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수군이 되었다. 144화
건국
기축년(1589년) 1월. 조선 전라도 전주 정여립의 자택.
“도대체 무슨 일을 벌인 것이냐?”
정여립은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정옥남을 바라보며 물었다.
“아버님 죄송합니다. 소자 재물이 필요하여 집안의 재물을 가져다 썼습니다.”
정옥남의 대답을 들은 정여립은 한숨을 내쉬며 정옥남에게 말했다.
“앞으로 어디 가서도 절대로 거짓을 말하지 말거라. 그렇게 얼굴에 거짓을 말하는 것이 티가 나고 있으니 네 말에 속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정옥남은 한층 더 얼굴을 숙였고 정여립은 다시 이유를 물었다.
“이제 무슨 이유로 재물이 필요했는지 솔직히 말하거라. 네가 주색에 빠져서 재물을 탕진할 위인은 못 된다는 것은 세상 누구보다 내가 잘 알고 있는 사실이고, 너 혼자 쓰기에는 많은 양의 면포와 비단을 꺼내 갔던데 무슨 일이 있는 것이냐?”
정여립이 거듭 추궁하자 정옥남은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사실대로 말했다.
“작은 배 한 척을 샀습니다. 그리고 배를 사는데 쓴 것 외에는 모두 울릉도에 가져다 놓았습니다.”
정옥남의 대답에 정여립은 궁금하다는 듯이 물었다.
“네가 어디에 쓰려고 배를 샀느냐? 그리고 울릉도에 가져다 놨다니 좌수사와 관련된 일이냐?”
“좌수사 영감께서 서신을 보냈습니다. 조정의 대신들 중에 아버님이 역모를 준비하고 있다고 모함하려는 자들이 있다고 말입니다. 역모라는 말에 말도 안 된다는 생각을 했지만 돌이켜 보니 사람들이 보기에 의심할 만한 일이 많았던 것이 사실이었습니다. 거기에 아버님께서 역모를 준비하고 있다고 모함하는 자들이 조정에 있다면 주상전하께서도 저들의 모함을 들으실 수 있으니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정옥남의 대답에 정여립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그게 무슨 실없는 소리냐. 역모라니. 그리고 사람들이 보기에 의심받을 수 있다니.”
“지난 한 해 동안 아버님께서 사들인 노비가 수천에 달하지 않으십니까. 새로 사들인 노비들은 모두 동해도로 보냈지만, 사람들은 그 사실을 모르고 있으니 아버님께서 수천 명의 노비를 거느리고 있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노비들 외에 동해도에 보내기 위해 사들이신 면포와 솜 역시 적지 않으니 많은 물품을 구매하신 것도 사병들을 먹이고 입히고 있는 증거로 충분히 오해를 받을 수 있는 일입니다.”
순간 정여립은 할 말을 잊었다. 정옥남의 대답을 들어보니 충분히 오해를 받을 수 있는 일이었다.
‘조정의 대신들 중에서 나를 못마땅하게 여기는 사람들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아니, 조정의 대신들뿐만 아니라 주상전하께서도 나를 못마땅하게 보고 계신 것이 사실이다. 조정의 대신들 중에서 나를 역도로 모함하려는 자들이 있다.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야…….’
역도로 모함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지 정여립은 냉정한 자신이 모함을 받고 의금부의 조사를 받았을 때 벌어질 일들을 생각해 보았다.
‘알 만한 사람들은 내가 대동계원들과 함께 어울리는 것을 알고 있다. 대동계원들만 해도 1,000여 명에 달한다. 우리 가문의 땅에서 농사를 짓고 있는 소작농들과 집안의 노비들도 모두 합하면 1,000명에 가까울 것이다. 여기에 동해도로 보내기 위해 사들인 노비들 물론 모든 노비를 내가 사들이지는 않았지만 의금부에서 조금만 조사한다면 나와 교류가 있는 상인들을 통해서 노비들을 사들인 것을 알아낼 수 있을 것이다. 아니, 나와 내 지인들이 의금부에 끌려가 문초를 당하면 금방 알려질 일이다. 내가 역모를 준비하고 있다는 소문이 조정에 흘러 들어가고 여기에 내가 실제로 작년 한 해 동안 무려 3,000명의 노비를 갑자기 구매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누가 봐도 역모를 준비하고 있는 것으로 보일 것이다.’
“네 말이 일리가 있구나. 갑자기 3,000명의 노비를 사들였고 그 노비들이 농사를 짓고 있는 것도 아니니. 사람들이 보기에는 사병으로 동원하기 위해 노비들을 사들였다고 의심할 수도 있겠구나.”
정여립의 자신이 한 말을 이해하자 정옥남은 열정적으로 말했다.
“그래서 배를 준비할 것입니다. 좌수사 영감은 서신에서 만약에 아버님을 모함하는 소문이 들려오면 곧바로 울릉도로 피신할 것을 권했습니다. 울릉도로 피신하라는 것을 보니 좌수사 영감은 아버님과 저를 동해도에서 보호할 생각인 것 같습니다.”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정여립은 생각 끝에 정옥남에게 입을 열었다.
“좋아 일이 이렇게 되었으니 우리도 대책을 세워야겠다. 이제부터 집안의 일은 옥남이 네가 맡도록 하여라. 집안일뿐만이 아니라 우리 가문이 소유하고 있는 토지와 소작농들도 모두 네가 관리하도록 하여라. 나는 중요한 일만 정리하고 난 후 강릉으로 올라갈 것이다.”
정여립의 말에 정옥남은 놀라서 물었다.
“아버님께서는 강릉으로 올라가시고 집안의 일은 모두 제가 관리하라는 말이십니까?”
“그래. 나는 강릉으로 올라가는 즉시 그 지방의 유지들을 초대해 술대접을 하고 기녀들을 불러들여 술과 잔치로 하루하루를 보낼 것이다.”
“아니,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아버님 술과 기녀라니요?”
정옥남이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으며 묻자 정여립은 침착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나를 모함하려는 자들이 너에게까지 신경을 쓰지는 않을 것이니. 옥남이 너는 이곳에 남아 토지를 관리하고 집안을 돌봐야 한다. 저들이 노리는 것은 바로 나 정여립이다. 내가 고향인 전주에서 수천 명의 노비를 소유하고 있고, 대동계원들을 거느리고 있는 모습을 보이면 누가 봐도 역모를 준비하고 있다고 의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저들이 나를 모함하였을 때 내가 고향이 아닌 강릉에서 기녀들을 옆에 끼고 술로 세월을 허비하고 있으면 주상전하와 조정의 대신들이 나를 어떻게 볼 것 같으냐?”
정옥남은 정여립의 대답을 듣고 감탄을 금치 못했다.
“역시 아버님의 지혜는 한이 없으십니다.”
“모르고 있었다면 당했을지도 모르지만, 나를 모함하려는 자들이 있다는 것을 안 이상 대책을 세우는 것을 어려운 일이 아니다. 나는 술과 여색에 빠져 있는 모습을 보여야 하니. 동해도에 노비와 곡식을 보내는 일도 네가 맡아서 해야 할 것이다. 내가 강릉에 있으니 강릉을 통해서 울릉도로 보내는 방법은 이제 못 쓸 것이니 다른 방법을 찾아보도록 하여라.”
“알겠습니다. 아버님.”
“올 한해가 우리 부자에게 아주 중요한 시기가 될 것 같구나. 내가 일 년 정도 주색에 빠져 있는 모습을 보이면 나를 모함하려는 자들도 함부로 나서지 못할 것이다. 그때까지 네게 모든 일을 맡길 것이다.”
“큰일을 맡겨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버님. 아버님께 부끄럽지 모습을 보일 것입니다.”
정옥남은 의욕에 불타오르는 눈빛으로 정여립에게 대답했고 정여립은 그런 정옥남을 대견하게 바라보았다.
* * *
기축년(1589년) 3월. 동해도(북해도) 함관(函館)[하코다테].
겨울이 끝나고 봄이 찾아오자 나는 계획대로 헤이메와의 혼례를 치를 것과 식이 끝난 후에는 함관에서 큰 잔치를 열 것을 발표했다.
잔치 소식에 함관의 주민들은 크게 기뻐했다. 함관에 식량이 부족하지는 않았지만 잔치를 마다하는 사람은 어디에도 없는 법이었다.
잔치를 준비하기 위해 여인들은 물론 사내들도 두 팔을 걷어붙였다.
여인들은 쌀부대를 풀어서 많지는 않은 양이었지만 술을 담그고 음식을 만들었고, 군사들은 눈이 녹은 지 얼마 안 되는 산으로 올라가 덫을 놓고 함정을 파는 한편 사슴이나 멧돼지를 발견하면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들어 사냥해 왔다.
함관 전체가 잔치 준비로 들썩이고 있었을 때 나는 생각에 잠겼다.
‘기리시탄들을 동해도에 받아들이면 분명히 선교사들도 따라올 것이다. 유럽인이 선교사들이 동해도에 들어온다면 유럽에도 동해도에 대해 알려지는 것은 시간문제야.’
지금은 동해도와 외부의 통신과 교역을 내가 장악하고 있었기에 오시마 반도 일대를 내가 장악한 것을 외부에 알려지지 않고 있었지만, 시간이 흐른 후에는 외부에 이곳이 소식이 알려지는 것을 막을 수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문제로 고민하던 나는 계속 지금 상태로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결론을 내렸다.
‘언제까지 좌수사로 불릴 수도 없고 장수들을 계속 군관으로 부를 수도 없으니 어차피 관제를 개편하자면 한번은 겪어야 하는 일이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지금 일을 치르는 것이 가장 합리적이야. 지금이라면 반대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결정을 내린 나는 그 자리에서 조천군과 최도진, 시마즈 도시히사 그리고 사화동을 불러들였다.
함관의 요새 안에는 내가 함관의 행정과 군사업무를 총괄하는 건물이 있었다.
전라좌수영의 관아의 형태를 참고해서 지은 건물 안에는 장수들의 공무를 보는 방이 있었고 내가 공무를 보는 방과 장수들이 모여서 회의를 하는 방도 있었다.
회의장으로 쓰는 넓은 방에 호출한 장수들이 모두 모이자 나는 장수들을 바라보며 지난 1년간의 노고를 칭찬했다.
“우선 지난 1년 동안 모두 수고가 많았다. 이곳 동해도에 도착한 이후 불과 1년 만에 이 정도로 자리를 잡는 데 성공한 것은 제장들의 수고와 헌신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모두 정말 수고가 많았다.”
뜻밖의 칭찬에 놀랐는지 사화동을 비롯해 회의장 안에 모은 장수들은 일제히 나에게 고개를 숙이며 내 칭찬에 답례를 보냈다.
나는 장수들의 답례를 받은 후 다시 입을 열어 장수들을 소집한 용건을 꺼냈다.
“그동안 편의에 따라 제장들은 나를 좌수사 혹은 장군으로 불러왔고 나도 편한 대로 제장들을 전라좌수군 시절의 직위로 불러왔지만, 이곳은 전라좌수영이 아니니. 나는 새롭게 관제를 정비해야 하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제장들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내 질문에 조천군은 고개를 조아리며 대답했다.
“저희는 좌수사 영감을 따라 고향을 떠나 이곳 동해도까지 온 사람들입니다. 좌수사 영감의 뜻을 따를 것입니다.”
조천군의 대답이 끝나자 최도진과 사화동 역시 동의한다는 뜻으로 고개를 조아렸고 사화동을 통해 내가 한 말을 전해 들은 시마즈 도시히사는 고개를 조아리며 대답했다.
“주군의 뜻을 따를 것입니다. 주군.”
모두의 대답을 들은 나는 만족한 표정으로 장수들에게 말했다.
“좋다. 관제를 정비하기 전에 먼저 해야 할 일이 있다. 우리는 조선과 왜국을 떠나온 사람들이고 이곳은 우리가 통치하는 우리의 땅이니 이곳에 우리들의 나라를 세우는 일이다. 아직 우리가 통치하고 있는 영역은 동해도의 남쪽 끝부분인 도도반도(渡島半島)[오시마반도] 일대에 불과하지만 이곳은 조선도 왜국도 아닌 우리의 땅이니 이곳에서 정식으로 나라를 세우고 주민들에게 건국(建國)을 선포할 것이다.”
정식으로 나라를 세우겠다는 말에 장수들은 다시 한번 머리를 조아렸다.
“이곳 동해도는 섬이지만 우리가 세우는 나라는 이곳 동해도 안에서 머물지만은 않을 것이다. 넓은 바다로 나가 바다를 지배하고 바다를 통해 다른 나라, 다른 대륙과 교류하는 해상제국이 될 것이다. 그런 의미해서 바다 해(海)를 국명으로 삼을 것이며 나는 대해의 국왕으로 대해를 역사에 길이 남을 해상강국으로 만들 것이다. 그리고 개국공신들은 그대들과 그 영광을 함께 나눌 것이다.
내가 왕위에 오를 것을 선포하자 장수들은 고개를 조아리며 일제히 외쳤다.
“주상전하. 천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