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수군이 되었다. 108화
시마즈의 위기
마쓰라 다카노부에게 구황작물의 구매를 부탁한 다음 날 상인들에게 자기와 다완을 판매했다.
이제까지와 마찬가지로 경매 방식으로 높은 가격을 부르는 사람에게 판매했고 구황작물을 구하기 위해 가져온 찻잔과 주전자, 접시도 이번에 상인들에게 공개했다.
“이것은 특별히 제작한 작품이오. 이건 아무나 뚝딱 만들어낼 수 있는 제품이 아니라 장인이 특별히 주문 제작한 제품이란 말이오. 이것은 따로따로 판매하지 않겠소.”
나는 주전자 1개와 찻잔 4개 그리고 접시 2개를 세트로 묶어서 세트로만 판매하겠다고 선언했다.
내가 한국에서 사용했던 주전자와 찻잔을 기억해서 그린 그림을 보고 도공들이 제작한 주전자와 찻잔의 모습에 포르투갈과 스페인의 상인들은 눈을 떼지 못했고 우윳빛을 자랑하는 접시도 상인들의 시선을 끌기에 충분했다.
“참고로 찻잔 세트는 5벌만 준비되어 있으니 구매하실 분은 서두르시오.”
말이 끝나기 무섭게 상인들은 경쟁하듯이 가격을 불렀다.
유럽인들의 취향에 맞는 세련된 디자인에 5벌뿐이라는 조건까지 붙자 상인들 간의 경쟁이 치열하게 벌어졌고, 결국 찻잔 세트는 1벌 당 은 500냥씩에 판매됐다.
유럽 상인들에게 자기가 비싼 값에 판매되고 있었지만 상인들 간의 가격 경쟁이 찻잔 세트의 가격을 올리는데 한몫했다.
찻잔 세트에 이어서 자기와 다완을 모두 판매하고 판매액을 계산하자 지난달 판매 액수에 3배가 넘는 액수를 벌어들인 것으로 확인됐다.
자기와 다완의 수량이 지난달의 2배였던 것과 내 고집과 다카노부의 비호 속에서 자기와 다완의 수량이 많았음에도 가격이 떨어지지 않고 제값을 받을 수 있었던 것.
그리고 찻잔 세트가 예상을 뛰어넘는 거액을 벌어들인 것에 힘입어 지난달 판매액의 3배가 넘는 거액을 벌어들인 것이다.
* * *
자기와 다완을 판매한 후 다카노부에게 수수료와 구매할 물품의 대금을 지불했다.
수수료와 물품 대금으로 가져간 은화를 확인한 다카노부는 만족한 표정으로 미소를 지으며 부하들을 시켜 갤리온으로 유황과 구리, 철을 보냈다.
갤리온으로 구리와 철을 가져온 왜인들 중에는 이토 겐타로도 있었다.
“오랜만이다. 잘 지냈느냐?”
“안녕하셨습니까. 장군님.”
이토 겐타로는 제법 익숙한 일본어로 인사말을 건네는 나를 보며 놀란 표정을 지었다.
“앞으로 필요할 것 같아서 틈나는 대로 왜어를 배우고 있다. 그렇지 않아도 너를 찾으려고 했는데 잘됐다.”
“무슨 일이 있으십니까? 장군님”
“일은 무슨 일. 내가 네게 선물을 하나 주기로 하지 않았느냐. 나는 빚지고는 못 사는 사람이다.”
이토 겐타로를 선장실로 데려간 나는 왜인들에게 선물 혹은 뇌물용으로 쓰기 위해 준비해놓은 청자를 하나 꺼냈다.
“받아라. 네게 주는 것이다.”
작은 화병 크기의 청자는 표면에 꽃이 피어 있는 나뭇가지와 날개를 편 학이 그려져 있었다.
“이런 보물을 제게 주신단 말씀이십니까?”
겐타로는 청자를 받아들고는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너도 나를 만나서 고생이 많았을 것이다. 거래를 성사시키면 자기를 주기로 약속한 것도 있고 너와의 인연을 생각해서 주는 것이니 받아라. 아 그냥 들고 다닐 수는 없을 테니. 이 상자에 넣어서 가져가거라.”
자기를 보관할 때 쓰는 나무상자를 겐타로에게 내밀었다. 겐타로는 고맙다고 고개를 숙이며 상자를 받아 청자를 상자에 담았다.
‘첫인상은 별로였지만 결과적으로 겐타로가 협조한 덕분에 갤리온도 차지했고, 히라도에서 자기와 다완을 판매하면서 돈도 많이 벌었으니. 내 입장에서 손해 본 것은 없는 셈이고, 겐타로는 고생은 고생대로 하고 챙긴 것은 없을 것이니 인심 좀 쓰자.’
돈도 많이 벌었겠다. 겐타로에게 인심을 쓸 생각이 든 나는 작은 가죽 주머니에 은화를 담았다.
“이것도 가져가거라.”
“장군님. 이것은 무엇입니까?”
“은 20냥이다. 네 덕분에 히라도에서 거래도 할 수 있게 되었고 다카노부공과 친분도 맺게 되었다. 결과적으로 나도 나쁠 것이 없게 되었으니 주는 것이다. 받아라.”
“장군님. 감사합니다.”
돈주머니를 받으며 이토 겐토라를 고맙다고 고개를 숙였다. 그런 겐타로의 모습을 보며 인심 쓰기를 잘했다고 생각하던 나는 갑자기 생각나는 것이 있어서 물었다.
“너에게 물어보고 싶은 것이 대답할 수 있겠느냐?”
“얼마든지 물으십시오. 소인이 알고 있는 것은 무엇이든지 대답하겠습니다.”
“규슈의 시마즈가 지금 어려운 처지라고 알고 있다. 시마즈의 사람들이 다카노부 공과 거래를 하고 있느냐?”
“예. 시마즈가 다스리는 사쓰마에는 유황이 나오는 화산이 있다고 합니다. 시마즈에서 히라도로 유황과 목재 등의 토산물을 판매하러 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역시 시마즈는 다카노부 공과 이번부터 거래가 있었군.’
“의외로구나 시마즈는 규슈 지역의 다른 영주들과 사이가 안 좋은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다카노부 공은 장사라면 상대를 가리지 않으시는 분이십니다.”
겐타로의 대답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보기에도 다카노부는 이익이 있다면 상대를 가리지 않을 사람이었다.
내가 시마즈에 관심을 보이는 것 같아 보였는지 겐타로는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그런데 시마즈에 대한 이상한 소문이 있었습니다.”
겐타로의 말에 나는 흥미를 느끼며 물었다.
“그 소문이 무엇이냐?”
“관백(関白)[도요토미 히데요시]께서 시마즈의 무사들에게 할복을 강요하고 있으시다는 소문입니다.”
이런 이야기는 한국에 있었을 때도 조선에 와서도 처음 들어본 적이 없었다.
“그 소문을 자세히 말해보아라. 관백이 왜 시마즈의 무사들을 죽이려고 하는지 말이다.”
“관백께서 시마즈와 전쟁을 하실 때 시마즈의 무사들 가운데 관백께서 타실 가마에 화살을 쏜 자들이 있다고 합니다. 다행히 관백께서 가마에 타지 않으셔서 무사하셨지만 가마에 화살이 박힌 것을 보시고 관백께서 진노하셨다고 합니다. 시마즈와의 전쟁은 이미 끝났지만 관백께서는 시마즈에 서신을 보내 관백의 가마에 화살을 쏜 무사들의 할복을 강요하고 계시다고 합니다.”
겐타로의 이야기를 듣고 생각나는 사건이 있었다.
‘한국에서 들어본 적이 있는 아니, 책에서 읽었었던 적이 있는 사건이다. 시마즈 도시히사는 히데요시에게 항복하는 데 끝까지 반대했고 시마즈가의 당주인 시마즈 요시히사가 이미 히데요시에게 항복한 후에도 히데요시에게 저항했다고 했지. 도시히사의 부하들이 히데요시를 유인해서 히데요시의 가마에 화살을 쐈다고 했어. 그러면 히데요시는 도시히사와 도시히사의 부하들의 목숨을 노리고 있구나.’
기록에 의하면 히데요시가 자신이 타는 가마를 여러 개 준비해 둔 덕분에 무사할 수 있었다고 한다.
도시히사의 부하들은 히데요시가 타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 가마를 노리고 화살을 쐈지만 히데요시는 다른 가마에 타고 있었고 화살에 맞은 가마는 빈 가마였다.
‘그렇다면 도시히사나 활을 쏜 무사들은 사쓰마를 떠나 다른 곳으로 피신해야 하는 것 아닌가? 히데요시가 죽이기로 작정을 했으면 그냥 끝나지는 않을 것 같은데.’
시마즈 도시히사와의 거래를 앞두고 뜻밖에 좋은 정보를 얻은 나는 우선 이토 겐타로를 돌려보냈다.
“아주 유용한 정보를 주었구나. 정말 고맙다.”
“장군님께 도움이 되었다니 정말 다행입니다.”
“나는 앞으로도 종종 히라도에 올 것이다. 다음에 또 보자.”
“장군님 앞으로도 건강하십시오.”
겐타로를 돌려보낸 후 나는 도시히사의 입장을 생각해 보았다.
* * *
다음 날 나는 시마즈 도시히사를 만나기로 한 장소에 김개동과 사화동 드리고 호위병들 거느리고 나갔다.
그 자리에서 도시히사와 함께 한 무리의 왜인들을 만날 수 있었다. 도시히사와 인사말을 나눈 나는 왜인들을 보며 도시히사에게 물었다.
“생각했던 것 보다 사람들의 수가 많습니다.”
“장군께서 원하셨던 대로 최고의 장인들이오. 장인들도 가족들과 함께 있기를 원해서 가족들도 함께 나온 것이오.”
내가 도시히사와 합의한 내용은 솜씨가 좋은 장인 10명과 그 가족들을 보내주는 것이었는데 지금 보이는 왜인들은 중년과 청년의 사내들만 해도 20명 이상에 여인과 아이들까지 100명은 넘어 보였다.
도시히사의 대답을 들은 나는 다시 한번 왜인들을 바라보며 도시히사에게 말했다.
“장인들의 손을 보고 싶습니다.”
“장군. 그게 무슨 뜻이오.”
“장인들의 손을 보고 싶습니다.”
“나를 의심하는 것이오. 우리 시마즈가를 모욕하실 생각이시오.”
“지금 모욕은 제가 당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도시히사와의 대화가 험악해지자 왜인들은 당황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제가 오해를 한 것이라면 정중히 사과하고 보상하겠습니다. 하지만 이 자리에서 제 부탁을 들어주시지 않는다면 도시히사 공께서 저를 속이시는 것으로 믿고 도시히사 공은 물론 시마즈와의 모든 거래를 파기하겠습니다.”
내가 강경하게 요구하자 도시히사마저 당황하는 기색을 보였다.
“참고로 말씀드리면 저와 친분이 있는 상인 하나가 사이카슈(雑賀衆)의 무리와 친분이 있더군요. 시마즈에게서 철포 장인을 구하지 못하면 사이카슈 무리를 고용해 철포제작 기술을 확보할 생각입니다. 유황 역시 시마즈를 통해서만 구할 필요는 없다는 것은 도시히사 공께서도 잘 아실 거라 믿습니다.”
내 경고를 들은 도시히사는 매서운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지만 나는 도시히사를 마주 보며 물러서지 않았다.
나는 이 자리에 나오기 전에 만반의 준비를 하고 나왔다. 왜인을 위장한 평상복 차림이었지만 옷 안에는 엄심갑을 입고 있었고 허리에는 일본도까지 차고 있었다.
김개동과 호위병들 역시 평상복 차림의 옷 안에 엄심갑을 입고 있었고 모두 일본도로 무장하고 있었으며 도시히사를 만나고 있는 부둣가 뒤편의 창고에는 이언세가 화승청으로 무장한 총병 15명을 거느리고 매복해 있었다.
시마즈 도시히사는 히데요시를 향해서도 저항을 멈추지 않았던 용사였지만 내가 물러서지 않자 어쩔 수가 없다는 듯이 고개를 돌렸다.
“모두 손을 보여라.”
도시히사가 왜인들에게 명령하자 나는 내 예상이 맞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역시 이들은 사쓰마로 돌아갈 수 없는 이들이다.’
도시히사의 명령이 떨어지자 장인들은 머뭇거리면서도 손바닥을 펼쳐 보였다.
나는 김개동과 함께 장인들의 손을 살펴보고는 예상을 벗어나지 않는 상황에 실소(失笑)를 지었다. 장인들의 손을 모두 살펴본 나는 도시히사에게 말했다.
“도시히사 공 나도 검을 익힌 무장이오. 내가 비록 나이는 어리나. 검을 잡은 무사의 손과 평생 망치를 잡은 장인의 손은 구별하지 못할 만큼 어리석지는 않다는 말이오.”
“그게 무슨 말씀이시오. 장군.”
도시히사가 변명하듯이 대답하자 나는 손바닥을 보이고 있는 사내들 중에서 덩치가 크고 눈매가 날카로운 중년 사내를 가리키며 도시히사에게 말했다.
“혹시 이자가 혼다 고로자에몬이 아니오? 관백 히데요시의 가마에 활을 쏜 용사 말이오.”
내 말에 도시히사는 놀란 표정을 지었고 고로자에몬은 품속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고로자에몬이 움직이자 김개동은 재빨리 일본도를 뽑아 들고 고로자에몬의 목에 칼날을 들이댔다.
“놀라실 것 없소이다. 이자의 손을 보니 평소에 열심히 활을 당긴 흔적이 역력했소이다. 이 정도의 수련을 거친 무사가 장인으로 위장해 조선으로 가려고 한다면 이유는 한 가지뿐이지 않겠습니까.”
도시히사는 한숨을 내쉬며 체념한 듯이 대답했다.
“장군의 생각대로요. 이들을 받아주시겠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