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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수군이 되었다-192화 (192/223)

< 상륙 >

신묘년(1591년) 2월 25일 대해국 함관항 아직 해도 뜨지 않은 새벽이었지만 항구에는 30여척의 갤리온과 전선들이 정박해 있었고 갤리온과 전선 안에는 무장한 병사들과 수병들이 탑승하고 있었다. 병사들이 탑승하고 있지 않는 전선에는 곡식부대와 화약이 든 상자들을 비롯해 각종 군수품들이 가득 실려 있었다. 30척이 넘는 전선들이 정박하고 있었지만 항구에는 순찰을 돌고 있는 병사들 외에는 인기척이 보이지 않았고 전선들도 모두 조용했다.

전선들이 출항준비를 마치고 항구에서 대기하고 있던 바로 그 시간 내 기함으로 사용하고 있는 갤리온의 선장실에서 나는 조천군으로 부터 사도 정벌 계획을 보고 받고 있었고 최도진, 시마즈 도시히사, 사화동, 강영남도 선장실에서 나와 함께 조천군이 설명하는 작전계획을 듣고 있었다.

“오늘 출항하는 전선의 수는 총 37척입니다. 37척의 전선에 탑승하는 수병의 수는 총 1665명이며 수병 외에 군사 3600명이 전선에 탑승하고 있습니다. 군사들은 모두 화승총으로 무장하고 있으며 대포는 36문을 사도 섬으로 수송하게 됩니다.”

정벌군의 전력을 설명하던 조천군은 탁자위에 펼쳐져 있는 사도 섬의 지도와 인근 바다의 해도를 가리키며 자세한 일정을 설명했다. 

“이곳 함관항에서 상륙지점인 사도의 마노만 까지는 약 4일의 시간이 걸릴 것으로 예상됩니다. 함관항을 출발한 함대는 사도의 서쪽 바다 동해상에서 대기하고 있다가 출항 5일째 되는 날 새벽 사도로 접근해 마노만에 군사들을 상륙시킬 예정입니다.”

사도 섬의 서쪽 해변가에 있는 마노만은 우에스기 카게카츠 사도를 공격했을 때 에치고 군사들이 상륙했던 곳이다. 마노만은 우에스기 카게카츠와 내통하고 있던 혼마 사마노스케가 다스리고 있던 사와네 성과의 거리가 가까워 마노남에 상륙한 에치고 군은 혼마 사마노스케의 안내를 받을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사도 섬 서쪽에 위치한 츠루코 은광과의 거리도 가까워 마노만에 상륙한 에치고군은 어렵지 않게 츠루코 은광을 점령할 수 있었다. 사도 섬의 지도와 지형 정보를 확보한 후 나는 장군들과 의논한 끝에 마노만을 상륙지점으로 결정했다. 

“전선들이 해안가에 가까이 접근할 수는 없으므로 병사들은 단선(보트)를 통해 육지에 상륙합니다. 우선 선발대로 전선 15척에서 45척의 단선으로 군사 450명을 상륙시키며 상륙한 군사들이 마노만 일대를 점령하고 교두보를 확보하는데 성공하면 이어서 정벌군 본진이 마노만에 상륙합니다. 군사들이 상륙하는 동안 전선 10척은 사도의 남쪽 바다를 11척은 서쪽 바다를 봉쇄해 사도 섬에서 우에스기 가문의 배가 출항하지 못하도록 봉쇄합니다.”

이가 닌자들이 제공한 정보에 의하면 사도에 주둔하고 있는 군사들의 수는 많지 않았다. 에치고에서 사도로 파견한 군사는 200명에 불과했고 사도 섬의 호족이었지만 우에스기 카게카츠와 내통해 카게카츠의 신하가 된 혼마 사마노스케의 군사들이 500명 정도 있을 뿐이었다. 모두 합해 700명에 불과했으니 대해국의 군사들이 사도에 상륙하는 것만 성공한다면 이들을 제압하고 사도를 점령하는 것은 시간 문제였다.

다만 한 가지 걱정되는 것은 사도에서 에치고로 구원을 요청하는 것이었다. 아직은 우에스기 카게카츠와 전면전을 벌일 때가 아니라고 판단한 나는 사도의 해안을 봉쇄해 대해국 군사들이 사도를 점령하고 있다는 것을 우에스기 카게카츠가 알 수 없도록 정보를 차단할 생각이었다.

‘에치고와 사도 섬의 거리가 멀지 않고 우에스기 가문에서도 사도와 정기적으로 연락을 주고받고 있을 테니. 오랜 시간동안 정보를 차단하는 것은 어렵겠지 하지만 아직 전화도 무전이나 인터넷도 없는 시대이니 마음만 먹으며 3, 4일 정도 정보를 차단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닐 것이다.’

여기까지 설명을 마친 조천군은 자리에 앉았다. 대해국 군사들이 사도에 상륙한 이후의 작전 계획은 왜군에 대해 잘 아는 시마즈 도시히사가 설명했다.

“새벽에 선발대가 마노만에 상륙해 교두보를 확보하는데 성공하면 해가 뜨기 이전에 1000명 이상의 병력을 사도에 상륙시킬 수 있을 것으로 예상하고 있습니다. 첫날 아침까지는 단선으로 군사들을 상륙시키고 날이 밝은 다음에는 대해국에서 준비해간 목재와 자재로 마노만에 임시 부두를 건설할 계획입니다. 선발대로 상륙한 군사들과 상륙 첫날 새벽에 마노만에 상륙한 군사 800명은 날이 밝기 전에 사와네 성으로 진군할 계획입니다. 우리 군사들이 사도에 상륙한 것을 적군이 알아차리기 전에 사와네 성을 공격할 계획이며 사와네 성을 공격하는 군사들은 혼다 고로자에몬이 지휘합니다.”

시마즈 도시히사는 이후에도 사도 섬의 적군을 소탕할 계획과 사와네 성의 공성 이후 츠루코 은광으로의 진군계획을 설명했다. 시마즈 도시히사의 설명이 끝난 후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장군들에게 말했다.

“모두들 알고 있겠지만 이번 사도 정벌의 작전 기간은 사도에 상륙한 날부터 10일이다. 10일 안에 모든 작전을 끝내고 사도에서 철수해야 한다. 쉽지 않은 일이라는 것은 과인도 잘 알고 있지만 불가능한 일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모두들 최선을 다하도록 하라.”

내가 장군들에게 외치자 장군들은 일제히 허리를 숙이며 대답했다.

“명을 따르겠나이다. 전하.”   

“좋다. 그럼 지금 즉시 출항한다. 모두들 각자의 전선으로 돌아가도록 하라.”

“예. 전하.”

장군들은 다시 한번 허리를 굽여 내게 대답한 후 자리에서 일어났다. 장군들이 선장실 밖으로 나가는 것을 바라보던 나는 조천군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조천군에게 다가갔다.

“조장군 관인이 출병하는 동안 대해국을 부탁한다.”

“전하. 심려를 놓으십시오. 대해국은 소장이 지킬 것이옵니다.”

조천군은 나와 함께 사도 정벌의 작전계획을 세우는데 많은 수고를 했지만 내가 대해국을 떠나 있는 동안 대해국을 지키고 대해국의 내정을 살피기로 했다. 조천군도 정벌에 참전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겠지만 안심하고 대해국을 맡길 사람이 없었으니 이번에도 조천군이 남기로 했다.

잠시 후 각 전선마다 돛이 펼쳐지고 닻을 올렸다. 항구에 정박하고 있는 전선들 가운데 가장 먼저 출항한 전선들은 사화동이 지휘하는 선단에 속한 갤리온들이었다. 사화동이 지휘하는 선단에 속한 4척의 갤리온과 강영남이 지휘하는 선단에 속한 11척의 전선에는 선발대로 사도에 상륙할 병사들과 그들이 사용할 군량과 무기 그리고 임시 부두를 건설할 자재들과 목재들이 적재되어 있었다. 사화동이 지휘하는 선단에는 병사들과 군수품 외에도 마카오에서 상인들에게 판매할 모피가 같이 실려 있었고 강영남이 지휘하는 선단에도 역시 병사들과 군수품 외에도 히라도에서 판매할 자기와 찻잔들 그리고 히라도에서 은으로 환전할 금이 실려 있었다. 사화동이 지휘하는 선단과 강영남이 지휘하는 선단은 사도에 군사들과 군수품들을 내려놓은 후 곧바로 마카오와 히라도로 출발할 계획이었다. 

사도 정벌에 최대한 많은 전선들을 동원하기 위해 생각해낸 계획이었고 다행히 마카오와 히라도로 가는 전선들이 갈 때는 가볍게 가면서 대해국으로 돌아올 때는 무겁게 화물을 싣고 오기에 가능한 계획이었다. 

사화동이 지휘하는 선단의 갤리온들이 모두 항구를 벗어나 바다로 나가자 그 다음은 강영남이 지휘하는 선단의 전선들이 천천히 항구를 벗어나 바다로 나갔다. 그렇게 37척의 전선이 모두 바다로 나가는데 적지 않은 시간이 걸렸다. 

한편 내가 대해국에서 사도를 정벌할 계획을 세우면서 겨울을 보내고 있는 동안 일본에서 큰일이 일어났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동생이자 히데요시의 가장 오래된 가신이자 참모인 도요토미 히데나가가 신묘년(1591년) 2월 지병으로 숨진 것이다. 히데요시의 유일한 남동생이자 가장 신뢰할 수 있는 부하였고 다이나곤의 직책에 올라 야마토 다이나곤이라 불리며 석고수 100만석이 넘는 영지를 거느리고 있던 히데나가의 죽음은 히데요시는 물론 일번 전체에 작지 않은 영향을 끼쳤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동생의 죽음에 큰 충격을 받았고 히데나가의 아들마저도 히데나가 보다 먼저 요절하였기에 히데나가의 영지와 재산은 그의 누이의 아들이자 양자인 도요토미 히데야스가 물려받게 되었다.

도요토미 히데나가의 죽음은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여러 가지로 악재였다. 호조정벌 이후 한참 상승세를 타고 있던 히데요시는 동생이자 가장 믿을 수 있는 가신인 히데나가의 죽음으로 그 오만방자하던 기세가 한풀 꺾였고 히데요시의 가신들은 히데나가의 자리를 노리면서 가신들 간의 치열한 경쟁이 벌어졌다.

신묘년(1591년) 3월 01일 새벽 사도 서쪽 해안 동해상에서 지난밤을 보낸 전선들이 조심스럽게 사도로 다가갔다. 사도에 병력과 군수품을 내려놓고 마카오로 떠날 갤리온들이 함대의 선두에 나와 있었고 그 뒤에는 내가 탑승하고 있는 기함이 있었으며 기함의 뒤에는 강영남이 지휘하는 전선들이 기함과 갤리온의 뒤를 따르고 있었다.

“상륙을 시작하라.”

“예이. 상륙을 시작하라.”

기함의 갑판에 나와 망원경으로 해변가를 살펴보던 나는 해변까지의 거리가 단선으로 충분히 상륙할 수 있는 거리에 이르자 상륙을 명령했다. 상륙명령이 떨어지자 갤리온에서는 단선이 바다로 내려왔고 단선이 바다위에 뜨자 화승총과 각궁으로 무장한 병사들이 줄 사다리를 타고 단선으로 내려왔다. 

사도에 최초로 상륙하는 선발대의 지휘관은 혼다 고로자에몬이었다. 사쓰마 출신인 혼다 고로자에몬은 대해국에서도 손꼽히는 맹장이었고 규슈에서 많은 실전을 치른 경험이 풍부한 무장이었기에 선발대의 지휘를 믿고 맡길 수 있었다. 단선에 오른 병사들은 사도에 상륙할 선발대와 노를 저어 단선을 다시 전선으로 귀환시킬 수병들 까지 총 15명이었다. 병사들이 모두 단선에 오르자 혼다 고로자에몬은 낮은 목소리로 명령을 내렸다.

“모두 노를 젓는다. 조용히 그리고 신속하게 노를 저어라.”

혼다 고로자에몬이 명령을 내리자 병사들은 이미 훈련받은 대로 대답하지 않고 조용히 노를 잡아 힘차게 저었다. 선발대의 병사들은 이미 대해국에서 단선의 조종과 노를 젓는 법도 훈련을 받았었기에 노를 젓는 병사들의 움직임은 거침이 없었다.

4척의 겔리온과 11척의 전선에서 총 45척의 단선을 바다에 내려놓았고 단선들은 곧 병사들을 태우고 사도로 조용히 다가갔다. 단선들이 움직이지 시작하자 기함에서는 궁수들이 화전을 날렸다. 기함에서 사도 방향으로 화전을 날려 단선에 탑승한 병사들에게 방향을 안내한 것이다. 하늘을 나는 화전의 불길을 길안내 삼아 단선들은 해변에 도착하는데 성공했고 단선이 해변에 닿자 선발대 병사들은 단선에서 힘차게 뛰어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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