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적의 적은 친구 >
“신부가 생각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오.”
나는 루이스 프로이스에게 단호하게 대답했다.
“대해국에서 전선과 대포를 제작하고 기리시탄들과 노예들을 훈련시키는 것은 왜국을 공격할 준비를 하는 것이 아니라. 왜국이 대해국과 조선 그리고 류큐(오키나와)를 침략할 것을 염려해서 방어전을 준비하고 있는 것이오.”
루이스 프로이스는 여전히 태연한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나는 프로이스 신부가 속으로는 놀랐을 것으로 확신했다.
‘두 번 연이어서 놀랐겠지 첫 번째는 내가 신부의 제안을 거절해서 놀랐을 것이다. 두 번째는 왜국이 대해국과 조선, 류큐를 침략할 것이라는 말에 놀랐겠지.’
루이스 프로이스는 여전히 태연한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상당한 달변가인 신부가 입을 열지 않자 내가 신부에게 입을 열었다.
“우선 신부가 오해한 것은 이해하오. 건국하지 얼마 안 되는 작은 나라가 노예들을 사들여서 군사로 훈련시키고 있고 장정들은 매일 공방과 조선소에 나가 전선과 대포를 제작하고 있으니 충분히 오해할 수 있는 일이오. 그러나 나는 왜국을 먼저 공격할 생각이 전혀 없소. 그러니 신부의 제안도 받아들일 필요가 없는 것이오.”
상당히 놀랐는지 프로이스 신부는 몇 분 정도 지나서야 입을 열었고 내게 질문을 던졌다.
“제가 오해를 했다면 좋습니다. 그런데 왜국이 대해국이나 조선 그리고 류큐를 침략할 것이라 무슨 근거로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신부는 왜국의 사정에 밝으니 왜국의 영주들이 자신의 영지를 지키기 위해 많은 군사를 거느리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을 것이오. 불과 10년 전까지만 해도 왜국의 영주들은 자신의 영지를 지키기 위해 또 이웃 영주의 영지를 빼앗기 위해 항상 싸웠고 왜국에서는 매년 전쟁이 그칠 날이 없었소. 그러나 지금의 왜국은 어떻소. 간파쿠(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왜국의 통치한 후 왜국에서는 영주들 간의 다툼으로 인한 전쟁이 아닌 간파쿠에서 충성하는 영주들과 간파쿠를 인정하지 않는 영주들 간의 전쟁이 벌어지고 있고 간파쿠는 왜국의 거의 대부분 지역을 통치하고 있고 간파쿠는 이번에도 간토지역의 호조가문을 토벌하기 위해 20만 대군을 출병시켰다고 하니 호조가문 역시 멸망할 것이고 왜국에서 더 이상 간파쿠에게 저항하는 영주들은 없을 것이오. 왜국의 상황이 이런데 왜국의 영주들이 더 이상 군사들을 거느리고 있을 필요가 있겠소.”
내 설명을 들은 루이스 프로이스 신부는 고개를 끄덕이며 내가 하는 말에 동의하는 모습을 보였다.
“생각해보시오. 왜국에 수십만의 군사가 있는데 더 이상 왜국에서는 영주들 간의 전쟁이 벌이질 일이 없으니 신부가 간파쿠라면 어떻게 하시겠소. 군사들의 무기를 빼앗고 땅을 나눠주어 농부로 만드시겠소. 아니면 왜구에서는 할 일이 없어진 군사들을 동원해서 대해국이나 조선 아니면 류큐를 침략해 영토를 넓히겠소.”
루이스 프로이스 신부는 생각할 필요도 없다는 듯이 대답했다.
“확실히 간파쿠라면 타국을 침략해 영토를 넓히려고 할 것입니다.”
“나는 대해국을 건국했고 대해국의 국왕이지만 분명히 조선 출신이고 조선의 해군 제독이었소. 왜국이 이곳 대해국을 침략한다면 당연히 이 목숨을 바쳐서라도 대해국을 지키기 위해 싸울 것이고 왜군이 조선을 침략한다고 해도 남의 일이라고 구경만 할 수는 없는 노릇이오.”
내 말을 들은 루이스 프로이스는 눈에서 빛을 내며 나를 바라보았다. 왜국이 대해국이나 조선을 침략한다면 맞서서 싸울 것이라는 말에 프로이스 신부는 희망을 느낀 것이다.
“신부는 이만 마카오로 돌아가시오. 내가 신부와 손을 잡는 일은 없을 것이오.”
루이스 프로이스가 헛된 희망을 가지기 전에 나는 단호하게 말했다. 프로이스 신부가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알게 된 이상 루이스 프로이스를 더 이상 대해국에 머무르게 할 수는 없었다. 잠시 고민을 하던 루이스 프로이스는 내 기분을 상하게 해서 좋을 것이 없다고 생각했는지 순순히 마카오로 돌아가는 것에 동의했다.
“전하 한 가지 부탁이 있사옵니다.”
‘끝까지 사람 피곤하게 만드네.’
나는 짜증이 나는 것을 참으며 신부에게 대답했다.
“무엇이오. 말해보시오.”
“제가 아니라도 좋습니다. 대해국에서 젊은 형제들을 몇 명 받아주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그 형제들이 이곳 대해국으로 이주한 형제들의 예배와 말씀 공부를 도울 것입니다.”
젊은 성직자들을 몇 명 받아달라는 프로이스 신부의 요청에 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대답했다.
“신부의 나라에서 성직자들은 많은 공부를 하는 것으로 알고 있소. 특히 타국에서 활동할 준비를 하는 성직자들은 교리공부 외에 다른 학문도 공부하는 것으로 알고 있소. 대해국에 필요한 학문과 지식을 갖춘 사람들이라면 기꺼이 대해국으로 이주하는 것을 허용하도록 하겠소.”
“전하. 원하시는 사람들이 있으십니까?”
“대포와 유리의 제작기술을 알고 있는 사람들이 좋겠소. 그리고 의학과 건축학 그리고 천문학과 지리학의 지식이 있는 사람들도 대해국에 필요하오.”
항상 태연한 표정을 짓고 있던 루이스 프로이스도 이번에는 놀란 표정을 숨기지 않았다.
“과연. 전하께서는 나라를 건국하시고 통치하시기에 부족함이 없으십니다.”
“8월과 10월에 대해국의 갤리온이 마카오에 도착할 것이오. 대해국에 필요한 사람들이 준비되면 갤리온을 통해 대해국으로 보내도록 하시오. 그리고 나는 육분의와 망원경, 나침반등의 항해도구와 대포와 총 등의 무기에 관심이 많소. 남만의 상인들이 왜국에 화약과 초석을 대량으로 판매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조선은 이미 200년 전부터 화약을 제조하고 있으니 초석이라면 몰라도 화약을 선물할 필요는 없소. 남만의 상인들이 화약과 초석을 왜국에 판매하고 왜국의 여인들을 노예로 구매해 가는 것을 알고 있소. 왜국에서 구매한 노예들을 이곳 대해국에 와서 판매한다면 은과 모피와 소금으로 대금을 지불하도록 하겠소.”
루이스 프로이스가 성직자들을 받아달라고 요청한 기회에 나는 그동안 영입하려고 했었던 의사들과 기능인 그리고 학자들을 요구했다. 이시대의 성직자들은 상당한 학문을 쌓은 지식인들이었고 특히나 선교의 목적으로 타국으로 나가는 성직자들은 선교지에서 필요한 여러 가지 학문을 쌓고 나가는 경우가 많았으니 성직자들 중에 의술과 학식을 쌓은 사람들이 있을 것으로 판단한 것이다. 그리고 프로이스 신부가 기리시탄들은 물론 포르투갈의 상인들에게도 영향력을 끼칠 수 있을 것을 판단한 나는 포르투갈 상인들을 대해국으로 불러들여 그들과도 무역을 할 생각이었다.
내 말을 들은 프로이스 신부는 놀란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고 깊은 생각 끝에 말을 꺼냈다.
“왜국의 간파쿠가 전하께서 염려하시는 대로 대해국이나 조선을 침략한다면 전하께서 저의 소망을 들어주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나는 마음을 다잡고 대답했다.
“나는 왜국의 영토에는 욕심이 없소. 그러나 왜국이 대해국이나 조선을 침략한다면 힘껏 싸울 것이오. 전쟁이 간파쿠의 뜻대로 풀리지 않는다면 간파쿠의 권위가 제대로 서지 않을 것이고 신부의 말대로 간파쿠는 적지 않은 나이에 자녀도 아직 어린 아기이니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 일 아니겠소.”
루이스 프로이스와 손을 잡겠다는 말은 아니었지만 그렇게 될 수도 있다는 여지를 남기는 대답에 프로이스 신부는 만족한 듯 대답했다.
“그와 같은 날이 하루 빨리 오기를 기도하겠습니다. 전하와 저희가 힘을 합친다면 왜국의 형제들의 신앙의 자유를 찾는 것도 불가능한 일은 아닐 것 같습니다.”
말을 마친 루이스 프로이스가 밖으로 나가자 나는 그 자리에서 쓰러지듯이 누웠다.
‘강력한 유혹이었다. 정말 강렬한 유혹이었어.’
왜국의 기리시탄들과 손을 잡고 왜국을 침략하라는 루이스 프로이스의 제안은 임진왜란을 대비하고 있던 나에게 정말 거절하기 어려운 유혹이었다. 순간적으로 내가 함대를 이끌고 바다에서 나고야 성(규슈 히젠 나고야 성)을 향해 포격을 퍼붓고 규슈 전역에서 기리시탄들이 봉기함과 동시에 시마즈 가문이 군사를 일으켜 히젠의 나고야 성으로 진군한다면 히데요시를 생포하거나 사살하는 것도 가능하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들 정도였다. 그러나 유혹에 넘어가기 직전에 정신을 차리고 루이스 프로이스의 제안을 거절했다.
‘루이스 프로이스가 성직자가 아닌 영주였거나 장군이었다면 손을 잡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루이스 프로이스는 신부고 성직자야. 정치나 전쟁에 종교가 깊숙이 개입해서 좋은 결과를 만든 적은 없었어.’
십자군 전쟁에서부터 유고내전과 이슬람국가 (ISIL) 까지 전쟁에 종교가 개입하는 반드시 대량학살이 뒤따랐고 그 끝이 좋지 않았다.
‘아무리 전쟁이라도 인간으로서 넘지 않아야할 선은 있는 법인데 전쟁이 종교전쟁으로 번지면 자신과 같은 종교를 믿지 않는 사람들은 같은 사람이 아닌 이교도로만 본단 말이지. 그러니 어린아이를 포함한 민간인들을 대량으로 학살하는 일들도 벌어지고 그리고 루이스 프로이스가 바라는 대로 왜국의 기리시탄들이 마음 놓고 자신의 신앙을 지키며 생활할 수 있는 상태가 되려면 나와 루이스 프로이스의 연합 세력이 왜국을 완전히 통치하거나 최소한 기리시탄들의 수가 많은 규슈 북부 지역은 완전히 점령해야 하는 데. 결코 쉬운 일이 아니야.’
내 목적은 조선으로 출병한 왜군의 보급을 차단시켜 전쟁을 조기에 끝내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일본의 전쟁수행능력을 떨어트리기 위해 일본의 선박들을 침몰시키고 항구와 해안 지역을 불태울 계획을 세우고 있었지만 교토나 오사카에 상륙해 왜군과 전면전을 치를 생각은 없었다. 내 계획대로 전쟁이 끝나도 히데요시가 살아있는 이상 토요토미 히데요시의 정권은 건재할 것이고 히데요시의 정권이 무너진다고 해도 도쿠가와 이에야스나 다른 영주들이 일본의 정권을 잡는다면 기리시탄들은 계속 종교를 이유로 탄압을 받을 것이 분명했다.
‘아무리 적의 적은 친구라고 하지만 루이스 프로이스는 나와 목표가 너무 달라. 목표가 다른데 얼마나 함께 갈수 있을까. 도쿠가와 막부도 기리시탄들을 탄압하고 일본에 기독교가 전파되는 것을 경계했었지. 루이스 프로이스가 원하는 대로 기리시탄들이 일본에서 탄압받지 않기 위해서는 기리시탄에 우호적인 영주가 일본의 정권을 잡거나 전국시대처럼 일본을 영지별로 갈라놓고 기리시탄 영주들의 영지에 기리시탄들이 집결하는 수밖에 없어. 절대로 쉬운 일이 아니지. 나와 루이스 프로이스가 힘을 합한다고 해도 실패할 확률이 높아. 혹시나 몰라서 전쟁이 벌어지면 루이스 프로이스와 힘을 합칠 수도 있다는 의도로 대답했지만 과연 루이스 프로이스와 힘을 합친다고 해도 얼마나 도움이 될까.’
그때까지 나는 루이스 프로이스의 능력과 인맥 그리고 일본에서 수 십 년간 활동해온 예수회 저력과 기리시탄 신도들에 대해 과소평가하고 있었다. 히데요시의 명령에 선교사들이 추방당하고 기리시탄들이 토착무사들과 승려들의 탄압을 견디다 못해 대해국으로 대량으로 이주한 모습을 본 나로서는 당연한 반응이었다. 그러나 일본에서 30년 가까이 활동해온 루이스 프로이스와 예수회의 저력은 결코 작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