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조선 수군이 되었다-162화 (162/223)

< 화전민과 유민 >

“화전민들을 찾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저희 계원들 중에도 화전을 일구던 이들이 있으니 10명이 아니라 100명이라도 찾아올 수 있습니다. 하오나 무슨 일 때문에 화전민들이 필요하신지 여쭤도 괜찮겠습니까. 전하.”

임장춘의 대답을 들은 나는 감자와 고구마 그리고 호박과 옥수수를 떠올리며 말했다.

“우리 대해국이 평호도를 통해 왜인들은 물론 남만인들과도 교역을 하고 있는 사실은 호위장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남만인 상인들과 거래를 하다가 우연히 남만의 작물을 몇 가지 구할 수 있었다. 이 작물은 내가 감자, 고구마, 옥수수, 호박이라 이름을 붙였는데 쌀과 달리 거친 땅에서 잘 자라는 것은 물론 산에서도 키울 수 있는 작물들이고 구워먹거나 삶아서 먹을 수도 있고 밥에 넣어서 먹거나 죽을 끓어서 먹을 수도 있으니 이 작물들이 조선에 전해지면 흉년이 든다고 해도 백성들이 굶어죽지는 않을 것이다. 그래서 계원들에게 감자, 고구마, 옥수수, 호박을 심고 키우는 법을 가르치려는 것이다.”  

화전민을 구한 이유를 들은 임장춘은 벌떡 일어나더니 그 자리에서 내개 엎드려 큰 절을 올렸다.

“전하. 전하께서는 정말 인간이 아니십니다. 대해국이 계시면서도 조선의 굶주리는 백성들을 가엽게 생각하시며. 거친 땅과 산에서도 잘 자라는 작물을 조선에 전해주시려 하시니 전하께서는 참으로 신선의 경지에 오르셨습니다.”

“그만 일어나도록 하라 내 비록 몸은 대해국에 있지만 조선에서 태어난 사실을 한시도 잊은 적이 없느니라. 조선에도 흉년이 들어 굶주리는 백성들이 많은 것으로 알고 있다. 감자, 고구마, 옥수수, 호박은 벼농사를 짓기 힘든 황무지와 산에서도 키울 수 있으니 산이나 비어있는 땅에 감자와 고구마, 옥수수, 호박을 심어놓는다면 벼농사가 흉년이 든다고 해도 감자와 고구마가 있으니 최소한 굶어죽지는 않을 것이다. 또 감자와 고구마는 땅 속에서 자라는 작물이니 감자와 고구마가 자라고 있어도 땅을 파지 않는다면 찾지 못할 것이다. 왜군이 침략하기 전에 전투가 벌어지기 쉬운 곳 주변에 감자와 고구마를 심어놓고 지도에 표시해 놓으면 나중에 감자와 고구마를 캐서 식량으로 쓸 수 있으니 군량을 수송하는 수고를 덜 수 있을 것이다.”

“묘안이십니다. 전하. 분명히 기억하고 있겠사옵니다.”

나는 대동계 조직을 동원해 조선에 구황작물 4종 세트를 전파할 생각이었다. 감자가 조선에 전해진 것이 대략 1800년대로 알려져 있고 고구마가 조선에 전해진 것이 1700년대 후반이었으니 내가 알고 있는 역사보다 200년 이상 앞서서 전해지는 것이다. 

‘2년 후에는 임진왜란이 일어날 것이니 지금 구황작물이 조선에 전해진다고 해도 조선에 큰 도움은 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전쟁이 끝난 후에도 농지는 황폐해져 있을 것이고 전쟁으로 장정들이 많이 죽어 농지를 복구하는 것도 힘들 것이니 대해국이 임진왜란에 개입한다고 해도 조선은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다. 조선에서 감자, 고구마, 옥수수, 호박이 전해지면 백성들이 전후 어려운 시기를 보내는데 도움이 되겠지. 최소한 굶어죽는 사람들은 나오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나는 임진왜란 보다는 전후에 어려운 시기를 보낼 수밖에 없는 백성들을 생각해서 구황작물을 조선에 전달할 생각을 했다. 내 말을 모두 들은 임장춘은 다시 한번 놀랍다는 표정을 지으며 나를 존경하는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과인이 할 말은 끝났다. 호위장도 과인에게 할 말이 없으면 그만 들어가서 쉬도록 하라.”

임장춘과의 대화가 길어지자 피곤해진 나는 임장춘을 돌려보내려고 했다. 할 말이 없으면 돌아가라는 말에 임장춘은 의외로 나에게 질문을 던졌다.

“소인이 이곳 대해국에서 지내보니 생각보다 조선의 문물이 많이 보였습니다. 하오나 대해국은 조선보다 영토와 백성의 수도 적고 조선과는 다른 것도 많으니 대해국에서도 조선의 재화(財貨)가 필요할 것 같사옵니다. 조선에서 생산되는 재화(財貨) 가운데 대해국에서 필요하신 것은 있지 않으십니까? 전하.”

조선의 재화(財貨) 가운데 대해국에서 필요한 것을 말해보라는 질문에 나는 어렵지 않게 대답했다.

“대해국에서 가장 필요한 것은 바로 사람이다. 일을 하고 병사로써 전장에 나갈 사람이 가장 필요하다. 우리 대해국의 주민들 가운데 8할(80%) 이상이 왜인들이다. 왜국과의 전쟁을 대비하고 있는 대해국에 이렇게 왜인들의 수가 많은 것은 바로 사람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전선과 병장기를 제작하고 군사들을 징집하려면 인구가 있어야 하는데 나라의 인구가 부족하니 왜인이라도 대해국에 충성하고 풍신수길에게 원한이 있는 사람들은 모두 대해국의 백성으로 받아들인 것이다. 조선에 있는 재화 중에서 내가 가장 필요한 것은 바로 조선의 백성들이다. 군사를 지휘했었던 무장들이나 대장장이 같이 특별한 재주가 있는 사람들이라면 더욱 좋겠지만 그런 재주 없이 농사를 짓던 사람들도 좋다. 대해국의 영토는 대부분 황무지 이니 황무지를 갈고 엎어서 옥토로 만들 농민들도 필요하다.”

사람이 가장 필요하다는 말에 임장춘은 눈에 빛을 내며 물었다.

“전하께서는 대해국에 충성하고자 하는 사람은 그 사람의 본래 신분을 보시지 않고 대해국의 백성으로 받아들이실 수 있으시옵니까?”

임장춘의 질문에 나는 당연하다는 듯이 대답했다.

“물론이다. 대해국이 충성할 마음만 있다면 그리고 과인과 대해국을 배신하지만 않는다면 누구든지 대해국의 백성이 될 자격이 있다.”

“그러시다면 대해국의 백성이 되고자 하는 조선인의 수가 적지는 않을 것이옵니다. 전하.”

나는 임장춘의 말에 놀라서 물었다.

“그것이 무슨 말이냐. 대해국의 백성이 될 사람이 많다니?” 

“화전민들은 대부분 마을에서 정상적인 삶을 살수가 없기에 산으로 올라간 이들입니다. 그들 중에는 도망친 노비들도 있고 제때에 세금을 내지 못하거나 빚을 지고 집과 땅을 빼앗겨서 고향을 떠난 이들도 있습니다. 어차피 고향에서 지낼 수가 없어 산으로 들어간 이들이니 화전민들은 먹고사는 문제만 해결 된다면 대해국의 백성이 되는 것을 주저하지 않을 것이옵니다.“  

임장춘의 대답을 들은 나는 귀가 솔깃해 졌다.

‘화전민이라 좋은 방법이다. 화전민들을 받아들이면 노동력도 확보할 수 있고 그들은 산에서 농사를 짓던 이들이니 동해도의 황무지를 논, 밭으로 일구는 것도 어렵지 않을 것이다.’

“좋은 생각이다. 화전민들을 울릉도로 데려올 수 있겠느냐?”

“계원들을 동원하면 충분히 가능하옵니다. 전하. 특히 도망친 노비들은 어떻게든 몸을 피해야 하는 처지이니 대해국으로 오는 것을 설득하기는 어렵지 않을 것이옵니다. 그리고 전하. 소인이 강릉에서 보고 듣기로는 평안도와 함경도 일대에는 흉년으로 인해 생계가 어려워 스스로 노비가 되려는 이들이나 홍수로 논, 밭을 잃고 유민이 되어 떠도는 이들도 적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사옵니다. 그들도 먹고사는 문제만 해결 된다면 그들이 사는 나라가 조선인지 대해국인지는 중요하지 않을 것이옵니다.”

임장춘의 대답을 들은 나는 잠시 고민에 빠졌다.

‘평안도와 함경도는 나와 인연이 없는 지역이다. 그곳의 유민들을 받아들이려면 대동계를 활용해야 하는데 대동계원들을 평안도와 함경도 까지 동원해도 괜찮을까? 위험부담이 크기는 하지만 평안도와 함경도에 거점을 만들어 두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것 같은데. 평안도와 함경도의 군사들은 여진족들과의 실전으로 단련된 정병들이고 그곳의 장정들은 전투에 동원되는 경우가 많으니 거점을 만들어 두면 반드시 쓸모가 있을 거야.’

나는 고민 끝에 임장춘에게 물었다.

“강릉에 거점을 만들 듯이 평안도와 함경도에도 거점을 만들 수 있겠느냐? 나중에라도 문제가 생겨서는 안 되니 신중하게 대답해야 할 것이다.”

“평안도에 거점을 만드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옵니다. 전하. 하오나 강릉에 거점을 만들고 상선을 건조한다면 함경도에 계원들을 보내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옵니다.”  

“자세히 설명해 보라.”

“전라도에서 평안도와 함경도로 계원들을 보내는 것은 어려운 일이나. 강릉에서 함경도 까지는 충분히 계원들이 활동할 수 있는 거리이옵니다. 더구나 상선이 완성된다면 강릉에서 바다를 통해 함경도로 올라갈 수 있으니 상인으로 행세를 하며 함경도로 올라간다면 의심을 받을 일은 없을 것이옵니다. 전하.”

강릉에서 동해바다를 통해 함경도로 올라간다는 계획은 충분히 가능성이 있어보였다.

“좋다. 강릉에 거점을 만드는 일이 끝나면 함경도로 계원들을 올려 보내도록 하라. 함경도의 유민들과 노비들도 울릉도로 보내기만 한다면 과인이 대해국으로 이주시키도록 하겠다. 그리고 필요한 것 있으면 언제든지 말하도록 하라.”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전하.”

그로부터 5일 후 시마즈 도시히사는 군사들을 거느리고 북쪽으로 출병했고 최도진과 사화동은 각각 전선을 거느리고 연해주와 마카오를 향해 출발했다. 강영남도 동해도 동쪽 해안가의 아이누인들과 교역을 하기 위해 전선을 몰고 바다로 나갔고 마지막으로 내가 선단을 거느리고 히라도섬으로 향했다. 히라도 섬으로 가는 동안에도 나는 생각하고 고민했다.

‘올해가 1590년 지금이 3월이니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군사를 거느리고 오사카 성을 떠났겠구나.’ 

1590년 3월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자신의 직속군사들을 거느리고 출병했다. 관동지역의 호조가문을 정벌하기 위한 출병이었다. 호조 가문은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사위인 호조 우지나오가 당주로 있었지만 가문을 실질적으로 이끄는 것은 호조 우지마사의 아버지인 호조 우지마사였다. 사가미의 오다와라 성을 거점으로 삼고 있었던 호조 가문은 관동지역의 최대 영주로써 관동 지역 8개 영지를 통치했고 그 영지의 수확량은 250만 섬 이상이었기에 도요토미 히데요시 조차도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호조 우지마사가 연합하여 자신에게 저항하는 것을 염려했을 정도였다. 

혼노지의 변을 일으킨 아케치 미츠히데를 토벌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이후 열린 기요스 회의에서 오다 노부나가의 장남 오다 노부타다의 3살 난 아들 산보시를 오다 노부나가의 후계자로 내세우는데 성공하면서 산보시의 옹립했다는 명분을 획득했다. 기요스 회의에는 명문은 물론 아케치 미츠히데를 토벌한 논공행상을 주도하면서 아케치 미츠히데의 영지 대부분을 차지해 오다 노부나가의 신하들 중에서 가장 넓은 영지를 확보하는데 성공한 히데요시는 자신의 전횡에 불만을 품고 있었던 노부나가 가신단의 최고 맹장 시바타 카츠이에와 오다 노부나가의 3남 오다 노부타카 까지 토벌하면서 일본 최고의 권력자가 되는데 성공했다.   

일본의 권력을 장악한 히데요시는 일본 전국의 영주들에게 서신을 보내 자신에게 교토로 상경할 것을 권했다. 이 당시에 영주들이 교토로 상경하다는 것은 곧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권위를 인정하다는 뜻이었고 히데요시는 교토로 상경한 영주들과 회담을 벌이며 자신의 편으로 포섭해 갔다. 300만석 이상의 영지를 통치하고 있었고 10만 이상의 군사를 동원할 수 있었던 히데요시의 위용에 히데요시에게 저항하던 도쿠가와 이에야스 마저도 교토에 상경해 히데요시와 회담을 가졌을 정도였다. 

그러나 호조 우지마사는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인정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몇 번이나 서신을 보내 상경하라는 히데요시의 요청을 거절하며 영지의 성벽을 보강하고 장정들을 소집해 군사훈련을 시키는 등 전쟁을 준비하는 모습을 보이자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호조 가문을 정벌하기로 마음을 먹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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