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눈을 뜬 이순신 >
갤리온으로 돌아와 저녁밥을 먹고 쉬고 있었던 이순신과 정옥남에게 이언세가 찾아왔다.
“만호나리. 정공 탁주입니다. 한잔 드시지요.”
이언세가 술병과 말린 생선을 꺼내 놓자 이순신과 정옥남은 사양하지 않고 자리에 앉았다. 이언세로부터 술병을 받은 이순신은 정옥남과 이언세의 잔에 탁주를 따르고 자신의 잔에서 탁주를 가득 부었다.
“크으 좋다.”
“시원하다.”
지난 며칠간 마음고생이 심했던 이순신과 정옥남은 시원하게 탁주를 들이마셨다. 단숨에 잔을 비우고 어포를 입으로 가져가던 이순신은 이언세에게 물었다.
“좌수사 영감께서는 언제부터 왜국을 드나드신 것인가?”
“5월부터 이곳 평호도(平戶島)[히라도]에 도자기와 찻잔을 가져오셨습니다.”
“좌수사는 도자기와 찻잔을 팔아서 돈을 많이 버시는 것 같소이다.”
정옥남의 질문에 이언세는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좌수사 영감께서 많은 이윤을 남기시고 도자기와 찻잔을 판매하시는 것은 사실이나 그렇게 번 돈을 개인적으로 치부(致富)하는데 사용하시지는 않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언세의 대답에 정옥남은 궁금하다는 듯이 물었다.
“금과 은이 상자에 가득한 것을 보았소. 그럼 좌수사는 그 많은 재물을 어디에 쓰고 계신 것이오?”
정옥남의 질문에 이언세는 잔에 남아있던 탁주를 들이마신 후 대답했다.
“돌산도에 거주하고 있는 항왜의 수가 2000명이 넘습니다. 그들을 먹이고 입히는데 드는 재물이 적지는 않을 것입니다. 좌수사 영감께서 좌수사에 오르신 후 좌수영의 병사들 중에서 밥을 굶는 자가 없어졌고 요즘은 좌수영의 병사들이 매일 점심을 먹고 있습니다. 병사들 중에 몸이 아파도 재물이 없어 의원을 찾아가지 못하는 이에게는 쌀과 면포를 보내주신 경우도 있었습니다.”
이언세의 대답을 들은 이순신은 놀랍다는 듯이 말했다.
“좌수사 영감이 병사들과 항왜들을 먹이고 입히는데 재물을 쓰셨구나. 그런 일이 있었다니.”
이언세는 술병을 들어 이순신과 정옥남의 잔에 탁주를 채워주며 이순신에게 물었다.
“만호나리께서는 좌수영에서 병장기와 전선을 새로 만들고 있는 것을 잘 아시지 않습니까.”
“그렇지. 좌수사 영감께서 좌수군의 병장기들을 중에서 낡은 병장기들을 새것으로 교체하셨지. 설마 병장기들을 제작하는 것도...”
“예 그렇습니다. 좌수사 영감께서는 도자기와 찻잔을 판매한 대금으로 매번 막대한 양의 철과 구리 그리고 유황을 구매하셨습니다. 이곳에서 구매한 철과 구리는 좌수영에서 병장기를 제작하는데 쓰이고 있고 유황은 화약을 제조하는데 쓰이고 있습니다.”
이언세의 대답을 들은 이순신과 정옥남은 재물이 쓰이는 용도를 듣고 놀랐다.
“좌수사께서는 잠매(潛賣)를 통해 번 재물로 좌수영의 군비를 충당하고 계셨구나.”
이언세의 대답을 들은 정옥남은 정여립이 매번 좌수영을 방문할 때 마다 많은 곡식과 가축을 선물로 가지고 갔던 일을 떠올렸다.
‘아버님께서는 좌수영의 사정을 알고 계셨구나. 그래서 매번 곡식을 가져가셨구나.’
“그런데 좌수사 영감께서 나와 정공(정옥남)을 이곳 평호도 까지 데려오신 이유는 무엇인가? 좌수사 영감께서 사사로이 치부를 하기 위해 이런 일을 벌이신 것은 아니겠지만 잠매(潛賣)를 하고 계신 것은 사실인데. 오늘 일을 우리에게 보여주신 이유를 모르겠네?”
이순신이 궁금하다는 듯이 묻자 이언세는 웃으며 대답했다.
“소인도 좌수사 영감의 속내는 정확히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좌수사 영감께서는 항상 왜국을 경계하셨고 조정에서 왜국을 너무 가볍게 보고 있다고 염려하고 계십니다. 아마도 만호 나리와 정공에게 왜국이 남만인들과 얼마나 많은 교역을 하고 있고 교역을 통해 얼마나 많은 재물을 벌어들이고 있는 지를 보여주려고 하신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이언세의 대답을 들으며 이순신은 고개를 끄덕였고 정옥남은 지나친 염려라고 생각하는 듯 자신의 생각을 말했다.
“왜국이 많은 부를 벌어들이고 있는 것은 사실이나. 왜국을 두려워할 필요까지 있겠소. 지난 전란에서도 조선을 침략한 왜구의 수는 2000명에 불과했고 좌수사 영감께서 모조리 격퇴하지 않으셨소. 왜군이 대규모로 침략해 온다고 해도 전라좌수군의 전력이며 충분히 격퇴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이는데.”
정옥남의 말을 들은 이언세는 다시 자신의 잔에 탁주를 채우며 대답했다.
“조정에서도 정공과 같은 생각이신 것 같습니다. 하지만 좌수사 영감께서는 왜국이 조선에 큰 위협이 된다고 생각하고 계시고 좌수사 영감을 쫓아다니며 왜국을 몇 번 드나든 소인이 보기에도 왜국은 가볍게 볼 대상이 아닌 것이 분명합니다.”
“재물이 있다고 해도 섬나라 왜국이고 미개한 왜구들이오. 왜구들이 몇이나 되겠소.”
정옥남이 이언세를 비웃듯이 말하자 이언세는 정옥남을 정면으로 바라보며 대답했다.
“왜국의 실권을 잡은 풍신수길이란 자는 20만 대군을 동원할 수 있다고 합니다.”
순간 정옥남은 말문이 막혔고 이순신은 기가 막힌다는 표정으로 이언세에게 물었다.
“20만. 20만이라고 하였는가?”
“예 그렇습니다. 돌산도에 머물고 있는 항왜들 중에 풍신수길의 군대와 싸웠던 왜인들이 있습니다. 그들에게서 들은 이야기 입니다. 풍신수길이 20만이 넘는 대군을 일으켜 왜국의 구주라는 섬을 침략했고 구주를 점령했다고 말입니다.”
이언세의 대답을 들은 정옥남은 놀라서 손을 떨고 있었고 이순신은 머릿속으로 이언세의 대답을 되새겼다.
‘20만 대군이라고. 군사가 20만이라면 보급과 지원을 담당하는 인원까지 실제로 동원된 군사와 장정들의 수는 30만 명이 넘을 것이다. 그리고 구주라는 섬으로 20만 대군이 침략해 들어갔다고. 왜국은 섬들로 이루어진 나라이니 다른 섬으로 쳐들어갈 수 있는 일이지. 20만 대군이 바다를 건너 다른 섬을 침략하는데 성공했다면 왜국의 20만 대군이 바다를 건너 조선을 침략하는 일도 충분히 가능한 일이지 않은가. 그래서 좌수사 영감께서 일본을 경계하시는 것인가. 좌수사 영감께서는 왜국이 대군을 일으켜 조선을 침략할 수도 있다고 생각하고 계신 것인가.’
이순신과 정옥남의 반응을 보며 이언세는 다시 한번 입을 열었다.
“좌수군이 오도(五島列島)[고토열도]를 정벌하고 왜구들을 토벌하는데 성공했으니 왜국이 대군을 일으켜 조선을 침략해도 물리칠 수 있다고 생각하실지도 모르겠지만. 소인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언세의 말을 들은 이순신과 정옥남 이언세를 바라보며 그 이유를 말하라는 듯한 표정을 짓자 이언세는 천천히 잔을 들어 탁주를 들이마시고 이순신과 정옥남의 잔에도 탁주를 따라주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올해 2월에 일어난 전란(정해왜변) 당시에도 손죽도에는 좌수군 전선 12척이 있었지만 왜구들이 화승총(조총)을 쏘며 공격해 오자 대부분의 전선들이 뿔뿔이 흩어져 도망치려고 했습니다. 달려드는 왜구들에게 총통을 방포하며 제대로 싸운 전선은 좌수사 영감께서 지휘하신 녹도전선 뿐이었습니다.”
이언세의 말에 이순신과 정옥남은 전라좌수사 이대원인 좌수사에 제수되기 이전에 녹도만호였다는 것을 떠올렸다.
“좌수사 영감께서 싸워야 할 때와 물러서야 할 때를 잘 아시고 녹도군을 지휘하셨습니다. 왜구들에게 포위되기 직전에 왜선에 방포해 왜선을 불태운 것도 녹도전선이었고 왜구들이 달려들자 좌수군의 전선들이 뿔뿔이 흩어졌을 때도 침착하게 사지를 벗어난 것도 좌수사 영감께서 지휘하셨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오도를 정벌했을 당시에는 지난 전란 당시 조선을 침략한 왜구들이 대부분 오도로 돌아가지 못했기에 오도에는 왜구들의 수가 얼마 없었습니다. 오도에서의 상황은 만호나리께서도 잘 아시고 계실 것입니다.”
이순신도 이언세의 말에 동의했다.
“순천부사께서도 말씀하셨네. 복강도(福江島)[후쿠에섬]에 상륙했을 때 항구와 해안가가 텅 비어 있어서 좌수군 군사들이 별 피해 없이 상륙할 수 있었다고. 왜구들에게서 노획한 병장기들을 보니 왜도는 날카롭기가 그지없고 화승총(조총)은 그 위력이 놀랍기 그지없더군. 섬에 왜구들의 수가 1000명만 넘었어도 쉽지 않은 전투가 되었을 것이네.”
이언세에 이어서 이순신도 왜국의 전력이 만만하지 않다고 인정하자 정옥남은 숨이 막힌다는 표정을 지으며 어쩔 줄 몰랐다.
‘큰일 났다. 한시라도 빨리 아버님께 서신을 보내야 한다. 아버님께 알려드려야 한다.’
마쓰라 다카노부의 저택에서 헤이메와 같이 밤을 보낸 나는 날이 밝자 자리에서 일어났다. 헤이메는 자리에서 일어난 직후부터 내 시중을 들었다. 세수할 물을 떠오고 세수를 마치자 수건을 건네주었으며 물기를 닦고 옷을 입자 하녀와 함께 밥상을 들고 왔다. 헤이메와 하녀가 들고 온 밥상으로 아침을 먹은 후 다카노부에게 인사를 올리기 위해 다카노부가 기다리고 있다는 내실로 들어가자 상석에 앉아 있던 다카노부는 나와 헤이매를 반갑게 맞이했다.
“내가 장군에게 장인 대접을 받을 생각은 없지만 헤이메는 내 양녀이고 헤이메의 어미는 나의 부인과 다름없으니 오늘은 헤이메의 어미와 함께 장군과 헤이메의 절을 받아야겠네. 헤이메가 오늘 장군을 따라가면 모녀가 다시는 만나는 날이 없을 것 같으니 오늘은 내 부탁을 거절하지 말아주게. 장군.”
마쓰라 다카노부에게 휘둘리고 싶지는 않은 생각에 이제껏 장인어른이라고 부르지 않았지만 이런 상황에서는 어쩔 수 없었다.
“부인과 함께 절을 올리겠습니다. 장인어른.”
“그래. 고맙네 사위.”
장인어른이라는 말에 마쓰라 다카노부는 만족한 얼굴로 미소를 지었고 잠시 후 헤미메의 어머니로 보이는 중년의 부인이 나왔다. 나와 헤미에는 우선 다카노부에게 절을 놀렸고 절을 받은 다카노부는 만족한 얼굴로 ‘껄껄’거리며 웃었다. 다카노부에게 절을 마친 후 헤이메의 어머니인 중년 부인에게 절을 올리자 부인은 눈물을 참는 얼굴로 절을 받고는 고개를 숙였다.
‘요즘 시대에 특히 일본에서 시집을 가면 친정으로 돌아올 일은 거의 없으니. 장모님이 슬퍼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지.’
특히 일본에서 영주나 귀족들의 혼인인 정략혼이니 이혼당하거나 시댁이 몰락하지 않는 한 친정으로 돌아갈 일은 없었다. 혼인한 딸이 친정으로 돌아오는 것 자체가 엄청난 불행을 당했다는 뜻이었다.
절을 마친 헤이메는 어머니에게 다가가 작은 소리 어머니에게 뭐라고 말하는 것이 슬픔에 빠진 어머니를 위로하는 것 같았다. 헤이메가 어머니를 위로하는 동안 다카노부는 나를 끌고 정원으로 나갔다. 정원 한쪽에는 커다란 나무 상자 3개와 흰색 천으로 포장된 꾸러미들이 준비되어 있었다.
“이 마쓰라 다카노부가 딸을 시집내보면서 인색하게 보일 수는 없어. 예물을 준비했네. 앞의 뒤의 상자 1개는 헤이메의 옷과 소지품들이고 앞의 상자와 짐들은 혼인 예물이네. 별로 거창한 예물은 아니지만 성의를 봐서 받아주게. 장군 같은 영웅호걸에게 헤이메를 맡기게 되어 기쁘기가 그지없네.”
“감사합니다. 장인어른.”
이런 자리에서 까지 딱딱하게 굴 수 없어 장인이라고 부르자 다카노부는 입이 귀밑까지 찢어질 정도로 좋아했다.
“그래. 좋아. 앞으로는 장인이라고 부르시게. 사위도 자식이니 앞으로 장인에게 부탁할 것이 있으면 서슴없이 말하시게. 이 마쓰라 다카노부가 나서서 구하지 못할 것은 거의 없을 것이니 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