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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수군이 되었다-126화 (126/223)

조선 수군이 되었다. 126화

보리와 면포

이순신의 질문은 듣기에 따라서 조정에 알릴 수도 있다는 말로 들릴 수도 있었지만, 그 정도는 이미 대비하고 있었다.

“그럼 내가 사람을 잘못 본 것이겠지. 나는 최소한 자네들 3명은 믿고 있네. 내가 준비하고 있는 계획이 조선에 해가 되지 않는 이상 조정에 고하지는 않을 것으로 생각하고 있고. 조정에 장계를 올린다고 해도 이미 대부분의 준비가 끝났으니 충분히 계획을 실행할 수 있을 것이네.”

나는 태연하게 이순신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내일 당장 조정에 장계를 올린다고 해도 파발이 한성에 올라가는데 시간이 얼마나 걸릴 것 같은가? 그리고 조정에 장계가 올라간다고 해도 곧바로 좌수사를 잡아들이라는 명령이 떨어질 것 같은가? 파발이 한성에 도착하고 주상전하께 소식이 전해지기까지 하루는 걸리겠지. 조정에서 대신들이 의견을 나누면 며칠이 더 걸릴 것이고. 설사 주상전하께서 장계를 받으시고 추포하라는 명을 내리신다고 해도 금부도사나 군사들이 좌수영에 내려오기까지 시간이 걸리지.”

조선은 교통과 통신이 21세기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느리고 불편한 시대였고 건조 중인 전선들은 곧 완성될 예정이었다.

나는 대동계 출신들 장정들과 대립군에 지원했던 장정들을 고용해 좌수영으로 들어서는 길목에 보초들을 배치해 두었다.

만약 금부도사나 좌수군 소속이 아닌 군사들이 좌수영으로 진군해오면 군사들이 좌수영에 도착하기 전에 파악할 수 있었고, 갤리온과 첨저형 전선을 타고 곧바로 좌수영을 탈출하는 것도 가능했다.

‘물론 최악의 경우를 예상한 시나리오지만 지금이라도 탈출은 충분히 가능하지. 건조 중인 전선들이 완성된 다음에는 항왜들과 함께 탈출하는 것도 가능하고…… 무기는 첨저형 전선들이 완성되는 대로 대포로 무장시킬 것이고 갤리온은 이미 대포로 무장하고 있으니 갤리온과 전선에 화약과 화승총만 싣고 가도 충분하고, 식량문제도 울릉도에 있는 식량과 연장들이 있으니 문제없다. 히라도에도 쌀 1만 섬을 준비해 두었으니 항왜들과 갤리온만 있으면 얼마든지 다시 시작할 수 있어.’

내 대답에 이순신은 여전히 표정의 변화가 없는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지만 김시민과 이억기는 놀랍다 못해 기가 막힌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좌수사 영감.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더 묻겠습니다.”

“물으시게.”

“우후와 순천부사 그리고 소장은 북방에서 야인들과의 전투를 겪은 장수들입니다. 저희가 탐이 나지는 않으십니까?”

이순신의 질문에 나는 본능적으로 대답할 뻔했다.

‘당연히 탐나지. 탐나고말고.’

세상에서 그 누가 이순신 장군과 이억기 장군 그리고 김시민 장군을 부하 장수로 부릴 수 있는 기회를 마다할까.

하지만 지금은 때가 아니었다.

“물론 탐나지. 우후와 순천부사 그리고 녹도만호가 북방에서 전공을 쌓은 것은 본관도 잘 알고 있는 일이네. 물론 욕심은 나지만 내가 동해도에 거점을 만들려는 이유는 왜국의 침략으로부터 조선을 지켜내고 왜국을 징벌하는 것이네. 자네들 같은 명장들이 조선을 떠난다면 누가 있어서 조선을 지키겠는가? 왜국이 조선을 침략했다는 소식을 듣고 동해도에서 출병하기 전에 조선 팔도가 왜군에게 짓밟히게 된다면 동해도에서의 출병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내 대답을 들은 이순신은 고개를 끄덕였고 김시민과 이억기도 공감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과연 좌수사 영감께서 염려하시는 데로 왜국이 조선을 침략한다면 좌수사 영감께서 동해도에서 양병한 군사들은 왜국의 등 뒤를 겨누는 화살이 될 것이고. 왜국이 조선을 침략하지 않는다고 해도 동해도의 왜인들을 토벌하고 동해도를 좌수사 영감께서 통치하시는 것이니 조선에는 해가 될 일이 없을 것입니다.”

나와 이순신의 대화를 들은 김시민은 내가 북해도를 점령하는 것이 조선에 해가 되지 않는다고 판단했고 이억기도 같은 생각이었다.

3명의 명장이 모두 북해도 정벌에 찬성하자 나는 내가 생각했던 계획들을 설명하며 장수들의 의견을 구했다.

이순신, 김시민, 이억기는 내 계획을 듣고 자신들의 의견을 말하며 세부적인 계획들을 보충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저녁 시간이 지나도록 3명의 장수와 북해도 정벌 계획을 의논한 나는 장수들과 함께 저녁밥을 먹고 탁주도 한잔 마시며 늦은 시간까지 이야기를 나누었다.

* * *

좌수영에서 자타가 공인하는 내 심복인 손대남, 이언세, 김개동 그리고 좌수영 최고의 명장들은 이순신, 이억기, 김시민에게 북해도 정벌 계획을 털어놓은 나는 그날 이후 수시로 그들과 정벌 계획을 점검하며 좌수영을 떠날 준비를 했다.

3명의 명장과 함께 북해도를 정벌할 준비를 하던 어느 날 정옥남이 갑자기 좌수영으로 나를 찾아왔다.

‘정옥남이 좌수영에 도착했다고…… 미리 연락도 없이 무슨 일로 찾아왔지?’

내가 부르지도 않았는데 정옥남이 찾아왔다는 보고에 나는 정옥남이 찾아온 이유가 궁금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잘됐다고 생각했다.

‘정옥남에게 시킬 일이 있었는데. 잘됐다.’

“정공, 그동안 안녕하셨소이까?”

오랜만에 찾아온 정옥남이 반가웠던 나는 정옥남에게 안부를 물었지만 정옥남은 놀라 표정으로 나에게 물었다.

“아니, 좌수사 영감. 이게 무슨 일입니까?”

“아니, 무슨 일이 있소이까? 천천히 말씀해 보시오.”

내가 정옥남에게 무슨 일로 있었는지 묻자 정옥남은 아무 말도 없이 소신을 내게 내밀었다.

서신의 필체를 보니 정여립이 쓴 글이었다. 서신을 읽어 내려가자 과연 정옥남이 놀랄 만한 내용이었다.

“아하. 죽도 선생의 서신 때문에 놀라신 모양이오. 하긴 내가 봐도 오해할 만한 글이기는 했소.”

내가 서신을 읽고도 태연하게 대답하자 정옥남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아니, 오해라고 하셨소이까? 좌수사 영감. 아버지께서는 분명히 좌수사 영감의 모친과 부인을 모시라고 하셨는데. 이것이 오해라는 말씀이십니까?”

나는 정여립의 서신을 잘못 이해하고 있는 정옥남에게 자세히 설명했다.

“그것은 내가 죽도 선생에게 부탁한 것이오. 죽도 선생에게 내가 좌수영을 떠나기 전에 모친과 부인을 피신시켜 주실 것을 부탁드렸소이다.”

그제 서야 전후 상황을 파악한 정옥남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럼 좌수사 영감의 모친과 부인을 모시라고 하신 것이…….”

“내가 항왜들과 함께 좌수영을 떠나면 조정에서는 나를 잡으려고 할 것이고 본가에도 화가 미칠 것이오. 그래서 미리 모친과 부인의 피신을 죽도 선생에게 부탁드린 것이오.”

정옥남은 자신이 아버지의 글을 이해하지 못하고 소란을 피운 것이 민망했는지 목소리를 높여 허세를 부리며 대답했다.

“그런 말씀이셨구려. 이제는 무슨 뜻인지 분명하게 알았으니 아무 염려하지 마시오. 내가 직접 평택으로 가서 좌수사 영감의 모친과 부인을 모시고 올 것이오.”

나는 직접 나서겠다는 정옥남을 말렸다.

“아니. 정공의 신분이 노출돼서 좋을 것이 없으니 정공께서 직접 나서지 말고 믿을 만한 사람들을 보내는 것이 좋겠소. 모친과 부인은 아무것도 모르고 계시니 내가 서신을 써 주겠소. 내가 쓴 글을 보시면 순순히 따라오실 것이오.”

“아니오. 좌수사 영감의 모친과 부인을 모시는 길인데. 어찌 남에게 맡길 수 있겠소. 내가 직접 나서서 모셔올 것이오.”

정옥남은 다시 나서려고 했지만 정옥남에게는 시킬 일이 따로 있었다.

“평택에는 믿을 만한 사람을 보내시고. 정공께선 나를 도와주실 일이 따로 있소이다.”

“내가 할 일이라니. 그것이 무엇이오?”

정옥남이 호기심을 가지고 물어보자 나는 방 안에 펼쳐진 병풍 뒤에서 나무 상자를 꺼냈다.

상자는 그렇게 크지 않았지만 묵직했다. 내가 묵직한 상자를 내려놓자 정옥남은 상자를 바라보며 물었다.

“좌수사 영감. 이것은 무엇이오?”

나는 상자의 뚜껑을 열면서 대답했다.

“은 1,000냥이오.”

상자 안에는 왜국에서 주조한 은화가 가득히 들어 있었다.

“이것이…… 다 은이라는 말이오……?”

정옥남이 은화를 바라보며 놀란 표정으로 물었다.

“왜국에서 만든 왜은이오. 왜관의 왜인들과 거래하는 상인들이라면 왜은을 받을 것이오.”

“이 은으로 무엇을 하면 되겠소이까?”

“보리와 면포를 최대한 많이 구해주시오. 면포는 항왜들의 옷을 만들고 전선의 돛을 만들 것이니. 최대한 상품(上品)으로 구해주셔야 하오. 은의 절반인 500냥은 면포를 구매하시는 데 사용하시고 나머지 500냥으로는 보리를 구해주시오.”

내 대답을 들은 정옥남은 진지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전선의 돛과 군량을 준비하시는 것을 보니. 출정 날을 정하신 모양이오.”

정옥남은 쌀이 아닌 보리를 구해달라는 말에 내가 군량을 확보하려고 보리를 구매하려는 것을 파악한 것이다.

나는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고 정옥남에게 웃으며 대답했다.

“정공의 도움이 꼭 필요합니다.” 

“염려하지 마시오. 최대한 많은 면포와 곡식을 구해올 것이오.”

정옥남은 사명감에 불타는 눈빛으로 은이 든 상자를 챙겨서 좌수영을 떠났다.

당장 군사들과 항왜들의 의복이 부족한 것은 아니었고 건조하고 있는 전선에 달 돛도 준비되어 있었다.

정옥남에게 보리와 면포를 구해달라고 한 이유는 정옥남의 생각대로 군량을 확보하려는 목적도 있었지만, 면포가 조선에서는 물론 왜국에서도 화폐 대신 교환수단으로 사용할 수 있는 유용한 제품이었기 때문이었다.

‘왜국에서는 아직까지 조선에서 만든 면포의 인기가 좋지. 북해도를 정벌한 후 아이누인들과 거래할 때도 면포는 유용한 물건이니 최대한 많이 확보해 놓자.’

한 무리를 책임지는 위치에 있다 보니 이것저것 신경 써야 할 일이 많았다.

면포를 구하는 것도 마찬가지였다. 면포는 실제 의복과 이불을 만들거나 전선의 돛을 제작하는 데 쓰이고 교환수단으로 써도 가치가 있으니 식량과 무기 다음으로 중요한 물품이었다.

* * *

정옥남이 은을 가지고 떠난 날로부터 정확히 7일 후 좌수영에서 건조하던 5척의 첨저형 전선이 완성되었다.

좌수영에 속한 장인들과 목수들은 한 번에 4척을 건조하는 것이 한계라고 했었지만, 좌수영의 군사들과 노비들까지 전선의 건조에 동원했고 정여립이 지원한 장인들과 장정들의 노동력이 더해지면서 기어이 5척을 동시에 건조하는 데 성공한 것이다.

왜인들이 남만선이라 부르는 갤리온과 왜선인 관선의 형태를 모방한 첨저형 전선은 기존의 판옥선과 달리 평저선이 아닌 배의 바닥이 V자 형태로 뾰족한 첨저선이었고, 갤리온의 구조를 모방해 갑판이 2층으로 나뉘어 있었다.

즉, 판옥선과 달리 갑판이 상부갑판과 하부갑판으로 나뉘었고, 대포는 하부갑판에 배치했다.

물론 유사시에는 상부갑판에도 대포를 배치하는 것이 가능한 구조였고, 파도가 칠 때 대포와 화약이 물에 젖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갑판에 배 안에서 열고 닫을 수 있는 포문을 설치해 평상시에는 포문을 닫고 있다가 적선을 발견하거나 전투가 생긴 경우에는 포문을 열고 대포를 발포할 수 있는 구조였다.

이 2층 구조의 갑판과 포문은 대목이 첨저형 전선을 설계하고 있었을 때 내가 강력하게 주장해서 관철시킨 결과물 들이었다.

대목과 목수들은 자신들이 익숙하지 않은 구조로 전선을 설계하고 건조하는 것을 부담스러워 했지만 견본으로 쓸 수 있는 갤리온이 있었으니.

나는 실제로 가능하다는 사실을 주장하며 내 의견을 굽히지 않았고 결국 내 고집대로 전선은 완성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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