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순종적인 여인
레인디아는 살며시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벌써 10년이나 된 옛 기억이었다.
레인디아는 어느새 앳된 티를 완전히 벗어 던진 스물네 살의 성숙한 처녀로 자랐다. 풍성한 속눈썹 아래엔 머루처럼 검은 눈동자가 숨겨져 있었다. 그녀의 눈동자는 밝은 금발과 대비되어 색이 더욱 짙어 보였다.
또 속이 비칠 것처럼 투명한 피부는 산뜻하면서도 청초한 분위기를 풍겼다. 레인디아는 누가 보아도 부정할 수 없는 미인이었다. 정작 본인은 늘 검소한 삶을 살아와서 외모를 가꾸는 일에는 관심이 없었지만.
‘부인이 아니었다면 나는 아직도 그 지옥에 있었을 거야.’
창밖에서 들어온 바람에 짧게 친 금발이 살랑거렸다. 바람이 제법 찼다. 레인디아는 노스랜드에 가까워졌음을 실감했다. 노스랜드는 신성 솔레디온 제국의 북쪽 땅을 일컬었다. 마차가 향하는 목적지는 공작령인 노스빌리움이었다.
“아, 짜증 나! 노스빌리움엔 대체 언제 도착하는데?”
벨리타가 빽 소리쳤다.
레인디아의 맞은편에 앉은 건 그레제 백작 부인이 아니었다. 그녀를 빼닮은 딸아이였다. 벨리타 그레제. 그레제 백작 부인에게 거둬진 후 레인디아가 쭉 모셔온 아가씨였다.
화려한 붉은 머리카락에 샛노란 눈동자, 그리고 장밋빛으로 물든 뺨이 매력적인 미인이었다. 올해 열여덟 살이 됐지만 하는 짓은 여전히 철부지 소녀였다.
“아, 아가씨, 진정하세요.”
큰소리에 화들짝 깬 앤이 부채를 주워들었다.
“앤! 지금 뭐 하는 거야? 나 얼어 죽이려고? 마차에서 던져버리기 전에 부채 치워!”
“죄, 죄송합니다……!”
앤은 황급히 부채를 의자 틈새에 끼워 넣었다. 그러더니 조용히 앉아 있던 레인디아를 톡 쏘아붙였다.
“레인디아, 창문 안 닫고 뭐 하니? 아가씨 추워하시는 거 안 보여?”
“내버려 둬. 갑갑해 죽을 거 같으니까.”
벨리타는 잔뜩 인상을 찡그리며 등받이에 등을 비비적댔다. 온종일 마차 안에 앉아 있으려니 좀이 쑤셔 견딜 수가 없었다. 벨리타는 슥 시선을 돌려 레인디아를 바라봤다.
“노스빌리움엔 언제 도착하니? 오늘 안에 도착할 순 있는 거야?”
레인디아는 서둘러 무릎 위에 올려둔 책을 덮었다.
<죄의 아이>
몇 번이고 반복해서 읽어 종이 끝이 헤져 있었다.
제 이름조차 쓸 줄 모르던 사창가의 아이는 어느덧 이 책의 내용을 달달 외우는 것은 물론이고, 기본적인 학문 소양을 갖춘 교양 있는 여인으로 자랐다. 거기다 백작가의 하녀란 반듯한 직업도 있었다. 이 모든 게 그레제 백작 부인의 하해와도 같은 은혜 덕분이었다.
“오늘 저녁 무렵엔 도착할 거예요, 아가씨.”
레인디아는 낡은 책표지를 소중히 쓰다듬으며 대답했다.
“저녁 안에 도착 못 하면 얼마 안 남은 머리카락도 빡빡 밀어버릴 줄 알아!”
벨리타가 앙칼지게 소리쳤다. 그러자 앤이 한쪽으로 길게 땋아 묶은 제 머리를 보란 듯이 매만졌다. 두 사람을 번갈아 보던 레인디아의 얼굴이 수치심에 붉어졌다.
“……네.”
레인디아는 푹 고개를 숙였다.
눈에 띄게 짧아진 머리카락이 눈앞을 아른거렸다.
수도 하이락을 떠나기 전, 레인디아는 허리까지 오는 찬란한 금발을 어깨높이로 싹둑 잘라야 했다. 변화는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숨이 막힐 정도로 붕대를 감싸 가슴을 판판하게 만들었다. 몸매가 드러나지 않는 펑퍼짐한 튜닉과 바지를 입은 그녀는 기실 숙녀라기보단 고전 소설 속 영웅을 호위하는 종사(從士)의 모습이었다.
아니, 검을 쓸 줄 모르니 종자(從者)에 가까우려나.
‘엄마! 황실 데뷔탕트의 초대장이에요!’
레인디아의 기억은 한 달 전으로 거슬러 올라갔다.
‘어머나, 내 딸. 이리 와 보렴. 진짜 황실의 인장이잖아? 드디어 우리에게도 기회가 온 거야!’
벨리타는 황후가 주관하는 황실 데뷔탕트에 초대받았다. 본디 제국의 영애는 열다섯에서 열일곱 살 사이에 데뷔탕트를 치르는 게 자연스러운 관례였다.
제국의 데뷔탕트에는 급이 있었다.
가장 높은 급이 황후가 주관하는 황실 데뷔탕트였고, 그다음으로 치는 게 공작가에서 주최하는 사교 시즌의 무도회, 마지막이 계절에 상관없이 열리는 크고 작은 무도회였다.
영애들에게 있어 어느 무도회에서 데뷔했느냐는 중대한 문제였다. 신사들이 모여 출신지와 가문을 소개한다면, 영애들은 자신이 데뷔한 무도회를 소개했다. 힘 있는 가문일수록 황실 데뷔탕트에 초대받을 가능성이 컸다. 달리 말하자면, 황실에서 데뷔탕트를 치렀다는 건 훌륭한 가문에서 태어났다는 훈장이기도 했다.
물론 한미한 가문의 영애라 할지라도 황실 데뷔탕트에 초대받는 경우도 있었다. 이들도 공평하게 황후와 대화할 기회가 주어졌다. 때때로 기회는 거기서 끝이 아니라 황실과의 인연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데뷔탕트는 태어나 딱 한 번밖에 치를 수 없다.
황실 데뷔탕트를 노리는 영애들은 나이가 차도 다과회 정도에만 참석하며 공식적으로 사교계에 얼굴을 보이지 않고 집 안에 꼭꼭 숨어 있었다. 물론 이런 경우는 극히 드물었다. 황실 초대장이 언제 날아올지 모르는 상황에서 막연히 기다렸다간 성년이 될 수 있었으니까.
그레제 백작 부인은 달랐다.
반드시 하나뿐인 딸아이를 황실 데뷔탕트에 선보이려 했다. 그녀는 데뷔탕트를 제대로 치르지 못했는데, 자신의 못다 이룬 꿈을 딸을 통해 이루고 싶어 했다. 벨리타 또한 흔해빠진 무도회에서 데뷔탕트를 치르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늘 파티의 주인공이자 특별한 존재가 되고 싶어 했다.
벨리타가 열여덟 살이 된 올해, 기회가 찾아왔다.
백작 부인이 황실 데뷔탕트를 담당하는 관리의 뒷주머니에 꾸준히 꽂아준 돈이 빛을 발한 것이다. 문제는, 데뷔탕트에서 벨리타가 황후의 노여움을 샀단 점이다. 황족을 능멸했다거나 하는 중죄는 아니었다. 그러나 황후는 그 실수로 벨리타에겐 눈길 한번 주지 않았다. 무엇보다 황후가 남긴 말이 결정적이었다.
‘그레제 백작가의 영애라고요? 내 기억해두겠습니다.’
그리 말하던 황후의 목소리는 결코 호의적이지 않았다.
이 소식은 수도 하이락에 일파만파 퍼져서, 영애들은 벨리타를 멀리했고 신사들도 그녀를 꺼림칙하게 여겼다. 벨리타는 하루가 멀다 하고 사용인에게 물건을 집어 던지며 분노를 표출했다. 가장 괴롭힘을 많이 당한 건 레인디아였다.
딸아이가 집안의 작은 악마가 되어가는 동안, 백작 부인은 백작 부인 나름대로 미칠 노릇이었다. 하필이면 이때 영지에서 벌어들이던 수익이 뚝 끊기고 말았으니까.
그레제 모녀는 딸아이의 본격적인 데뷔탕트를 위해 백작령을 떠나 수도의 타운 하우스로 완전히 이주했다. 그 탓에 백작령의 산출량이 줄어들었음에도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못했고, 영지 경영을 소홀히 한 대가를 톡톡히 치르고 있었다.
사실 재정난의 가장 큰 원인은 백작의 죽음이었다. 돈을 벌어오는 남편이 죽어버리니, 반대로 돈 쓸 줄만 알던 아내는 빚이 불어나지 않게 막는 것만으로도 정신이 없었다. 하지만 달라진 상황 속에서도 그레제 모녀는 상류층의 삶을 포기하지 못했다. 백작가의 재정상태는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이나 마찬가지였다.
레인디아의 삶은 전과 비슷했다.
‘레인디아, 너는 표면적으론 하녀이지만, 사실은 우리의 혈연이기도 하잖니? 그러니 봉급은 주지 않고 내가 따로 관리하마. 훗날 네 지참금으로 쓸 수 있게 말이다.’
‘네, 백작 부인. 지참금이라니…, 그런 부분까지 신경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하지만 결혼은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어서…….’
‘호호호. 너는 착하고 성실하니 지금처럼만 하면 틀림없이 좋은 신랑감을 만날 수 있을 거란다. 물론 결혼한다 해도 여기서 일하는 걸 그만둬선 안 돼. 내 말 이해하지, 레인디아?’
‘네, 백작 부인. 전 앞으로도 쭉 백작가만을 위해 봉사할 거예요. 이곳에서 받은 은혜가 너무나 크니까요.’
어릴 적부터 백작가에 무급으로 봉사해 왔기 때문이다. 때문에 봉급이 준다 해도 레인디아의 생활은 평소와 다름이 없었다. 그러나 얼마 안 가 레인디아 역시 새벽까지 자수를 놓아야 했다. 아침이 밝으면 시장에 나가 자수를 팔았다.
‘백작 부인, 오늘 자수를 판 돈이에요.’
‘겨우 이게 다니? 얘, 레인디아. 요즘 가계가 안 좋아. 그래서 말인데, 만드는 양을 좀 더 늘리면 안 되겠니? 네 자수는 시장에서 인기가 많다며? 그래, 요즘은 장미가 유행한다는데 장미 자수를 좀 해 봐.’
‘네, 부인.’
‘필요한 실이 있으면 얘기하고. 실 정도는 내가 사줄 수 있으니까. 다만 비싸게 팔아야 해. 비싼 실로 만든 자수를 싼값에 팔면 수지가 안 맞잖니? 너도 산수는 할 거 아냐. 벨리타가 배우는 걸 옆에서 지켜봤으니.’
‘네, 명심할게요.’
레인디아는 평소 필요한 돈을 자수로 마련했다. 그러나 백작가의 형편이 안 좋아지자 이제는 그 돈마저 모녀에게 상납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도 불평 한 번 하지 않았다. 오히려 이런 손재주를 준 신께 감사했다.
어느 날.
결단을 내린 백작 부인이 말했다.
‘황후 마마의 노여움이 가실 때까지 노스빌리움에 가 있으렴. 그곳에 그이의 친구분이 있어. 그분이 당분간 널 돌봐주실 거야.’
‘나를 노스랜드에 처박겠다고요? 싫어요! 난 그런 곳에서 썩을 운명이 아니라고요!’
‘진정하렴, 벨리타. 노스빌리움은 북부의 수도라 불리는 곳이란다. 하이락과 별반 다르지 않아. 거기다 네 아버지의 친구분은 지역 유지기도 하니, 인연을 만들어 나쁠 것 없지. 운이 좋다면 그곳에서 멋진 신랑을 만나 떵떵거리며 살 수도 있어. 수도의 귀부인 못지않게 말이야.’
‘수도의 귀부인 못지않게 살고 싶은 게 아니라, 나는 수도의 귀부인이 되고 싶다고요! 하이락에 뼈를 묻고 싶단 말이에요!’
백작 부인은 어떻게든 딸아이를 설득시키려 애썼다. 보다 못한 레인디아도 부인의 곁에 서서 벨리타를 진정시켰다. 그럴수록 벨리타의 울음소리는 더욱 높아졌다. 결국 참다못한 백작 부인이 버럭 화를 냈다.
‘울어도 소용없어! 그러게 황후마마의 앞에서 처신을 제대로 했어야지! 대체 그날 무슨 짓을 저지른 거니?’
‘다 저년 때문이에요!’
‘레인디아? 저 아이가 뭘 어쨌다고?’
‘제 대답을 가로채 갔다고요!’
‘그게 정말이니, 레인디아? 대답해!’
모녀의 시선이 레인디아에게 쏠렸다. 레인디아는 고개 숙여 사과했다.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죄송합니다, 백작 부인. 제가 주제도 모르고 그곳에서 입을 여는 바람에…….’
사실 백작 부인도 사건의 자초지종은 알고 있었다. 완전히 제 딸의 잘못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노련하게 레인디아에게 죄를 뒤집어씌웠다. 또 그것을 용서하는 관용도 베풀었다.
‘하아. 지나간 일을 어쩌겠니. 이미 엎질러진 물인 것을. 레인디아, 너도 너무 마음 쓰지 말렴.’
‘엄마! 지금 저년 편드는 거야?’
‘벨리타, 조용히 좀 하렴. 그리고 레인디아. 너도 벌이라 생각하고 벨리타와 동행하거라. 가만, 둘만 보낼 순 없으니 앤도 데려가도록 해. 벨리타, 너 앤과 친하잖니?’
‘하녀같이 천한 것과 친하게 지낼 리 없잖아요.’
‘너와 동갑인 하녀는 앤뿐이잖니. 너희 셋이 짐을 꾸려서 북부로 떠나려무나. 이 이상 나은 조합은 없겠어.’
백작 부인의 말을 경청하던 레인디아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백작 부인, 저는 늘 그래왔듯 최선을 다해 아가씨를 보필할 테지만 여자의 몸으론 한계가 있어요. 아가씨를 보호할 남자 사용인을 한 명 정돈 붙이시는 게 좋지 않을까요?’
말을 마친 레인디아는 무척이나 송구스러워하며 몸을 움츠렸다.
‘……네 말도 일리는 있구나.’
백작 부인이 고개를 주억였다.
그녀라고 그 생각을 안 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벨리타가 황실 사교계에서 물의를 일으킨 상태에서 남자 사용인과 한 마차를 타고 북부로 떠난다면, 얘기가 와전되어 추문으로 번지기에 십상이었다.
벨리타의 평판이 더욱 바닥을 치겠지. 그렇다고 남자 하나 더 보내자고 마차를 두 대씩 사용할 순 없는 노릇이었다. 상기했다시피, 백작가의 재정 상태는 연일 적자를 기록하고 있었다.
보수적인 북부는 좀도둑도 감옥에 가둘 만큼 법이 엄해 여행길이 위험하진 않을 것이다. 어차피 노스빌리움에만 도착하면 벨리타의 식비며 생활비는 그이의 친구가 해결해 줄 테니…….
‘그래, 레인디아. 네가 하면 되겠구나!’
‘……네? 무엇을요?’
‘하이락을 떠나는 즉시 머리를 자르고 남장을 하렴. 어차피 수도의 귀족들은 여자 셋이 떠난다고 알 테니 상관없어. 그렇게 노스랜드에 도착할 때까지만 남자인 척하란 거야.’
‘하지만, 저는 검을 사용할 줄 모르는걸요?’
‘나도 너에게 그런 걸 기대하진 않는다. 하지만, 정말 위험한 상황이 오면, 목숨을 걸고서라도 벨리타를 지켜줄 사람은 너뿐이잖니. 그렇지? 응?’
너는 그래야만 하잖아?
백작 부인이 레인디아의 손을 붙잡으며 덧붙였다. 잠시 고민하던 레인디아는 비장한 얼굴로 고개를 주억였다.
‘다녀오겠습니다, 백작 부인.’
그렇게 레인디아는 남장을 하고 대륙의 최북단인 노스랜드로 향하고 있었다. 처음 하는 남장은 아니었다. 어릴 적에도 자라는 가슴을 숨기려 붕대로 꽁꽁 동여맨 적이 있으니까. 물론 그것을 남장이라 해야 할지 의문이었으나.
어쨌든 그 시절과 지금은 마음가짐부터 달랐다. 어릴 적엔 오직 자신의 안위만을 생각해 한 행동이었지만, 지금은 두 여인을 지켜야 하는 막중한 사명감을 짊어지고 있었다.
문제는 벨리타와 앤이었다.
아직 스물도 되지 않은 두 처녀는 사사건건 유치한 시비를 걸어 레인디아를 곤란하게 했다.
‘앤 몫까지 네가 들어, 레인디아.’
‘그래, 아가씨 말씀이 맞아. 너는 남자니까 네가 다 들어야지. 여자인 우리가 들면 이상하게 보일 것 아니니?’
하이락을 떠난 후, 제일 먼저 묵은 숙소에서 머리를 짧게 자르고 나오자 벨리타와 앤은 레인디아를 놀리기 바빴다. 레인디아는 혼자 세 명분의 짐을 마차에 실었다. 그 모습이 가여워 보였는지 지켜보던 여관 딸이 와서 거들어주기까지 했다.
‘도와주시지 않으셔도 되는데……, 호, 혹시 제가 남자로 안 보이시는 건가요?’
‘어머, 정말 이상한 소릴 하시네요. 술 취했어요? 잘생겨서 도와준 거라고요. 당신처럼 예쁜 미남은 주변에 흔치 않으니까!’
여관집 딸은 레인디아의 가냘픈 어깨를 두드리며 깔깔대다 돌아갔다. 남자로 보인단 대답에 레인디아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러다 예쁜 미남이란 칭찬이 떠올라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빨리 침대에 눕고 싶어.”
벨리타의 칭얼대는 목소리에 레인디아는 현실로 돌아왔다.
이토록 불안한 여행은 벌써 일주일 차에 접어들었다. 마차가 지나치는 풍경이 하얗게 변하기 시작하더니 어느새 고지가 코앞이었다.
‘해가 질 무렵이면 노스빌리움에 도착할 거야.’
레인디아는 창밖으로 살며시 고개를 내밀었다.
눈에 보이는 하늘은 푸르렀으나 코끝에 노을의 향기가 닿았다.
* * *
“하아, 하아……!”
레인디아는 조명 하나 없이 숲길을 달렸다.
나무가 빽빽하게 들어찬 침엽수림은 스산한 분위기를 풍겼다. 사방이 캄캄했다. 그녀의 등 뒤에서 샛노란 보름달만이 휘영청 빛나고 있었다.
‘어서 아가씨와 앤을 찾아야 해…….’
레인디아는 숨이 목 끝까지 차올라 잠시 멈춰 섰다.
‘어쩌다 이렇게 된 걸까.’
검은 눈동자에 습기가 차올랐다. 레인디아는 질끈 눈을 감고 고개를 저었다. 울고 있을 여유가 없었다. 그런다고 닥친 상황이 해결되지 않았으니까.
레인디아는 다시 어둠 속을 달렸다.
‘저녁 무렵이면 도착할 거라 했잖아!’
씩씩대던 벨리타의 모습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벨리타의 옆에 선 앤도 팔짱을 낀 채 레인디아를 노려봤다. 늙은 마부는 마차를 밀다가 지쳤는지 바닥에 앉아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아냈다.
하필이면 숲길에서 마차 바퀴가 땅에 박히고 말았다. 레인디아가 마부와 합세해 바퀴를 빼보려 했지만 소용없었다. 땅에 단단히 뿌리내린 바퀴는 꿈쩍하지를 않았다.
내가 진짜 남자였다면 밀어낼 수 있었을까?
그런 분한 마음도 잠시, 어설픈 남장을 하고 벨리타와 앤을 지키겠다 다짐하던 과거의 자신이 한심하게 느껴졌다. 코끝이 시큰거리는데 벨리타가 아이처럼 엉엉 울기 시작했다. 그 소리에 레인디아는 도리어 침착해졌다.
‘여기서 자야 하는 건 아니지? 나는 벨리타야! 벨리타 그레제라고! 백작가의 영애인 내가, 흐윽, 노스랜드로 쫓겨나서 노상을 해야 한다니, 흐으윽, 이 사실이 알려지면, 흣, 다들 날 무시할 거야! 시집도 못 갈 거라고! 흐어어엉!’
‘숲을 지나오기 전에 민가를 봤어요. 그곳에 도움을 청하고 올게요.’
레인디아는 마부에게 벨리타 아가씨 곁에 있어 달라 신신당부한 뒤 등을 돌렸다. 그때였다.
‘레인디아!’
‘네, 아가씨.’
‘이거 챙겨가. 네 가방.’
벨리타가 짐칸을 가리켰다. 색이 다른 천으로 여기저기 기운 천 가방이었다. 안에는 하녀복과 속옷, 그리고 백작 부인에게 선물 받은 책이 들어 있었다. 레인디아의 유일한 짐이었다. 그녀가 이번 생에 소유할 수 있는 전부이기도 했다.
‘혹시라도 그 사람들이 도와주지 않겠다고 하면 어떡해? 그땐 여장이라도 해서 유혹해 봐. 넌 그런 거 잘할 거 같은데.’
여장이라니. 난, 태어날 때부터 여자였는데…….
왠지 모를 수치심에 레인디아는 얼굴이 화끈거렸다.
서둘러 시선을 내리깐 채 가방을 챙겼다. 북쪽에서 불어온 찬바람에 짧은 머리가 나부꼈다. 역시, 이렇게 짧은 머리론 여자처럼 안 보이겠지. 그 사실을 알고 있지만. 당연히 지금은 남자처럼 보여야 했지만.
왠지, 자신의 모든 걸 부정당하는 기분이 들었다.
이제야 사람답게 사는 것 같았는데, 결국 모두 착각이었던 거다.
‘다녀오겠습니다, 아가씨.’
레인디아는 꾸벅 고개를 숙이고 도망치듯 달렸다.
그렇게 허겁지겁 달린 끝에 도착한 집은 텅 비어 있었다. 사람의 흔적은 없었다. 완벽하게 버려진 집이었다. 레인디아는 절망했다. 고개를 돌리는데 구석에 가득 쌓인 뼈 무더기가 보였다. 소동물의 뼈였다. 다시 바닥을 보니 늑대 털로 추정되는 털 뭉치도 여기저기 붙어 있었다.
‘아우우우-.’
밖으로 나오는 순간 멀리서 늑대 울음소리가 들렸다.
본디 늑대는 인간을 공격하지 않는다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북부의 늑대는 사납기로 유명했다. 노스랜드엔 오염된 늪지대가 있어 그곳에서 서식하는 야생동물은 인간을 습격하는 변종으로 변했다.
레인디아가 다시 돌아왔을 땐 텅 빈 마차뿐이었다. 쌍두마차를 이끌던 말도, 늙은 마부도, 벨리타와 앤도 없었다. 짐칸은 텅 비어 있었다. 그것을 확인한 순간 눈앞이 새하얘졌다.
설마 내가 자리를 비운 동안 도적이 습격한 건가?
레인디아는 저무는 노을에 의지해 마차 주변을 살폈다. 어째서인지 저항의 흔적은 없었다. 그러나 안심할 수 없었다. 그렇게 해가 질 때까지 숲 주변을 돌아다니며 애타게 아가씨를 찾아다녔다.
“하아. 하…….”
얇은 입술 밖으로 입김이 흘러나왔다.
온도가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침엽수림의 그림자가 더욱 짙어져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았다.
‘다시 마차가 있는 곳으로 가봐야겠어.’
결국, 레인디아는 마차가 있던 장소로 돌아가기로 했다.
“빌어먹을! 종자 놈이 사라진 사이에 전부 털어먹을 수 있겠다 싶었는데. 하필 북군(北軍)이 나타나선.”
그런데 뜻밖의 불청객이 마차를 점거하고 있었다.
레인디아는 황급히 나무 뒤에 몸을 숨겼다.
“기껏 함정까지 파두었는데 이게 웬 봉변이냐고! 재수가 없으려니.”
“그러게 북부에선 노략질하기 힘들다니까.”
장정의 남자 두 명이 투덜댔다. 바퀴가 바닥에 걸린 건 우연이 아니었다. 도적들이 파둔 함정이었다. 다행히 그들도 외부에서 온지라 주변 지리에 밝지 않은 눈치였다.
“타이밍 한번 더럽네. 카악!”
도적 한 명이 바닥에 침을 뱉었다.
‘내가 사라지면 마차를 습격할 생각이었던 거야.’
그런 상상을 하자 절로 헉 소리가 튀어나왔다. 레인디아는 재빨리 입을 틀어막았다. 주변을 순찰 중이던 북군의 호위를 받았다면 모두 지금쯤 무사히 노스빌리움에 도착했을 것이다.
비로소 안심이 되는 한편, 마음이 착잡해졌다.
‘날 두고 가버렸구나. 어째서 기다려주지 않은 걸까.’
생각해 보니 전에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성축일 날이었다. 백작 가족이 수도에 그녀만 버려둔 채 백작령으로 돌아간 적이…….
그날의 기억이 떠오르자 눈시울이 붉어졌다. 아니야. 그래도 무사한 걸 알았으니 됐다. 날 두고 갈 수밖에 없던 이유가 있었겠지. 레인디아는 번잡한 마음을 갈무리했다.
‘최대한 조용히 도망치자.’
저들의 눈을 피해 말 발자국을 따라 걷는다면…….
우지끈.
레인디아의 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조용히 도망친다는 게 그만 나뭇가지를 밟고 말았다.
“거기 누구냐?”
“읏……!”
레인디아는 황급히 몸을 돌렸다. 그러나 도적들이 빨랐다. 정면을 보던 시야가 휙 뒤집혔다. 무수히 많은 별이 밤하늘을 수놓고 있었다. 이윽고 별들이 뿌옇게 흐려졌다. 목덜미를 잡혀서 눈물이 핑 돌았다.
“이 자식, 아까 도움을 구하러 갔던 종자 놈이잖아?”
도적이 레인디아의 몸을 바닥에 내팽개쳤다. 울퉁불퉁한 땅에 뺨과 손등이 쓸려 송골송골 피가 맺혔다. 고통을 느낄 틈도 없었다.
어쩌지, 어떡하면 좋지.
레인디아는 바닥을 더듬으며 몸을 일으키려 했다. 그러자 등 뒤에서 도적이 다시 레인디아의 머리채를 잡아당겼다. 횃불로 레인디아를 비추던 도적의 입가에 야릇한 미소가 번졌다.
“뭐야? 사내놈 맞아? 어이, 와서 보라고. 사내놈치곤 반반하네. 어라, 턱도 보드라운데? 하하! 수염도 안 난 애송이냐?”
“흐음. 그러게. 사내놈치곤 낯짝이 반반해.”
도적들이 레인디아의 뺨과 턱을 쓰다듬으며 킬킬댔다. 레인디아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더러운 벌레가 살가죽 위를 기어 다니는 것처럼 소름이 끼쳤다. 머리 위에서 씨근대는 숨소리가 떨어졌다.
“이런 얼굴이면 남자여도 가능할 거 같은데 말이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너 이 새끼, 제정신으로 하는 말이야?”
“진짜 계집년일 수도 있잖아. 벗겨봐야 알겠는데?”
“아서라. 그러다 남자면? 똥구멍에라도 박게?”
“염병, 그럼 뭐 그냥 박아야지. 구멍이 다 같은 구멍 아니겠어?”
“변태 새끼.”
도적이 우악스레 붙잡고 있던 레인디아의 머리를 밀쳐내자 그녀는 힘없이 바닥으로 쓰러졌다. 새우처럼 웅크린 몸 위로 상스러운 말들이 쏟아졌다.
“뒤집어서 박아. 괜히 벗겼다가 고추 튀어나오면 입맛 버릴라.”
“오, 그것도 좋은 방법인데?”
목덜미를 타고 식은땀이 주르륵 흘렀다. 검은 눈동자가 정신없이 흔들렸다. 그 순간, 기억 속에 가라앉아 있던 목소리가 생생히 되살아났다.
‘가슴도 안 나온 어린애를 데려와서 200데르크나 받겠다고?’
‘조금만 키워서 팔아. 크면 반반하겠구먼. 봐, 꼬질꼬질해서 그렇지 백금발이라고. 최상품이야.’
‘도망가면 다리를 분지를 줄 알아. 그대로 두 손이 묶인 채 손님을 받게 될 거야.’
‘앞으로도 그렇게 쭉 착하게 있으렴.’
‘같이 손님 받으면 좀 좋아. 가뜩이나 상대하는 손님이 늘어나서 죽겠는데.’
‘어린 게 아주 영악하기 그지없어! 먹여주고 재워준 게 얼만데! 감히 날 속여?’
그렁대던 두 눈에서 이내 모든 습기가 사라졌다. 팽팽하게 잡아당긴 실오라기가 툭 끊어지듯 순식간에 힘이 풀렸다. 벗어날 수 없는 현실이 불러온 무력감이 여체를 짓눌렀다.
레인디아는 저항하지 않았다.
천천히 두 눈을 감았다. 미칠 듯이 뛰던 심장 소리가 차분해졌다. 바닥에 귀를 맞대고 있으니 색색거리는 얕은 숨소리만 들렸다.
‘어차피 일어날 일이었어.’
레인디아는 무감하게 생각했다.
‘언젠가……, 단지 예전엔 운이 좋아 당하지 않았을 뿐이야.’
자신의 삶은 언제나 불행했고, 자신이 이토록 불행한 까닭은 죄를 지었기 때문이다. 불경한 여인의 자궁에서 원죄를 양분 삼아 태어난 죄!
그러니 저항해도 소용이 없었다.
‘이것도 신이 내린 형벌이겠지?’
가느다란 눈물 한 줄기가 오른쪽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상처 위에 눈물이 닿자 피부가 욱신거렸다. 그러나 이보다 더 큰 고통이 곧 자신의 다리 사이를 파고들 것이다. 단단하게 기립한 더러운 살덩이가 몸을 찢어발기면 얼마나 괴로울까?
‘처음은, 아프다던데…….’
레인디아는 질끈 눈을 감고 말했다.
“……빨리, 해 주세요.”
“뭐?”
“……저항하지 않을게요. 부탁드립니다. 최대한 빨리, 끝내주세요.”
레인디아는 고장 난 태엽 인형처럼 중얼거렸다. 어차피 당해야만 한다면, 가능한 한 빠르고 짧은 고통이 나았다. 무력감이 전신에 퍼져 저들이 부탁을 들어주지 않을 무뢰한이란 사실조차 망각하고 만 것이다.
도적들은 시선을 주고받다 음흉한 미소를 지었다.
“이거 완전 걸레 아니야?”
“주인집 아가씨한테 예쁨 좀 받았나 본데?”
레인디아가 위를 바라봤다. 검은 손이 저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레인디아는 다시 눈을 감았다. 이대로 기절해버리면 좋을 텐데. 아니면, 겁탈을 당하는 동안만이라도…….
“억!”
철푸덕.
짧은 비명과 함께 무언가 쓰러지는 소리가 들렸다.
‘무슨 일이지?’
그렇게 한참이 지나도록 아무런 통증도 느껴지지 않았다. 살그머니 눈을 뜨자 시퍼렇게 뜬 두 눈이 레인디아를 보고 있었다. 저를 범하려던 도적 중 한 명이었다. 뒤통수에 볼트가 박혀 있었다. 갈라진 두개골에서 흘러나온 핏물이 레인디아 쪽으로 가까워졌다.
탁하게 가라앉은 레인디아의 눈동자에 초점이 돌아왔다.
“아아…….”
그제야 레인디아는 황급히 상체를 일으켰다. 다리에 힘이 풀려 완전히 일어설 순 없었다. 결국 바닥에 엉덩이를 맞댄 채 엉거주춤 땅을 기어 뒤로 도망쳤다.
“히익……! 씨, 씨발! 누구냐? 숨어 있지 말고 나와!”
남은 도적이 허리에 찬 검을 빼 들었다.
푸슉!
“끄어…….”
풀썩!
또 다른 도적의 오른쪽 눈에 볼트가 박혔다. 거구의 몸이 비틀대다 시체 위로 넘어졌다. 시체가 두 구로 늘어났다. 레인디아는 숨을 들이켰다. 심장이 쿵쾅쿵쾅 갈빗대를 두드렸다.
“헉, 허억. 헉……!”
레인디아는 흠칫흠칫 경련하며 숨을 들이켰다.
조금 전까지 살아 있던 사람이 죽는 모습을 본 충격은 상상 이상이었다. 사람의 목숨이 이토록 허무하게 사라질 수 있는 것이었다니. 마치 일렁이는 촛불을 후 불어 끄듯이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너.”
어둠 속에서 차갑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들렸다.
이윽고 무거운 발소리가 가까워졌다.
소리는 레인디아의 바로 앞에서 멈췄다. 살인자. 저를 겁탈하려던 도적들을 죽인 자다. 레인디아는 차마 고개를 들 수 없었다. 그녀가 제일 먼저 본 것은 군화처럼 보이는 부츠였다.
군인? 제국군? 그렇다면 북군인 걸까……?
레인디아가 묻기도 전에 남자가 먼저 물어왔다.
“외부인인가?”
“……저, 저는.”
“고개 들어.”
싸늘한 명령조의 말투에 어깨가 움찔했다.
레인디아는 잔뜩 주눅이 든 개처럼 고개를 들었다. 시선이 마주쳤다. 내려다보는 남자의 두 눈은 피처럼 시뻘겠다. 남자는 어둠에 녹아들 듯이 새카만 차림이었지만, 그의 붉은 눈동자는 어둠을 뚫고 나올 정도로 선명했다.
당장이라도 뺨 위로 핏방울이 투두둑 떨어질 듯했다.
“저는……, 하이락에서 온, 방문객입니다.”
대답을 마친 레인디아는 재빨리 고개를 숙였다. 무심히 내려다보던 남자가 비어 있는 마차 쪽으로 턱짓했다.
“마차는?”
“제가, 모시는 아가씨의 마차입니다. 저는 그레제 백작가의 하……, 아니, 종자입니다.”
레인디아는 하녀란 단어를 내뱉을 뻔한 입을 꾹 다물고 자신을 종자라 소개했다.
그레제 백작가?
그레제란 성을 듣자 남자의 몸이 눈에 띄게 굳었다. 그러나 레인디아는 고개를 숙이고 있어 알아채지 못했다. 남자는 표정을 가지런히 하고 입을 열었다. 여전히 얼음장처럼 차가운 목소리였다.
“일어나.”
처음엔 군인인가 싶었으나 생각이 달라졌다. 그의 말투는 군기가 잡혀 있다기보단 오만함이 느껴졌다. 타인에게 쉬이 굽히지 않고, 명령받는 것보다 명령하는 게 자연스러운 인간.
그러나 저를 겁탈하려던 도적들과 같은 천박함은 느껴지지 않았다. 어쩌면, 이 근방에 사는 귀족일지도 몰랐다. 사냥을 나왔다가 위험에 처한 저를 발견하고 구해 준 것일까?
레인디아는 몸을 일으키려 했으나, 바로 옆에 쓰러진 시체를 보자 뼈마디가 딱딱하게 굳었다.
“……저.”
레인디아가 말끝을 흐리자 남자는 추궁하듯 그녀를 쏘아붙였다.
“말해.”
“……다리에, 힘이 풀려서 일어날 수 없어요.”
죄송합니다. 레인디아는 푹 고개를 숙인 채 사과했다.
머리 위로 못마땅한 숨소리가 들렸다. 그는 어쩔 수 없단 듯이 다가왔다. 그러곤 그대로 등을 굽히더니 레인디아의 한쪽 겨드랑이에 팔을 끼워 넣었다. 낯선 사내의 접촉에 놀랄 틈도 없었다. 그와 동시에 레인디아의 몸이 훅 위로 올라갔다.
“왜 이리 가볍지?”
남자가 의아한 듯 물었다.
마치 남자가 맞느냐고 묻는 듯한 눈빛에 레인디아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레인디아가 계속 굳어 있자 남자는 다른 손으로 바닥에 널브러진 가방을 주워들었다.
“들어. 직접.”
“읏!”
이번에도 남자는 우악스럽게 레인디아의 가슴에 가방을 처박았다. 붕대를 하고 있었지만 통증은 그대로였다. 레인디아는 아픔을 참으며 가방을 꽉 움켜쥐었다. 그때 현기증이 일었다. 레인디아가 비틀거리자 남자는 걱정하는 대신 픽 비웃음을 날렸다.
“계집애 같긴.”
“…….”
경멸적인 말에도 불구하고 레인디아는 안심했다. 적어도, 아직은 저를 비리비리한 남자라 믿고 있는 눈치였으니까.
남자는 레인디아를 빤히 보다 물었다.
“더 할 말은?”
“아, 구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레인디아가 감사를 표하자 남자의 입가에 사악한 미소가 번졌다. 그가 몸을 낮추며 속삭였다. 귓가를 훑는 숨결이 야릇했다.
“그래. 도적놈들한테 뒷구멍이 따일 뻔한 걸 구해 줬으니 당연히 감사해야지. 네가 은혜를 아는 인간이라면 말이야.”
뒷구멍이 따일 뻔한 걸…….
노골적인 표현에 어안이 벙벙해졌다.
“얌전히 따라와.”
남자는 멍청하게 굳어 있는 레인디아를 어디론가 질질 끌고 갔다. 뒤늦게 정신을 차린 레인디아가 다급한 목소리로 물었다.
“자, 잠시만요. 지금 어디로 가는 건가요? 저 시체들은요……? 경비대에 알려야…….”
“이곳 늑대들은 변종이라 인간을 특히 좋아해서 뼈까지 씹어먹지. 아침이 오면 흔적도 남아 있지 않을 테니 안심해.”
남자는 덤덤하게 대답했다.
역시 변종 늑대의 서식지였구나. 그렇다면 밤새 이곳에서 노상을 하는 건 위험했다. 레인디아는 가방을 꼭 붙잡으며 고민했다.
“그리고 나는 북부의 법을 따른 거야. 살려뒀어도 결국 사형이니.”
살벌한 목소리에 레인디아는 입 안이 바싹 말랐다.
“그보다 너, 머물 곳이 필요하지 않아?”
“……!”
레인디아는 퍼뜩 고개를 들었다. 그녀에겐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숲에서 변종 늑대 무리를 만나기라도 한다면 비명 한 번 지르지 못하고 목을 물어뜯겨 죽을 테니.
다행히 이 남자는 말이 통하는 인간이었다.
제 생명의 은인이기도 했고.
“실례가 안 된다면 하룻밤만 신세를 져도 괜찮을까요?”
“실례될 거야 없지. 다만.”
남자의 얼굴에서 미소가 가셨다.
그는 시선을 내려뜨리며 중얼거렸다.
“내가 원하는 답을 얻기 전까진 못 나가.”
“원하는 답이라니요?”
레인디아가 동그랗게 눈을 뜨고 되물었다.
“잠시 기절해 줘야겠어. 장소를 들키면 곤란해서.”
기절? 곤란하다니?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지? 레인디아가 입을 열기도 전에 쫄쫄 물 흐르는 소리가 들렸다. 이윽고 젖은 천이 레인디아의 입을 감쌌다.
“으, 으읍?”
숨을 들이켜자 눈앞이 흐릿해졌다. 의식을 잃은 건 한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