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수군이 되었다. 155화
모피
기축옥사는 결국 용두사미로 끝나고 말았다.
정철은 정여립과 정옥남을 혹독하게 문초했지만 정여립은 계속 억울함을 호소했고 정옥남도 자신은 모른다는 소리만 반복했다.
한 달 이상 정여립을 문초했지만, 정여립이 역모를 계획했다는 증거는 하나도 나오지 않았고 정여립과 정옥남이 계속 혐의를 부인하자 오히려 정철이 궁지에 몰리고 말았다.
정여립이 한 달 이상을 버티자 그동안 눈치만 보고 있던 동인들이 정철을 공격하기 시작한 것이다.
처음 정여립이 의금부로 끌려갔을 때만 해도 역모라는 말에 동인들도 감히 정여립을 두둔할 생각을 하지 못했지만, 한 달이 지나도록 역모에 대한 증거가 나오지 않자 그동안 눈치만 보고 있었던 동인들이 일제히 정철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정여립이 역모로 몰릴 경우 정여립과 서신들 주고받았던 동인들은 자신들도 의금부로 끌려갈 것이라는 걸 예상하고 있었기에 정철을 공격할 기회가 보이자 그 기회를 놓치지 않은 것이다.
위관으로서의 역할을 제대로 감당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탄핵을 당한 정철은 결국 위관에서 물러나게 되었고 선조의 신임이 두터운 우의정 정언신이 위관이 되었다.
사건을 처음부터 다시 조사한 정언신은 조사한 내용을 선조에게 보고하며 정여립과 정옥남이 무고하다는 사실을 선조에게 보고했다.
정여립과 정옥남이 무고하다는 보고에 선조는 못마땅한 기색이었지만 결국 정여립과 정옥남을 방면할 것을 명하면서 기축옥사는 그대로 끝나고 말았다.
기축년(1589년) 11월 20일 정여립과 정옥남은 의금부에서 방면되어 자유의 몸이 되었고, 정옥남은 의금부에서 풀려나자마자 정여립을 모시고 전주의 자택으로 향했다.
무고하다는 사실이 밝혀져 방면되기는 했지만 의금부에서 당한 고문과 매질로 정여립의 육체는 이미 엉망이 되어 있었다.
전주에 도착하자마자 거친 숨을 몰아쉰 정여립은 결국 숨을 거두었고 정옥남은 정여립의 시신 앞에서 울부짖었다.
* * *
기축년(1589년) 11월 25일 히라도.
기리시탄들을 데리고 대해국으로 돌아갔던 나는 11월에 다시 선단을 몰고 히라도로 향했다.
13척의 선단을 거느리고 히라도에 도착했다.
히라도에 도착해 마쓰라 다카노부와 인사를 나눈 나는 주문해 왔었던 노예들과 곡식들을 확인한 후 거래를 마치기 위해 알폰스 비에이라를 찾았다.
“다시 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제독님.”
“나도 다시 만나 반갑소. 그동안 안녕하셨소.”
“저는 잘 지냈습니다. 제독님을 다시 만나는 날만 손꼽아 기다렸습니다.”
알폰스 비에이라의 능글맞은 웃음에 나는 나도 모르게 얼굴을 찡그렸다.
‘마카오와 거래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필요한 인물이기는 한데. 별로 마음에 들지 않는 작자야.’
나도 모르게 얼굴을 찡그린 나는 재빨리 인상을 풀고 호위병에게 명해 자기들을 꺼내놓았다.
“우선 거래부터 마무리합시다. 지난번에 지불하지 못한 대금을 상환하겠소.”
하얀 백자들이 탁자 위에 그 모습을 드러내자 알폰스 비에이라의 얼굴이 대번에 밝아졌다.
비에이라는 백자들을 바라보며 마치 군침이라도 삼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정말로 아름답습니다. 정말로 아름다운 예술품입니다.”
나는 갤리온의 구매대금으로 가져온 백자들을 모두 탁자 위에 올려놓은 후 비에이라에게 말했다.
“이 정도면 충분하시겠소.”
“충분합니다. 충분하지요.”
알폰스 비에이라는 다행히 욕심을 부리지는 않았다. 준비해간 백자로 대금을 지불한 후 나는 준비해간 모피를 꺼냈다.
“이것을 봐주시겠소.”
“그것이 무엇입니까?”
알폰스 비에이라는 눈이 휘둥그레지며 내가 준비해간 곰 가죽을 바라보았다.
“내가 사냥한 곰의 가죽이오. 적당한 가격에 판매하고 싶소.”
“정말 놀랍습니다. 루스 차르국이 아닌 다른 나라에서 이런 곰의 가죽을 상품으로 내놓을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알폰스 비에이라의 말을 들은 나는 루스 차르국이 내가 알고 있는 러시아의 현재 국명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러시아. 러시아가 모피의 획득을 위해 시베리아에 진출했었지. 아직은 러시아가 시베리아에 진출하지 않았겠군.’
내가 러시아에 대해 생각하고 있는 사이 곰 가죽을 살펴본 알폰스 비에이라는 흔쾌히 대답했다.
“좋습니다. 제독님 구매하도록 하겠습니다. 가격은 얼마나 생각하고 계십니까.”
알폰스 비에이라가 곰 가죽을 구매하겠다고 하자 나는 비에이라에게 물었다.
“이 모피는 마카오에서도 충분히 상품 가치가 있을 것 같소.”
내 말을 들은 비에이라는 그제 서야 내가 곰 가죽의 가치를 알아보기 위해 자신에게 모피를 팔겠다고 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알폰스 비에이라는 당했다는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물론입니다. 제독님. 이 정도 모피라면 마카오는 물론 포르투갈에 가져가도 충분히 상품으로 가치가 있을 것입니다.”
나는 알폰스 비에이라의 눈빛을 보고 진심인 것을 알 수 있었다.
“좋소. 그 모피는 선물로 드리겠소. 솔직하게 대답해 준 보답이오.”
비에이라는 내가 선뜻 곰 가죽을 선물로 주겠다고 하자 놀란 표정을 지었다. 나는 그런 비에이라에게 말했다.
“나는 히라도의 마쓰라 다카노부공께 신세를 진 것이 있소. 자세한 사정은 말하기 어렵지만 포르투갈과 스페인의 상인들이 이곳 히라도에서 도자기를 구매하고 있으니 내가 직접 마카오까지 가서 도자기를 판매하기는 것은 곤란하오. 그러나 마카오에서 직접 거래를 하는 것은 나에게도 큰 기회이니 나는 마카오에서 거래할 기회를 놓치고 싶은 생각이 없소.”
나는 잠시 말을 멈췄다가 알폰스 비에이라를 바라보며 다시 입을 열었다.
“마카오에서 도자기를 판매하는 것은 어렵겠지만…… 모피를 판매하는 것은 상관없을 것 같소. 내년 봄에 마카오에 갤리온을 보내 모피와 상품들을 판매하고 다시 마카오에서 상품들을 구매할 계획이오.”
내 말을 들은 알폰스 비에이라는 입을 크게 벌리며 내게 말했다.
“언제든지 마카오에 오시면 아니 마카오에 부하들을 보내시면 부하들에게 저를 찾으라고 명령하십시오. 제가 제독님께서 만족할 만한 가격에 모피와 제독님이 판매하시는 상품들을 구매하고 제독님께서 만족하실 만한 상품들을 소개할 것입니다.”
알폰스 비에이라는 이번 기회를 놓치지 않겠다고 각오를 보였고 큰 기회를 잡았다고 생각했는지 눈에서 빛을 내고 있었다.
나는 그런 비에이라를 보며 지나가는 말처럼 말했다.
“나는 무기들도 관심이 있고 노예들에게도 관심이 있소이다.”
“아무 염려 하지 마십시오. 총이든 대포든 마카오에서 구하지 못할 것은 없습니다. 제독님의 함대와 군사들을 무장시킬 만큼 충분한 무기를 구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노예들도 문제없습니다. 힘 좋은 사내들은 물론 이국적인 여인들까지 필요한 노예는 얼마든지 구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서로 만족할 만한 거래를 이어갑시다.”
“감사합니다. 제독님.“
알폰스 비에이라는 내게 고개까지 조아리며 마카오에서의 거래를 맡겨달라고 말했고 나는 만족한 표정으로 알폰스 비에이라와 인사를 나누었다.
비에이라와 인사를 나눈 후 부두로 향하면서 나는 생각에 잠겼다.
‘이것으로 마카오에 직접 선단을 보낼 수 있는 기반이 확보됐다. 처음 몇 번은 알폰스 비에이라를 통해 거래를 해야겠지만 마카오의 상황만 파악하면 계속 비에이라와 거래를 이어갈 필요는 없겠지.’
나는 마쓰라 다카노부 덕분에 히라도에서 필요한 물품들을 충분히 구매할 수 있었고, 마쓰라 다카노부 의리 때문에도 마카오에 직접 도자기를 판매할 생각은 없었다.
그런데도 마카오에 직접 선단을 보내려는 것은 히라도를 통한 보급이 어려워질 경우를 대비해 거래선을 확보하기 위해서였다.
‘이번에 정여립이 몸을 사리면서 조선에서의 보급이 어려워졌지만. 히라도에서 필요한 물품들을 구매할 수 있었기에 큰 어려움이 없었어. 보급로를 조선에만 의지하지 않고 히라도와 거래선을 유지한 것이 그야말로 신의 한 수였어. 조선에서의 보급이 어려워진 이상 히라도의 거래선만 믿고 있을 수는 없지.’
곧 임진왜란이 발발할 것이고 임진왜란이 시작되면 히라도를 통해 식량과 철을 구매하는 것은 불가능해 질 것이다.
임진왜란이 발발하기 이전에 최대한 대해국의 대지를 개간하고 구황작물들을 심어서 식량을 자급할 수 있도록 해야겠지만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서 마카오를 통해서도 필요한 물품들을 구매할 수 있도록 거래선을 확보해 놓을 계획이었다.
내가 동해도(북해도)로 이주하고 대해국을 건국한 것은 모두 임진왜란을 대비하기 위한 준비과정이었다.
나는 한시도 그것을 잊지 않고 있었다.
‘마카오에 직접 도자기를 판매할 수 없어서 고민했었는데 다행히 모피도 좋은 상품이 될 것 같다.’
다행히 동해도(북해도)에는 곰뿐만이 아니라 늑대, 여우, 사슴, 토끼 등 가죽을 사용할 만한 동물들이 많이 서식하고 있었다.
늑대와 여우, 사슴의 가죽도 좋은 상품이 될 것이 분명했다.
다음 날 아침 노예들과 쌀을 실은 전선들은 항구를 빠져나와 북쪽으로 방향을 돌렸다.
단 선단의 전선들 중에서 1척은 다른 전선들과 달리 방향을 남쪽으로 돌려 대해국과는 반대 방향으로 달렸다.
* * *
기축년(1589년) 11월 28일 최도진이 지휘하는 8척의 첨저형 전선이 톨만의 영역에 상륙하는 데 성공했다.
선단을 지휘한 최도진은 지난번의 기억을 더듬어 선단을 몰았고 선단은 다행해 목책이 처져 있는 해안가를 발견하고 무사히 톨만의 영역을 찾아오는 데 성공했다.
전선들이 해안가에 도착하자 최도진은 지난번과 마찬가지로 선발대를 상륙시켰고 선발대가 군영을 쳤던 목책을 점령하는 데 성공하자 안심하고 모든 병력을 상륙시켰다.
육지에 상륙하자마자 군영 밖으로 나간 최도진은 해안가 너머의 숲을 바라보며 호기롭게 외쳤다.
“톨만 듣고 있는가. 나 최도진이 다시 왔다. 대해국의 최도진이 다시 왔어.”
최도진이 고함을 지르며 외치자 숲속에서는 말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숲속에서 누군가 움직이는 기색이 보이자 군사들은 긴장한 표정을 지었지만 최도진은 태연한 표정으로 병사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신경 쓸 것 없다. 어서 군영을 치고 경계태세만 철저하게 갖추도록 하라. 비록 안면이 있다고는 하지만 야인들을 믿을 수는 없으니 경계에 소홀해서는 안 될 것이다.”
“예. 장군.”
최도진의 명령이 떨어지자 지난번에 이곳에 왔었던 병사들이 중심이 돼서 군영을 세우고 전선에서 대포를 내려 목책 뒤에 세웠다.
해안가에 상륙한 지 한나절 정도 지났을 때 10여 명의 여진족 기병이 해안가에 그 모습을 드러냈고 선두에는 톨만이 말을 달리고 있었다.
“최장군 안녕하셨소. 나 톨만이오.”
“톨만 어서 오게. 기다리고 있었네.”
톨만은 말에서 내려 스스럼없이 목책 안으로 들어오며 감탄했다는 듯이 말했다.
“이곳에 또 진을 치셨소. 최 장군은 이곳을 아예 대해국의 영토로 생각하시는 것은 아니신지 모르겠소.”
톨만의 말에 최도진은 태연하게 대답했다.
“지난번에 왔던 곳이라 그런지 낯설지도 않고 편하더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