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홍이포 >
“물을 가져왔나이다. 전하.”
“고맙다.”
목이 말랐던 나는 물을 떠오는 사람은 쳐다보지도 않고 손을 뻗어 잔을 잡았다. 찻잔을 잡은 나는 잔속에 든 물을 단숨에 들이마셨다.
“시원하다. 이제 살겠구나.”
물을 마시고 갈증이 가시자 나는 그제 서야 내 앞에 서있는 소녀를 바라보았다. 헤이메가 시집을 왔을 때 같이 온 소녀들 중에 하나인 히데코가 쟁반을 들고 서 있었다. 나는 히데코에게 빈 잔을 내밀면서 감사인사를 했다.
“히데코였구나. 고맙다.”
“감사합니다. 전하.”
히데코는 나에게서 잔을 받아 쟁반에 올려놓았다.
“헤이메는 쉬고 있느냐?”
“예 이미 잠자리에 드셨습니다.”
헤이메를 따라온 히데코, 교코, 메구미는 헤이메와 친자매들처럼 지냈고 있었다.
“그래. 하긴 밤이 늦었지. 너도 그만 들어가서 쉬도록 하여라.”
밤이 늦었고 취기에 피곤했던 나는 그만 쉴 생각이었지만 히데코는 자리에서 방에서 나가지 않았다.
“잠자리를 봐 드리겠습니다.”
히데코는 방에 요를 깔고 잠자리를 만들어주었다. 히데코가 잠자리를 만들자 나는 말했다. 히데코에게 말했다.
“수고했다. 그만 들어가거라. 나도 쉬어야겠다.”
그만 들어가도 좋다고 했지만 히데코는 그 자리에 무릎을 꿇고 나에게 말했다.
“전하 오늘은 소인이 전하를 모시도록 하겠습니다.”
“뭐야.”
아직 취기가 남아있었던 나는 나도 모르게 소리를 질렀다.
“전하. 노여워하지 마시옵소서.”
내가 소리를 지르자 히데코는 두려운 듯 몸을 떨면서 말했다.
‘예가 왜 이래 해이메가 시켜나? 헤이메가 그럴 성격은 아닌 것 같은데.’
히데코는 헤이메와 같은 열아홉이었지만 얼굴이 둥근 형태라 헤이메보다 더 어려 보였고 히데코가 헤이메를 따라왔을 때의 나이는 열여섯이었다. 분명히 예쁘고 귀여운 소녀였지만 내 눈에는 아직 어린 소녀로만 보였다.
“오늘은 그럴 기분이 아니다. 그만 들어가도록 하여라.”
“전하.”
“그럴 기분이 아니라고 했다. 때가 되면 내가 부를 것이니 그때까지 기다리고 있거라.”
“예. 전하.”
때가 되면 부르겠다는 말을 듣고 나서야 히데코는 밖으로 나갔다. 겉옷을 벗은 나는 자리에 누워서 생각했다.
‘갑자기 왜 저러는 거야. 헤이메를 질투하나?’
헤이메가 나에게 시집왔을 때부터 함께 지내왔지만 히데코나 다른 소녀들이 나와 같이 자겠다고 나선적은 지금까지 없었다. 갑자기 히데코가 안하던 짓을 하자 나는 신경이 쓰여 잠을 잘 수가 없었다.
‘요 근래 무슨 일이 있었나?’
히데코가 갑자기 안하던 행동을 한 이유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던 나는 마카오에서 보낸 노예들을 떠올렸다.
‘그렇지. 알폰스 비에이라가 노예들에게 집안일을 시키고 있었지. 혹시 노예들을 질투했나?’
생각해보니 그럴 듯 했다. 내게 선물로 보내온 노예들이고 자신들과는 다른 이국적인 외모의 미인들이니 히데코나 다른 소녀들이 질투하는 것도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그런데 질투를 했다고 해도 히데코가 저렇게 까지 나오는 것은 이해가 되지 않는데.’
나는 3명의 소녀는 물론 6명의 노예들 중에 그 누구와도 관계를 가진 적이 없었다. 이미 이씨 부인과 헤이메 이렇게 2명의 아내가 있었고 대해국 안에 있을 때에도 공무로 항상 바빠서 부인들과 잠자리를 가지는 경우도 드문 편이었다.
‘혹시 내가 하녀들과 관계를 가졌다고 오해하고 있나?’
오늘 히데코의 행동은 알폰스 비에이라가 보낸 노예들을 질투한 것이 원인이라는 판단을 내린 나는 히데코를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했다.
‘어떻게 하지. 같이 지낸 정도 있고 헤이메와 친자매 같은 사이이니 다른 곳에 보내는 것도 마음에 내키지 않고 그렇다고 덜컥 관계를 가지고 후궁으로 받아들이면 교코, 메구미도 후궁으로 받아들여야 할 것 같은데.’
나는 갑자기 생긴 고민거리에 한참을 생각하다가 가까스로 잠자리에 들었다.
8월이 지나고 경인년(1590년) 9월이 되었다. 8월의 성과는 매우 만족스러웠다. 외부와의 교역은 기대 이상의 성과를 올렸고 새로운 전선 8척이 완성됐다. 시마즈 도시히사와 군사들이 수고해준 덕분에 대소 호주 주변에 5개의 마을을 건설하는데 성공했다. 이제는 마을에 주민들을 이주시키고 주민들이 정착할 수 있도록 지원만하면 대소호수 까지 대해국의 영토가 확장되는 것이다. 나는 조천군에서 눈이 내리기 전에 6척의 전선을 추가로 건조할 것을 명령하고 9월에도 무역을 위한 선단을 출항시킬 준비를 했다. 선단의 출항준비로 하루하루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었을 때 사화동이 지휘하는 선단은 마카오에서 무사히 교역을 마치고 대해국으로 돌아왔다.
“수고가 많았네.”
“이리 마중 나와 주시니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전하.”
사화동은 항구 까지 마중을 나온 나를 보고 감격한 표정이었다.
“정말 수고 많았네.”
사화동은 그 자리에서 이번 무역의 성과를 보고했다.
“마카오에서 흑인노예 700명(사내 400명, 여인 300명)과 아랍인 노예 100명(전부 사내) 그리고 면포 2000필과 비단 300필 그리고 주석 1000근을 구매해 왔나이다. 전하.”
“정말 수고 많았네. 대단한 성과야.”
“은을 금으로 환전하는데 성공하였습니다. 전하.”
사화동은 이전과는 달리 작은 목소리로 내게 보고했고 나 역시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금부터 우선 하역하도록 하지. 군사들을 시켜 금을 관아로 수송하도록 하겠네.”
“예. 전하 그리고 전하께 보여드릴 것이 있사옵니다.”
“내가 봐야 할 것이라니 무엇인가?”
“루이스 프로이스 신부님의 도움으로 대포를 구매할 수 있었습니다. 마카오에서 항구의 방어를 위해 포대에 설치해 놓은 대포입니다.”
새로운 대포라는 말에 호기심이 생긴 나는 갤리온에 올라갔다. 갤리온에 승선하자 갑판 한쪽에 자리 잡고 있는 거대한 대포가 눈에 보였다.
‘이게 뭐야 컬버린인가. 그것도 2문이나’
갑판의 한쪽 구석을 채우고 있는 대포는 포신의 길이가 2m는 넘어보였고 포의 구경도 120mm는 넘어 보였다. 나는 컬버린을 보고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대단하군. 천자총통을 능가하는 크기가 아닌가. 이 정도 크기의 대포라니 위력도 대단하겠군.”
“전하. 루이스 프로이스 신부님께서 도와주시기 않으셨다면 포르투갈인들이 이 대포를 판매하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합니다. 마카오에서도 해적의 침입에 대비하기 위해 이 대포를 항구에 배치해 놓았습니다.”
사화동의 말을 들은 나는 루이스 프로이스가 나에게 컬버린을 2문이나 보낸 이유를 생각해 보았다.
‘컬버린은 무게 때문에 기동성이 떨어져서 주로 공성포로 쓰이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컬버린을 2문이나 보내다니 히데요시와 빨리 싸우라고 등을 떠미는 구나.’
루이스 프로이스의 속셈이 어떻든 간에 나는 컬버린을 2문이나 확보한 것이 기쁘기만 했다.
‘명나라에서는 컬버린을 복제 생산해 홍이포(紅夷砲)라고 불렀지. 명국도 복제 생산하는데 성공했으니 이곳 대해국에서도 제작할 수 있을 것이다. 컬번린을 대량으로 장비한다면 오사카 성을 공격하는 것도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나는 컬버린을 보자 든든하고 흐뭇한 기분이 들었다. 컬버린을 살펴보던 나는 생각나는 것이 있어서 사화동에게 물었다.
“루이스 프로이스가 소개한 사람들은 없었는가? 대해국에 도움이 될 만한 사람들을 보내주기로 했었는데.”
“전하. 신부님과 함께 찾아온 사람들이 12명입니다. 모두 선실에 있습니다.”
‘12명이나 생각보다 많군.‘
“그들을 만나보겠네.”
사화동은 곧 선원들을 시켜서 선실에서 대기하고 있던 사람들을 갑판으로 불러왔다. 마카오에서 온 사람들은 곧 갑판위로 올라왔고 나는 그들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의외로군. 전원 포르투갈인이나 유럽의 성직자들이 올 줄 알았는데.’
12명 중에 6명이 일본인으로 보였고 그중의 4명은 수녀였다.
“대해국에 온 것을 환영한다. 과인은 대해국의 국왕이다.”
내가 국왕인 것을 밝히자 마카오에서 온 사람들은 긴장한 표정을 지었다.
“전하. 저는 가스파르 코엘료라고 합니다. 전하를 뵙게 되어 무한한 영광입니다.”
일행 중에 가장 나이가 많아 보이는 서양인 신부가 능숙한 일본어로 자신을 소개했다. 나는 신부의 인사를 받으며 생각했다.
‘루이스 프로이스 보다 나이가 적지는 않을 것 같은데.’
루이스 프로이스는 분명히 젊은 성직자들을 보내겠다고 했다. 그런데 프로이스 보다 나이가 적지 않아 보이는 신부가 일행을 대표해서 자신을 소개하자 나는 이들이 루이스 프로이스에게 충분한 설명을 듣고 온 것인지 의문이 들었다.
자신의 소개를 마친 가스파르 코엘료는 자신들의 일행을 소개했다. 일본인으로 보였던 사람들은 마카오에서 신학을 공부하던 일본인들이었다. 선교사 추방령으로 일본으로 귀국하는 것이 위험해지자 그동안 마카오에서 지내고 있다가 루이스 프로이스의 소개를 받았다고 한다. 4명의 여인은 수녀였고 2명의 사내는 사제들이었다. 그들 모두 마카오에서 지내는 동안 신학 외에 의학도 공부했다고 했다. 코엘료는 수녀와 사제들을 소개한 후 포르투갈인 사내들을 소개했다.
“이 사람들은 사제는 아니지만 전하께서 관심을 가지고 계신 대포에 대한 전문가 들입니다.
이쪽의 몬테로와 빌리노는 마카오에서 가장 뛰어난 포수이자 대포도 제작하는 장인입니다. 이 배에 실린 컬버린도 이들의 작품입니다.“
사내들이 컬버린을 제작한 장인들이라는 말에 나는 나도 모르게 사내들을 바라보았다. 코엘료의 설명을 들으니 이들 중에서는 성직자는 일본인 6명과 코엘료 뿐이고 다른 5명 중에서 2명은 대포를 제작하는 장인 2명은 의사 그리고 1명은 건축가였다. 코엘료가 일행을 모두 소개하자 나는 그들에게 말했다.
“대해국에 온 것을 다시 한번 환영한다. 이곳에서 그대들이 할 일이 많을 것이다. 배를 타고 먼 길을 와서 피곤할 것이니 우선은 며칠 푹 쉬고 체력을 회복하도록 하라.”
“감사합니다. 전하.”
코엘료가 일행을 대표해서 감사 인사를 하자 일행 모두가 나에게 허리를 숙였다. 일행이 인사를 마친 후 자신들의 짐을 챙기기 위해 선실로 내려가려고 하자 나는 코엘료 신부를 붙잡았다.
“신부는 잠시 과인을 따라오라.”
가스파르 코엘료는 순순히 나를 따라 선장실로 들어왔다. 코엘료에게 의자에 앉을 것을 권한 후 나는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루이스 프로이스 신부에게 이곳의 상황을 들었는가?”
“그렇습니다. 전하. 프로이스 신부는 이곳과 전하에 대해 자세히 설명해 주었습니다.”
“프로이스 신부도 이곳에 남겠다고 했었지만 내가 반대했다. 그 이유에 대해서도 알고 있는가?”
“예 전하. 물론입니다. 참고로 말씀드리자면 프로이스 신부가 제가 이곳에 오는 것을 상당히 염려하였습니다.”
가스파르 코엘료와 대화를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아 나는 피곤해 지는 것을 느꼈다.
‘역시 루이스 프로이스 만큼 상대하기 피곤한 사람이다. 그런데 프로이스 신부가 반대한 것이 아니라 염려했다고.’
코엘료와의 대화 중에 나는 이상한 점을 느꼈다.
“프로이스 신부가 말렸는데도 코엘료 신부는 대해국으로 오는 배를 탄 것인가?”
내 물음에 코엘료는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래서 컬버린과 대포를 만드는 장인들을 데려온 것입니다. 참고로 말씀드리면 저는 한때 예수회의 일본지역 책임자였습니다. 지위로만 따지자면 루이스 프로이스 신부보다 높은 지위에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