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수군이 되었다. 172화
경인년(1590년) 6월
“아버지께서 저를 좋게 보시는 것은 매우 감사한 일이지만…… 사람에게는 각자의 자리가 있는 법입니다. 저는 복잡한 정치에 관심이 없습니다. 제가 다스리는 땅에서 제가 하고 싶은 대로 마음 편히 사는 것으로 만족합니다.”
내 대답을 들은 마쓰라 다카노부는 껄껄거리며 웃으며 내게 말했다.
“네 나이가 몇이냐? 아직 서른도 되지 않았다고 했지. 20대에 너만 한 재산과 함대를 거느린 이가 몇이나 될 것 같으냐? 네놈이 마흔이 지나서도 그런 소리를 할 수 있을지 모르겠구나. 아니, 네가 그전에 몰락하지 않는다면 네 자리와 재산을 지키기 위해서도 큰 결심을 내릴 수밖에 없을 것이다.”
나는 마쓰라 다카노부의 말에 쉽게 대답할 수가 없었다. 내가 대답을 하지 못하자 마쓰라 다카노부는 나에게 다가와 귓속말로 말했다.
“네가 간파쿠의 자리에 관심이 있다면 진짜로 내 아들이 되어도 좋다. 네가 아들이 되겠다면 너를 내 가신의 아들로 위장시켜 정식으로 양자로 삼을 것이다. 네가 마쓰라 가문의 일원이 된다면 차후 간파쿠의 자리를 노릴 때 네 신분은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다.”
마쓰라 다카노부는 나를 생각해서 하는 제안이었지만 나는 다카노부의 제안을 받아들일 생각이 없었다.
“생각해 주셔서 대단히 감사합니다. 그러나 사람은 각자에게 맞는 자리가 있는 법입니다.”
나는 최대한 정중히 마쓰라 다카노부에게 인사를 올리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 * *
다음 날 아침 마쓰라 다카노부에게서 구매한 물품들과 노예들이 부두에 도착했다.
우선 철과 구리 그리고 유황을 전선에 옮겨 실은 후 1,000여 명의 아이들을 포함해 3,600명에 달하는 노예들을 전선과 갤리온에 나눠서 탑승시켰다.
노예들이 모두 탑승하자 전선과 갤리온은 일제히 돛을 펴고 바다로 나왔다.
갤리온이 히라도항을 벗어나 바다로 나오자 나는 갑판 위에 나와 멀어져 가는 히라도를 바라보았다.
‘처음에는 마쓰라 다카노부의 강요로 인해 히라도에서 무역을 시작했지만, 지금은 히라도와 마쓰라 다카노부에게 정이 많이 들었다……. 임진왜란이 시작되면 나는 일본의 항구들을 공격할 것이다. 특히 조선에서 가까운 규슈와 혼슈 서남부의 항구들을 맨 처음 공격해야 하게 되겠지. 그렇게 되면 히라도와 히젠 지역의 마쓰라 다카노부의 영지도 무사하지 못할 텐데…… 어떻게 해야 할까.’
마쓰라 가문은 히라도 외에도 히젠의 일부 지역을 통치하고 있었고,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히젠에 나고야 성(히젠 나고야 성)을 세워 임진왜란 당시 전초기지로 사용하였다.
임진왜란이 발발하면 히젠 지역은 전쟁터가 될 수밖에 없었다.
‘방법을 생각해 보자. 생각해 보면 방법이 있겠지.’
처음 마쓰라 다카노부와 거래를 시작할 때만 해도 마쓰라 다카노부를 돈만 밝히는 일본 상인으로 생각했지만, 마쓰라 다카노부는 몇 번이나 나를 도와주었고 이번에 양자로 들어오라는 제안은 정말 상상하지도 못한 제안이었다.
마쓰라 다카노부에게 정을 느낀 나는 임진왜란이 발발한 후에도 히라도와 마쓰라 다카노부에게 피해를 주고 싶지 않았다.
* * *
경인년(1590년) 5월 28일 내가 지휘하는 선단은 무사히 대해국의 함관항에 도착했고 갤리온과 전선들은 항구에 도착하기 무섭게 노예들과 물품들을 항구에 내려놓았다.
나는 대해국에 도착하기 무섭게 5월에 출항하지 않았던 전선들과 울릉도에 다녀왔던 전선 그리고 연해주에 다녀왔던 전선들 중 일부를 동원해 10척의 전선으로 선단을 꾸렸고 6월 3일까지 히라도로 출항할 것을 명령했다.
출항할 시간이 얼만 남지 않았고 대해국에서 내가 봐야 할 업무도 있는 만큼 이번 선단은 내가 지휘할 수 없었다.
“야인기병 8,000명이라…….”
“그렇사옵니다. 전하. 톨만은 지휘권과 전공에 따른 보수 그리고 왜인 포로들만 노예로 데려갈 수 있다면 참전할 의사가 있다고 하옵니다.”
최도진의 보고를 받으며 나는 톨만의 배짱이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최도진의 보고를 들으니 무능하거나 성급한 자는 아닌 것 같은데…… 왜국과 왜인들에 대해 잘 알지도 못하면서 참전을 결정했다는 말인가? 그리고 전공에 따른 보상이라 전공을 세울 자신이 있다는 말이겠지.’
톨만이 무슨 이유로 참전을 결정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여진족 기병 8,000명을 왜국에 상륙시킬 수 있다는 것은 분명히 좋은 소식이었다.
나는 최도진에게 명령을 내렸다.
“다음에 톨만을 만나거든 톨만에게 모든 조건을 승낙하겠다고 전하게. 다만, 전장에서 내 명령 없이 후퇴하는 것만 용서할 수 없으니 후퇴는 내 명령을 따른다는 조건을 더하도록 하게 그리고 전쟁에 참전하는 모든 야인전사에게 은 10냥을 내리겠다고 전하도록 하게.”
8,000명에서 은 10냥씩을 내린다면 은 8만 냥의 거액이 필요했지만 여진족 기병들을 왜국에 상륙시켰을 때의 결과를 생각해 본다면 은 8만 냥은 값은 충분히 하고도 남을 것이 분명했다.
“명을 따르겠사옵니다. 전하.”
최도진은 자신이 직접 연해주까지 다녀온 보람이 있었다고 생각했는지 만족한 표정을 지으며 자리에서 물러났다.
나는 대해국에 돌아와서도 쉴 틈이 없었다.
울릉도에 다녀온 박언필과 연해주에 다녀온 최도진으로부터 보고를 받았고, 시마즈 도시히사가 어디까지 진군했고 마을과 도로는 얼마나 건설했는지도 일주일 간격으로 확인하고 명령을 내려야 했다.
여기에 대해국의 내정을 돌보는 일과 무기 개발 그리고 병사들과 노예들의 군사 훈련까지 신경 써야 했으니 몸이 10개라도 부족할 지경이었다.
박언필이 울릉도에서 총각들을 데려와 왜인 여인들과 맺어주려고 한다는 보고에 나는 잘했다고 박언필을 칭찬했고, 혼자 살고 있는 왜인 여인들 중에서 조선인 총각과 결혼할 의사가 있는 여인들을 찾아볼 것을 명령했다.
‘어쩌다 보니 이번에도 사내들보다 여인들을 600명이나 더 데려왔다. 그렇지 않아도 대해국의 주민들 중에는 사내들보다 여인들이 더 많았는데, 울릉도의 총각들을 데려왔다니 잘된 일이야.’
박언필이 나가자 이번에는 조천군이 들어와 대해국의 내정과 전선의 건조 상황 그리고 군사들의 훈련 상황을 보고했다.
대해국 국내의 일을 전담하고 있는 조천군은 이번에 히라도에서 3,600명의 노예가 새로 들어오자 늘어난 일거리에 한숨부터 내쉬었다.
“전하. 이번에 도착한 노예들로 인해 대해국의 인구는 이미 5만 명이 넘었습니다. 사람이 늘어난 만큼 먹이고 입히는 일이 문제입니다.”
조천군이 걱정된다는 듯이 말하자 나는 조천군에게 질문을 던졌다.
“대해국의 식량 사정이 좋지가 않은가? 히라도를 통해 구매한 곡식도 있고 대해국에서 수확한 곡식도 있는 것을 알고 있는데.”
“전하. 히라도에서 구매한 쌀과 보리는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이번 달 중에 보리를 수확할 예정이니 식량은 부족하지 않을 것 같지만…… 문제는 옷. 정확히는 옷을 지을 면포가 부족할 지경입니다.”
대해국에서는 밭을 개간해 보리와 조 그리고 수수를 농사짓고 있었다.
대해국에서 수확한 곡식과 히라도를 통해 수입한 곡식으로 식량은 부족하지 않았지만 문제는 옷감이었다.
대해국에서는 목화 농사를 짓고 있지 않았고 그 결과 솜과 옷감은 전량 수입에 의존하고 있었다.
“사람 수가 늘어난 만큼 면포도 더 많이 필요하겠지. 그 점은 걱정하지 말게 임장춘에게 서신을 보냈으니 늦어도 다음 달에는 면포와 솜이 들어올 것이네.”
면포와 솜이 들어올 것이라는 말에 조천군의 얼굴이 밝아졌다.
나는 박언필을 통해 임장춘에게 은 500냥과 서신을 보내면서 은 500냥으로 아직 다 자라지 않은 소 20마리와 함께 솜 그리고 면포를 최대한 많이 구해서 울릉도로 보내라는 명령을 내렸다.
소는 밭을 개간하고 달구지를 끌기 위해 사용할 것이고 면포와 솜은 의복과 이불을 제작하는 데 쓰일 예정이었다.
“면포가 들어온다니 정말 다행입니다.”
조천군은 면포와 솜이 들어올 예정이라는 소식에 진심으로 기뻐하는 표정을 보였다. 나는 그런 조천군에게 선물을 주었다.
“그동안 나라 안의 일들을 맞아서 보느라 수고가 많았네. 이번에 평호도(平戸島)[히라도]에 다녀오게.”
감자기 히라도에 다녀오라는 말에 조천군은 놀란 얼굴로 불었다.
“전하. 무슨 말씀이십니까? 신에게 평호도에 다녀오라고 하시는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그동안 국내에서 일만 하느라 바깥세상을 본 지도 오래되지 않았나. 히라도에 다녀오면서 좀 쉬다 오게. 이번에는 내가 대해국에 남아 내정을 살피고 전선의 건조를 감독할 것이니. 나를 대신해 선단을 지휘해 평호도에 다녀오게. 평호도에서 특별히 할 일은 없을 것이네. 이미 마쓰라 다카노부에게 필요한 물품들을 주문해 놓았으니 말이네. 여행을 다녀온다고 생각하고 평호도에 다녀오게.”
내 대답을 들은 조천군의 얼굴이 밝게 변했다. 조천군도 그동안 일에 치여 답답하기도 했을 것이다. 그런데 모처럼 히라도에 다녀오라고 했으니 반가워하는 것도 당연했다.
“6월 3일에는 출항해야 하니. 준비를 서두르고 조심히 다녀오게.”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전하.”
조천군은 허리를 숙이며 외쳤다.
* * *
경인년(1590년) 6월 3일 사화동이 지휘하는 4척의 갤리온이 마카오에 도착했다.
마카오로 오는 동안 루이스 프로이스 신부는 대해국에 필요한 인재들을 준비해 놓을 테니 8월에는 꼭 마카오로 갤리온을 보내야 한다고 사화동에게 신신당부했고, 사화동은 늦지 않게 출발하겠다는 약속을 하고 나서야 루이스 프로이스에게서 벗어날 수 있었다.
선단이 마카오에 도착하자 루이스 프로이스는 황급히 배에서 내려 마카오 시내로 사라졌다.
마카오로 오는 동안 루이스 프로이스로부터 그동안의 사정을 전해 들은 사화동은 프로이스 신부의 마음이 급한 것은 이해를 했지만 마카오에 도착하자마자 인사도 제대로 하지 않고 사라진 루이스 프로이스를 생각하며 혀를 찼다.
배가 무사히 항구에 도착하자 사화동은 갤리온의 선장들에게 항구에서 대기할 것을 명령한 후 6명의 부하를 거느리고 알폰스 비에이라를 찾아갔다.
“어서 오시오. 정말로 반갑소이다.”
알폰스 비에이라는 사화동을 보자 환영한다는 반응을 보였다.
“안녕하시오. 그동안 잘 지내셨소.”
사화동은 알폰스 비에이라와 인사를 주고받은 후 준비해간 선물을 꺼내놓았다.
“장군님께서 비에이라 공에게 보내시는 선물이시오.”
사화동의 부하들이 단단해 보이는 나무 상자의 뚜껑을 열자 사화동은 상자 안에서 단단하게 포장되어 있었던 백자로 된 주전자와 백자로 된 찻잔 세트를 그리고 꽃병 크기의 백자를 꺼내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제독님께서 제게 이런 귀한 선물을 보내셨다는 말이오……? 너무 아름다워서 받기가 두려울 정도요.”
알폰스 비에이라는 백자 주전자를 손으로 들어 올리며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사화동은 주전자를 바라보는 비에이라의 모습이 탐욕스러워 보였지만 마카오에서의 무역을 위해 비에이라에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장군님께서는 비에이라 공께서 보내신 선물을 보시고 매우 흡족해하셨소이다. 장군님께서는 비에이라 공께 장군님께서 얼마나 감사하게 여기고 계신지 반드시 전하라고 하셨으며 이 선물도 장군님께서 직접 내리신 것이오.”
알폰스 비에이라는 자신이 보낸 선물을 받고 제독이 흡족해했다는 사화동의 말에 크게 기뻐하며 제독이 자신에게 선물한 찻잔 세트를 바라보았다.
“제독님께서 선물을 마음에 들어 하셨다니 정말 다행이오. 제독님께서 보내주신 선물은 잘 받도록 하겠소. 정말 감사하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