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수군이 되었다. 153화
야인여진 톨만
대해국의 군사들이 해안가에 군영을 치고 주둔해 있자 다음 날 말을 탄 여진족 10여 명이 군영으로 다가왔다.
여진족이 나타나자 대해국 군사들은 재빨리 화승총을 들고 경계를 섰고, 포병들은 대포에 화약과 포탄을 장전했지만 여진족 기병들은 대해국 군사들의 군영에 가까이 다가오지는 않았다.
여진족 기병들이 거리를 두고 살펴보고 있다는 보고를 받은 최도진은 두정갑 차림에 투구를 쓰고 군영 앞으로 나왔다.
호위병도 없이 혼자 목책 밖으로 나온 최도진은 여진족들에게 힘껏 외쳤다.
“너희 중에 조선말을 할 줄 아는 자가 있느냐?! 조선말을 할 줄 아는 자가 있으면 앞으로 나와라!”
최도진이 힘껏 외치자 최도진의 말을 알아들은 중년의 여진족 사내가 최도진에게 다가와 물었다.
“조선군이시오? 조선군이 이곳에는 무슨 일이시오.”
대해국군이 상륙한 곳은 조선의 6진 중 하나인 경흥군에서 북쪽으로 50km 떨어진 지점으로 야인여진의 영역이었고 20세기에는 러시아의 하산스키군이 되는 지역이었다.
“우리는 조선군이 아니다. 우리는 대해국의 군사들이다. 우리는 말을 구입하기 위해 이곳에 왔다.”
말을 사러 왔다는 말에 여진족 사내는 기가 막힌다는 말투로 대답했다.
“말을 사기 위해 군대를 거느리고 온다는 말이오?”
“솔직히 말해서 너희 야인들을 믿을 수가 없기에 군사들을 거느리고 왔지만 가격만 맞으면 너희에게서 말을 사고 싶다.”
최도진이 계속해서 말을 사러 왔다고 하자 사내는 솔깃한 말투로 물었다.
“그럼, 말의 대금으로는 무엇으로 주시겠소?”
“소금과 조선에서 짠 면포를 가져왔다. 원한다면 은으로 지불할 수도 있다. 와서 보거라.”
최도진은 병사들에게 소금과 면포 그리고 은화를 가져올 것을 명령했고 최도진과 대화를 나누던 사내는 면포와 은이 있다는 말에 대해국의 진영으로 다가왔다.
사내가 부하로 보이는 청년들과 조심스럽게 다가오자 최도진은 병사들을 시켜 목책 앞에 소금 자루와 면포 5필 그리고 은화 10개를 꺼내 놓았다.
“우리는 안으로 들어갈 테니 안심하고 와서 보거라.”
말을 마친 최도진이 군영 안으로 들어가자 여진족들은 목책 앞까지 다가와 말에서 내렸다. 말에서 내린 여진족 사내들은 자루를 열어 소금을 확인했고 바닥에 놓인 면포와 은화를 만져보았다.
여진족 사내들이 소금과 면포를 살펴보는 것을 확인한 최도진은 힘껏 외쳤다.
“너희 부족에게서 말을 구입할 수 있도록 거래를 주선해 주면 면포와 소금과 은화를 선물로 주마. 거래를 주선해 주겠느냐?”
최도진이 외치자 중년의 사내가 대답했다.
“내가 부족의 족장이오. 말은 몇 필이나 필요하시오?”
사내가 족장이라는 말에 잘됐다고 생각한 최도진은 힘차게 외쳤다.
“우선은 60필을 구입할 예정이오.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 정기적으로 거래를 이어가고 싶소.”
60필이라는 말에 그 정도는 크게 부담이 되지 않는다고 여겼는지 족장은 곧바로 대답했다.
“60필이라면 오늘 당장에라도 가져올 수 있소. 구체적인 가격을 협상하고 싶소.”
족장의 대답을 들은 최도진은 일이 잘 풀린다는 생각에 신이 났다.
‘족장이 시원시원하구나.’
“좋소이다. 괜찮으면 안으로 들어오시겠소? 같이 밥이라도 먹으며 가격을 협상해 봅시다.”
안으로 들어오라는 말에 족장은 거침없이 대답했다.
“좋소이다. 문을 여시오.”
잠시 후 군사들이 목책의 문을 열자 족장을 선두로 11명의 여진족 사내들이 목책 안으로 들어왔다.
진영 안에는 300명의 군사가 화승총으로 무장하고 있었지만 여진족 사내들은 전혀 두려워하는 기색이 없었다.
여진족들이 모두 안으로 들어오자 최도진은 족장과 인사를 나누었다.
“반갑소. 대해국 장군 최도진이오.”
“장군님이셨소. 높으신 분이시구려. 나는 톨만이라고 하오.”
톨만은 야인여진의 우지에부 소속의 족장 중 한 명이었다.
최도진은 여진족 사내들에게 식사를 대접할 것을 명령하고 톨만과 함께 밥을 먹으며 말했다.
“이미 말한 대로 말을 가져오면 소금과 면포로 값을 치르겠소. 원한다면 은으로 값을 치르는 것도 좋소.”
“말을 가져오는 것은 어렵지 않지만, 먼저 거래 상대의 정체를 알아야 믿고 거래를 할 수 있지 않겠소. 나는 대해국이라는 나라를 들어본 적이 없소. 대해국은 어디에 있는 나라요?”
톨만의 질문에 최도진은 침착하게 대답했다.
“우리 대해국은 바다 건너 동쪽에 있는 나라요. 우리가 대해국에서 이곳에 오기까지 저 전선으로 9일이 걸렸으니, 대해국이 얼마나 멀리 있는 나라인지는 짐작할 수 있을 것이오. 족장은 내가 조선말을 쓰고 두정갑을 입고 있는 것을 보고 조선군으로 생각했겠지만 나는 분명히 대해국의 장군이오. 그리고 나는 조선에서 태어난 사람이오.”
최도진의 말에 놀란 톨만은 다시 물었다.
“역시 장군은 조선인이셨소. 그럼 대해국은 조선이 세운 나라요?”
톨만의 질문에 최도진은 단호하게 대답했다.
“그렇지 않소. 대해국은 조선과는 상관이 없는 나라요. 다만 우리 대해국은 조선은 물론 왜국과 남쪽에 멀리 떨어져 있는 나라에서 온 남만 상인들과도 활발하게 교역을 하고 있소. 그래서 우리 대해국에서는 조선에서 만든 면포와 두정갑은 물론 왜국에서 주조한 은화도 구할 수 있소.”
말을 마친 최도진은 톨만에게 왜국의 은화와 일본도를 증거로 보여주었다.
톨만은 족장이었던 탓에 조선에 대해서도 알고 있었고 6진 부근에서 조선의 물품들을 구입한 적도 있었다.
때문에 최도진이 보여준 은화와 일본도가 조선의 것과는 형태가 다르다는 것을 확인한 톨만은 최도진의 말을 믿을 수밖에 없었다.
“조선은 물론 왜국과도 교역을 하는 나라라니 그런 나라가 있다는 것은 이번에 처음 들어봤소.”
톨만이 놀랍다는 듯이 말하자 최도진은 호탕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나도 이곳에는 생전 처음 와봤소이다.”
“장군께서는 조선인이면서 어떻게 대해국의 장군이 되신 것이오?”
톨만이 궁금하다는 듯이 묻자 최도진은 톨만을 바라보며 침착한 태도로 대답했다.
“나는 조선에서 하급 군인이었소. 집안이 한미하고 아는 연줄도 없어 더 이상 진급하기가 어려워 정말하고 있었을 때 우연한 기회로 대해국에 대해 알게 되었소. 대해국은 땅은 넓지만 일할 사람이 적어서 인재를 귀중하게 여기고 출신에 상관없이 능력만 있으면 얼마든지 출세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아 바다를 건너 대해국으로 갔고, 주상전하께 충성을 바친 끝에 장군이 될 수 있었소.”
최도진의 말을 들은 톨만은 신기하다는 듯이 최도진을 바라보며 말했다.
“정말로 신기한 일이오. 바다를 건너 타국에 건너가 장군의 자리에 오르다니. 장군은 정말 대단하신 분이오.”
“이 모든 것이 주상전하를 만났기 때문이오.”
최도진과의 대화가 즐거웠던 톨만은 최도진과 한참을 더 이야기를 나눈 후 다음 날 다시 찾아오기로 약속하고 자신의 부족에게로 돌아갔다.
* * *
기축년(1589년) 9월 22일 대해국 함관.
이키쓰키섬에 다녀온 후 한 달 가까운 시간을 그야말로 정신없이 보내야 했다.
조선소에서 건조 중인 전선도 신경 써야 했고, 전선이 완성되면 전선에 장착할 대포는 얼마나 제작되었는지도 확인해야 했으며 전선을 몰고 바다로 나갈 신입 선원들과 신병들을 훈련시키는 일도 중요한 일이었다.
물론 나만 바쁜 것은 아니었다.
신생국인 대해국의 특성상 아직은 중간관리자급 인물의 수가 턱없이 부족한 탓에 나는 물론이고 조천군과 최도진 심지어 시마즈 도시히사 까지 조금이라도 지위가 높은 사람들은 각자 서넛 가지씩의 일을 떠맡아 처리하고 있었고.
일반병사들도 좌수군 출신 병사들과 시마즈 출신 무장들 등, 조금이라도 기본 지식과 경험이 있는 사람들에게는 일을 맡길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장군의 반열에 오른 조천군, 최도진, 시마즈 도시히사는 무능한 인물이 아니었고, 관리자급이 부족하다 보니 능력이 있고 야심이 있는 사람들에게는 자신의 능력을 드러낼 좋은 기회가 주어졌다.
맡겨진 일을 잘 처리한 사람들은 장군들의 이목을 끌게 마련이었고 그들은 곧 지위가 상승했다.
조천군으로부터 함관 일대에 경작하고 있는 밭의 수확량과 아이누족들과의 교역으로 얻은 사금과 가죽 등의 수량을 보고 받은 나는 선단의 출항 준비를 명령한 후 포르투갈인 항해사 드베로를 호출했다.
드베로는 고토열도 정벌 당시 전라좌수군이 점령한 갤리온의 항해사였고, 지금은 대해국에 잡혀 있는 포르투갈 선원들의 입장을 대표하는 지도자가 되어 있었다.
항구에서 신입 선원들의 교육을 도와주고 있던 드베로는 나의 호출을 받고 황급히 달려왔다.
“부르셨습니까. 전하.”
드베로는 잔뜩 긴장한 표정으로 내 앞에서 엎드렸다. 나는 그런 드베로를 바라보며 천천히 말했다.
“드베로. 자네와 자네의 동료(포르투갈 선원들)들이 우리를 도와준 지도 벌써 2년이 지났군. 그동안 잘 지냈는가?”
“예 전하. 특별히 불편한 것 없이 잘 지내고 있습니다.”
내 질문에 드베로는 온화한 표정으로 대답하고 있었지만 속으로는 어이가 없다고 생각하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나는 저들이 우리를 도와주었다고 말했지만 드베로나 포르투갈 선원들의 입장에서는 우리에게 구속당해 이것 동해도까지 끌려온 것이었으니 불만이 없을 리가 없었다.
“과인이 자네와 자네의 동료들을 처음 만났을 때 했던 약속을 기억하는가?”
드베로는 한시도 잊은 적이 없는 약속을 떠올리며 온몸에 긴장감이 도는 것을 느꼈지만 긴장한 기색을 드러내지 않기 위해 노력하며 최대한 태연하게 대답했다.
“전하.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나는 그런 드베로를 바라보며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기억하지 못할 리가 없을 텐데. 하루하루 손꼽아 기다렸을 텐데.’
“아직 3년도 지나지 않았는데 벌써 잊었단 말인가. 과인은 이제 그 약속을 지키려고 하는데.”
약속을 지킨다는 말에 드베로의 머릿속이 하얗게 변했다.
“그 말이 진심이십니까. 전하.”
“그렇다네. 이제 자네와 자네의 동료들을 그만 풀어줄 테니 가고 싶은 곳으로 가도 좋아. 곧 히라도로 출항할 것이니 모두 배에 승선하도록 하게. 히라도에서 내려주도록 하지. 약속한 대로 수고한 보답을 줄 것이야. 자네와 동료들에게 각각 은 100냥과 도자기 한 점씩 주도록 하겠네. 고향으로 돌아갈 여비로는 충분할 것이니 가져가도록 하게.”
내 말을 들은 드베로는 꿈인지 생시인지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으며 외쳤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전하.”
“그동안 수고 많았네.”
나는 놀라서 울부짖는 드베로를 위로했다. 드베로와 포르투갈 선원들을 석방하는 이유는 더 이상 그들이 필요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처음 그들을 만났을 때는 갤리온을 운용할 사람이 없어서 포르투갈 선원들의 협조가 필요했지만 지금은 그동안 갤리온을 운용한 경험으로 그들의 협조가 없어도 충분히 갤리온을 활용할 수가 있었다.
그리고 곧 마카오에서 구매한 갤리온을 인수하게 되는 것도 드베로와 선원들을 석방하는 중요한 이유였다.
이번 거래를 통해 마카오에서 거주하는 포르투갈 상인들에게 대해국이 노출되는 것은 피할 수 없는 현실이었다.
그래서 나는 이번 기회에 마카오를 통해 포르투갈 상인들과 직접 교역하는 것도 고려하고 있었다.
‘포르투갈 상인들과 거래를 해야 하는데 포르투갈 선원들을 잡아두고 있는 것이 알려져서 좋을 것은 없지. 더 이상 잡아둘 필요도 없으니 차라리 지금 풀어주는 것이 속 편할 것 같다. 그들도 노예무역을 하다가 잡혔으니 당당한 입장은 아니고 돈을 넉넉하게 줘서 보내면 다른 마음을 먹지는 못하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