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수군이 되었다. 96화
마쓰다 다카노부
“지금 장난하자는 것이냐?”
내가 성난 목소리로 외치자 이토 겐타로는 고개를 조아리며 대답했다.
“죄송합니다. 장군님 그러나 저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나는 자기와 다완을 가지고 조선으로 돌아가면 그만이다. 내가 돈이 아쉬워서 너에게 기회를 준 것 같으냐?”
나는 고함을 질렀고 이토 겐타로는 고개를 조아리며 대답했다.
“제발…… 이놈, 한 번만 살려주십시오. 장군님을 꼭 뵙고 싶어 하시는 분이 계십니다.”
“이놈이 그래도 정말!”
내가 다시 고함을 지르자 이토 겐타로는 내 앞에 엎드려 내 다리를 잡으려고 했다.
말 그대로 내 바짓가랑이를 잡으려고 드는 모습에 나는 화를 참지 못하고 걷어차려다가 억지로 참았다.
‘도자기 무역은 큰 이익이 보장되는 거래다. 여기서 겐타로를 걷어차면 거래 상대를 다시 구해야 하는데…….’
나는 잠시 숨을 고르고 바다를 바라보며 어떻게 해야 할지 생각에 잠겼다.
전날 돌산도를 출발해 오늘 오전 후쿠에 섬 북쪽의 무인도에 도착할 때까지만 해도 모든 것이 순조로웠다.
바람도 잘 불었고 갤리온이 그 바람을 타고 달리니 판옥선보다 빠른 속도로 달리는 것이 가능했다.
그런데 예상보다 일찍 무인도에 도착해 보니 무인도 앞바다에는 왜선 한 척이 정박해 있었다.
마치 우리를 기다리는 듯이 정박해 있는 왜선을 발견하자 나는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 대포에 포탄을 장전할 것을 지시했고 좌수군의 갤리온들은 천천히 왜선을 향해 다가갔다.
왜선에서는 갤리온을 발견한 왜인들이 두 팔을 흔들며 외쳤고 잠시 후 배 안에서 이토 겐타로가 나와 그 모습을 드러냈다.
약속한 시간보다 일찍 도착했음에도 불구하고 이토 겐타로가 미리 와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자 나는 이번 거래가 순조롭게 진행될 것을 기대하고 이토 겐타로를 갤리온으로 불러들였다.
그런데 이토 겐타로는 내 기대와는 달리 뜻밖의 말을 꺼냈다.
“그러니까. 내가 히라도까지 직접 가서 거래를 하라는 말이냐?”
고토열도의 작은 섬이나 인근 무인도에서 상인들을 만나 자기와 다완을 판매할 생각이었던 나는 히라도까지 가야 한다는 말에 화가 났다.
“그렇습니다. 장군님. 장군님을 직접 뵙고 싶어 하시는 분이 계십니다.”
이토 겐타로의 대답을 들은 나는 간신히 화를 참으며 물었다.
“그래. 그 사람이 누구냐? 나를 직접 만나야 거래를 하겠다고 하는 사람이 대체 누구냐?”
이토 겐타로는 잠시 머뭇거리더니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저희 영주님의 아버지가 되시는 마쓰라 다카노부 나리이십니다.”
겐타로의 대답을 들은 나는 거물의 등장에 놀랐다.
‘뭐, 마쓰라 다카노부? 히라도 섬은 물론이고 히젠 지역도 일부분 통치하는 영주였잖아!’
“영주의 아버지라니…… 영주가 아닌 영주의 아버지가 나를 찾는다고?”
“예. 다카노부 나리의 아드님이신 시게노부 님이 저희의 영주님이십니다.”
겐타로의 대답을 들으며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어째 일이 잘 풀린다 했다. 마쓰라 다카노부가 부른다고 하니 이번 초대를 거절하면 히라도에서 도자기를 팔 생각은 접어야겠네.’
마쓰라 다카노부 한국에서 역사를 공부했을 때 들어본, 아니, 읽어본 이름이었다.
히라도를 거점으로 하는 해상 세력 집단의 주인이며 포르투갈 상인들과의 무역으로 막대한 부를 축적한 인물이었다.
히라도에서 활동하는 왜구들은 사실상 마쓰라 다카노부와 그의 아들인 마쓰라 시게노부의 부하들이었다.
“좋다. 정 그렇다면 내가 히라도 까지 직접 가지. 하지만 조건이 있다.”
“감사합니다, 장군님.”
“위장할 옷을 준비해라. 너와 마쓰라 다카노부가 외에는 우리가 조선에서 온 것을 그 누구도 알아서는 안 된다. 그러니 왜인이나 명국 사람으로 위장할 수 있도록 옷을 준비해라.”
“바로 준비하도록 하겠습니다. 장군님.”
“그리고 자기와 다완을 구입할 상인들은 이미 확보했겠지. 거래는 하루 만에 모두 끝낼 것이다. 다완과 자기를 모두 같은 날 판매할 것이니 자기와 다완을 판매할 장소를 준비하고 상인들에게도 그렇게 알려라. 판매하는 그 날 팔리지 않는 자기는 그대로 조선으로 가지고 돌아갈 것이다.”
“이미 준비되어 있습니다. 장군님 아무 염려 마십시오.”
“판매 대금은 금과 은으로만 받겠다고 했다. 그것도 상인들이 알고 있느냐?”
“예 장군님. 신신당부해 놨습니다.”
“그럼 가자. 나는 바쁜 사람이다.”
나는 히라도를 향해 출발할 것을 명령한 후 손대남에게 조용히 말했다.
“항왜들은 돌산도에 처자식이 남아 있는 사람들만 데려왔으니 걱정할 필요가 없겠지만, 남만인들은 히라도에 도착하면 도망치려고 할 수 있다. 병사들을 시켜서 남만인들을 철저하게 감시하고 총병들을 화승총으로 무장시켜라.”
“예, 좌수사 영감.”
손대남은 낮은 목소리로 대답한 후 병사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 * *
바다를 가르며 달린 갤리온들은 다행히 해가 지기 전에 히라도항 인근 바다에 도착할 수 있었다.
히라도가 가까워지자 나는 겐타로를 불러서 명령을 내렸다.
“우리는 해가 지면 입항하겠다. 우리 배를 알아보는 남만인들이 있으면 곤란하니 해가 진 다음에 입항하려는 것이다. 너는 먼저 히라도에 입항해 우리가 도착했다는 것을 마쓰라 다카노부에게 알리고 위장할 옷과 우리 배가 정박할 수 있는 자리를 확보해 놓아라. 다른 남만선들과는 거리가 있는 자리여야 할 것이다.”
“알겠습니다. 장군님.”
이제는 살았다고 생각한 것인지 겐타로는 힘차게 대답한 후 왜선을 타고 히라도항으로 들어갔다.
잠시 후 해가 지자 조심스럽게 히라도항으로 갤리온을 몰았다.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서 갤리온의 대포에는 화약과 포탄을 장전했고 총병들은 화승총을 들고 갑판에서 몸을 숨기고 있었다.
3척의 갤리온이 항구에 들어서자 왜선이 나와 갤리온을 정박할 자리를 안내했고, 항구에 정박하자 이토 겐타로와 10여 명의 왜인들이 위장할 옷과 물품들을 가지고 왔다.
항구에 도착하자마자 포르투갈 선원들을 선실에 감금하고 문을 걸어 잠갔다.
문 앞에 무장한 병사들을 배치하라는 명령까지 내리고 나서 나는 옷을 갈아입었다.
대부분의 군사들은 왜인으로 위장한다는 것을 꺼렸기에 배 안에 남아 있도록 했다. 단, 조선인이라는 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들키지 않도록 조심할 것을 명령했고 배 안에서도 무장하고 있도록 명령했다.
나를 호위하기 위해 따라온 손대남과 김개동을 비롯한 호위병 5명 그리고 통역과 안내를 위해 사화동이 나를 따라서 히라도에 상륙했다.
이토 겐타로의 안내를 받으며 걷다 보니 상당한 크기의 일본식 저택이 눈에 보였다.
겐타로는 거침없이 저택의 문을 두드렸고 잠시 후, 문이 열리자 우리는 안으로 인도했다.
“안으로 드시지요. 다카노부 나리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저택 안으로 들어가자니 긴장감이 느껴졌다.
나는 나도 모르게 품속에 숨기고 있던 와키자시를 손으로 만졌고 손대남과 호위병들도 각자 자신이 지내고 있는 무기를 손으로 확인했다.
“가자.”
마쓰라 다카노부 정도의 거물에게 얕보이고 싶지 않은 마음과 아무리 생각해 봐도 마쓰라 다카노부가 나를 죽여서 이득이 될 것이 없다는 생각에 나는 용기를 내서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
저택 안에는 무사로 보이는 이들이 나와 우리를 맞이했다.
“어느 분이 장군님이십니까?”
중년의 무사가 나와서 묻자 나는 당당히 앞으로 나가서 대답했다.
“내가 장군이다. 마쓰라 다카노부 공은 어디에 계시는가?”
손대남이 아닌 내가 나서자 놀란 의외라는 표정을 지은 무사는 곧 표정을 풀고는 내게 말했다.
“부하분들께는 식사를 준비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다카노부님께서 장군님만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무사의 말을 전해 들은 손대남과 김개동이 발끈한 기색을 보였지만 나는 손을 들어 그들을 말리고 좌수영에 있는 동안 틈날 때마다 익힌 일본어로 무사에게 대답했다.
“부하들은 상관없지만 내 왜어 실력이 신통치 않아서 통역을 해줄 사람이 필요하다.”
내가 평소에 일본어를 공부하는지 몰랐던 부하들은 놀란 기색으로 나를 바라본 반면에 내 일본어 공부를 도와주고 있었던 사화동은 흐뭇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중년의 무사는 이해한다는 듯이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다카노부님께서 미리 짐작하시고 통역할 사람도 준비하셨습니다. 그리고 장군님의 발음은 아주 훌륭하십니다.”
뜻밖의 칭찬에 나는 가볍게 웃었고 손대남에게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안심하고 기다려라. 나를 해치지는 못할 것이다.”
“예, 영감.”
손대남은 긴장한 기색을 숨기지 못하면서도 고개를 숙였고 나는 중년 무사의 안내를 받으며 내실로 들어갔다.
잠시 후 몇 개의 문을 거쳐 들어간 내실에는 서양식 의지와 가구들이 보였고 가장 화려한 의자에 노인이 앉아 있었다.
“안녕하십니까. 조선에서 온 이대원입니다.”
내가 먼저 노인에게 인사를 하자 노인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내 인사를 받았다.
“반갑소이다. 장군. 기다리고 있었소이다.”
다카노부가 권하는 대로 다카노부의 맞은편에 앉은 나는 천천히 다카노부를 바라보았다.
‘아들에게 영주 자리를 물려줬다고는 하지만 아직 정정해 보이는데…… 설마 아들을 병풍으로 세워두고 실무는 다카노부가 결정하고 있나?’
“장군께서는 왜어를 구사하시는 줄은 몰랐소이다. 왜어 솜씨가 훌륭하시오.”
“아닙니다. 다카노부 공께 인사말을 할 정도이지 긴 대화를 할 실력은 안 됩니다. 통역의 도움을 받았으면 좋겠습니다.”
쉽지 않은 대화를 나누게 될 것을 직감한 나는 통역을 요청했다.
“준비해 두었으니 염려 마시오.”
마쓰라 다카노부가 안쪽을 향해 무어라 일본어를 외치자 잠시 후 기모노를 곱게 차려입은 소녀가 내실로 들어왔다.
다카노부와 나의 사이에 있는 탁자의 왼쪽에 앉은 소녀는 아직 어려 보였지만 상당한 귀여운 얼굴이었다.
“인사드리겠습니다. 소녀는 다가와 헤이메라고 합니다.”
자리에 앉은 소녀는 발음이 어색하기는 했지만 제법 유창한 실력의 조선어로 말했다.
“내 부하의 딸 아이오. 대마도에서 태어나고 자라서 조선말을 할 줄 알고 똑똑해서 이 자리에 불렀소. 편하게 대하시오. 장군.”
다카노부가 소녀를 소개하자 나는 천천히 헤이메를 바라보았다.
‘한껏 치장하고 꾸몄지만 어려 보이네. 14살이나 됐을까? 제법 귀여워 보인다.’
“나는 이대원이라고 한다. 오늘 잘 부탁하겠다.”
“예, 나리.”
다카노부를 두려워하는지 잔뜩 몸을 움츠리고 있던 헤이메는 내가 인사말을 건네자 황송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나 앞에서 허리를 숙였다.
‘이 아이의 아버지도 조선말을 할 줄 알면 그 사람을 통역으로 부르면 됐을 텐데. 아직 어린 소녀를 통역으로 불렀다라…… 이것도 다카노부의 속셈이겠지.’
헤이메를 의식해서는 안 된다고 판단한 나는 헤이메가 숙이고 있는 허리를 펴기도 전에 다카노부를 바라보며 조선어로 말했다.
“다카노부 공께서도 시간을 허비하지 않기를 바라실 것 같고, 저도 바쁜 사람이니. 실례가 아니라면 다카노부 공께서 저를 만나려고 하신 이유를 알고 싶습니다.”
허리를 숙이고 있던 헤이메는 황급히 허리를 펴고 마쓰라 다카노부에게 일본어로 내가 한 말을 전했다.
내가 단도직입적으로 묻자 다카노부는 아무 대답도 없이 천천히 차를 마셨고 다카노부의 그런 모습을 보며 나 역시 내 앞에 있는 찻잔을 들어 차를 마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