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수군이 되었다. 142화
기리시탄
무자년(1588년)의 마지막 달인 12월이었지만 무자년 안에 노비 8,000명을 동해도로 이주시키겠다는 정여립의 야심 찬 계획은 결국 이뤄지지 못했다.
정여립은 실제로 8,000명의 노비를 동해도로 이주시키려고 했지만 정여립이 준비한 노비들을 울릉도에서 동해도로 이주시킬 운송수단이 부족했던 탓에 12월까지 동해도로 이주한 노비들의 수는 3,000명에 불과했다.
내가 보유하고 있는 선박은 고토열도를 정벌하면서 획득한 갤리온 3척과 전라좌수영에서 건조한 첨저형 전선 6척이 전부였고, 이 9척의 선박으로 히라도와 교역을 하는 동시에 울릉도와 동해도를 오가며 노비뿐만 아니라 곡식과 면포 그리고 목화솜을 수송하였으니 정여립이 계획했던 만큼 노비들을 수송할 수 없었던 것이다.
겨울이 되자 바다는 더욱 거칠어졌고 동해도의 추위도 무시할 수 없었다.
나는 아쉬운 마음이 들었지만 주변의 환경을 고려해 정여립에게 내년 봄에 다시 노비들을 보내줄 것을 요청했고, 히라도에도 사화동을 통해 서신을 보내 겨울 추위를 피해 4월에 다시 교역선을 보내겠다고 통보했다.
겨울 동안은 노비와 노예의 이주를 중단하고 내정을 정비할 생각이었다.
“지금까지 조선에서 동해도로 이주한 노비들의 수가 3,000명 그중에서 사내인 노(奴)의 수가 1,500명에 그중에서 신병으로 선발된 인원이 500명이다. 그리고 히라도에서 구매한 노예들의 수가 2,000명, 이번 달 중으로 2,000명이 더 도착할 예정이지. 그럼 총 4,000명에 그들 중에서 사내의 수가 2,000명이니…… 사내들 중에서 3할(30%)을 신병으로 동원하면 600명, 신병의 수가 1,100명. 좋아, 이번 겨울 동안 훈련시키면 내년에는 쓸 만하겠지.”
동해도로 이주하는 인원이 늘수록 먹여 살려야 하는 입이 늘어나는 셈이었지만 어느 시대나 인구의 수는 곧 국력이었다.
올해만 1,100명의 신병을 새로 확보했다는 사실에 마음이 든든해졌다.
“대립군과 대동계원들을 조선으로 돌려보낸 것이 아쉽기는 하지만…… 신병들의 훈련만 끝나면 대립군과 대동계원들의 공백을 채우고도 남는다. 계획했던 대로 내년에 노비 5,000명과 노예 6,000명을 추가로 이주시키는 데 성공하면 내년에도 1,600명 이상의 신병을 새로 확보할 수 있어. 이런 식이면 임진왜란이 발발하는 1592년 이전에 1만 이상의 병력을 확보하는 것도 충분히 가능하다.”
물론 계획했던 대로 노비와 노예들을 동해도로 이주시키는 것은 조선에서 정여립이 계속 노비와 곡식들을 공급해 주고 히라도의 마쓰라 다카노부에게서 계속 노예들을 구매할 수 있어야 가능한 일이었지만 나는 그 점은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마쓰라 다카노부는 장사꾼이야. 나와 계속 거래를 유지하는 것이 이익이 되는 한 나를 배신하거나 나와 관계를 끊을 생각은 하지 못할 거야. 더구나 히라도에 청자를 공급하는 사람은 나뿐이니 내 기분을 상하게 할 필요는 없지. 마쓰라 다카노부 정도의 인물이 나에게 자기와 찻잔을 구매하기 위해 상인들이 히라도를 찾아오는 것이 히라도에 이익이라는 것을 모르고 있을 리가 없으니. 걱정되는 것은 정여립인데…… 정여립의 인맥과 재력은 내가 상상하던 것 이상이었어. 그런 정여립이 기축옥사(己丑獄事)[정여립의 난]으로 몰락한 것이 이상하게 느껴질 정도야. 역사기록에는 정여립이 관군에 붙잡히기 전에 자살했다고 되어 있지만 그것도 의문이고. 내가 본 정여립의 인맥과 재력 그리고 대동계원들의 실력이나 규모로 보면 정여립의 세력은 작지 않았어. 정옥남에게 서신을 보내 역모로 모함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을 미리 알려줬으니 정옥남이나 정여립이 대책을 세우겠지. 그 정도의 재력과 세력을 가진 정여립이 쉽게 포기할 리는 없을 테니.’
기축옥사, 즉, 정여립의 난은 내년인 기축년(1589년) 음력 10월 선조에게 황해도 관찰사 한준의 장계가 올라가는 것을 시작으로 벌어진다.
한준이 올린 장계에는 정여립이 겨울철 한강이 얼었을 때를 기다려 황해도와 전라도에서 동원한 사병을 거느리고 한성으로 진군해 병조판서 신립을 죽이고 선조를 몰아내려 한다고 쓰여 있었다고 한다.
한준의 장계를 읽은 선조는 의금부의 도사와 전선관을 황해도와 전라도로 보내 사실을 확인했다고 하니 선조는 장계를 확인한 후 신속하게 조치를 취한 것으로 보인다.
결국 이 사건은 정여립이 자살한 후 정여립이 역모를 일으키려 했다는 주장이 기정사실이 되면서 정여립의 친족들은 물론 정여립과 서신을 주고받던 조정의 대신들까지 폭풍을 맞게 된다.
선조의 신임이 두터웠던 정언신도 정여립과 친척이라 하여서 그 폭풍을 피하지 못하고 유배를 가게 되었고, 결국 유배지에서 사망하였다.
기축옥사로 인해 사망하거나 몰락한 사람들의 수가 1,000여명에 달한다고 하니 아예 학살이 벌어진 수준이었다.
내가 정옥남에게 서신을 보내 역모로 몰릴 수 있다는 사실을 알린 것은 정여립에게 여러 가지로 지원을 받아 고마운 감정도 있었지만 이 기축옥사가 마음에 들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임진왜란을 불과 3년 앞두고 1,000여 명의 무고한 사람들이 살해당하는 큰 사건이 벌어졌으니 조선에 영향을 끼치지 않았을 리가 없었고, 몇몇 사람의 모함으로 1,000여 명의 사람들이 살해당하는 큰 사건이 벌어진 것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기축옥사가 벌어진 것만 봐도 그리고 반란을 준비했다는 물리적인 증거도 없이 수많은 사람이 학살당한 점만 봐도 선조가 이끄는 조선이 얼마나 불안정한 나라인지 알 수 있다. 조선을 떠나 동해도에 정착한 것은 아무리 생각해 봐도 현명한 선택이었어.’
* * *
내가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을 때 동해도의 함관항에는 히라도에서 노예와 곡식 그리고 각종 물품을 싣고 온 배들이 들어오고 있었다.
“다카노부 님의 부탁이 있었기에 배에 태워드리기는 했지만 장군님께서 여러분을 어떻게 생각하실지는 알 수 없소이다. 장군님께 말씀드리기는 하겠지만 여러분은 초대받지 못한 손님이라는 것을 잊지는 마시오.”
사화동의 말에 중년의 왜인 이케다 마사이에는 사화동에게 정중히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우리가 불청객인 것은 잘 알고 있소이다. 앞으로 무슨 일이 벌어져도 절대로 그대나 다카노부 어르신을 원망하지는 않을 것이오. 이제까지 우리를 보살펴 주셔서 고맙소이다. 하나님의 은혜가 함께 하시기를.”
이케다 마사이에의 대답을 들은 사화동은 그들에게 정중히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한 후 선실을 나왔다.
배에 공간은 넉넉했지만 마쓰라 다카노부의 부탁으로 배에 탄 저들을 노예들과 같이 선창에서 머물게 할 수 없었던 사화동은 선원들의 불만에도 불구하고 선실 하나를 비워 저들에게 내주었다.
먹는 음식은 선원들이 먹는 것과 마찬가지로 크게 대접한 것은 없었지만 자신들에게 선실을 준 것만으로도 사화동이 자신들을 신경 써주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이케다 마사이에의 일행은 항상 사화동에게 고마워하고 있었다.
사화동이 선실 밖으로 나가자 이케다 마사이에의 일행은 자리에 앉아 두 손을 마주 잡고 기도를 시작했다.
배가 항구에 도착하자 선원들과 병사들은 우선 선창의 출입문을 열어 노예들부터 부두로 내리게 했다.
“어서어서 움직여라!”
“빨리 움직이지 못해?! 늦장을 부리는 놈은 오늘 밥이 없을 줄 알아라!”
“너희는 운이 아주 좋은 놈들이다. 여기서 한 달만 지내면 왜 그런지 알게 될 거다.”
선원들과 병사들은 노예들에게 고함을 지르는 한편 달래가면서 노예들을 배에서 내리게 했고 노예들이 부두로 나오자 기다리고 있던 백호대 병사들이 노예들을 목욕탕으로 인도했다.
노예들이 모두 배에서 내리자 그다음은 배에 실린 곡식과 화물들을 내릴 차례였다.
곧 노비들과 이들보다 먼저 동해도에 도착한 노예들이 배에 올라 곡식 부대를 부두로 운반했다.
노예들과 노비들이 배에 올라갔다가 쌀과 보리가 담긴 부대를 짊어지고 부두로 내려오는 행동을 반복하는 동안 이케다 마사이에와 젊은이들은 배에서 부두로 내려왔다.
부두에서 조천군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던 사화동은 그들을 발견하자 조천군에게 그들을 소개했다.
“다카노부 님께서 부탁하신 사람들이 이들입니다.”
사화동의 설명을 들은 조천군은 이케다 마사이에에게 말했다.
“좌수사 영감을 뵙고 싶다고 했다지. 영감은 쉽게 만날 수 있는 분이 아니시다. 좌수사 영감께 말씀을 드릴 테니. 숙소에서 기다려라. 너희가 지낼 수 숙소로 안내해 주마.”
조천군이 한 말을 사화동이 일본어로 전해주자 이케다 마사이에와 젊은이들은 조천군에게 고개를 숙이며 감사 인사를 했다.
조천군은 그들의 인사를 받으며 병사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이들을 관아로 안내하고 방을 내주어라.”
조천군의 명령을 받은 병사들은 이케다 마사이에의 일행을 요새로 안내했다.
* * *
그로부터 1시간 후 나는 사화동으로부터 히라도에 다녀온 경과를 보고 받으며 마쓰라 다카노부가 보낸 서신을 받았다.
사화동은 경과를 보고하며 다카노부의 부탁으로 왜인 3명을 동해도에 데려왔다고 보고했다.
“마쓰라 다카노부공이 갑자기 부탁을 했다고. 그것도 히라도를 출발하기 직전에.”
“예 그렇습니다. 장군님. 부두에서 갑자기 말씀하셨습니다. 다카노부 님께서 직접 부탁하신 사람들이라 데리고 오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죄송합니다.”
사화동은 내 허락도 없이 외부인들을 동해도로 데려온 것이 마음에 걸리는지 죄송하다고 했지만 내가 있었어도 그 같은 상황에서는 어쩔 수 없었을 것 같았다.
“괜찮다. 다카노부공께서 직접 부탁하신 일인데 거절했다면 그 결과가 좋지 않았을 것이다. 그들을 내가 만나보겠다.”
“예 감사합니다. 장군님.”
“피곤할 텐데. 그만 들어가서 쉬어라.”
“예 장군님.”
사화동을 돌려보낸 후 마쓰라 다카노부가 보낸 서신을 읽던 나는 다카노부가 부탁했다는 왜인들의 정체를 알고는 놀랐다.
“기리시탄(일본 기독교인)…….”
조선에서도 천주교도들에 대한 탄압과 학살이 있었지만 일본에서 기독교 박해는 그 역사가 훨씬 더 길었다.
일본은 전국시대 포르투칼과 스페인 그리고 네덜란드의 무역선들이 일본에 도착하면서 유럽인들과의 무역이 시작됐고, 유럽인들이 일본으로 들어오게 되면서 자연히 기독교 선교사들도 일본으로 유입되었다.
특히 오다 노부나가의 경우에는 유럽인들의 문물에도 많은 관심을 가졌고 유럽에서 온 선교사에게 직접 유럽의 문물을 소개받기도 했다.
그러나 일본에서 활동하던 유럽인 선교사들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규슈정벌 이후 큰 위기를 맞이한다.
규슈정벌이 끝난 후 규슈지역을 직접 살펴본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기독교와 선교사들을 자신의 권력을 위협할 수 있는 존재로 보고 선교사들에 대한 추방령을 내린 것이다.
그와 더불어 자신의 영향력 아래에 있던 영주들 중에서 기독교를 믿고 있던 영주들을 위협해 종교를 버리든지 아니면 지위와 영지를 버릴 것을 강요해 영주들이 개종하도록 위협하기까지 했다.
이런 상황이었으니 일본의 일반 기독교인들이 신변의 위협을 느끼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