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수군이 되었다. 93화
역시 이곳은 위험해
“그러나 과인의 허락을 구하지 않고 전라좌수사가 단독으로 군사를 출병시킨 것은 용서받을 수 없는 큰 죄이다.”
순간 편전에 정적이 흘렀다.
“전라좌수사는 과인의 허락도 없이 군사들을 출병시킨 책임을 혼자 지겠다고 했다. 기억하고 있느냐?”
나는 선조의 질문에 침착한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지금도 그 마음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전하.”
내 대답을 들은 선조는 어른이 어린아이를 대하듯이 나에게 물었다.
“좌수사의 나이가 22세라고 들었다.”
“그렇습니다. 전하.”
내 대답을 들은 선조는 책망하는 말투로 나에게 물었다.
“전라좌수사는 정3품의 당상관이고 전라좌도의 전체 수군을 지휘하는 요직이다. 22세의 어린 나이에 전라좌수사까리 올랐으면 그 자리에 만족해도 충분할 것이다. 그런데 좌수사는 무슨 욕심으로 과인의 허락도 받지 않고 군사를 일으켰느냐?”
“조선을 지키는 것이, 바다를 지키는 것이, 그리고 백성들을 보호하는 것이 저를 전라좌수사로 제수하신 주상전하의 은혜에 보답하는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옵니다. 전하.”
선조는 순간 얼굴에 미소를 띠었지만 재빨리 미소를 지우고 근엄한 태도로 말했다.
“전라좌수사는 자세히 말하라.”
“지난 전란 당시 소장은 선봉이었지만 왜구들에서 승리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저희 전라좌수군은 왜구들에게 패해 좌수사 영감까지 왜구들에게 참살당하는 치욕을 겪었습니다. 선봉의 임무를 감당하지 못한 소장은 죽어 마땅한 죄인이었으나 전하께서는 소장에게 패전의 죄를 묻지 않으셨을 뿐만 아니라, 전라좌수사로 제수하시는 은혜를 베푸셨나이다. 소장은 전하께서 내리신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 왜구들을 토벌하고 조선의 바다를 지키며 조선의 백성들을 보호하려고 하였나이다. 왜구들을 토벌하고 백성들을 구출하는 것이 곧 주상전하의 은혜에 보답하는 길이라고 생각하였나이다. 전하.”
내 대답을 들은 선조는 만족한 표정을 지었고 조정의 대신들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좌수사가 과인에게 고하지도 않고 군사를 일으킨 것은 분명한 잘못이다. 그러나 역심을 품고 사사로운 욕심으로 저지른 일이 아니었고, 왜구들을 토벌하고 백성들을 구하였으니 그 전공이 작지 않다. 전라좌수사의 죄와 공을 상쇄(相殺)하는 것이 어떻겠는가?”
“탁견(卓見)이십니다. 전하.”
선조의 질문에 대신들이 마지못해 대답하자, 나는 선조에게 엎드려 외쳤다.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전하.”
‘이제 됐다. 이것으로 조정의 허락 없이 고토열도를 정벌한 것은 넘어가는구나.’
처벌받지 않는 대신 전공에 대한 포상은 없겠지만, 이미 고토열도를 정벌하면서 갤리온과 화승총을 비롯해 많은 전리품을 얻었다.
게다가 히라도를 통해 도자기 무역도 시작할 예정이었으니 포상을 받지 못하는 것은 아쉽지 않았다.
조정의 대신들 중에서 특별히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이 없자, 선조는 근엄한 표정을 지으며 내게 말했다.
“전라좌수사 이대원은 들으라. 좌수사와 전라 좌수영의 군사들이 오도의 왜구들을 토벌하고 조선의 백성들을 구해온 것은 장한 일이나 모든 일은 원칙에 맞게 절차를 거쳐서 진행해야 하는 법이다. 비록 좌수사와 좌수영의 군사들이 큰 전공을 세운 것은 사실이나 출병하는 것을 조정에 알리지도 않고, 과인의 허락도 없이 군사를 일으켰으니 그 죄는 결코 가볍지 않은 것이다. 그러나 백성들을 구하기 위해 출병한 좌수사의 용기와 부하들을 대신해 모든 책임을 지려고 하는 좌수사의 덕을 가상히 여겨 이번 일을 불문에 부치고 다시는 죄를 묻지 않을 것이다. 알겠느냐?”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전하. 전하께 충성을 다하여 조선의 바다를 지키는 방패가 되겠나이다.”
나는 선조 앞에서 엎드리며 큰소리로 외쳤고 선조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선조에서 충성을 맹세한 것이 효과가 있었는지 선조는 뜻밖에 보너스를 내렸다.
“좌수사는 비록 공과 죄를 상쇄하여 상을 내릴 수는 없으나 왜구들과 용감히 싸운 좌수영의 장수들과 군사들에게도 상을 내리지 않는 것은 도리가 아닐 것이다. 전라좌수영에 비단 50필과 면포 3,000필을 내리고 백미 1,000섬과 보리 2,000섬을 내릴 것이니 왜구들을 토벌하는 데 공을 세운 장수와 군사들에게 상을 내리도록 하라.”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전하.”
이번에는 나뿐만 아니라 조정의 대신들이 일제히 선조에게 외쳤다.
* * *
전라도 순천부 전라좌수영.
한성에서의 모든 일이 끝나고 좌수영으로 돌아왔을 때는 벌써 4월이 끝나가는 시점이었다.
좌수영이 있는 순천부에서 한양까지 가는 시간만 3일이 걸렸고 한성에서 7일을 머물렀으며 다시 한성에서 좌수영까지 돌아오는 시간까지 더하자 꼬박 보름 가까운 시간을 보냈다.
한성에서 이렇게까지 시간을 보낼 줄 몰랐던 나는 한성에서 머무는 시간이 예상보다 길어지자 돌산도를 관리하고 있는 군관 조천군에게 서신을 보내 사화동을 비롯한 항왜와 포르투칼 선원들 그리고 좌수군 군사들을 동원해서 갤리온을 출항시킬 것을 명령했다.
이토 겐타로와의 약속 시간을 맞추기 위해서였다.
사화동에게 이토 겐타로와의 거래를 맡기는 것이 불안하기는 했지만 일본인과의 밀수를 조선인에게 맡길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다행히 사화동과 선원들은 무사히 고토열도의 무인도에 다녀왔고 좌수영에 돌아온 나는 이토 겐타로가 보낸 서신을 확인할 수 있었다.
“청자가 80점, 백자가 40점에 다완과 조선 인삼을 찾는 상인들도 있다고…… 이놈이 아주 나를 장사꾼으로 보고 있군.”
겐타로가 보낸 서신을 읽으며 겐타로가 건방지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첫 거래에 120점 이상의 도자기를 주문받은 것은 기쁜 소식이었다.
‘한 달 후에 도자기를 가져가겠다고 했으니…… 고토열도까지 가는 시간을 계산해도 아직 열흘 정도 시간이 남았다. 다완은 지금이라도 도공들에게 주문하면 열흘 안에 제작할 수 있을 것 같고, 청자와 백자는 도공들이 이번 달에 가져온 것까지 200점 이상이 있으니 충분한 셈이지. 좋아, 우선은 도공들에게 다완을 주문하자.’
이언세에게 다완의 그림을 그려주며 백자를 만드는 도공들에게 다완을 주문할 것을 지시한 나는 곧바로 방을 나왔다.
“돌산도로 갈 것이다. 준비하라.”
“예. 좌수사 영감.”
이번에 한성에 다녀오면서 나는 느낀 점이 많았다.
‘전공과 상쇄하는 조건으로 고토열도로 출병한 죄는 묻지 않기로 했고, 갤리온과 전리품들도 내 마음대로 처분하라고 했으니 내가 이익을 본 것이 맞지만…… 역시 선조는 상관으로 모실 사람이 아니야.’
* * *
지난번에 상경했을 때와는 달리 이번에는 정언신 대감의 집이 아닌 훈련원을 숙소로 잡아 지냈기에 정언신 대감과 깊은 대화를 나눌 기회는 없었다.
정언신 대감과 대화를 나누고 싶기는 했지만 정언신 대감은 병조판서였고 나는 죄를 지은 상황에서 상경한 것이었으니 정언신 대감을 만나는 것은 서로에게 좋을 것이 없는 일이었다.
결국 아쉬운 마음을 달래고 좌수영으로의 귀환을 준비하던 나는 한성을 떠나기 전날 밤 선조의 부름을 받아 입궐했다.
경복궁의 작은 전각에서 독대한 선조는 나를 칭찬하는 것으로 시작됐다.
“수고가 많았다. 좌수사가 군사들을 잘 다루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그 짧은 시간에 오도를 정벌할 줄은 몰랐다. 몇 달의 시간이 더 걸릴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는데 장하구나. 정말 수고가 많았다.”
“소장을 믿고 돌봐주신 전하의 은총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전하.”
“좌수사는 검술과 궁술만 능한 것이 아니라 언변(言辯)과 아부 실력도 대단하구나.”
언변과 아부가 대단하다는 선조의 말에 나는 등에 식은땀이 흐르는 것을 느꼈다.
“좌수사가 과인 앞에서 그 정도의 언변 실력을 자랑할 줄은 몰랐다. 좌수사의 언변을 들어보니 변방보다는 조정에 들어와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선조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나는 다급하게 대답했다.
“전하 황송하오나. 소장은 아직 좌수영에서 해야 할 일이 많사옵니다. 돌산도와 절이도의 둔전은 아직 추수도 하지 못했고 항왜들을 정착시키는 일도 쉬운 일은 아니옵니다. 소장이 시작한 일이니 소장이 마무리 지을 수 있게 허락해 주시옵소서. 전하.”
“그래. 장계만 봐도 좌수사가 좌수영에서 할 일이 많은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런데 남만인들의 우두머리를 참하고 선원들을 압송했다고 하던데 한성에는 데려오지 않았더구나. 항왜들은 대부분 여인들과 아이들이라고 하였으니 돌산도에 있는 포로들과 짝을 지워주면 될 것인데 왜구들에게서 빼앗은 전리품들도 어찌 처리하겠다는 말이 장계에는 없었다.”
‘어째 일이 쉽게 끝난다고 생각했었다.’
나는 그 자리에 엎드려 선조에게 외쳤다.
“전하 소장의 충심(忠心)을 의심하시나이까? 좌수영의 사정이 너무나 좋지 않아 왜구들에게서 빼앗은 전리품이라도 사용할 수 있는 것은 사용하고 사용하지 못할 정도로 망가진 것들은 녹여서 괭이와 삽을 만들려 하옵니다. 항왜와 포로들 역시 돌산도의 땅을 갈고 바다에서 물고기를 잡게 해 조금이라도 좌수영의 군량과 군비를 마련하는 데 도움이 되게 하려는 것이니 부디 소장의 충심을 믿어 주시옵소서. 전하.”
말로는 선조에게 믿어달라고 했지만 나는 머릿속으로 생각했다.
‘선조가 진심으로 나를 의심했거나 파직시킬 생각이었다면 조정의 대신들이 있는 자리에서 추궁하지 이런 자리에서 추궁하지는 않았을 거야. 선조가 나를 길들이려고 하는 것이 확실해.’
“하하하. 과인이 좌수사를 의심했다면 좌수사의 수급은 이미 효수되었을 것이다.”
선조는 호탕하게 웃으며 말했지만 선조의 말을 들은 나는 소름이 끼쳤다.
‘선조는 능히 그럴 수 있는 인간이야.’
“과인은 좌수사의 충심을 믿는다. 좌수사가 지난 전란 당시 왜구들에게서 획득한 전리품과 왜선으로 사사로운 욕심을 채우지 않고 좌수영을 재건하기 위해 사용한 것도 과인은 이미 알고 있다. 이번에 획득한 전리품과 남만선 역시 좌수영을 위해 잘 사용할 것을 믿고 좌수사에게 모든 처분을 맡기도록 하겠다.”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전하”
“좌수사는 바다를 잘 지켜왔고 왜구들도 토벌했으니…… 다음에는 북방을 지키고 야인들을 토벌하는 것이 어떠한가.”
‘북방이면 6진 지역, 야인이면 여진족.’
생각하지도 못했던 전개에 나는 대답하지 못했고 선조는 그대로 결정지어 버렸다.
“장수는 전장에 있어야 가치를 드러내는 법이니 내년 초, 좌수사를 북방으로 올려보내 주겠다. 북방에서 야인들을 상대로 용맹을 마음껏 자랑하도록 하라.”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전하”
* * *
선조의 독대는 그렇게 끝났지만 앞으로는 두 번 다시 경험하고 싶지 않았다.
‘아무래도 여기는 너무 위험해. 언제 선조의 마음이 바뀔지도 모르고 갤리온과 전선들을 사용하지 못하게 되면 도자기 무역도 북해도 진출도 끝장이다. 지금부터 본격적으로 북해도로 진군할 준비를 하자.’
돌산도로 가기 위해 항구로 향하던 중에 이언세가 나를 찾았다.
“좌수사 영감. 영감께 손님이 찾아오셨습니다.”
“손님이라니 누구냐?”
“홍문관 수찬을 지내신 정여립 나리이십니다.“
정여립이 좌수영에 도착했다고 하자 나는 이번 기회에 정여립을 돌산도로 데려갈 생각을 했다.
“죽도 선생이 오셨다니 잘됐다. 죽도 선생을 이곳으로 모셔라. 돌산도로 모실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