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무와 기회
포구에 도착하기 무섭게 염전으로 발걸음을 재촉한 나는 내가 도착했다는 소
식을 듣고 나오던 조천군과 마주쳤다.
“조군관 수고가 많네.”
“좌수사 영감 안녕하셨습니까.”
내가 방문한다는 연락도 없이 갑자기 돌산도에 나타나자 조천군은 당황하면서
놀란 기색을 보였다.
‘어느 부대건 갑자기 상급부대장이 방문하면 난리가 나는 법이지. 대대급 부
대에 갑자기 사단장이 나타난 격이니 조천군이 놀라는 것도 무리는 아니지.’
조천군을 놀라게 하려던 생각은 없었기에 조천군의 놀라는 모습을 보자 미안
한 마음이 들었다.
“너무 놀라지 마시게 돌산도에 먹는 입이 늘었으니 곡식을 좀 가지고 왔네.
보리 300섬을 가져왔지. 그동안 밀린 좌수영의 공무도 어느 정도 마무리 됐기
에 곡식을 가져오는 김에 염전과 둔전도 살펴볼 생각을 직접 온 것이니 너무
긴장하지 마시게.”
나는 웃으며 말했지만 조천군은 군기가 든 모습으로 대답했다.
“좌수사 영감께서 돌산도에 이리도 많은 관심을 가져주시니 영광입니다. 소장
이 안내하겠습니다. 영감.”
나는 조천군의 안내를 받으며 소금을 생산하고 있는 염전과 콩을 심은 밭을
둘러보았다. 염전은 저수지 마다 염분이 높은 바닷물이 가득히 저수되어 있었
고 소금 생산을 앞둔 저수지에는 백색의 소금 결정이 빛을 발하고 있었으며
콩을 심은 밭은 얼마 전 까지 황무지였던 땅을 갈아서 만든 밭으로 보이지 않
을 정도로 잘 정돈되어 있었다.
“저수지 마다 바닷물이 가득하게 차있고 밭은 반듯하게 정리되어 있군. 수고
가 많았네. 염전과 밭의 상태를 보니 조군관이 얼마나 신경을 써서 살폈는지
알겠어. 정말 수고 많았네.“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좌수사 영감.”
조천군은 겸손하게 대답했지만 겸손한 대답과는 다르게 얼굴은 좋아하는 기색
이 역력했다.
“조군관이 돌산도를 책임지고 돌봐주었기에 나는 안심하고 오도를 정벌할 수
있었어 조군관이 든든하게 돌산도를 지켜주고 잘 관리한 것을 내 결코 잊지
않겠네.”
좌수군의 군관들 중에서도 고토열도 정벌에 참가했던 손대남, 최도진, 김윤
문, 허원종 등의 군관들은 이번 정벌의 전과로 포상을 받을 것이 확실했지만
좌수영을 지키고 있었던 장수들과 조천군 처럼 다른 임무를 맡아서 정벌에 참
가하지 않은 군관들은 별다른 상이 없을 것이다. 돌산도의 둔전과 염전의 중
요성을 잘 알고 있는 나는 조천군을 격려하고 위로하지 않을 수 없었다.
“좌수사 영감.”
조천군은 감격했는지 고개를 숙였고 나는 그런 조천군을 다시 한번 격려한 후
당부의 말을 잊지 않았다.
“항왜들의 수가 크게 늘어 많이 힘들었을 것이네. 그동안 신경 쓰지 못해서
미안할 뿐이야 돌산도에 군사를 증원하기로 했으니 앞으로는 일손이 부족하지
는 않을 것이네.”
군사들을 증원한다는 말에 조천군은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보았다.
“지금 돌산도에 4개 대(隊)의 군사들이 주둔하고 있지. 항왜들의 수가 늘어난
만큼 돌산도에 주둔하고 있는 군사의 수를 2개 여(旅)로 증원하기로 했네. 오
늘 중으로 군사들이 도착할 것이니 그 군사들도 조군관이 지휘하도록 하게.”
군사들을 증원한다는 말에 조천군은 크게 놀란 표정을 지었다.
‘조군관이 놀라는 것도 무리가 아니지 군사의 수가 2.5배로 늘었으니.’
조선군의 편제로 오(伍)는 군사 5명, 대(隊)는 25명[5개 오(伍)] , 여(旅)는
125명[5개 대(隊)]으로 구성된다. 돌산도의 주둔중인 군사들은 4개 대 100명
에 불과했지만 2개 여로 증원되면 250명으로 늘어나는 것이다. 조천군은 갑자
기 지휘해야할 군사들이 늘어나서 업무가 늘어나겠지만 군사들은 일손이 늘어
서 좋아할 것이다.
“소장을 믿고 군사를 증원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영감”
잠시 놀란 것 같던 조천군은 곧 침착하게 대답했고 나는 그런 조천군을 보며
만족했지만 당부해야 할 말이 있었기에 엄숙한 말투로 말했다.
“그리고 한 가지 당부할 것이 있네. 항왜들 가운데 여인들이 많은 만큼 군사
들의 기강을 바로 잡는 것을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할 것이네. 무슨 말인지 알
겠지.”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느낀 조천군은 진지한 자세로 대답했다.
“항상 명심하겠습니다.”
“좌수군의 군사들이라도 항왜(여인)를 겁탈하는 자는 무조건 사형에 처할 것
이네. 참수하여 그 목을 좌수영에 효수할 것이니 군사들에게 알리도록 하게.”
“예 좌수사 영감.”
“여인의 동의를 구하고 정을 통했다고 할지라도 조건이나 대가를 빌미로 정을
통했다면 겁탈한 것으로 여겨 참수할 것이고. 여인과 서로 좋아서 정을 통했
다면 좌수영에서 혼례를 치러줄 것이니. 혼례까지 올릴 각오가 아니면 여인과
종을 통할 생각은 하지 말라고 알리게 알겠는가.”
“예 좌수사 영감 군사들에게 알려 불미스러운 일이 없도록 하겠습니다.”
조천군은 군기가 바짝 든 표정으로 대답했고 나는 그만하면 됐다고 판단했다.
‘이 시대에 조선에서 조선인이 일본여자와 결혼을 한다. 그것도 정해왜변이
일어난 지 몇 달 안 되는 지금 동네사람들에게 손가락질 받을 일이지. 항왜와
혼인까지 하겠다고 쉽게 생각하는 놈들은 없을 것이고 여인을 겁탈하는 놈들
은 목을 쳐서 효수하겠다고 했으니. 함부로 여인들에게 집적대는 놈들은 없겠
지.’
내가 역사를 공부하면서 그리고 해병대와 특전사에 있었으면서 실감한 것이
군기가 바로 서지 못한 군대는 강한 군대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이었다. 고대시
대부터 약탈과 강간에 익숙한 군대는 적 앞에서 쉽게 무너졌다. 전장으로 나
가면서 지나가는 마을을 약탈하고 부녀자들을 강간했던 군사들이 전장에서 용
감하게 싸웠던 적은 없었다. 중세유럽시대의 용병들은 전세가 불리하다고 보
이면 적군 앞에서 도망가는 일이 빈번했고 심지어는 도망치면서 의뢰인 군대
의 군량과 보급품을 약탈하는 일도 있었다. 군의 기강을 바로 잡기 위해서도
군사들의 강간과 성폭행은 강력하게 처벌할 필요가 있었다.
‘군사들이 항왜들을 함부로 여기지 못하게 하는 것은 항왜들을 불쌍히 여겨서
가 아니라 좌수군의 군기를 무너트리지 않기 위해서다. 곧 임진왜란이 발발할
텐데 이곳 전라좌수군의 군사들은 왜군으로부터 조선을 방어할 핵심전력이다.
전라좌수군을 강철같이 단련시키지는 못할망정 이들의 군기를 추락시켜 놓고
이순신 장군께 넘겨드릴 수는 없지.’
조천군에게 당부의 말을 마친 후 조천군을 돌려보낸 나는 항왜들을 만나러 갔다.
“장군님.”
사화동을 비롯한 항왜들은 나를 발견하기 무섭게 땅에 엎드려 절을 했다.
“그만 일어나라. 그동안 잘 지냈느냐?”
“장군님의 은혜로 굶주리지 않고 잘 지내고 있습니다.”
사화동의 말을 들으며 나는 웃었다.
“입에 발린 말 할 것 없다. 너와 이와마츠 요시히 둘만 따라 오거라.”
항왜들이 살고 있는 마을에서 가장 큰 집으로 들어간 나는 곧장 방 안으로 들
어갔다. 김개동과 일본어를 통역할 병사가 나를 따라 방안으로 들어오자 잠시
후 사화동과 이와마츠 요시히 그리고 여인 두 명이 방안으로 따라 들어왔다.
“여인들은 밖으로 내보내라 너희 둘에게 이야기할 것이 있다.”
사화동이 여인들에게 나가라고 하자 여인들은 고개를 숙이며 밖으로 나갔고
나는 사화동과 요시히를 바라보며 말했다.
“나는 주상전하께 고토열도를 정벌한 것과 고토열도에서 여인들과 아이들을
구출한 사실을 보고하는 장계를 올렸다. 곧 조정에서는 내가 올린 장계를 확
인하기 위해 한성으로 나를 부를 것이다. 나는 그때 항왜들 중에서 여인과 아
이들로 몇 명 데려 가려고 한다. 좌수군이 이번에 올린 전공을 증언할 증인들
인 셈이지. 어려울 것은 없다. 그들이 겪은 일을 사실대로 말하면 되니까.”
내말을 들은 사화동은 조심스럽게 물었다.
“장군님과 함께 한성으로 올라간다니 정말 영광입니다. 그럼 어떤 이들을 준
비시키면 되겠습니다. 장군님께서 허락하신다면 소인이 직접 장군님을 모시고
상경해도 좋습니다만.”
사화동의 질문에 나는 단호하게 대답했다.
“항왜는 여인과 아이들만 데려갈 것이다. 여인 다섯에 아이는 셋으로 하고 아
이들은 상경하는 여인들의 자녀인 것이 좋겠구나. 어미와 아이가 함께 상경하
는 것이지. 아이가 없는 젊은 여인 셋과 어린 아이가 있는 여인 둘로 선발하
는 것이 좋겠다. 그리고 사화동은 물론 사내들은 안 된다.”
말을 마친 나는 잠시 사화동과 요시히를 바라보며 다시 말을 이었다.
“고토열도에서 병사로 있었던 포로들도 10명 정도 한성으로 데려갈 생각이다.
여인과 아이들은 자신들이 겪은 일을 솔직하게 말하기만 하면 크게 어려울 것
없겠지만 포로들은 내가 선처를 부탁한다고 해도 처형당할 가능성이 크다.”
일본어를 통역하는 병사가 내가 한 말을 일본어로 전하자 이와마츠 요시히는
몸을 떨었고 사화동도 짐작하고 있었던 일인지 자신의 무릎을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알겠느냐? 아무리 항왜라도 사내가 가면 위험해질 수 있다. 그러니 여인과
아이들만 데려가려는 것이다.”
내말을 들은 이와마츠 요시히는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보며 대답했다.
“장군님의 은혜에 감사드리며 장군님의 뜻에 따를 여인과 아이들을 고르도록
하겠습니다.”
병사의 통역으로 이와마츠 요시히가 한 말을 전해들은 나는 단호하게 말했다.
“내가 시키는 대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사실 그대로 말해야 한다. 잘못해서
거짓을 말한다는 의심을 받으면 여인들은 물론 나도 위험해지니 사실 그대로
말해야하는 것을 잊지 말아라.”
“예 장군님.”
사화동과 요시히는 거의 동시에 나에게 절을 올리며 대답했다. 사화동과 요시
히의 대답을 들은 나는 잠시 그들을 바라본 후 다시 입을 열었다.
“너희가 나에게 충성하는 개가 되겠다고 한 말을 기억하느냐?”
“기억합니다. 소인은 평생 장군님께 충성할 것입니다.”
사화동과 요시히가 당연하다는 듯이 대답하자 나는 조용히 그들에게 물었다.
“너희의 각오가 그렇다면 내가 너희에게 기회를 주려고 한다. 어떠냐. 내가
시키는 일을 할 수 있겠느냐?”
“소인 장군님의 은혜를 크게 받았습니다. 장군님 덕분에 목숨도 건지고 부인
도 다시 만났으니 그 은혜는 결코 잊지 못할 것입니다. 소인은 장군님께 충성
하는 개에 불과하니 어떤 일이든지 시켜만 주십시오. 장군님”
사화동과 요시히는 내말이 끝나기 무섭게 무슨 일이든 시켜만 달라고 외쳤고
나는 그런 그들에게 임무를 내렸다.
“남만인들 중에 왜어를 하는 이가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누구인지 아느냐?”
“예 항해사 3명은 다들 왜어를 듣고 대답할 수 있고 그 중에서는 드베로가 제
일 잘합니다.”
사화동의 대답을 들은 나는 잘됐다고 생각했다.
‘그동안 일본을 드나든 덕분인지 항해사들은 일본어가 되는 모양이구나. 항해
사들을 살려두기를 잘했다.’
“남만인들 중에서 왜어를 할 줄 아는 이가 항해사들 말고는 없느냐?”
혹시나 하고 한 질문인데 이번에는 이와마츠 요시히가 대답했다.
“곤잘레스라는 남만인도 왜어를 할 줄 압니다.”
“잘됐다. 이제부터 둘은 내말을 잘 듣고 내가 시키는 대로 해야 한다. 알겠느
냐.”
“예 무엇이든 말씀하십시오. 장군님.”
둘은 자신 있게 대답했고 나는 그 둘에게 또 하나의 임무를 내렸다.
“조천군 군관에게는 내가 이야기를 해 놓을 것이 곧 남만선에 오를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왜어를 할줄 아는 좌수군 군사들이 함께 남만선에 오르겠지만
남만선에서 일할 항왜는 너희가 선발할 수 있게 해주마. 너희는 처자식이 돌
산도에 있는 항왜들 중에서 배를 모는 일에 익숙하고 체력이 좋은 자들을 선
발해 남만인들과 함께 남만선을 점검하며 남만인들에게 남만선을 모는 법을
배워야 한다.”
“남만선을 말입니까?”
사화동이 놀란 표정으로 묻자 나는 사화동을 바라보며 대답했다.
“내가 기회를 주겠다고 하지 않았느냐. 남만선을 몰고 바다를 건널 정도로 남
만선에 대해 잘 알아야 하고 열심히 배워야 할 것이다. 이번 일만 성공하면
너희에게 더 큰일을 맡길 것이다.”
내말이 끝나기 무섭게 사화동과 요시히는 내게 절을 하며 외쳤다.
“장군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