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수군이 되었다. 141화
눈엣가시
무자년(1588년) 12월 11일 히라도 마쓰라 다카노부의 저택.
두 달 만에 다시 히라도를 방문한 사화동과 대화를 나눈 마쓰라 다카노부는 항상 그렇듯이 어려울 것 없다는 표정으로 사화동에게 말했다.
“가져갈 상품들은 내일 아침에 부두로 보내주겠네. 남녀 노예 2,000명과 철, 구리, 유황, 그리고 이번에는 쌀과 보리도 가져가겠다고?”
마쓰라 다카노부의 질문에 사화동은 이전과 마찬가지로 융통성 없어 보이는 표정과 말투로 대답했다.
“저는 다카노부 님께서 주시는 대로 받아갈 뿐입니다. 서신에 쓰여 있는 대로 주시면 그대로 받아가겠습니다.”
사화동의 대답에 다카노부는 질렸다는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서신을 보니 이 장군이 쌀 1,000섬과 보리 2,000섬을 보내달라고 하더군. 이 장군이 주문한 대로 준비해 주겠네. 노예 2,000명에 곡식 3,000섬이면 적지 않은 양인데 전부 가져갈 수 있겠나?”
이번에도 사화동은 아무렇지 않다는 듯이 대답했다.
“남만선과 전선 9척을 끌고 왔으니 전부 배에 싣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닐 것입니다. 장군님께서 명하신 일인데 자리가 부족하면 쌀부대 위에 노예들을 앉혀서라도 전부 데려갈 것입니다.”
사화동의 대답을 들은 다카노부는 속으로 생각했다.
‘하여간 재미없는 놈이야. 그래도 책임감은 있는 것 같고…… 이 장군에 대한 충성심도 대단하군. 역시 이 장군은 사람 보는 눈이 있어.’
“알겠네. 곡식도 내일 아침까지 부두로 보내줄 것이니. 걱정 말게. 그리고 이 장군의 서신에 다음 배는 4개월 후에 보내겠다고 했으니 다음 거래는 4월에 맞춰서 준비하도록 하겠네. 이 장군에게 그렇게 전하게.”
“예 알겠습니다. 장군님께 반드시 전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사화동의 대답을 들은 다카노부는 지나가는 말처럼 물었다.
“이 장군이 주문했던 노예가 1만 명이네. 적지 않은 수인데 그렇게까지 일손이 많이 필요한가?”
다카노부의 질문에 사화동의 질문은 여전했다.
“제가 대답할 수 있는 질문에 아닙니다. 그런 질문은 다카노부 님께서 장군님께 서신을 통해 물으시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사화동의 대답에 기분이 상한 다카노부는 사화동을 내쫓듯이 내보냈다.
“알겠네. 필요한 것은 내일 아침 부두로 보내줄 것이니 이제 그만 가보도록 하게.”
“감사합니다. 다카노부 님.”
사화동은 다카노부에게 정중하게 인사를 올린 후 다카노부의 저택을 떠났다.
사화동이 떠난 후 다카노부는 술상을 앞에 놓고 측실의 시중을 받아가며 술잔을 기울였다.
‘참, 보면 볼수록 마음에 들지 않는 놈이야. 머리도 나쁘지는 않은 것 같고. 이 장군에 대한 충성심도 대단한 것 같지만 말투나 행동은 영 마음에 안 들어 이 장군은 그래도 상대하는 재미가 있었는데 이렇게 재미없고 딱딱한 놈을 이 장군 대신 상대해야 하다니. 그래도 이 장군을 대신해서 거래하러 온 놈이니. 내가 상대하지 않을 수도 없고…….’
사화동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다카노부는 사화동과의 대화를 떠올리며 자신도 모르게 실소를 지었다.
‘정말 대단한 놈이다. 이 마쓰라 다카노부를 이렇게까지 불쾌하게 만들다니. 이 장군도 내 앞에서는 내 기분을 상하지 않게 하려고 언행을 조심하는 모습을 보였었는데.’
어이가 없다는 생각에 웃음을 터뜨린 다카노부는 사화동을 떠올리며. 요즘 자신을 골치 아프게 만들고 있는 존재들이 생각났다.
‘생각해 보니. 사화동 그놈과 여러모로 닮은 점이 있는 놈들이구나. 쓸모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상대하자니 골치 아프고 그렇다고 상대를 안 할 수도 없고.’
자신을 골치 아프게 만드는 존재들이 여러 가지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에 다카노부는 자신도 모르게 어이없는 웃음을 짓다가 자신에게 골치 아픈 존재들을 자신의 눈 밖으로 치우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사화동 그놈에게 차라리 그놈들도 데려가라고 할까. 그럼 골치 아픈 존재들이 모두 사라지는 것인데.’
처음에는 장난으로 그런 생각을 했던 다카노부는 곧 진지한 표정으로 지으며 생각에 잠겼다. 생각해 보니 충분히 가능성이 있어 보였던 것이다.
* * *
다음 날 아침 직접 부두로 나온 다카노부는 사화동에게 서신을 건넸다.
“내가 이 장군에게 보내는 서신이네. 이 장군에게 전달해 주게.”
사화동은 정중한 태도로 다카노부가 내미는 서신을 받아 품 안에 넣으며 대답했다.
“장군님께 직접 전해드리겠습니다.”
사화동의 대답을 들은 다카노부는 만족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인 후 자신의 뒤에 서있는 왜인들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리고 이들을 이 장군이 있는 곳에 데려다 주게.”
다카노부의 부탁에 사화동은 다카노부가 가리키는 이들을 바라보았다.
그들은 한 명의 중년 남성 두 명의 젊은 남성으로 깨끗한 옷차림에 일본도까지 허리에 차고 있는 것을 보니 노예는 아니었다.
“저들은 누구입니까? 장군님께서 노예 외에 다른 사람들을 데려오라는 명을 내리신 적은 없습니다.”
“저들을 보내는 것은 내가 책임지겠네. 저들에 대해서는 이 장군에게 보내는 서신에 자세한 사정을 적어놓았으니 저들을 데려갔다고 해서 이 장군이 자네를 책망하는 일은 없을 것이네. 자네도 알고 있지 않은가. 사사롭게는 이 장군이 이 마쓰라 다카노부 님 사위라는 것을 말일세. 장인이 사위에게 해가 되는 일을 하겠나.”
다카노부의 요청을 거절하려고 했던 사화동은 다카노부가 이대원의 장인이라는 사실을 들먹이자 다카노부의 요청을 거절하기가 어려웠다.
잠시 고민하던 사화동은 다카노부가 데려가라고 요청한 왜인들의 수가 3명에 불과하다는 것을 계산해 다카노부의 요청을 수락했다.
“좋습니다. 그러나 저들이 검을 지내고 배에 탈 수는 없습니다. 배에 오르기 전에 지니고 있는 검을 풀어놓아야 합니다.”
시화동은 왜인들의 검을 풀어놓을 것을 요구했고 이 정도만 해도 고지식한 사화동이 많이 양보한 것이라고 판단한 다카노부는 왜인들에게 검을 풀어놓을 것을 명령했다.
“잘 들었지. 모두 검을 풀어놓도록 하여라.”
다카노부의 명령에 왜인들은 순순히 검을 풀어 다카노부의 부하들에게 건네주었다. 다카노부는 왜인들에게 말했다.
“너희의 사정은 장군에게 서신에 적어 보내지만 장군을 설득하고 설득하지 못하고는 너희의 재주에 달려있다. 장군이 매정한 사람은 아니지만 만만하지도 않은 사람이니 너희가 쓸모 있는 존재라는 것을 장군에게 보여주는 것이 중요할 것이다. 알겠느냐.”
다카노부의 말이 끝나자 중년의 왜인이 다카노부에게 간절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저희에게 이런 기회를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어르신. 하나님의 은혜가 늘 어르신과 함께하시기를 기도하겠습니다.”
왜인의 대답에 다카노부는 듣기 싫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됐다. 너희가 잘되는 것이 결과적으로 나에게도 나쁜 일이 아니니 이런 기회를 만들어 준 것이지만. 너희에게는 두 번 다시 없을 좋은 기회이니. 잘해 보거라. 그럼 잘 가거라.”
왜인들에게 인사를 마친 다카노부는 사화동에게 다가갔다.
“그럼 조심히 돌아가게.”
“예 감사합니다. 다카노부 님 다음에 뵐 때 까지 건강하십시오.”
사화동은 마쓰라 다카노부에게 작별인사를 한 후 갤리온에 올랐다.
그동안 노예들과 동해도에 가져갈 화물을 모두 실은 갤리온과 전선들은 한 척씩 항구를 떠나 바다로 향했다.
9척의 배가 모두 히라도항을 벗어나자 진형을 정비해 일제히 북쪽으로 향했다.
배들이 항구를 떠나는 광경을 부두에서 지켜보던 마쓰라 다카노부는 진심으로 이번에 떠나는 배들이 목적지까지 무사히 도착하기를 기원했다.
“잘만 하면 눈에 거슬리는 것들을 모두 낸 눈앞에서 치워 버릴 수가 있겠어. 사위에게도 좋은 일일 것이고.”
* * *
12월 18일 조선 전라도 전주 정여립의 자택.
한동안 강릉에서 거주하며 울릉도로 노비와 곡식들 보내던 정여립과 정옥남은 겨울이 되자 울릉도에 면포와 목화솜을 보낸 후 전주의 집으로 돌아왔다.
겨울 추위도 피하고 한동안 관리하지 못했던 토지와 집도 관리하기 위해 자택으로 내려온 것이다.
정여립은 전라도로 내려온 후에도 지방의 양반들과 관원들 그리고 대동계원들 등 사람들을 만나는 일로 정신없이 바빴으니 집안의 일이나 토지들을 관리하는 일은 정옥남의 몫이었다.
집으로 돌아와 이런 일, 저런 일을 처리하느라 바빴던 정옥남은 급한 일이 어느 정도 정리되고 나서야 이대원이 자신에게 보낸 서신을 생각했다.
‘좌수사 영감이 울릉도에 면포와 목화솜을 운반한 상선을 통해 내게 서신을 보냈었지. 서신의 겉에 전주의 집으로 돌아가면 열어보라는 글이 쓰여 있는 것을 보고 궁금했지만 열어보지 않고 참았었는데. 막상 집에 와서 바빠서 서신을 깜박 잊고 있었네…….’
서재에 잘 보관해 두었던 서신을 꺼낸 정옥남은 침착하게 서신을 열어보았다.
“좌수사는 무슨 생각으로 이 서신을 집에서 열어보라고 했을까?”
궁금증에 서신을 열어본 정옥남은 서신에 적힌 글을 읽고 점차 얼굴이 창백해져 갔다.
‘아니, 이게 뭐야. 곧 아버님을 모함하려는 움직임이 있을 수 있다고? 아버지께서 넓은 토지를 보유하고 계시고 대동계원들과 어울리시는 것을 구실로 삼아 역모를 준비하고 있다고 모함하려는 무리가 있고 여기에 아버님께서 지방의 양반들 그리고 조정의 대신들과 주고받으신 서신들은 아버님이 그들과 연계해 역모를 일으킬 준비를 하고 있다는 증거로 쓰일 수 있다니……!’
좌수사 이대원이 보낸 서신을 읽은 정옥남은 역모라는 말에 놀랐지만 생각해 보니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아버님이 거느리고 있는 장정들의 수가 1,000여 명에 달하고 아버님 소유의 전답에서 농사를 짓고 있는 농민(소작농)들도 그 수가 수백 명이다. 여기에 아버님과 서신을 주고받는 이들 가운데 관직에 있는 분들이 한두 명이 아니니…… 누가 역모를 준비하고 있다고 전하께 고하기라도 하는 날에는 의금부의 문초를 피할 도리가 없다.’
어느 시대, 어느 왕조에서건 반역은 큰 죄였다.
조선 역시 반역을 준비하고 있다고 의심이라도 받으면 의금부로 압송돼 가혹한 고문을 피할 수 없었다.
고문을 견디지 못하고 반란을 준비했다고 자백하면 역도로 몰려 당사자는 물론 집안 전체가 몰살당하는 일이 벌어졌고, 고문에 굴복하지 않고 끝까지 무죄를 주장했어도 고문들 당하다가 사망하거나 불구가 되는 일이 흔하게 벌어졌다.
좌수사의 서신에 적힌 내용이 그럴듯하다고 판단한 정옥남은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며 끝까지 서신을 읽었다.
‘그래도 좌수사 영감이 의리가 있구나. 역모로 의심을 받으며 울릉도로 몸을 피하라니……. 좌수사 영감은 우리 부자를 지켜줄 생각이구나. 그리고 아버님께서 사람들과 주고받은 서신을 모두 불태우라니. 이것은 역모의 증거로 쓰일 수 있는 서신들을 없애야 한다는 말이구나. 좋았어. 아버님께서 집을 비우시는 대로 서신들부터 모두 불태워 버리자.’
좌수사 이대원이 보낸 서신을 믿고 정여립이 대신들과 주고받은 서신들을 없애 버릴 것을 결심한 정옥남은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 울릉도로 피신할 준비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