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동계주 >
나는 동해도에서 자리를 잡기 까지 여러 가지로 도와줬던 정여립이 매질과 고문에 죽음을 당했다는 사실에 가슴이 아팠다.
‘정여립이 방면된 것이 그나마 다행인가. 정여립이 역모를 계획했던 것으로 결론이 났다면 정옥남은 물론 정여립과 가까웠던 사람들도 화를 피할 수 없었을 것이니.’
“동해도에 잘 왔네. 정공도 요양이 필요할 것 같으니 이곳에서 요양하며 몸과 마음을 회복시키도록 하겠네. 죽도선생께서 내게 베푸신 은혜가 깊으니 내 정공을 귀빈으로 모시고 정공의 심신을 회복시키기 위해 최선을 다할 것이네.”
내 말을 들은 사내는 일제히 허리를 숙이며 대답했다.
“감사합니다. 영감.”
“자네들도 먼 길을 왔으니 많이 피곤할 것이네. 이곳에서 푹 쉬었다가 편할 때 돌아가도록 하게. 이곳에서 겨울을 지낼 수 있도록 숙소를 준비해 주겠네.”
사내들에게 숙소를 준비해 주겠다고 하자. 나에게 정여립의 죽음을 설명한 사내는 나를 똑바로 바라보며 물었다.
“좌수사 영감. 저희가 어떻게 이곳에 왔는지 아십니까?”
사내가 갑자기 엉뚱한 질문을 하자. 나는 무슨 의미로 묻는지 몰라 사내를 노려보았다.
‘갑자기 무슨 소리? 이곳에는 당연히 배를 타고 왔겠지. 전선에서 내린 것을 내가 봤는데.’
사내를 노려보던 나는 정옥남의 일행이 어떻게 내가 보낸 전선에 탑승했는지 궁금해졌다.
“그러고 보니 자세한 보고를 듣지 못했군. 자네들은 어떻게 전선에 탑승하였는가? 비밀리에 보낸 전선이었는데.”
“비록 계주어르신께서 돌아가셨지만 저희 대동계의 조직이 와해된 것은 아닙니다. 정공이 의금부에 압송됐다는 소식을 들으시고 계주께서 저희에게 자중하라는 명을 내리시지만 않으셨어도 의금부를 습격해서라도 계주어르신과 정공을 구출하였을 것입니다.”
사내의 대답을 들은 나는 궁금증을 풀 수 있었다.
“조선에 보낸 부하들을 대동계원들이 발견한 모양이군. 대동계원들 중에는 좌수영에서 군사훈련을 받은 자들도 있고 동해도에 상륙했을 때 참전한 자들도 있으니 좌수군 출신 부하들을 알아보는 것은 어렵지 않았겠지.”
“그렇습니다. 영감. 저희는 계주어르신께서 영감과 손을 잡은 후 좌수영의 동태를 살피는 것을 게을리 하지 않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계주어르신께서 내리신 명이었습니다.”
사내의 말을 들은 나는 정여립을 생각하며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동해도에 상륙하기 전부터 정여립이 좌수영에 지원한 곡식과 재물이 적지가 않았지. 자신의 밑천을 부어가면서 지원하면서 의심하거나 경계하지 않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야. 정여립이 동해도에 대동계원들을 투입하는 것에 소극적인 모습을 보인 것만 봐도 어느 정도는 나를 경계하고 있었던 것이 분명해.’
“대동계의 정보력이 대단하군. 조선에 상륙한 부하들도 남해안 일대를 자신의 손바닥 보듯 할 정도로 좌수영과 인근지역의 지리와 환경에 익숙한 자들이었고 대놓고 돌아다니지는 않았을 것인데. 그들을 발견한 것을 보면.”
“영감. 대동계원들의 수가 얼마나 되는지 알고 계십니까?”
사내의 질문에 나는 질문으로 대답했다.
“천여 명이 넘는 것으로 알고 있지만. 정확한 수는 모르고 있네. 그래 대동계원들의 수가 얼마나 되는가?”
내 질문에 사내는 진지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영감. 저희 대동계원들은 장정들만 1300명에 달하고 그들의 가족들 까지 포함하면 3000명이 넘습니다.”
‘장정만 1300명이라 대단하다. 정여립이 역모를 준비하고 있다고 의심할 만 했구나.’
대동계의 규모에 놀란 나는 사내를 바라보며 말했다.
“대단하군. 그 정도의 장정들을 거느리고 있었으면서 자중하라고 하신 죽도선생도 대단하시고.”
내 말에 사내는 공감한다는 듯이 고개를 숙이며 말을 이었다.
“대동계원들 중에는 관아의 아전에서부터 농부와 어부는 물론 승려들과 사냥꾼, 백정과 갖바치들도 있습니다. 전라도 지역에서는 저희 대동계가 알아내지 못할 것이 없고 구하지 못할 것이 없습니다.”
사내의 말을 듣던 나는 사내의 말이 이상하게 흐르는 것을 느끼고 사내를 노려보았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것인가? 나는 시간이 많은 사람이 아니니. 어서 본론을 말해보게.”
“영감. 저희 대동계가 탐나지 않으십니까?”
사내의 말에 나는 살짝 놀랐다.
‘대동계라 탐나기는 하지 대동계를 장악하면 조선에 기반을 가지게 되는 셈인데. 대동계원들을 통해 정보를 수집할 수도 있고.’
순간 욕심이 났지만 나는 곧 고개를 저었다.
“무슨 소리를 하는 것인가? 대동계는 앞으로 정공이 이끌지 않겠는가. 무엇보다 나는 다시 조선으로 돌아갈 생각이 없네. 동해도에 있는 내가 조선에 있는 대동계를 이끌 수 있겠는가?”
내 말에 사내는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지금까지의 무례를 용서해 주십시오. 영감. 계주어르신께서 자중하라는 명을 내리시며 저희에게 또 하나의 명을 내리셨습니다.”
사내의 말에 나는 궁금증을 느끼며 물었다.
“무엇인가? 죽도선생이 내리신 명이.”
“계주어르신께서 더 이상 대동계를 이끌지 못하게 되시면 좌수사 영감의 명을 따르라는 명이셨습니다. 저희는 영감을 계주로 모실 것입니다.”
사내가 내 앞에서 허리를 숙이자. 사내의 좌우 옆에 있던 사내들도 일제히 허리를 숙였다.
‘뭐야. 정여립이 대동계를 나에게 맡겼다고.’
뜻밖의 말에 나는 황당함을 느끼며 물었다.
“그게 무슨 소리냐? 죽도선생이 내게 대동계를 맡기셨다니.”
사내는 내 질문에 대답하지도 않고 우선 정중히 자신을 소개했다.
“인사가 늦었사옵니다. 계주어르신. 소인 전 계주어르신의 호위장이었던 임장춘이라 하옵니다.”
“호위 정두관입니다.”
“호위 맹형수입니다.”
사내들이 자신을 소개하고 난 후에야 임장춘은 비로소 내 질문에 대답했다.
“이곳에 오기 전에 조선에 있는 계원들과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갑자기 계주어르신께서 변을 당하시어 계가 와해될 위기에 처했으니 우선은 전 계주어르신의 명대로 영감을 계주로 모시고 계를 정비하자는 의견에 계원들이 찬성했습니다. 계주께서 저희를 이끌어주시지 않으시면 저희는 주인을 잃고 뿔뿔이 흩어질 것입니다. 저희를 받아주시옵소서. 계주어르신.”
“계주어르신.”
임장춘이 허리를 숙이자 정두관과 맹형수도 내 앞에서 허리를 숙였다.
‘참 이렇게 나오는데 못하겠다고 할 수도 없고.’
나는 갑자기 대동계의 계주를 맡아달라고 하자 이것이 행운인지 불행인지 판단할 수가 없었다. 확실히 대동계를 지휘하게 되면 조선에 기반을 확보하는 격이니 나에게 나쁠 것은 없었다. 대동계를 통해 조선의 사정을 알 수 있었고 대동계를 통해서 조선에서 곡식과 생필품을
구하는 것도 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나 장점만 있는 것은 아니었으니 지금의 상황에서는 이곳 대해국에서 조선에 있는 대동계원들을 지휘할 방법이 없었다. 고민 끝에 나는 우선 이들의 제안을 받아들인 후 시간을 끌어보기로 했다.
“상황이 그렇다니 우선 자네들의 제안을 받아들이기로 하겠네. 그러나 대동계를 지휘하기 위해 내가 직접 조선으로 갈수는 없으니 그렇게 알고 있게.”
내가 계주를 수락하자 임장춘과 사내들은 일제히 허리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계주어르신 저를 비롯해 모든 계원들이 계주어르신께 충성을 바칠 것입니다.”
“자네들도 지금 당장은 조선으로 돌아갈 수 없네. 봄이 되고 나서야 조선으로 돌아가는 배가 있을 것이니 자네들은 이곳에서 겨울을 보내며 휴식을 취하도록 하시게.”
“계주어르신의 명을 따를 것입니다.”
나는 대동계원들에게 숙소를 마련해 줄 것을 명령한 후 방에서 나왔다. 갑자기 대동계의 계주가 되어 얼떨떨한 기분이 들었다.
‘대동계라. 확실히 활용할 수만 있으면 많은 도움이 될 조직이기는 한데. 어떻게 지휘해야 할지.’
나는 우선은 대해국에서 겨울을 지내는 동안 정옥남과 대동계원들을 대해국에 묶어두고 대동계를 어떻게 지휘할지 고민해 보기로 했다. 눈이 내리고 본격적인 추위가 시작되자 나는 작년과 마찬가지로 외부활동을 자제하고 겨울을 보내는 데만 집중했다. 눈이 내리면 병사들과 장정들을 동원해 내린 눈이 쌓이기 전에 눈을 치울 것을 명령했고 눈이 내리지 않는 날에는 항상 병사들을 내보내 장작을 구해오게 했다. 기리시탄들을 받아들이면서 인구수가 비약적으로 증가한 만큼 필요한 장작과 식량의 양도 많아졌다. 다행히 식량은 히라도에 곡식을 수입한 덕에 부족하지 않았지만 겨울의 추위를 이기기 위해 장작은 거의 무한정으로 필요했다.
평소라면 목재로 쓰기 위해 장작으로 쓰지 않을 통나무들 까지 줄기를 자르고 갈라서 장작으로 만들었고 집집마나 헛간은 물론 마당 한쪽에 까지 장작을 산처럼 쌓아놓고 장작이 눈에 젖지 않도록 멍석으로 장작을 덮어놓았다. 한 가지 다행인 점은 대해국의 모든 가옥은 조선식 온돌을 갖추고 있는 것이었다. 온돌방식이 난방과 열효율이 좋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나는 동해도(북해도)의 겨울 추위를 견디기 위해 동해도에 정착한 후 모든 가옥은 의무적으로 온돌방식으로 짓도록 명령을 내렸다. 온돌에 익숙하지 않은 왜인들은 자신들이 익숙한 방식대로 집을 짓고 방안에 화덕을 놓는 방식으로 난방을 하려고 했지만 동해도의 겨울 추위를 잘 알고 있었던 나는 온돌에 대해서는 양보하지 않고 밀어붙였다. 굳이 익숙하지 않은 조선식의 방식으로 집을 지으라는 명령에 불평하는 왜인들도 있었지만 그들도 겨울이 되고 온돌의 난방효과를 경험한 후에는 따뜻한 방의 온도와 열효율에 놀랐다고 한다.
겨울동안 사냥과 물고기 잡이는 눈이 내리지 않는 맑은 날에만 허락되었고 부식거리를 마련할 정도만 허락되었다. 마을 한쪽에는 목책으로 울타리를 쳐서 목장을 만들었고 목장 안에 줄지어 있는 마구간에는 연해주에서 구입해온 말들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동해도에는 곰과 늑대, 여우들의 야생동물들이 많았으므로 목장의 울타리는 굵은 나무로 튼튼하게 지었고 무장한 병사들이 밤낮으로 순찰을 돌아 곰이나 맹수들이 말을 노리는 일이 없도록 방비를 철저하게 했다. 정옥남은 기리시탄 의원들에게 돌보게 해서 정옥남의 건강을 회복시켰고 정옥남과 함께 대해국에 들어온 대동계원들은 겨울동안 대해국에서 지내며 조선과는 다른 동해도의 자연환경과 문물을 신기해했다. 대동계원들이 대해국에 들어 온지 한 달이 지날 무렵 조천군과 최도진은 조선의 소식도 들을 겸 술상을 준비해서 대동계원들을 초대했다.
“자네들이 대해국에 온 것은 알고 있었지만 그동안 공무가 바빠 신경 쓰지 못했었네. 오늘은 자네들과 술도 한잔 마시고 조선의 이야기도 듣고 싶어서 자리를 마련했으니 사양하지 말고 많이 드시게.”
“어서 앉으시게. 편히 앉아 많이 드시게.”
조천군과 최도진은 임장춘과 대동계원들이 방에 들어오자 자리에 앉을 것을 권했다. 대동계원들이 자리에 앉자. 여인들이 각자의 앞에 상을 내려놓았고 상위에는 술잔과 함께 자반구이와 구운 사슴고기가 담긴 접시들과 고깃국이 담긴 국그릇이 올라와 있었다. 모두의 앞에 상이 놓이자 조천군은 술병을 들어 모두의 잔에 술을 따라주었다.
“비록 탁주지만 이곳에서는 구하기 어려운 술이네. 한잔씩 들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