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수군이 되었다. 97화
내가 갑이다
다카노부와 내가 차를 마시고 빈 잔을 내려놓자 헤이메는 빈 잔에 차를 따라주었다.
빈 잔을 내려놓고도 아무 말이 없자. 나는 다카노부에게 작별인사를 했다.
“다카노부 공이 저를 찾으셨다는 말을 듣고 히라도까지 왔으나 아무 말씀도 없으시니 저는 이만 일어나 보겠습니다.”
말을 마친 후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하자 마쓰라 다카노부는 묵직한 목소리로 나를 말렸다.
“젊은 사람이 성격이 급하군. 천군만마를 거느린 장군이 그렇게 성격이 급해서야 대업을 이룰 수가 있겠나.”
마쓰라 다카노부가 나를 말리자 나는 못 이기는 척하고 자리에 앉았다. 다카노부의 말문이 열렸으니 본론은 이제부터 시작될 것이다.
“저를 부르신 이유를 듣고 싶습니다.”
“장군은 정말 성격이 급해. 그렇게 성격이 급하니 사람의 그릇도 보지 못하고 감당하지도 못할 큰일을 맡기지.”
“저는 글을 읽는 선비가 아닌 칼을 잡는 장수입니다. 알아듣기 편하게 간단히 말씀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대화의 주도권을 빼앗겼다고 느꼈는지 마쓰라 다카노부는 못마땅한 기색이었지만 내가 자리에서 일어나면 곤란한 것은 다카노부였다.
다카노부는 나를 부른 이유를 털어놓았다.
“이토 겐타로 말이네. 그 아이는 자네가 시킨 일을 할 만한 그릇이 되지 못해.”
“겐타로를 대신해 다카노부 공께서 저를 도와주시겠다는 말씀이십니까?”
“내가 나선다면 이토 겐타로와는 비교할 수는 없지.”
마쓰라 다카노부가 자신감을 드러내며 말하자 나는 다카노부에게 대답했다.
“제가 이토 겐타로에게 제시했던 조건대로라면 저는 상관없습니다.”
순간 다카노부는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
“그건 아니지. 이 늙은이가 장군을 위해 해줄 수 있는 일은 겐타로와는 비교가 안 될 텐데. 같은 조건이라니 거래는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야.”
말을 마치고 나를 바라보던 다카노부는 내가 아무 말도 없이 다카노부를 바라보자 어쩔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먼저 입을 열었다.
“언제든지 마음 편하게 히라도를 드나들 수 있게 해주겠네. 물론 장군이 타고 온 남만선을 타고 말이야. 장군이 남만선 문제로 신경 쓰지 않도록 해주지. 장군이 필요한 상품들도 얼마든지 구해주겠네. 물론 합리적인 가격으로 말이야.”
마쓰라 다카노부의 제안을 들어보니 이토 겐타로에게 나와 있었던 일을 모두 들은 것이 확실했다.
“남만선에 대해서도 신경 쓰지 않게 해주시고 필요한 상품들도 구해주신다고 하니 정말 감사합니다. 그럼 다카노부 공께서 원하시는 것은 무엇입니까?”
내 질문에 다카노부는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별로 대단한 조건은 아니네. 장군이 판매하는 조선의 자기와 다완을 전량 이 늙은이의 이름을 걸고 처분해 주겠네. 20년 이상 남만인들과 거래를 해온 마쓰라 가문의 신용이면 남만인들에게 제값을 받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지. 장군이 직접 판매하는 것보다는 높은 가격을 받을 것을 장담하겠네. 그리고 판매 수수료는 1할만 받기로 하고 거래에 필요한 모든 편의를 제공하도록 하지.”
다카노부가 하는 말을 듣고 기가 막혔지만 애써 화를 내지 않고 참으며 말했다.
“다카노부 공 그럴 수는 없습니다.”
‘뭐? 판매 수수료 1할에 자기와 다완의 판매를 전량 맡기라고? 고양이에게 생선가게를 맡기고 수수료까지 내라니 누구를 호구로 보셨나.’
“내 제안이 마음에 들지 않았나? 그럼 히라도에서 자기와 다완을 판매하는 것은 어렵겠는데…… 어찌하겠나. 장군이 직접 사카이나 나가사키까지 가서 자기와 다완을 판매할 생각이신가?”
마쓰라 다카노부는 히라도가 아닌 다른 무역항에서는 내가 자기와 다완을 판매하지 못할 것으로 확신하고 있었다.
확실히 조선인인 내가 직접 나가사키나 사카이(오사카 만의 항구 도시)까지 직접 배를 몰고 가서 자기와 다완을 판매하는 것은 무리가 있었지만 일본에 청자를 판매하는 상인은 없었으니 다카노부가 아닌 내가 갑이었다.
“저는 장사하는 상인이 아닌 칼을 잡는 장수입니다. 자기와 다완의 판매가 생각대로 되지 않으면 이대로 자기와 다완을 가지고 조선으로 돌아가도 상관없습니다. 그리고 제가 자기와 다완을 대마도로 가져가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대마도를 언급하자 다카노부는 눈에 띄게 동요하는 모습을 보였다.
‘대마도는 조선과 일본과의 무역을 독점해 부를 쌓았고 히라도는 포르투갈 상인들과의 무역으로 부를 쌓은 곳이지. 히라도와 대마도는 무역 상대는 달랐어도 무역으로 먹고산다는 공통점이 있어. 히라도는 포르투칼 상인들의 상품을 대마도는 조선의 상품들을 일본 상인들에게 판매하며 서로 경쟁하던 사이야.’
나는 그런 다카노부를 바라보며 기름을 끼얹었다.
“겐타로가 견본으로 가지고 있는 자기를 보셨을 것입니다. 조선에서 그런 자기 특히 청자를 왜국에 판매할 사람은 저밖에는 없습니다. 청자는 대마도에서도 구하지 못하는 보물입니다. 제가 남만선에 자기와 다완을 싣고 대마도로 가면 대마도주 소 요시토시가 반가워할 것 같습니다만.”
확실히 대마도가 경쟁 상대였는지 대마도를 언급할 때마다 다카노부가 동요하는 것이 눈에 보였다.
“겐타로에게 제시했던 조건대로 히라도에서는 자기와 다완을 구매할 상인들을 소개해 주십시오. 남만인이건 왜인이건 상관하지 않겠습니다. 자기와 다완은 전량 제가 직접 판매하겠습니다. 구매를 원하는 상인들을 모아놓고 상인들 앞에서 경매 방식으로 판매하려고 합니다. 다카노부 공께서 다른 상인들과 같은 조건으로 자기와 다완을 구입하셔도 상관없습니다. 히라도에서 상인들을 만나고 자기와 다완의 판매가 원활하게 진행되도록 편의를 봐주신다면 판매액의 5푼(分)[5%]을 히라도에 지불하도록 하겠습니다.”
내 제안을 들은 다카노부는 고민하는 기색을 보였고 나는 다카노부를 앞에 두고 느긋하게 차를 마셨다.
‘누구를 호구로 보고 장난을 치려고 해. 지금 시대에 나 말고는 일본에 청자를 판매할 사람은 없어. 청자를 공급할 수 있는 내가 갑이고 너는 을이다. 지금은 일본의 영주들 사이에서 다도 문화가 유행처럼 번지고 있는 시기야. 유행은 위에서부터 아래로 흐르는 법. 찻잔으로 사용하는 다완도 없어서 못 팔고 있을 텐데. 대마도를 통해서 수입되는 다완만으로 일본의 수요를 충족시킬 수 있을까? 자기와 다완 모두 일본에 풀어놓기만 하면 날개 돋친 듯 팔릴 텐데. 다카노부가 과연 내 제안을 거절할 수 있을지 궁금하네.’
한참을 고민하던 다카노부는 무엇인가 내려놓은 듯한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장군은 참으로 대단한 사람이군. 장군이 상인이 되지 않은 것이 천만다행이야. 장군 같은 사람과 경쟁할 것을 생각하니 등골이 오싹해지는군. 그래.”
나는 태연하게 다카노부를 바라보며 물었다.
“저의 제안을 받아들이시겠습니까?”
대화로 분위기를 풀려고 했던 다카노부는 내가 단도직입적으로 묻자 입을 다물었다가 잠시 후 입을 열었다.
“두 가지만 물어보겠네.”
“말씀하십시오.”
“경매란 무엇인가?”
다카노부의 질문에 나는 잠시 황당함을 느꼈다.
‘아, 경매라는 용어가 없는 시대인가? 경매 방식은 고대시대에도 있었던 것으로 알고 있는데.’
잠시 당황한 나는 경매에 대해서 설명했다.
“판매할 상품을 앞에 놓고 구매할 의사가 있는 상인들이 경쟁적으로 구매하고자 하는 가격을 불러서 가격을 결정하는 것을 말합니다. 자기를 놓고 최저가를 은 10냥으로 말하면 10냥부터 시작해서 가장 높은 가격을 부르는 상인이 자기를 구입하는 것입니다.”
용어는 달라도 경매 방식에 대해 알고 있었는지 다카노부는 알겠다는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만약 상인들이 장군이 기대한 것만큼의 가격을 부르지 않으면 어떻게 할 생각인가?”
다카노부의 질문에 나는 고민하지 않고 바로 대답했다.
“저는 상인이 아닌 장수입니다. 자기와 다완을 목표했던 가격에 판매하지 못한다면 헐값에 판매하느니 그 자리에서 부숴 버릴 것입니다.”
보통 상인이라면 결코 하지 못할 대답이었다. 다카노부는 놀란 기색을 숨기지 못하고 물었다.
“굳이 그렇게까지 할 이유가 있는가?”
“제가 가져오는 자기는 조선에서도 귀한 보물이며 다완 역시 조선에서도 손꼽히는 장인들이 애써서 만든 작품입니다. 그런 보물들이 제 가치를 인정받지 못하고 헐값에 팔린다면 조선의 보물들은 이후에도 제 가치를 인정받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그런 사태가 벌어지지 않도록 가치를 인정받지 못하는 헐값에는 판매하지 않겠습니다.”
다카노부도 이번에는 내 생각에 공감했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장군이 상인이 되지 않은 것이 나에게는 큰 복이었어. 좋아 장군의 제안을 받아들이지. 히라도에서는 무엇을 하건 신경 쓰지 않겠네. 필요한 것이 있으면 무엇이든지 말하게 구해줄 수 있는 것은 무엇이든 구해줄 테니. 단 대금은 청구할 것이야.”
“예 감사합니다. 다카노부 공.”
“그리고 수수료 말인데.”
‘이래서 말은 끝까지 들어봐야 한다더니…….’
나도 모르게 인상을 쓰며 다카노부를 바라보자 다카노부는 자신이 양보했으니 너도 양보하라는 듯의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5푼(分)은 너무한 것 같군. 1할(割)[10%]로 하는 것이 어떻겠나 장군?”
나는 잠시 고민했지만 단호하게 대답했다.
“좋습니다. 다카노부 공 7푼(分) 5리(釐)[7.5%]로 하시죠.”
내 대답에 다카노부는 질린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장군 같은 사람은 정말 처음이네…… 좋아 서로 양보해서 7푼(分) 5리(釐)로 결정하지.”
7.5%라고 해도 자기와 다완의 거래가 얼마나 큰 이익이 될지 다카노부가 계산하지 못했을 리가 없었다.
경쟁 상대인 대마도를 들먹였어도 자기와 다완이 이익이 되지 않는다고 판단했으면 다카노부 같은 노회한 인물이 순순히 거래에 합의했을 리가 없었다.
“다카노부공과 거래하게 되어 매우 기쁩니다.”
“나도 기쁘네. 나를 이렇게까지 긴장시킨 상대도 오랜만이야.”
다카노부와 거래를 마친 나는 피곤해서 그만 갤리온으로 돌아가 쉬고 싶었지만 다카노부는 나를 놔주지 않았다.
“이런 날은 축하주가 없을 수 있겠나. 함께 저녁을 먹으며 축하주를 나누도록 하지. 장군의 부하들에게도 이미 반주를 곁들여 식사를 대접하게 했으니 아무 걱정 마시게.”
다카노부는 직접 일어나 나를 안쪽의 방으로 안내했고 나는 앞으로의 거래를 생각해 다카노부가 안내하는 대로 방으로 들어갔다.
다카노부가 권하는 자리에 앉자 하녀들이 밥상을 가져왔고 다카노부와 내 앞에 상이 차려졌다.
상이 차려지자 다카노부의 측실로 보이는 여인들이 다카노부의 좌우에 앉아 시중을 들었고 내 옆에는 헤이메가 소리도 없이 다가와 앉았다.
다카노부가 잔을 들자 여인들은 잔을 채웠고 헤이메가 작은 목소리로 나에게 말했다.
“장군님. 잔을 드시지요.”
엉겁결에 헤이메의 말에 따라 잔을 들자 헤이메는 고운 손으로 술병을 들고 내 잔을 가득 채웠다.
다카노부는 단숨에 잔을 비웠고 그 모습을 본 나는 잔에든 술을 들이마셨다.
입안에서는 술의 향기가 퍼졌고 목으로 넘어가는 감촉이 부드러운 것이 값비싼 고급술이 분명했다.
술잔을 비운 다카노부는 측실들의 시중을 받으며 식사를 시작했고 나도 잔을 내려놓았다.
“장군님. 한잔 더 올리겠습니다.”
바로 옆에서 들리는 헤이메의 목소리에 놀란 나는 황급히 말했다.
“아니다. 나는 반주로 마실 뿐 술을 즐기지는 않는다.”
말을 마친 후 나는 젓가락을 들어 공기의 밥을 입안으로 가져갔고 작은 밥공기가 순식간에 비워졌다.
‘조선인들은 일본인들보다 한 끼에 몇 배 이상의 밥을 먹었다더니 조선과 일본은 공기의 크기부터 다르구나.’
평소에 조선에서 먹던 식사량이 있었으니 일본의 작은 공기에 담긴 밥이 성에 찰리가 없었다.
아쉬운 마음에 젓가락을 내려놓자 헤이메가 빈 공기를 집어가더니 공기에 가득히 밥을 담아 내 상에 올려놓았다.
“많이 드십시오. 장군님.”
밥공기를 보고 헤이메를 바라보니 어느새 헤이메의 옆에는 나무로 된 밥통이 있었고 헤이메는 주걱을 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