 그리 뒤처지지 않는 다는 뜻이었다.
“그게 사실입니까. 일본은 우리에게서 화약과 화승총을 구매하기 전까지는 화약무기를 사용하지 못했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조선은 200년 전부터 화약무기를 사용했다니 그것이 가능합니까?”
소아르스는 그동안 들어보지도 못한 조선이라는 나라가 유럽의 국가들이 본격적으로 대포를 사용했을 무렵에 대포와 화약을 보유하고 있었다는 말을 믿기 어려웠다.
“왜? 조선이 일본보다 미개할 것 같아? 조선수군의 전선에 대포가 있는 것을 보지 못했느냐? 배의 크기는 갤리온 보다 작아도 제법 튼튼해 보이는 배였다. 대포도 제법 많아 보였고 겐타로의 말에 의하면 조선이라는 나라는 이미 100여 년 전에 전선 100척과 군사 만여 명을 동원해 일본을 공격한 적도 있다고 한다. 쓰시마 섬이라는 일본의 섬을 공격했다고 하던데 이번에 조선수군이 하는 것을 보면 그곳에서도 어떻게 했을지 짐작할 수 있는 일이지.”
드베로의 말에 놀란 소아르스는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드배로는 그런 소아르스에게 조심스럽게 말했다.
“내 눈앞에서 선장님의 목을 친 놈들이다. 나도 분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어쩌겠느냐. 선장님들과 고급선원들의 목을 아무렇지도 않게 자른 놈들이야. 조선인들에게 반항하면 나와 너는 물론 다른 선원들 까지 어떻게 될 것 같으냐.”
선장들의 최후가 생각났는지 드베로는 잠시 몸을 떨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조선인들은 우리가 반항하거나 자신들에게 협조하지 않으면 우리의 목도 아무렇지 않게 자르고도 남을 자들이다. 지난 며칠간 이들 조선인들을 보니 조선인들은 야만인도 아니지만 결코 신사도 아닌 것을 알 수 있었다. 선장님들이 처형당한 날 함께 처형당한 일본인들에 대해 알고 있느냐?”
“물론 알고 있습니다. 장교들과 성주의 심복들이 처형당하지 않았습니까.”
“조선인들이 그들을 처형한 후 그들의 머리를 바닷물에 절여 부대에 담은 것도 알고 있느냐?”
드베로의 말에 소아르스는 놀라며 말했다.
“사람의 머리를 잘라서 바닷물에 절였다는 말씀이십니까.”
“갑판장과 선원들은 낮에 선실에 내려가 있어서 보지 못했겠지만. 갑판에 있었던 나는 똑똑히 봤다. 오늘도 조선인들은 일본군과 전투를 벌여 일본군들을 죽이고 죽은 일본인들의 머리를 잘라서 바닷물에 절이는 것을 그리고 그 머리를 부대에 담아서 배에 실었다. 지금 갑판 한쪽에서 비린내를 풍기고 있는 부대가 바로 일본인들의 머리를 담은 부대야.”
사람의 머리를 잘라 가지고 간다는 말에 소아르스는 놀라서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조선에서는 적군의 머리를 잘라가는 것으로 전공을 입증한다고 하더군. 일본인들의 머리를 잘라가는 것은 전공을 확인할 증거를 가져가기 위한 행동이야. 이제 알겠지. 우리가 조선인들에게 협조하지 않으면 조선인들도 우리의 목을 쳐서 머리를 가져갈 것이라는 것을”
드베로의 말을 들은 소아르스는 놀란 나머지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10여년 이상 갤린온을 타며 산전수전을 다 겪은 그에게도 전공의 증거로 사람의 머리를 잘라가는 것은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1587년 4월 11일 후쿠에 섬에 좌수군이 상륙한지 6일째 되는 날
좌수영에서 출병한 지원함대는 좌수영에서 출항한지 이틀째 되는 날 오후에 복강도에 도착했다. 손대남과 항왜 오오타 스케마스가 뱃길을 안내했고 때맞춰 강한 바람이 불어주었기에 별 어려운 없이 복강도에 도착할 수 있었다. 김시민이 이끄는 전선들이 도착하자 나는 항구로 나가 김시민과 손대남을 맞이했다.
“어서 오게. 먼 길 오느라 수고 많았네.”
“대승을 거두셨다. 들었습니다. 축하드립니다. 좌수사 영감.”
김시민과 인사말을 나눈 후 우리는 복강성으로 들어가 좌수영으로의 귀환을 의논했다. 귀환계획을 세우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판옥선 16척, 관선 3척, 갤리온 3척에 좌수군 병사 2400명(지원함대 병력 포함)과 조선인 150명(왜구들에게 납치된 조선인들 일부는 히라도로 끌려가 구출에 실패했다.), 항왜 2100명(항왜들의 가족과 노예로 팔려갈 뻔 했던 여인과 아이들을 포함), 왜군포로 200명(후쿠에 섬과 히사카 섬에서 붙잡힌 왜군 병사들), 남만인 포로 42명(포르투칼인들)까지 총 4992명이 좌수영으로 돌아가야 했고 자세한 사정을 알지 못하는 김시민은 항왜들의 수가 2100명에 달한다는 것이 놀란 표정이었다.
“사람들만 데려가는 것으로 끝나는 일이 아니다. 이번 출병으로 노획한 병장기들과 왜구들의 수급도 좌수영으로 가져가야 우리 좌수군이 세운 전공을 인정받을 수 있을 것이다. 다행히 군량은 우후(김시민)가 충분히 싣고 왔고 복강성과 북성의 창고에 있는 곡식들도 있으니 좌수영으로 돌아가는 동안 양식이 부족하지는 않을 것이다.”
돌아갈 인원수를 듣고 놀랐던 김시민은 노획한 병장기와 왜군들의 수급까지 가져간다는 말을 듣고 기가 막힌다는 표정을 지으며 나를 바라보았지만 나는 얼굴에 철판을 깔고 말을 이었다.
“남만선은 40명 이하의 적은 인원으로도 항해를 할 수 있고 많은 수의 화물을 실을 수 있으니 노획한 병장기와 수급은 모두 남만선에 적재할 것이다. 그리고 항왜들도 최대한 남만선에 탑승하도록 조치할 것이다.”
포로로 끌려왔던 여인들과 아이들은 다시 갤리온에 탑승하는 것이 두려울 수도 있었지만 갤리온의 수송능력이 판옥선 보다 뛰어나니 어쩔 수가 없었다. 판옥선도 수송능력이 나쁘지는 않았지만 많은 수의 격군들이 필요한 판옥선은 격군들과 격군들이 먹고 마실 식량과 식수를 실어야 했으니 갤리온 보다 수송능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남만인 포로들은 남만선을 운행하는데 필요하니 남만선에 나눠서 탑승시키고 남만선 마다 군사 30명씩을 탑승시켜 남만선을 운행시키고 한편으로는 남만인 포로들을 감시한다. 남만선에 탑승하지 못한 항왜들은 전선에 나눠서 탑승시키고 특히 항왜들 중에서 사내들과 조선인들은 전선에 탑승시킨다. 왜군 포로들은 전선과 관선에 나눠서 태우고 전선의 노를 젓는데 동원한다.”
내가 대략의 방침을 설명한 후 그에 맞춰서 세부적인 계획을 세우는 것은 우후 김시민과 순천부사 이억기 그리고 녹도만호 이순신이 할 일이었다. 나는 3명의 명장들이 세부적인 계획을 세우는데 방해가 되지 않도록 방에서 나왔다.
“우후와 순천부사 그리고 녹도만호가 시장하지 않도록 저녁상을 늦지 않게 방으로 들여라. 나는 방에서 따로 저녁을 먹을 것이다.”
“알겠사옵니다. 좌수사 영감.”
내방으로 저녁상을 들이라고 명한 후 나는 자연스럽게 성주의 방으로 들어갔다. 방에 들어온 나는 저녁상이 들어오기를 기다리며 지금까지 기록한 일지를 꺼내 내용을 읽어보고 다시 정리했다. 지원함대를 기다리는 동안 추가로 전과를 올리고 군사들을 긴장시키기 위해 실행한 히사카섬 정벌과 나카도리섬 정벌은 성공적이었다. 나카도리섬에서 안 좋은 추억도 있었지만 갤리온으로 나카도리섬에 다녀오는 것에 성공하면서 좌수군으로 갤리온을 운용할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지게 됐고 실제로 나카도리섬에 다녀온 군사들은 다녀오는 동안 갤리온에서 포르투칼인들의 설명을 들으며 갤리온의 구조와 운행 방식을 배웠고 키와 돛대도 실제로 작동시켜 보면서 경험을 쌓았다.
나에게는 나카도리섬 정벌하면서 좌수군이 갤리온데 대한 경험을 쌓은 것이 가장 큰 성과였고 노획한 병장기와 왜군들의 수급은 정벌 과정에서 부수적으로 따라온 성과에 불과했다.
내가 직접 다녀온 나카도리섬 정벌도 만족스러웠지만 이순신 장군이 지휘한 히사카섬 정벌 역시 대성공이었다. 이순신 장군은 판옥선 2척과 관선 2척으로 히사카섬의 항구를 점령하고 군사 300명을 상륙시켜 왜군 50여명을 죽이고 60명 이상을 포로로 잡아왔다. 그와 더불어 항왜를 통해 히사카섬 주민들 가운에 돌산도에 거주하고 있는 항왜들의 가족을 찾아내 가족들이 모여서 살 수 있게 해주겠다고 설득해서 데려왔다. 그 결과 왜군 포로 60명과 항왜들의 가족들 40명 그리고 따라오면 굶지 않게 해주겠다는 말에 설득된 일본인들과 과부들에
왜군 포로들의 가족들 까지 100명의 일본인들 까지 후쿠에섬으로 데려왔으니 그 성과를 보고 받은 내가 놀랄 지경이었다.
좌수군이 후쿠에섬을 점령한데 이어서 히사카섬과 나카도리섬 까지 정벌하는데 성공하자 후쿠에섬의 일본인들은 물론 포르투칼인들도 나와 좌수군을 보는 눈빛이 달라졌다. 실제로 좌수영으로 가는 것에 동의한 항왜들 가운데는 왜군 포로들의 가족들도 있었고 스스로 좌수군을 찾아와 좌수영으로 보내줄 것을 자청한 일본인들도 있었다. 그동안의 일을 모두 정리해서 일지에 기록한 나는 생각에 잠겼다.
‘고토열도 정벌은 대성공이다. 조선인들을 모두 구출하지는 못했지만 200여 명 중에서 150명을 구출하는데 성공했고 항왜들의 가족들도 대부분 좌수영으로 데려가며 무엇보다 겔리온을 3척이나 확보했으니 이 이상 욕심을 부릴 필요가 없어. 귀환할 준비가 끝나는 대로 곧바로 좌수영으로 돌아간다.’
조선으로 떨어진지 3달 밖에 되지 않았지만 그동안 대부분의 시간을 좌수영에서 지낸 덕분에 이제는 전라좌수영이 집처럼 생각됐고 좌수영으로 돌아간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편했다.
‘문제는 좌수영으로 돌아간 다음이겠지 갑자기 3000명에 가까운 항왜들과 포로들을 데려가면 좌수영에 남아있는 장수들은 기겁을 할 거야. 그리고 항왜와 포로들의 처분도 조정. 정확히는 선조의 허락을 받아야 하는 일인데.’
조정과 선조에서 이번 정벌을 설명하고 전공을 인정받는 것은 별로 걱정하지 않았다. 선조와 정언신 대감은 이미 고토열도 정벌에 대해 알고 있었고 선조는 이번 정벌을 알고서도 묵인했으니 내가 고토열도 정벌에 성공한 이상 나를 쉽게 팽할리는 없다고 생각했다.
‘선조라면 고토열도 정벌에 성공한 사실을 자신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사용하고도 남을 사람이지. 나를 좌수사에 제수한 것도 파격적인 승진이었으니 자신이 사람 보는 눈이 있어서 나를 좌수사에 제수한 것이라고 주장할 수도 있고. 왜군 포로들은 참수당하기 쉽겠지만 항왜들은 이미 돌산도에 항왜들을 수용한 이력이 있으니 돌산도를 벗어나지 않게 하는 조건으로 좌수군에서 수용할 수 있을 것 같고 문제는 갤리온의 처분인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