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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수군이 되었다-176화 (176/223)

조선 수군이 되었다. 176화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인내

“돈은 들겠지만, 왜국의 정보를 손쉽게 얻을 수 있으니 이가의 무리를 적극적으로 활용할 생각이네.”

조천군은 닌자들이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그들이 유용한 집단이라는 것은 인정했다.

“알겠습니다. 전하.”

닌자들에 대한 이야기를 마친 후 나는 조천군과 함께 집무실로 돌아가 이번 히라도 무역의 성과를 정식으로 보고 받고 대해국의 내정과 7월에 출항할 선단을 구성하는 일을 의논했다.

* * *

경인년(1590년) 7월 5일.

오다와라 성에서 90일 이상을 농성하던 호조 우지나오는 오다와라 성외에 대부분의 성들이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항복하거나 함락되자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항복하겠다는 의사를 밝혀왔다.

오다와라 성의 방어력과 성안에 비축해 놓은 군량을 믿고 오다와라 성에서 농성을 시작했을 때만 해도 호조 우지나오와 그의 아버지인 호조 우지마사는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오다와라 성을 포위하고 있다가 군량이 떨어지면 오사카 성으로 돌아갈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성문을 단단히 닫고 성안에서 버티기만 하면 승리할 것으로 생각했다.

실제로 호조 가문은 우에스기 겐신, 다케다 신겐과 같은 일본에서도 이름난 맹장들과 전쟁을 치렀을 때도 전황이 불리해지면 오다와라 성으로 들어가 성문을 닫아걸고 적군이 지쳐서 돌아갈 때까지 농성전을 벌였다.

그러나 호조 우지나오와 호조 우지마사는 시대가 변한 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전국시대 당시 일본의 영주들은 상대방의 영지를 공격하면서도 자신의 영지가 다른 영주에게 공격받을 것을 염려해 영지의 방어를 위해 높은 산성을 쌓고, 성을 지킬 군사들을 남겨놓아야 했으며, 전쟁이 장기전으로 이어지는 경우가 드물었다.

전쟁이 길어지면 군량과 보급품의 수송이 어려워질 뿐만 아니라 병사의 대부분이 영지의 농민들이었으니 농사에 차질이 가지 않도록 농사철에는 영지로 돌아가야 했기 때문이다.

그런 극한 상황에서 전쟁을 치르다 보니 우에스기 겐신이나 다케다 신겐 같은 맹장들도 오랜 시간 동안 오다와라 성을 포위하지 못했고, 몇 달 만에 자신들의 영지로 돌아가야 했다.

그러나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이제까지 호조 가문에서 상대했던 적들과는 차원이 다른 상대였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셋쓰에 위치한 오사카 성을 거점으로 약 20여 개의 영지.

당시 석고로 300만 섬이 넘는 영지를 직접 통치하거나 동생과 조카 그리고 가신들을 통해 통치하고 있었고, 주고쿠 지역의 최대 영지를 통치하고 있던 모리 가문과 우에스기 겐신의 후계자인 우에스기 카게카츠가 히데요시의 충실한 동맹으로 히데요시를 지원하고 있었다.

호조 가문이 믿고 있었던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아예 선봉으로 나서서 3만이 넘는 군사로 호조 가문의 성들을 공격하는 데 앞장서고 있었으니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우에스기 겐신이나 다케다 신겐과 달리 오다와라 성을 포위하고 있는 동안 자신의 영지와 오사카 성의 안전을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동원할 수 있는 군사와 간토 지역으로 수송할 수 있는 군량과 보급품의 수에서도 우에스기 겐신이나 다케다 신겐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였다.

다케다 신겐이 동원했던 군사는 최대로 잡아도 3만 명 이하였었고, 우에스기 겐신이 오다와라 성을 포위했을 때 10만의 군사를 동원했다는 기록이 있지만 그 군사들은 간토 지역에서 호조 가문과 적대적이던 영주들과 토착 무사들이 모인 연합군으로 우에스기 겐신의 직속 군사들은 아니었다.

히데요시는 10만에 가까운 직속군사를 동원할 수 있었고, 그의 가신들과 히데요시에게 협조해서 출병한 영주들의 군사까지 20만이 넘는 대군을 동원하는 데 성공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군량과 보급품의 수송 역시 어렵지 않았다.

히데요시는 이미 간토 지역으로 출병하기 이전에 20만 석의 군량을 준비해놓을 것을 명령했고 군량과 군수품을 사카이 항에서 선박으로 수송할 것을 명령했다.

규슈 정벌과 이때까지 전쟁을 치른 경험으로 배를 통해 해상으로 수송하는 것이 수레를 통해 육로로 수송하는 것보다 몇 배나 많은 양을 수송할 수 있다는 것을 히데요시는 잘 알고 있었다.

히데요시는 군량 외에도 많은 군자금을 동원해 전장에서 필요한 물품들을 상인들에게 곧바로 구매할 수 있도록 시스템을 갖춰놓고 있었던 덕분에 오다와라 성을 포위하고 있는 동안에도 히데요시는 물론 군사들을 지휘하던 영주들과 무장들은 무엇 하나 부족한 것 없이 풍족한 생활을 했다고 한다.

이런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국력 앞에서 오다와라 성이 포위되고 다른 성들이 하나씩 함락되거나 항복하자 오다와라 성안에 있던 호조 가문의 가신들 사이에서도 항복하자는 의견이 나오기 시작했다.

일이 이 지경에 이르자 호조 우지나오는 더 이상 견디지 못했고, 자신의 장인인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통해 히데요시에게 항복하겠다는 의사를 밝히게 된다.

호조 우지나오의 항복을 받은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호조 가문의 영지를 모두 몰수하고 호조 우지마사와 항전파였던 가신들의 할복을 명령했다.

이것은 규슈 정벌 이후 시마즈 가문에 영지를 남겨주고 시마즈 요시히사가 당주의 자리에서 물러났을 뿐 살아남은 것과 비교하면 가혹한 처분이었다.

가혹한 처분이었지만 이미 오다와라 성외에 대부분의 영지를 잃은 호조 가문에게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

히데요시의 명령대로 호조 우지마사와 가신들은 스스로 할복해 목숨을 끊었고 호조 우지나오는 오다와라 성에서 나와 일족들과 함께 고야산으로 들어가 근신하게 되었다.

호조 우지나오의 항복을 받은 후 오다와라 성에 입성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간토 정벌에 참가한 영주들과 무장들 앞에서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전공을 크게 치하했다.

“다이나곤 이번에 호조를 정벌하는데 큰 공을 세우셨소. 다이나곤의 군사들이 선봉에서 싸우셨고 군량을 수송하는 곳도 다이나곤의 영지인 스루가를 통해서 수송하였으니 다이나곤 덕분에 호조를 정벌할 수 있었던 것이오. 정말 감사하오.”

“간파쿠 전하. 천만의 말씀이십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자신의 전공을 크게 떠들자 도리어 긴장했다.

“다이나곤이 이렇게 호조를 정벌하는데 제일가는 공을 세우셨으니 포상을 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오. 다이나곤에게 호조의 영지를 모두 드리겠소. 이번에 출병한 다른 무장들에게는 다이나곤의 영지인 미카와, 토토우미. 스루가, 가이, 시나노로 포상을 할 것이니 다이나곤은 사양하실 필요 없으시오.”

순간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숨이 멎는 것 같았다.

호조의 영지를 받는 대신 자신이 통치하고 있는 영지를 모두 내놓으라는 말에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들어 히데요시를 바라보았지만, 초인적인 인내심을 발휘해 입을 열지 않았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영지를 내놓으라는 말에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반발하지 않자 더욱 거세게 이에야스를 몰아붙였다.

“그리고 나 간파쿠가 영지를 인정하겠다고 약속한 다이묘들에게는 약속을 지킬 것이니 다이나곤께서도 이해해 주시오.”

호조 가문의 영지 중에서 히데요시에게 항복한 영주들의 영지는 기존의 영주들에게 주겠다는 말이었다.

그렇게 되면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새로 받은 영지 인근에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영지를 인정받은 영주들이 자리 잡게 된다.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입장에서는 히데요시의 부하들에게 에워 쌓인 것과 마찬가지였다.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입장에서는 분통이 터질 일이었지만 이에야스는 재빨리 현재 상황을 파악했다.

‘이곳은 슨푸 성이 아닌 오다와라 성이고 이곳에는 히데요시를 따르는 다이묘들과 무장들이 가득하다. 이곳에서 히데요시의 요구를 거절하면 히데요시는 자존심 때문에라도 나를 정벌하지 않을 수 없다.’

이곳은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영지가 아닌 오다와라 성이었고 성 밖에는 히데요시를 따르는 20만 대군이 버티고 있었다.

“간파쿠의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인내심을 발휘해 대답했고 이에야스의 대답을 들은 히데요시는 속으로 미소를 지으며 이에야스에게 말했다.

“다이나곤이 수고한 덕분이니 감사할 일이 아니오. 말이 나온 김에 영지를 정리하도록 합시다.”

말이 끝나기 무섭게 지도를 가져오라고 명한 히데요시는 간토 지역의 지도를 펼쳐놓고 이에야스에게 하사할 영지들과 히데요시가 영지를 인정한 영주들의 영지를 지도에 표시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호조 우지나오가 항복하기 전에 히데요시에게 항복한 영주들의 영지를 우선 표시했고 지도에 자신에게 항복한 영주들의 영지를 모두 인정하겠다는 표시를 하고 나서야 지도에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영지가 될 지역을 표시했다.

그러자 250만석 이상을 자랑하던 호조 가문의 영지 중에서 220만석 정도 되는 지역이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영지로 남았다.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통치하던 5곳의 영지의 석고를 합하면 130만 석에 달했으니 석고 수 220만 석의 영지를 받는 것이 큰 포상으로 보였지만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호조가 다스리던 영지를 받는 것이 전혀 반갑지 않았다.

미카와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고향으로 대대로 이에야스의 가문이 다스리던 영지였고, 오다 가문과 이미가와 가문에서 볼모 생활을 하며 어린 시절을 보낸 이에야스가 이미가와 요시모토에게서 독립한 후 자립할 수 있는 기반이 된 곳도 바로 미카와였다.

미카와 외에 다른 영지들도 마찬가지였다.

토토우미는 이에야스가 자립한 후 청년 시절 이미가와 가문의 영주들과 치열하게 싸워서 얻은 영지였으며 전국시대 최고의 명장으로 명성을 떨친 다케다 신겐의 진격에 맞서 싸워서 지켜낸 영지였다.

가이와 시나노는 혼노지의 변 이후 오다 노부나가가 임명한 가이와 시나노의 영주들이 그 지역의 토착 무사들과 다케다 가문의 잔당들에게 살해되고 무주공산이 되자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직접 군사들을 거느리고 출병해 차지한 영지로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시나노를 지키기 위해 4만이 넘는 호조의 대군과 전쟁을 치러야 했다.

그만큼 피땀으로 얻고 지켜낸 영지들이었으니 영지에 대한 애착이 클 수밖에 없었고 이익을 따져도 오랜 시간 동안 통치해 안정적으로 세금을 걷고 군사들을 징발할 수 있는 영지다.

그런 영지 버리고 이번 전쟁으로 피해를 입어 토착 무사들과 주민들의 반항이 예상되는 간토 지역의 영지를 받는 것은 결코 이익이 아니었다.

호조 가문의 영지를 포상으로 주겠다는 말을 꺼내기 무섭게 영지 교체를 기정사실로 만들고 영주들과 무사들 앞에서 심지어 새로 받을 영지까지 지도에 표시하는 히데요시의 모습을 보며 영지 교체를 피할 수 없겠다고 판단한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이를 악물며 히데요시에게 말했다.

“간파쿠 전하의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전하께서 허락하신 영지를 개간하여 비옥한 옥토로 만들 것이며 영지의 도적들을 토벌하고 튼튼한 성벽을 쌓아 영지의 주민들이 안심하고 살아갈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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