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수군이 되었다. 123화
폭리를 덜 취하다
정언신 대감은 서신을 통해 여진족들이 녹둔도를 공격한 사실과 왜국의 사신 귤강광이 조선을 방문한 사실을 알려왔다.
‘이때쯤에 여진족들이 녹둔도를 습격했지.’
내가 알고 있는 역사에서 1587년 9월 여진족이 녹둔도를 공격했을 때 녹둔도의 책임자는 조산보 만호 겸 녹둔도 둔전관이었던 이순신 장군이었다.
녹둔도 사건으로 인해 이순신 장군은 백의종군을 명령받게 되고 무장의 지위가 박탈된 상황에서 시전부락 전투에 참가하게 된다.
녹둔도의 지휘관은 이순신 장군이 아니었지만, 정언신 대감의 서신에 적힌 녹둔도 사건의 상황은 내가 알고 있는 상황과 흡사했다.
녹둔도에서 둔전을 일구고 있던 병사들이 곡식을 추수하기 시작하자 여진족들이 녹둔도를 공격해 왔고, 조산보 만호와 경흥부사가 군사들을 지휘해 여진족과 전투를 벌였지만.
수적 열세로 인해 10여 명의 병사가 전사하고 50명 이상이 여진족들에게 잡혀갔다.
여기까지는 내가 알고 있는 역사와 흡사했다.
그런데 여진족이 녹둔도를 공격한 사실이 조정에 보고된 후 조정에서 의논된 대책이 한심했다.
‘이건 뭐야. 녹도만호 이순신으로 다시 조산보 만호 겸 녹둔도 둔전관으로 복귀시켜 녹둔도의 방어를 맡기고 전라좌수사 이대원을 경흥부사에 임명해 여진족을 토벌하자는 의견이 나왔다고?’
이미 녹둔도가 공격당했고 북방에 비상이 걸린 상황에서 남해를 지키고 있는 장수들을 북방의 육진에 배치하자는 의견이었으니.
내가 보기에는 탁상공론에 불과한 어리석은 의견이었다.
하지만 조선에서는 육진에서 근무하던 장수들이 수군으로 발령받는 경우도 흔히 있는 일이었고, 이순신 장군 역시 조선보 만호로 복무하던 중 녹도만호로 발령을 받은 것이니.
이순신 장군과 나를 육진에 배치하는 것이 조선에서는 불가능한 일이 아니었다.
다행히 이순신 장군과 나를 육진으로 배치하자는 의견은 정해왜변과 고토열도 정벌로 인해 손실된 전라좌수군의 전력을 회복시키는 일이 시급하다는 이유로 선조가 거부했다고 한다.
‘정해왜변과 고토열도 정벌 때문인지 조정의 대신들에게 내 이름이 많이 알려진 것 같군. 이러다가 정말 북방으로 끌려갈지도 모르겠어……. 하루라도 빨리 울릉도로 이주해야겠다. 아무래도 올해를 넘기지 않는 것이 좋겠어.’
나와 이순신을 북방으로 배치하자는 의견이 있었다는 사실에 놀란 탓인지 귤강광이 연회 자리에서 무례를 범했다는 소식은 그리 중요하게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귤강광의 조선 방문은 충분히 의미 있는 일이었으니.
귤강광은 대마도주의 신하였고, 대마도주는 자신의 의지가 아닌 조선에 사신을 파견하라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명령에 따라 조선에 귤강광을 파견한 것이었다.
즉, 귤강광이 조선으로 온 것 자체가 히데요시가 조선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정언신 대감의 서신을 모두 읽은 나는 정여립이 보낸 서신을 펼쳤다.
정여립은 울릉도에 장정들을 더 파견해 북해도로 이주할 항왜들과 군사들이 울릉도에서 머무르며 지낼 수 있도록 집과 우물을 준비하고 있다고 했고.
대동계원들은 조선을 떠나는 것을 원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알려왔다.
‘대동계원들은 고향을 떠나는 것을 원하지 않고 있으니…… 동해도(북해도) 정벌과 한국의 건국에 동원되는 계원들도 전투가 끝난 후에는 조선으로 돌려 보내주기를 바란다. 그 대신 한국이 건국된 후에는 조선인 노비들을 한국으로 이주시키도록 하겠다. 젊은 남녀 노비를 최대 3,000명까지 이주시킬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정여립의 서신을 읽으며 생각에 생각을 거듭했다.
‘정여립도…… 대동계원들도…… 결국은 조선인들이란 말인가. 농경민족인 조선인들은 쉽게 고향을 떠나지 않았지. 그리고 정여립 또한 대동계원들이 북해도로 이주하는 것을 반가워하지 않는 것 같고.’
고향을 벗어나기 싫어하는 조선인들의 감정을 생각하면 정여립과 대동계원들의 이런 반응이 이해되지 않는 것도 아니었지만.
한편으로는 정여립이 대동계원들을 자신의 품 안에 안고 있으려고 한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런데 이전부터 느꼈지만…… 정여립이 재물과 곡식을 지원하는 것은 아까워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지원하는 것 같은데 대동계원들을 움직이는 일은 소극적으로 움직이는 것 같단 말이야. 정옥남에게서 히라도를 다녀온 일을 들었을 텐데도 이런 반응이라는 솔직히 실망인데.’
정여립에게 많은 도움을 받고 있었고 앞으로도 정여립의 도움이 필요한 일이 많았지만 나는 왠지 정여립이 대동계원들을 비롯한 인적자원을 움직이는 일에는 소극적으로 지원하는 것 같아 서운한 마음이 들었다.
하지만 나는 앞으로도 정여립에게 도움을 받아야 하는 일들을 생각하며 애써 서운한 마음을 털어버리고 정여립에게 보내는 서신을 썼다.
* * *
1587년 10월 05일.
히라도 마쓰라 다카노부의 저택.
조선으로 이주하기를 원하는 무장들과 함께 히라도를 방문한 시마즈 도시히사는 다카노부와 함께 술잔을 기울였다.
함께 술을 마시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주고받던 두 사람은 자연히 조선의 장군 이대원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 장군에게 공의 양녀를 측실로 주셨다는 말씀이십니까?”
도시히사는 놀란 표정으로 다카노부에게 물었다.
“그래 헤이메라고 자네도 몇 번 보았을 것이네. 내 측실이 전남편과의 사이에서 낳은 딸인데 이번에 양녀로 삼아 시집을 보냈지.”
“아무래도 이 장군은 조선인인데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도시히사는 마쓰라 다카노부가 무엇이 아쉬워서 이 장군에게 자신의 양녀를 시집보냈지 궁금한 표정이었다.
“자네도 그동안 이 장군과 몇 번이나 거래를 한 것으로 알고 있는데 그렇게 이 장군을 모르겠나?”
다카노부는 시마즈 도시히사를 한심하다는 듯이 보며 말했다.
“어르신께 가르침을 청합니다.”
자신이 깨닫지 못한 무엇인가가 있다고 판단한 시마즈 도시히사는 다카노부에게 고개를 숙였다.
“생각해 보게. 이 장군이 지금까지 이곳 히라도에 와서 무엇을 팔았고 무엇을 구매하였는지. 그리고 자네에게, 아니, 시마즈에 무엇을 요구하였는지 말이네.”
다카노부의 대답에 도시히사는 곰곰이 생각했다.
‘가만…… 이 장군이 히라도에서 판매한 것은 도자기와 찻잔이었지. 비싼 상품들이지만 전쟁에 쓸모 있거나 군사들에게 필요한 물품들은 아니야. 그 돈으로 구매한 상품들은 철과 구리 그리고 유황…… 그렇구나. 무기와 화약을 만들 재료들이구나!’
도시히사가 알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다카노부를 바라보자 다카노부는 한 수 알려준다는 표정으로 도시히사에게 말했다.
“이 장군이 쌀을 주문한 것은 알고 있나? 그것도 조선의 기준으로 무려 1만 섬이나. 이 장군은 무기와 화약을 만들 재료들을 대량으로 구매하고 군량으로 쓸 쌀을 주문했으며 철포를 제작하는 장인들과 대장장이들을 요구했네. 이제 이 장군을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 알 수 있겠나.”
도시히사는 한층 더 놀란 표정으로 다카노부를 바라보았다.
“설마 이 장군이 전쟁을 준비하고 있는 것입니까?”
“무장이 전쟁을 준비하는 것은 늘 있는 일이지. 그런데 이 장군이 누구와의 전쟁을 준비하고 있느냐가 중요한 것이겠지.”
도시히사나 다카노부가 생각하기에 상식적으로 일본과의 전쟁을 준비하는 사람이 일본에 와서 철과 구리, 유황을 구매하고 왜인들을 데려가지는 않을 것 같았다.
조선과 인접한 나라는 명과 일본뿐이고 조선의 북방에는 여진족들이 부족별로 살고 있을 뿐이었다.
이 장군이 일본과의 전쟁을 준비하고 있는 것은 아니라면 조선과 인접한 나라는 명국뿐인데 아무래도 명국과의 전쟁을 생각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생각할 수 있는 상대는 하나뿐이었다.
“이 장군은 조선의 왕이 될 생각을 하고 있는 것입니까?”
“충분히 가능하지 않겠나. 이 장군이 거느리고 있는 군사의 수가 정확히 얼마나 되는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본 이 장군은 빈틈이 없는 사람일세. 그 정도로 빈틈이 없는 사람이 승산이 없는 일을 벌일 것 같지는 않군. 무기와 화약 그리고 군량까지 충분하니 큰 꿈을 가질 만하지 않겠나.”
마쓰라 다카노부는 이제야 알겠냐는 표정으로 지으며 시마즈 도시히사를 바라보았고 도시히사는 생각에 잠겼다.
‘만약 이 장군이 조선의 왕이 될 생각이라면. 그렇군. 그래서 혼다 고로자에몬과 무장들을 순순히 받아들였구나. 고로자에몬과 시마즈의 무장들을 반정에 동원할 생각이야.’
시마즈의 무장들이 이 장군에게로 피신했다는 사실을 떠올리며 이것은 시마즈에게도 좋은 기회라는 생각했다.
“다카노부 공 감사합니다. 오늘의 가르침은 절대 잊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말을 마친 시마즈 도시히사는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 * *
그로부터 8일 후.
돌산도를 출발한 3척의 갤리온들이 히라도에 도착했다.
이번에 도착한 갤리온에는 나와 이언세 외에도 김시민과 이억기가 탑승하고 있었다.
이순신과 정옥남에게 히라도를 보여준 결과에 만족한 나는 큰마음을 먹고 좌수영 우후 김시민과 순천부사 이억기를 납치하듯이 갤리온에 태워 히라도로 데려왔다.
히라도에 오는 동안 귤강광의 조선 방문을 비롯해 일본의 현재 상황을 설명한 나는 일본의 실제 모습을 염탐한다는 핑계로 김시민과 이억기에게 히라도의 무역항과 갤리온들이 정박해 있는 부두를 보여주었다.
이순신과 정옥남이 히라도를 보고 충격을 받았던 것처럼 김시민과 이억기 역시 큰 충격을 받았고 일본과 유럽 상인들과의 무역을 통해 일본이 많은 양의 화약과 염초를 수입한다는 사실에 경각심을 가졌다.
이언세와 사화동에게 김시민과 이억기를 히라도와 유럽 상인들을 보여줄 것을 명령한 나는 다카노부의 저택을 찾아가 마쓰라 다카노부에게 선물에 대한 감사 인사를 하고, 혼인 선물의 답례로 준비한 찻잔과 청자를 선물한 후 본격적인 용건을 말했다.
“이번에는 내일 판매할 자기와 찻잔 외에 같은 수량의 자기와 찻잔을 더 준비해 왔습니다.”
“평소보다 2배를 판매할 생각이신가. 상인들이 좋아할 것 같은데.”
“아닙니다. 내일 판매하는 자기와 찻잔 외에 여벌로 준비해 온 자기와 찻잔은 다카노부 공께서 천천히 처분해 주십시오.”
내 말을 들은 마쓰라 다카노부는 어두운 표정으로 물었다.
“이제 히라도에는 오지 않을 생각이신가?”
“그렇지 않습니다. 다카노부 공. 다만 겨울에는 장거리 항해를 하기 어렵고 저도 시간을 내기가 어려워 한동안은 히라도에 오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내년 4월부터는 다시 히라도에 자기와 찻잔을 가지고 올 수 있을 것입니다.”
내 대답을 들은 다카노부는 알겠다는 듯이 말했다.
“자기와 다완을 찾는 상인들이 계속 히라도를 찾도록 상품을 준비해준 것이군. 고맙네 사위. 자네의 정성은 잊지 않겠네.”
다카노부가 먼저 사위라고 부르자 나는 어쩔 수 없이 다카노부를 장인이라고 불렀다.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장인어른.”
“사위가 놓고 가는 상품으로 이번 달에 사위가 구매할 철과 구리, 유황의 대금과 주문한 쌀의 대금을 상쇄하도록 하지. 사위가 주문한 쌀은 구매해서 이미 창고에 보관하고 있는 중이네. 필요할 때 가져가도록 하게.”
다카노부의 대답을 들으며 나는 역시 빈틈없는 노인이라는 생각을 했다.
‘히라도에서 판매하는 자기와 찻잔의 가격을 생각하면 다카노부가 손해를 보지는 않을 거야. 아니, 손해를 보지 않는 정도가 아니지. 몇 달 동안 히라도에 자기와 찻잔이 들어오지 않으면 자연히 자기와 찻잔의 가격은 오를 것이고 자기와 찻잔을 판매할 수 있는 사람은 다카노부뿐이니…… 이번 겨울에 다카노부가 자기와 찻잔으로 큰 이익을 볼 것 같군.’
자기와 찻잔으로 다카노부가 큰 이익을 볼 것은 분명했지만 내가 도공들에게 자기와 찻잔을 받으며 지불하는 가격을 생각하면 쌀 1만 섬과 철, 구리, 유황의 구매대금과 상쇄하는 것도 충분하다 못해 폭리를 취하는 셈이었다.
아니, 그동안 히라도에서 판매한 자기와 찻잔의 가격을 생각하면 나는 늘 히라도에서 폭리를 취한 셈이었고 이번에는 특별히 폭리를 덜 취하는 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