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수군이 되었다. 94화
위위구조(囲魏救趙)
“이것은 무엇이오?”
갤리온을 처음 본 정여립은 놀란 얼굴로 갤리온을 바라보며 물었다.
“왜인들이 남만선이라고 부르는 배입니다.”
“남만선?”
“조선에서 서쪽으로 먼바다를 건너 한 달 이상을 가면 구라파(歐羅巴)[유럽]라고 하는 대륙이 있습니다. 구라파에는 10여 개의 크고 작은 나라들이 있고, 구라파에 있는 나라 중에서 포도아(葡萄牙)[포르투갈]의 상인들이 타고 온 배가 바로 이 남만선입니다. 왜인들은 구라파에서 온 사람들을 남만인이라 부르며 구라파 사람들이 타고 온 배를 남만선이라 부릅니다.”
나는 나름대로 친절하게 설명했지만 좌수영에 도착하자마자 나에게 붙잡히다시피 해서 돌산도까지 동행한 정여립은 아직도 무슨 영문인지 모르겠다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남만선은 그렇다 치고. 왜 나를 이곳까지 데려온 것이오?”
“배에 오르시죠. 자세히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말을 마친 내가 정여립의 대답도 듣지 않고 사후선에 오르자 정여립은 한숨을 쉬며 나를 따라 사후선에 올랐다.
나와 정여립이 사후선에 오르자 군사들은 사후선의 노를 저었고 사후전은 곧 갤리온에 다가갔다.
사후선이 갤리온의 측면 줄사다리가 걸쳐진 선체 앞에 멈추자 나는 아무 말도 없이 줄사다리를 타고 갤리온의 갑판으로 올라갔다.
무사히 갑판에 올라간 나는 정여립이 서툰 솜씨로 줄사다리를 타고 올라오는 것을 보고 손을 뻗어 정여립을 부축했다.
간신히 갑판 위로 올라온 정여립은 나를 바라보며 폭발할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이게 도대체 무슨 짓이오.”
정여립이 고함을 질렀지만 나는 차분한 목소리로 정여립에게 대답했다.
“이곳에서는 누구의 눈치도 볼 필요가 없습니다. 평소에는 배를 지키는 군사들이 상주하고 있지만 모두 내려보냈고 지금 남만선, 아니, 갤리온 안에는 저와 죽도 선생, 단 둘뿐입니다.”
내 말을 들은 정여립의 표정이 삽시간에 변했다.
“좌수사는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것인가?”
정여립은 심각한 목소리로 물었지만 나는 대답하지 않고 정여립에게 질문을 던졌다.
“죽도 선생은 무슨 일로 친히 좌수영을 방문하셨습니까?”
“그야 좌수사가 서신을 보내지 않았나. 좌수군의 장졸들이 조선의 바다를 지키기 위해 수고하고 있으니 장졸들에게 술과 고기를 보내달라고 말이네.”
나는 정여립의 대답을 들으며 웃었다.
한성에 있는 동안 정여립에게 서신을 보내기는 했지만 정여립이 진짜 술과 고기 때문에 좌수영에 온 것이 아니라는 것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는 일이었다.
“이곳에서는 솔직하게 말씀하셔도 됩니다. 설마 죽도 선생께서 저와 좌수군의 장졸들이 오도를 정벌하고 백성들을 구출한 것을 모르시지는 않을 것 아닙니까. 이미 좌수군이 오도를 정벌하면서 얼마만큼의 전공을 세웠는지는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내 말에 정여립은 놀란 표정을 지었다.
‘정여립이 고향에 은거하고 있지만 조정의 대신들과 서신을 주고받으며 조정과 한성의 소식을 전해 듣고 있었으니 내가 한성에 올라갔었던 일을 모를 리는 없지. 더구나 정언신 대감도 정여립과 서신을 주고받고 있으니.’
“궁금하지 않으십니까. 지난 전란에서부터 22세의 어린 장수가 어떻게 왜구들을 물리치고 좌수영을 수습했는지. 무슨 배짱으로 전하의 허락도 받지 않고 오도를 정벌했는지. 그리고 오리 영감(이원익)께서 안주목사로 제수되실 것과 평안도에 흉년과 돌림병이 돌 것을 어떻게 미리 알고 있었는지 말입니다.”
“자네, 정체가 뭔가?”
정여립의 목소리는 어느새 떨리고 있었다. 나는 자세를 바로 한 후 그 자리에서 엎드려 정여립에게 절을 올렸다.
“아니…… 이게 무슨.”
내가 갑자기 절을 올리자 정여립은 완전히 당황했고 나는 그런 정여립 앞에서 무릎을 꿇고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사태가 시급하여 무례를 범했습니다. 이 정도 방법이 아니면 죽도 선생께서 제 이야기를 진지하게 들어주시지 않을 것 같아 무례를 범하였으니 용서를 구합니다.”
정여립은 생각지도 못한 일이 연이어서 일어나자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래. 내 모든 것을 용서하고 좌수사가 하는 말은 팥으로 메주를 쑨다고 해도 믿을 것이니 이제 그만 일어나 자세히 말해보게.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인가.”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정여립을 선장실로 안내했다.
“이야기가 길어질 것 같습니다. 안으로 드시지요.”
선장실은 깨끗하게 정리되어 있었고 불을 밝힐 수 있도록 호롱이 준비되어 있었다.
선장실의 의자에 정여립을 앉히고 호롱불을 밝힌 나는 의자에 앉아 정여립을 바라보고 말했다.
“제가 하는 말은 절대로 허풍이나 거짓이 아니니 들으시고 놀라지 마십시오.”
정여립은 갈증이 나는 듯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어서 말해보게.”
“지난 전란 당시 저는 선봉으로 출정하던 중에 전선 안에서 정신을 잃었습니다. 제가 정신을 잃고 쓰러져 있는 동안 저는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을, 그러나 반드시 일어날 일들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왜구들과 싸울 때도 두려워하지 않고 싸울 수 있었습니다. 왜구들이 어떻게 움직일지 알고 있었기에 왜구들보다 한발 앞서서 움직였고 왜구들을 격퇴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평안도와 황해도 그리고 전라도에 흉년이 드는 것과 특히 안주에 돌림병이 돌아 이원익 영감께서 안주의 백성들을 구휼하게 되시는 것도 미리 알 수 있었습니다.”
“전란과 흉년 외에 자네가 본 것이 더 있는가?”
정여립은 놀란 표정으로 나에게 물었고 나는 곧바로 대답했다.
“앞으로 5년 안에 왜군이 조선을 침략할 것입니다. 올해 일어난 규모의 전란이 아닌 조선과 왜국 간의 전쟁이 벌어질 것이고 20만 명 이상의 왜군이 조선을 침략해 한성으로 진군할 것입니다. 그리고…… 왜군이 조선에 상륙한 지 한 달도 되지 않아 한성은 왜군에게 함락될 것입니다.”
임진왜란이 일어난다는 말에 정여립은 충격을 받은 표정을 지었다.
“조선군은 무엇을 하고 있었냐고 물으신다면, 왜군의 선봉인 소서행장(小西行長)[고니시 유키나가]의 병력만 해도 2만 명에 가까운 대군이었습니다. 경상우수사는 왜군이 공격해 오자 전선들을 침몰시키고 경상우수영에서 도망쳤으며, 그 모습을 본 경상우수군 병사들도 제각기 도망쳤습니다. 경상좌수사는 군사를 모아 싸워보려고 했지만 왜군이 워낙 대군이었기에 경상좌수영도 순식간에 왜군들에게 함락되고 말았습니다. 지상에서의 전투 역시 왜군들은 왜국의 전국시대를 거치면서 전투로 단련된 강병이었는데 비해 조선군은 대부분 농사를 짓다가 소집된 장정들이었으니 개개인의 전투력에서 큰 차이가 있었고, 결정적으로 왜군보다 조선군의 수가 너무 적었습니다. 말씀드렸듯이 왜군은 20만 대군에 선봉만 해도 2만에 가까운 대군입니다.”
잠시 말을 멈춘 나는 정여립을 바라보았지만 정여립이 아무 말도 없이 나를 바라보자 다시 입을 열었다.
“신립 장군과 이일 장군은 왜군을 저지하기 위해 출병했지만 조선군은 전투력에서도 숫자에서도 왜군의 상대가 되지 못했습니다. 신립 장군이 전사했다는 소식을 들은 전하는 한성을 버리고 평양으로 파천(播遷)하셨고, 왜군은 한성을 점령하고 전하를 쫓아 평양까지 진군하였습니다. 조선은 경상도는 물론 충청도와 경기도, 황해도, 평안도, 강원도, 함경도까지 왜군들에게 짓밟혔고 왜군에게 저항하는 자들은 왜군의 창칼에 죽임을 당했습니다. 길가에는 시신이 즐비했고 아비와 어미를 잃은 아이들은 울부짖었으며 여인들은 왜군에게 끌려갔습니다.”
“그만.”
정여립은 참지 못하겠는지 고함을 질렀다.
“그것을 알고 있으면서 왜 가만히 있는 것인가?”
정여립은 성난 목소리로 외쳤지만 나는 태연하게 대답했다.
“그럼 어찌하면 되겠습니까? 조정에 알리거나 전하께 말씀드린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요상한 말을 퍼뜨린다고 참수당하지 않을까요.”
정여립은 내 생각에 동의하는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어차피 지금의 조선으로는 왜국을 당해낼 수가 없습니다.”
“그게 무슨 말인가? 왜국을 당해낼 수 없다니.”
“전쟁도 재물이 있어야 할 수 있습니다. 재정에서도 조선은 이미 왜국의 상대가 되지 못합니다.”
정여립은 그렇지 않다는 듯이 말했다.
“무슨 근거로 그런 말을 하는가? 어떻게 왜국이 조선보다 부유하다는 말인가.”
나는 그런 정여립을 보며 한국에서 역사를 공부하던 시절이 떠올랐다.
‘나도 한때는 저런 생각을 했었지. 임진왜란은 조선이 전쟁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아서 일본에게 크게 당했을 뿐이고, 일본은 조총의 효과를 크게 본 것이라고. 그러나 그뿐만이 아니었어. 16세기 일본은 이미 조선과는 경제력에서 이미 큰 차이가 있었다.’
“왜국의 쌀 수확량이 얼마나 되는지 아십니까?”
내 질문에 정여립은 대답하지 못했다.
“모르겠네. 좌수사는 알고 있는가?”
“정확하지는 않아도 1,850만 석에 가깝습니다.”
일본은 전국시대로 인해서 오랜 기간 동안 전국적으로 토지 조사가 이루어지지 못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일본을 통일하고 나서야 토지 조사가 이뤄졌고 태합검지(도요토미가 실행한 토지 조사) 결과, 일본의 쌀 수확량은 1,850만 석으로 확인됐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조선을 침략하기 직전 조사한 조선의 쌀 수확량이 일본의 석(石) 기준으로 1,200만 석이었으니 일본은 이미 쌀 수확량에서도 조선을 능가하고 있었다.
“그 1,850만 석에서 세금으로 거두는 쌀이 얼마나 될 것 같습니까. 과연 조선에서 전세(田稅)로 거두는 쌀보다 적을 것 같으십니까? 일본은 농업 외에도 각지에 금광과 은광을 개발하는 광업이 성행하고 있고 상업도 활발하게 이뤄지고 있습니다. 일본은 이미 조선보다 월등히 부유하며 정부에서 거두는 세금도 조선과는 비교가 되지 않습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이전 조선의 토지는 150만 결 이상으로 예상되고, 1결의 토지에서 최대 300두(말)의 쌀을 수확했다.
적지는 않은 양이었지만 조선에서는 왕실 소유의 토지와 공신전을 비롯해 세금을 내지 않는 토지가 적지 않았고 수확량에 비해 중앙정부에 걷히는 세금도 적었다.
“그렇군…… 군사들을 무장시키고 먹이는 것도 재물과 쌀이 있어야 가능한 일이지.”
정여립은 한숨을 쉬며 안타까워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조선을 구할 방법은 조선에서 찾을 수 없었습니다.”
조선을 구할 방법이라는 말에 정여립은 눈을 크게 뜨고 나를 바라보았다.
“방법이 있겠나?”
“조나라를 구하기 위해서는 위나라를 공격해야 합니다.”
내 대답을 들은 정여립은 삼십육계를 떠올렸다.
“위위구조(囲魏救趙).”
위나라를 포위해서 조나라를 구한다는 뜻으로 춘추전국시대에 위나라의 군대가 조나라를 공격하자 조나라는 제나라에 구원을 요청했다.
조나라의 구원 요청을 받은 제나라는 군대를 출병시켰고 제나라 군대를 지휘하던 손빈은 위나라 군대가 진군하고 있는 조나라로 진군하는 것이 아니라 위나라를 직접 공격해 위나라의 수도를 포위했다.
위나라 왕은 수도가 포위되자 조나라를 공격 중이던 군대에 회군을 명령했고 결국 조나라에서 위나라 군대가 철수하게 된다.
“위나라를 공격할 군사들을 조나라에서 출정시킬 수는 없을 것입니다.”
정여립은 심각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며 물었다.
“왜를 공격할 군사들을 어디에서 출병시킬 생각인가?”
나는 품속에서 품고 있던 지도를 꺼내 탁자에 펼쳤다.
내가 직접 그린 지도로 일본과 조선 그리고 동해 바다가 그려진 지도였다. 나는 북해도를 가리키며 정여립에게 말했다.
“바로 이곳, 동해도입니다.”
“동해도.”
“정확한 섬 이름은 모르겠지만 조선의 동쪽 바다에 있으니 동해도라고 부르려고 합니다. 이 섬은 왜와 가까운 곳에 있지만 왜의 영토는 아닙니다. 섬의 남부 지역 일부만 왜인들이 점거하고 있을 뿐, 왜국과는 다른 나라입니다.”
지도를 바라보던 정여립은 북해도, 아니, 동해도를 가리키며 말했다.
“확실히 동해도에서 군사를 기른다면 왜국을 노리기에 좋은 위치이긴 하군. 총통으로 무장한 전선들이 동해도에서 출정한다면 왜국의 해안가 지역을 어디라도 공격할 수 있겠어.”
지도를 바라보며 잠시 생각에 잠긴 모습을 보이던 정여립은 내게 말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알려주게. 좌수사 영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