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절대복종-7화 (7/23)

7. 사육 下

‘야. 너 할 거 없지?’

레인디아가 서랍 밑의 먼지를 닦고 있는데 바닥에 노트가 툭 떨어졌다.

‘내 숙제야. 오늘까지니까 오후 전에 끝내. 알았니?’

‘하지만 아가씨, 선생님이 눈치챌 거예요.’

‘그러니까 안 들키게 잘하면 되잖아? 수업은 같이 듣는데 숙제는 왜 나만 해? 불공평하잖아!’

레인디아는 벨리타가 수업을 받을 때 옆에서 함께 참관했다. 그레제 백작 부인의 하해와도 같은 은혜 덕이었다. 가정교사는 열에 한 번 정도 레인디아에게 질문을 했다. 그때마다 레인디아는 정답을 말했고, 그것이 벨리타의 신경을 건드린 것이다.

‘종년 주제에 잘난 척이나 하고! 선생님도 나보다 널 더 예뻐하는 게 틀림없어!’

‘그, 그런 게 아니에요, 아가씨.’

가정교사가 이따금 레인디아에게도 문제를 내주는 이유는 측은지심 때문이었다. 조금 떨어진 곳에 앉아 벨리타에게 해 주는 말을 열심히 경청하며 머리에 집어넣는 모습이 딱했으니까. 정작 가르침을 받아야 할 벨리타는 이해하기 어려운 문제가 나올 때마다 가정교사의 실력을 의심하며 밥줄을 끊어버리겠다고 협박했다. 벨리타는 영악하기 그지없는 아이였다.

반면 가정교사는 책임감이 강한 어른이었다. 결코 두 사람을 차별해서 벨리타에게만 숙제를 내준 게 아니었다. 오히려 벨리타가 자신의 학생이기 때문에, 가르치는 대상에게만 숙제를 내주는 것이다.

하지만 어린 벨리타가 이해할 리 없겠지…….

‘아가씨, 숙제는 직접 하셔야 비로소 자신의 것이 되는 거예요. 저는 수업에서 배운 지식이 소용없는 하녀라 숙제를 안 하는, 아니, 못 하는 것뿐이에요. 그러니 속상해하지 마시고…….’

레인디아가 어른스럽게 타이르자 벨리타가 그녀의 머리채를 휘어잡았다. 그리고 마구 흔들며 소리쳤다.

‘네가 우리 가문의 사생아란 거 동네방네 떠들고 다녀줘?! 네가 사생아란 게 들통나면 하녀들도 다 널 무시할걸? 외톨이가 되고 싶으면 그렇게 해줄게. 어때?’

‘윽, 아, 아가씨…….’

머리털이 뜯기는 고통에 눈물이 핑 돌았다. 하지만 레인디아는 울지 않았다. 벨리타는 어린아이였다. 아이들은 때때로 고약한 심술을 부리기도 한다. 결코, 악의가 있어서가 아니라…….

‘시키는 대로 해! 알았어?’

‘……네. 아가씨.’

레인디아는 벨리타의 노트를 펼쳐두고 그녀의 삐뚤빼뚤한 글씨를 따라 쓰며 문제를 풀었다. 전부 맞으면 들킬지도 몰라. 한두 문제는 틀리는 게 좋겠지? 바로 그때 가슴이 욱신거렸다. 소심한 새가슴으로 어떻게 이런 치밀한 계획을 짜고 있는지 믿기지 않았다.

‘……나는 거짓말쟁이야.’

타인을 속이는 형편없는 인간.

가정교사, 동료 하녀들, 이 세상의 모든 사람을 속이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죄의 아이는 태어난 순간부터 손가락질을 받으며 살았다. 그런데 부덕하게 태어난 저는 타인을 속이며 이토록 안온한 삶을 살아간다니.

이게 과연 신이 바라는 모습일까?

‘얘, 레인디아. 앞으로 식사는 저쪽 테이블에서 혼자 해.’

‘그리고 주말 카드 게임에 넌 끼지 마.’

‘어째서요……?’

‘왜긴. 벨리타 아가씨가 너랑 친하게 지낸다고 우리까지 들들 볶는 거 모르니?’

‘맞아, 맞아. 널 보는 백작 부인 표정도 탐탁지 않고. 하여튼 너랑 어울리면 우리까지 재수 옴 붙어.’

사생아란 사실이 밝혀지기 전부터 백작가의 사용인들은 레인디아에게 선을 그었다. 레인디아는 그런 동료들을 원망하지 않았다. 오히려 다행이라 여겼다. 이것이 부덕한 태에서 잉태한 자식에게 어울리는 결말이었으니까.

마치 죄의 아이 같아.

하지만,

죄의 아이처럼 꿋꿋하게 죄를 회개한다면 나도…….

“……천국에, 갈 거야.”

내내 물고 빨아 부르튼 입술이 예쁘게 오물거렸다. 그러나 내뱉은 말은 전혀 어여쁘지 않았다. 잠꼬대하는 레인디아를 빤히 보던 에이든의 표정이 서늘해졌다.

“천국은 없어, 디아. 인간이 만들어 낸 사후 세계 따위를 믿다니 순진하구나.”

에이든은 안타까운 마음으로 중얼거렸다.

이런 순진무구한 사슴을 바깥에 보내면 결국 덫에 걸려 발목이 잘리거나, 다른 들짐승에게 잡아먹힐 게 뻔했다. 특히나 너는 탐이 날 만큼 아름답고 살가죽에서도 윤기가 흐르니까. 누구든 이런 널 원하게 될 거야. 집요한 빛을 띤 붉은 눈이 가늘어졌다.

‘숲에서도 혼자 돌아다니고 있었지.’

문득, 에이든은 그녀가 무리에서 버려졌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무리의 알파, 그러니까 우두머리 격인 주인은 하인이 도움을 구하기 위해 자리를 떠난 사이 사라졌다. 구조대가 저희를 발견하자마자 곧장 말이다. 심지어 레인디아를 찾는단 소식도 없었다.

‘버리고 잊은 건가?’

아무리 제 아랫사람이라 한들, 목숨과 감정이 있는 인간이었다. 하다못해 무리에서 버려진 짐승도 자신이 버려졌단 사실을 안다. 그런데 어떻게 인간에게. 사실 에이든은 그리 놀라지 않았다. 전장에선 이보다 더한 인간군상을 수도 없이 목도했다. 동료의 등에 칼을 꽂는 자, 의식을 잃은 동료의 몸을 방패막이 삼아 도망친 자…….

또한, 자신도 그리 떳떳한 인간은 아니었다.

‘……괜찮으시다면, 눈이 그치고 함께 가도 될까요? 아가씨가 너무 걱정되어서…….’

이해할 수 없는 건 레인디아였다.

“너를 사지로 내몰고 찾지도 않는 인간에게 돌아가고 싶다고?”

대답을 바라고 한 질문은 아니었다.

에이든은 살며시 레인디아의 목덜미에 입술을 파묻었다. 그는 여린 살갗을 털을 고르는 짐승처럼 죽 핥아 올렸다. 자신이 남긴 붉은 자국이 타액으로 번들거렸다.

“절대 못 보내. 알겠어, 디아?”

“으응……?”

목덜미가 간지럽고 축축했다. 기묘한 감촉에 레인디아가 부스스 눈을 떴다. 이윽고 제 목에 얼굴을 파묻고 그르렁거리는 붉은 짐승과 시선이 마주쳤다.

“아, 아…….”

레인디아는 화들짝 놀라 뒤로 도망쳤다. 에이든은 제자리에 잠자코 누워서 레인디아가 누워 있던 자리를 툭툭 두드렸다.

“이리 와.”

명령조의 싸늘한 말투와 달리 이어지는 목소리는 다정했다. 그는 늘 이렇다. 보이지 않는 채찍으로 매섭게 제 몸을 채질하다가도, 꿀을 듬뿍 묻힌 손가락을 제 입에 넣어 침이 흐를 때까지 굴려댔다.

“더 자야지, 응?”

레인디아가 머뭇거리자 에이든이 슥 상체를 일으켰다. 굼틀거리며 솟아오르는 그의 거대한 체구는 마치 표범이 기지개를 켜는 모양새였다.

“자기 싫어? 그럼 이번엔 서로 빨아줄까? 내가 디아의 보지를 빨고 디아는 내 좆을 빨아주는 거야. 해가 뜰 때까지.”

에이든의 말에 정신을 잃기 전의 일들이 뇌리를 스쳤다. 이윽고 입 안에서 정액이 주르륵 흘러내리는 것 같아 레인디아는 꾹 입을 다물었다. 혀를 감싸는 타액이 정액처럼 느껴졌다.

레인디아는 에이든의 눈치를 살피다 꾸물꾸물 그의 품 안으로 들어왔다. 몸이 덜덜 떨렸다. 호랑이 굴에 제 발로 들어오다니. 하지만 그녀에겐 선택지가 없었다. 그저 이대로 재워주기만을 간절히 바랄 뿐이었다.

“자, 잘게요…….”

“착하다.”

에이든은 레인디아의 이마에 쪽쪽 입을 맞추며 등을 다독여줬다.

“자장, 자장.”

에이든은 젖먹이를 재울 때 부르는 민요를 읊어댔다. 높낮이가 없이 그저 가사만 읊는 중저음의 목소리가 소름 끼쳤다. 하지만 등을 다독이는 손길은 퍽 다정했다. 레인디아는 자신이 생각하고도 믿기지 않았다. 다정하다니. 이 남자의 손길이 다정할 리 없지 않나.

‘착각이야. 악몽을 꿔서 그래.’

레인디아는 속지 않기 위해 애썼다. 에이든의 품이 따뜻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레인디아가 살아온 삶이 삭막했기 때문이다. 타인에게 기대는 것보다 자신의 심장 소리를 들으며 안심해 왔기 때문이다. 혼자란 사실이 얼마나 외로운지 뼈저리게 사무쳤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런 것일 뿐.

자신을 안아주는 게 에이든이 아닌 다른 누구더라도, 틀림없이 이런 기분일 거라고 레인디아는 자신을 설득했다. 눈꺼풀이 스르륵 감기는 까닭은 이 남자의 손길 때문이 아니라고, 절대 그럴 리 없노라고…….

* * *

다시 눈을 떴을 때 에이든은 없었다. 그러나 옆자리엔 희미한 온기가 남아 있었다.

에이든이 누워 있던 곳을 더듬던 레인디아는 황급히 제 얼굴을 어루만졌다. 얼굴 가득 흩뿌려진 정액의 감촉. 그 비릿한 맛이 아직도 입 안에 남아 있었다.

자는 동안 살에 묻은 정액이 굳었으면 어쩌지. 걱정하며 얼굴을 꼼꼼히 더듬었다. 예상외로 깨끗했다. 레인디아가 꾸물대는 소리를 들었는지 하녀들이 침실 안으로 들어왔다.

“아가씨, 일어나셨나요? 목욕물 준비는 전부 마쳤습니다.”

하녀의 목소리에 레인디아는 퍼뜩 고개를 들었다.

“욕실로 안내해드릴게요.”

“……감사합니다.”

침대를 내려오는데 다리가 휘청거렸다.

“저런. 제게 기대세요.”

“아. 그게, 네…….”

에이든이 질리도록 밑을 물고 빤 덕에 걸을 때마다 깊은 곳이 따끔거렸다. 그러고 보니 분명 잠들 때는 전라였는데 지금은 얇은 실크 가운을 걸치고 있었다.

부드러운 실크에 젖이 쓸려 아팠다. 젖꼭지와 입술이 눈에 띄게 부어 있었다. 평소보다 도톰해진 입술을 만지작거리던 레인디아는 에이든과의 키스가 떠올라 황급히 손을 내렸다.

‘허벅지 안쪽은 왜 쑤시는 거지?’

매질이라도 당한 것처럼 허벅지 안이 당겼다. 욕실에 도착하고 나서야 그 이유를 알게 됐다.

거대한 육각형 모양의 욕실은 한쪽 면이 유리창으로 만들어져 있었다. 나머지 벽에는 화려한 그림이 담긴 금테 액자가 걸려 있었고, 가장자리엔 조각품과 도자기 화분에 담긴 관엽식물이 자리하고 있었다. 금으로 장식된 순백의 욕조는 중앙에 놓여 있었다.

레인디아가 가운을 벗으려 하자 하녀들이 일제히 등을 돌렸다. 그러나 등 뒤에도 눈이 달린 것 같았다. 레인디아는 서둘러 가운을 벗고 욕조에 발을 담갔다. 그 순간 허벅지 안쪽에 피어난 붉은 자국들이 눈에 들어왔다.

레인디아는 그 흔적을 감추려 황급히 욕조 안으로 들어갔다. 마음이 조급했던 탓에 물이 마구 출렁거렸다. 물결을 따라 레인디아의 몸도 흔들렸다. 마치 바다에서 표류하는 조난객이 된 기분이었다.

‘이 정도로 페로몬을 묻혔으니까 다른 새끼들이 넘보진 않겠지?’

레인디아는 붉게 자국 난 허벅지를 꽉 오므렸다. 그리고 손바닥으로 물을 퍼서 몸을 문지르기 시작했다.

‘디아는 저항을 안 하니까 내가 이렇게 냄새를 묻히는 수밖에 없잖아.’

얼굴처럼 몸에도 정액은 남아 있지 않았다. 설마 자는 동안 누군가 닦아준 것일까? 혹시 에이든이? 아니야. 레인디아는 도리도리 고개를 저었다. 에이든의 정액을 입으로 받은 직후 기력이 소진해 정신을 잃고 말았다. 뒤처리는 여기 있는 하녀들이 했겠지.

“……죄송해요. 못 볼 꼴을 보여드려서…….”

“네?”

하녀들이 고개를 갸웃했다. 모두 어제 침실에서 일어난 일을 모르는 얼굴이었다.

아, 설마.

설마, 에이든이 뒤처리한 걸까?

여기까지 확신이 미치자 레인디아는 황급히 입을 다물었다.

“아니, 아니에요.”

왜? 차라리 그대로 내버려 뒀다면…….

오히려 그러는 편이 자연스러웠다. 레인디아는 혼란스러웠다. 그때 하녀가 유리병을 뽁 따서 들고 왔다.

“이건 피로를 풀어준다는 특별한 향유예요. 동방에서 만병통치약으로 불리는 백년초라는 걸 넣어 만들었대요.”

그녀는 물 안에 향유를 쏟아붓고 휘휘 저었다. 코를 간지럽히는 달콤한 향이 솔솔 올라왔다. 이윽고 온몸에 힘이 풀려 기분 좋은 나른함이 레인디아를 감쌌다.

‘좋은 냄새.’

레인디아는 멍하니 생각했다.

“이렇게 문지르면 아기 피부처럼 보송보송해질 거예요. 물론 아가씨는 살결이 워낙 고우시지만.”

하녀 둘이 양쪽에서 레인디아의 팔을 붙잡더니 향유를 붓고 부드럽게 문지르기 시작했다.

“흣. 제, 제가 직접 할게요.”

간지러우면서도 생경한 감촉이 오소소 올라오자 레인디아는 소심하게 몸부림쳤다. 하녀들은 순순히 그녀의 팔을 놓아줬다. 레인디아가 재빨리 제 가슴을 감싼 채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그럼 향유는 여기에 두고 나가겠습니다, 아가씨.”

“……네.”

하녀들이 일렬로 욕실을 빠져나갔다. 넓은 욕실에 홀로 남은 걸 확인한 레인디아는 향유 뚜껑을 닫아 저 멀리 두었다.

‘동방의 만병통치약으로 만든 향유라니. 이런 귀한 걸 몸에 바를 순 없어.’

레인디아는 욕조 안에서 최대한 몸을 웅크렸다. 이 물조차 저에겐 사치 같았다. 이토록 좋은 물이 제 몸 때문에 오염되는 기분이 들어 몸의 관절이 절로 곱아 들었다.

* * *

레인디아는 제 키만 한 타월로 몸을 감쌌다.

밖으로 나오자 하녀들이 옷을 들고 그녀를 기다렸다. 욕실의 관엽식물처럼 싱그러운 초록색 실크 드레스였다. 손목에 달라붙는 흰색 소매는 자수가 들어간 값비싼 면직물이었다.

“입는 걸 도와드릴게요.”

“……감사합니다.”

레인디아는 혼자 입고 벗을 수 없는 옷을 입는 게 처음이었다. 제 옷을 가져와달라고 하고 싶었으나, 아직 이 저택에 남아 있을지 의문이었다. 에이든의 앞에서 직접 벗은 뒤로 행방이 묘연해진 옷이었다. 하녀복은 더더욱 안 되고.

천장까지 닿는 거대한 거울 앞에 섰을 때 레인디아는 얼굴이 화르륵 달아올랐다. 허벅지만이 아니라 목덜미에도 에이든이 남긴 흔적이 가득했다. 마치 죄인의 몸에 찍는 낙인처럼 무수한 붉은 자국이 그녀의 몸을 어지럽히고 있었다. 보이지 않는 손가락이 자신을 음란한 여자라 비난하는 듯했다.

레인디아는 하녀들을 흘깃거렸다. 하지만 모두 레인디아의 몸에는 관심을 두지 않았다. 오직 어떻게 하면 레인디아가 편하게 드레스를 입을 수 있을까 하는 생각만 가득해 보였다.

다행히 드레스에는 목 전체를 감싸는 장신구가 세트로 있어서 자국을 가릴 수 있었다. 반면 가슴골이 조금 드러나는 디자인이라 에이든이 가슴 윗살이 아닌 젖꼭지만 집중적으로 빨아댄 게 고마울 정도였다.

“정말 잘 어울리세요.”

“흑진주 귀걸이를 함께 착용해 보는 건 어떨까요? 아가씨의 눈동자를 닮아서 무척 어울릴 것 같은데.”

한 하녀가 보석함을 가져와 뚜껑을 열자 다른 하녀들이 그 안에 든 액세서리를 하나씩 들어 레인디아의 뺨 옆에 가져다 댔다. 만장일치로 레인디아는 흑진주를 귀에 걸게 됐다. 사금처럼 밝은 금발 사이에서 빛을 머금은 흑진주가 영롱하게 반짝였다.

곁에서 찬사를 보내는 하녀들과 달리 레인디아는 속이 착잡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드레스와 자신이 따로 노는 기분이 들었다. 제 눈동자를 닮았다는 새카만 흑진주도 짧은 머리카락에 파묻힌 게 안쓰럽게만 보였다.

차라리 하녀복이라도 입어야 했을까. 뒤늦은 후회가 밀려왔다.

* * *

침실에 도착했을 땐 에이든이 서 있었다.

그는 검은색 벨벳 재킷을 입고 있었다. 빛을 받을 때마다 보랏빛으로 물드는 게 그의 머리카락 같아 신비로운 분위기를 자아냈다. 레인디아는 제 귀에 걸린 흑진주를 숨기고 싶었다.

“왔어, 디아? 봐. 널 위해 준비한 건데 마음에 들어?”

“……네?”

또 무엇을 준비했다는 걸까. 레인디아가 불안해하자 에이든이 어디론가 턱짓했다. 그를 따라 시선을 돌리니 드레스를 입힌 마네킹이 주르륵 늘어져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 보석함을 든 하녀들이 다소곳이 서 있었다.

섬세하게 세공된 루비, 블루 사파이어, 저녁노을 빛깔의 파파라차, 진녹색의 말라카이트, 에메랄드 등 고가의 보석뿐이었다. 그중에서 제일 눈에 띄는 건 압도적인 존재감을 과시하는 다이아몬드였다. 오색찬란한 보석들 사이에서 특별한 기교 없이 순수한 광택으로 시선을 사로잡았다.

“……이것들은.”

레인디아는 말을 잇지 못했다. 이토록 귀한 보석과 저 많은 드레스를 대체 어디서 구해 온 것일까? 불과 하루 만에?

“노스빌리움의 백화점에서 사 왔어. 아직 치수를 재지 않았잖아. 기성복을 구하는 게 제일 빠르니까.”

에이든은 싱긋 웃으며 덧붙였다.

“전부 디아에게 주는 선물이야.”

“바, 받을 수 없어요.”

저것들이 전부 선물이라니 터무니없었다.

“사양하지 마.”

“그, 그런 문제가 아니에요. 이렇게 비싼 걸……, 보관할 곳도 없는걸요?”

레인디아는 도리도리 고개를 저었다. 에이든은 부루퉁한 표정을 지으며 구석을 가리켰다.

“저기 있잖아. 옷장에 보관해. 뭐, 보관하기 귀찮으면 입고 버려도 상관없어. 매일 새것을 갖다 줄 테니까.”

“저는, 이 옷이면 충분해요. 이것도 충분히 좋은 옷이에요.”

레인디아는 자신이 입은 옷을 바라보며 대답했다.

“이 옷도 에이든 님이 주신 옷이잖아요? 그러니 저 옷들은…….”

“그건 부하를 시켜 구해 온 옷이야. 다른 놈이 고른 옷을 입고 돌아다니게 할 거 같아?”

에이든이 저벅저벅 다가왔다. 당장이라도 그가 옷을 찢어버릴 것 같은 공포가 엄습했다. 레인디아는 발이 땅에 붙어 꼼짝할 수 없었다.

“저 드레스 중 하나를 입어. 아니면 알몸이야. 내 저택에선 내가 준 것만 입을 수 있고, 내가 먹여준 것만 먹을 수 있어. 그게 싫으면 알몸으로 지내고 쫄쫄 굶어야지.”

에이든은 마치 일곱 살 난 아이가 투정 부리듯 말했다. 그러나 이어지는 목소리에는 완연히 자란 사내만이 풍길 수 있는 엄숙함이 묻어났다.

“그런 말이 있잖아, 디아. 성에선 성주의 법을 따라라. 이 저택은 내 성이기도 해.”

“……다시 갈아입어야 하나요?”

레인디아가 푹 고개 숙인 채 물었다. 에이든은 싱긋 웃었다.

“그래 준다면 정말 고마울 것 같아.”

“가, 갈아입을게요. 나가주세요.”

“어떤 옷으로?”

레인디아는 푹 고개를 숙인 채 가장 가까운 드레스를 가리켰다.

“저 옷이 마음에 들어요.”

“장신구는 어떻게 할까?”

“……옆에 있는 걸로요.”

“좌측? 우측?”

“……우, 우측이요.”

대답하는 내내 레인디아의 시선은 바닥으로 향해 있었다. 제대로 보지 않았음이 자명했다. 에이든은 그녀를 유심히 관찰하다 살포시 어깨를 잡았다.

“고마워, 선물을 받아줘서. 정말 기뻐. 디아를 생각하며 손수 고른 것들이거든.”

에이든은 쪽 소리가 나게 레인디아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레인디아가 고른 드레스와 장신구를 제외한 나머지는 하녀들과 함께 줄줄이 밖으로 사라졌다. 레인디아는 또다시 하녀의 도움을 받아 옷을 갈아입었다. 오늘만 몇 번 옷을 갈아입는 건지 정신이 없었다.

“혹시나 아가씨께서 오해하실까 봐 말씀드리자면, 노스빌리움의 백화점에서 파는 옷들은 보통 기성복이 아니에요.”

“네?”

다른 하녀가 거들었다.

“맞아요. 수도에선 부유한 평민과 중류층이 백화점의 주요 고객이라 들었어요. 하지만 북부에선 값비싼 물품만을 취급해 상류층만이 애용할 수 있답니다. 거기다 회원제라 연회비를 내지 않는 사람은 출입할 수 없지요.”

즉, 북부의 백화점은 엄선된 고객을 위해 운영되는 한정된 시장이란 뜻이었다. 하녀는 북부에서 보기 힘든 이색적인 물건을 모아두고 경매를 하기도 한다고 덧붙였다.

“이 드레스들도 엄밀히 따지면 기성품이지만, 한정 수량으로 나와서 북부에선 한 벌밖에 없답니다. 고객들이 같은 옷을 입고 무도회에서 마주치면 민망할 테니까요.”

“어머. 그런데 역시 재단을 안 해서 그런가 사이즈가 조금 안 맞네요. 하지만 괜찮아요. 수선하는 건 금방이니까요. 에이든 님께서 북부에서 가장 솜씨 좋은 드레스 장인을 저택에 고용하셨거든요.”

“……고용을요?”

“네. 아 참. 장신구 장인들은 이삼일 뒤에 도착할 거라 들었어요.”

세상에. 믿을 수 없었다. 고작 저에게 입힐 옷과 장신구 때문에 저택에 장인까지 불러들이다니. 그나저나 외부인이 출입할 수 있단 건, 나갈 수도 있단 뜻이겠지.

‘어쩌면 탈출 기회가 있을지도 몰라.’

레인디아가 생각하는 사이 하녀들이 치장을 끝마쳤다.

레인디아는 평균보다 가슴이 크고 허리가 잘록한 편이었다. 그래서 가슴은 꽉 끼고 허리는 벙벙하게 남았다. 다행히 허리는 뒤에 달린 끈을 조여 조절하면 되지만 가슴이 문제였다.

목둘레선 위로 윗가슴이 볼록 튀어나온 모습은 얼굴을 붉힐 만큼 노골적이었다. 레인디아는 꾹꾹 눌러 담을까 했지만, 신축성이 없는 원단이라 풍만한 가슴을 담지 못하고 찢어질 것 같아 그만두었다.

“이번엔 붉은색 드레스를 고르셨네요.”

“에이든 님과 나란히 서면 정말 잘 어울릴 것 같아요.”

하녀들의 대화에 레인디아는 자신이 새빨간 드레스를 골랐단 사실을 뒤늦게 알아챘다. 레인디아는 자신감 없는 미소를 억지로 지은 채 짧은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렸다.

“아가씨께서 치장을 마치셨습니다.”

하녀의 보고에 에이든이 들어왔다. 에이든은 레인디아를 멍하니 보다가 툭 한마디를 내뱉었다.

“예뻐.”

그 말을 시작으로 물꼬가 터졌는지 가까이 다가와 레인디아의 몸을 더듬으며 반복적으로 중얼거렸다.

“정말 예뻐. 붉은색도 잘 어울릴 거라 생각해서 골라봤어. 역시 내 선택은 틀리지 않았어. 디아, 꼭 새빨간 핏물을 뒤집어쓴 것 같아.”

“……네?”

에이든은 아차 했다.

“장미 말이야. 피처럼 새빨간 장미. 그만큼 강렬하단 뜻이었어.”

에이든이 자연스럽게 말을 돌렸다.

“이건 깜짝 선물.”

그는 등 뒤에 감추어둔 것을 레인디아의 머리에 가져다 댔다. 어깨까지 늘어지는 기다란 검은 깃털이 붙은 붉은색 벨벳 미니햇이었다. 둥근 챙에는 작은 보석이 박혀 빛을 받을 때마다 반짝거렸다.

거울을 보자 화려한 미니햇이 시선을 분산시켜 주었다. 무엇보다 풍성한 검은 깃털이 어깨 아래로 늘어져 짧은 머리가 오히려 자연스러워 보였다. 마치 패션의 일부인 듯했다.

“이렇게 입으시니 꼭 남부의 귀족 같으세요.”

하녀들이 칭찬했다. 남부의 영애들은 더운 날씨의 영향으로 머리를 짧게 자르기도 했다. 에이든은 고개를 끄덕였다.

“남부풍 드레스도 잘 어울리겠어. 하지만 여긴 추워서 곤란해.”

에이든은 등 뒤에서 레인디아를 꼭 끌어안았다.

“음. 아무래도 기성복이라 품이 조금 남네. 하녀들에게 들었으려나? 재단사는 벌써 도착했어. 오늘 저녁에 수선을 맡기자. 그 참에 치수도 재보고.”

잘록한 허리를 끌어안은 에이든의 팔에 힘이 들어갔다.

“그나저나. 혹시 탈출할 생각을 한 건 아니지, 디아?”

레인디아의 몸이 흠칫 떨렸다.

“외부인이 들어온다는 건, 반대로 나갈 수도 있단 뜻이니까.”

거울에 비친 에이든의 입꼬리가 요염하게 올라갔다. 여인을 홀리는 사악한 미소였다. 레인디아는 재빨리 시선을 내리깔았다.

“디아도 참. 생각하는 게 얼굴에 빤히 보여.”

에이든은 살그머니 레인디아의 오른쪽 귀를 깨물었다. 레인디아는 흣흣 신음을 참으며 허벅지를 꼬았다. 허벅지 안쪽이 아릿했다.

“그래서 귀여워.”

에이든의 팔이 레인디아의 허벅지 안으로 파고들었다. 풍성한 드레스가 그의 팔에 짓눌렸다. 레인디아는 헉 숨을 들이켰다.

“그래도 도망가지는 마. 디아가 도망치면 그땐 진짜 화날 것 같거든. 먹고 싶은 거, 입고 싶은 거 뭐든 말해. 원하는 건 전부 구해 줄게. 그러니 여기 있어, 알겠지?”

레인디아가 대답하지 않자 에이든이 대뜸 새끼손가락을 들이댔다.

“약속.”

레인디아는 거울을 보며 그와 새끼손가락을 걸었다. 제국에선 손가락을 걸어 약속하는 문화가 있었다. 그러나 지금 이 행위는 서로를 향한 신뢰의 맹세가 아니었다. 레인디아가 일방적으로 복종하는 행위나 다름없었다. 마치 주인의 앞에서 무릎을 꿇는 종처럼.

레인디아는 허탈한 마음을 억누르며 겹쳐진 손가락을 바라봤다. 에이든의 새끼손가락은 레인디아의 엄지보다 굵었다. 새끼손가락을 건 게 아니라, 마치 올가미에 목이 걸린 듯한 모양새였다.

* * *

그날 이후, 레인디아는 에이든과 모든 것을 함께했다.

어디든 시선이 닿는 곳에 에이든이 있었다. 머리 위에선 늘 그의 싸늘하게 식은 숨결이 느껴졌다. 귓가엔 에이든의 심장 소리가 들렸다. 눈을 뜬 순간부터 눈을 감기까지, 단 한 번도 에이든과 떨어진 적이 없었다.

잠을 잘 때도, 먹을 때도, 씻을 때도.

이 모든 행위는 에이든의 손을 거쳐야 했다. 에이든은 마치 어른의 보살핌 없인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갓난아이를 보살피는 것처럼 지극정성이었다. 다만, 그는 밤이 오면 젖을 물리는 대신 그녀의 입에 두툼한 좆을 물리고 쉴 틈 없이 정액을 먹여댔다.

지난 십여 년간 보살핌과 양육, 노동은 레인디아의 몫이었다. 그것을 빼앗겨 레인디아는 마치 속이 텅 빈 마리오네트가 된 기분이었다.

관절에 묶인 보이지 않는 실을 따라 고개를 들면 그가 있다.

에이든 헬렌베르크.

나를 이 저택에 감금한 남자.

동시에 자신의 수족을 자처하는 남자.

“옷 갈아입는 거 도와줄게.”

“……네.”

어느 순간부터 옷도 에이든이 직접 입혀주었다.

가봉을 위해 치수를 잰 것도 에이든이었다.

거울 앞에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고 서자 차가운 줄자가 가슴이며 허리며 엉덩이며, 허벅지 안쪽 같은 내밀한 곳을 옥좼다. 심지어 목덜미와 손가락의 둘레까지 빠짐없이 노트에 기록했다.

마침내 발바닥 사이즈까지 알아낸 에이든은 무척 흡족한 표정을 지으며 펜을 내려놨다. 그렇게 불과 이틀 만에 레인디아의 몸에 딱 맞는 드레스와 구두, 장신구가 옷장을 가득 채웠다.

“이번에 새로 들여온 원단이야.”

따사로운 오후의 일광이 저택에 내려앉은 어느 날이었다.

에이든은 다양한 원단을 가져와 주르륵 펼쳐놨다.

“나는 디아의 모든 걸 알고 싶어. 치수뿐 아니라 뭘 좋아하고 싫어하는지, 취향에 대해서도 빠짐없이.”

에이든이 레인디아의 등 뒤로 다가왔다. 그리고 그대로 허리를 손에 쥐었다. 레인디아의 허리는 두 손에 담길 만큼 잘록했다. 반대로 에이든의 손바닥과 손가락이 평균 이상으로 크기도 했다.

허리에 꼭 달라붙어 있던 손가락이 뾰족하게 솟더니 위로 향했다. 마치 손 모양의 거미 두 마리가 제 허리를 더듬는 것 같았다. 레인디아는 소리 없이 숨을 들이켰다.

“자, 어떤 게 마음에 들어? 색뿐만 아니라 감촉도 직접 만져봐. 보는 것과 달리 부드러운 원단도 있거든.”

“……저는.”

레인디아는 선뜻 대답할 수 없었다.

레인디아에게 있어 취향이라는 건 다년간 쌓여온 경험에 기반했다. 그리고 경험은 부유한 자들의 것이다. 물론 가질 수 없는 것을 동경하고, 그것을 곧 본인의 취향이나 이상향으로 삼는 사람도 있었다. 하지만 레인디아는 아니었다. 그녀에게 소유란 여전히 낯선 행위였다.

“이, 이거요. 이게 좋아 보여요.”

레인디아는 제일 가까이 있는 원단 앞에 섰다.

“마음에 든 건지 물은 거야.”

“……네, 마음에 들어요.”

레인디아는 에이든의 눈치를 보다 살며시 원단을 쓰다듬었다. 무엇이든 상관없어. 설령 포대 자루로 옷을 만들어준다고 해도.

‘차라리 그쪽이 마음이 편할 텐데.’

레인디아는 작게 한숨을 쉬었다.

“좋아. 그럼 보석은?”

레인디아는 테이블 위에 올려진 보석함을 바라봤다. 안에는 세공되지 않은 보석이 주르륵 박혀 있었다.

“……이게, 마음에 들어요.”

레인디아는 가까운 보석을 콕 찍었다. 에이든은 흐음, 소리를 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사파이어의 일종인 파파라차야. 노을을 닮은 붉은 빛깔이 매력적이지. 이름의 의미는 연꽃에서 유래했다고 해.”

에이든이 파파라차를 손에 쥐었다. 높이 들어 올리자 샹들리에의 빛을 반사하며 오렌지 빛깔로 반짝였다. 그러나 어느 순간엔 에이든의 붉은 눈동자처럼 한없이 짙어졌다.

그래, 꼭 에이든의 눈동자처럼.

보석을 보던 레인디아는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이게 제일 마음에 들어?”

에이든이 슥 고개를 숙여 물었다. 레인디아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 날, 북부의 보석점에 존재하는 모든 파파라차가 에이든의 저택에 도착했다. 레인디아는 상자에 수북이 쌓인 붉은 보석을 보며 경악했다. 에이든은 도무지 적당함이란 단어를 모르는 사람 같았다.

이 일로 레인디아는 에이든의 앞에서 말하는 것에 더욱 신중하게 됐다.

* * *

하늘에 붉은 달이 떴다.

붉은 달은 제국에서 불길한 증조로 여겨져 백성들은 외출을 삼가곤 했다. 그러나 저택에서 그것을 신경 쓰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레인디아도 그랬다. 하늘에 뜬 달이 붉은색인지, 흰색인지, 모양은 초승달인지, 보름달인지, 생각할 겨를이 없었으니까.

“응, 으응. 흣.”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지금, 에이든이 물고 빨던 구멍 안으로 두 번째 손가락이 꾸역꾸역 밀려들어 오고 있었다.

“으흐으…….”

레인디아는 베개에 얼굴을 파묻은 채 바르작거렸다. 좁은 질벽이 에이든의 손가락으로 가득 차 아랫배가 덜덜 떨렸다. 손가락이 조금만 돌아가도 날개뼈와 골반이 비틀렸다.

“힘들어?”

레인디아의 앓는 소리가 격해지자 에이든이 살그머니 물었다. 등 뒤로 그의 단단한 육신이 닿았다. 당장이라도 짓눌릴 것 같았다. 그러나 레인디아는 발정기의 암캐처럼 엉덩이를 꼿꼿이 든 채 버텼다.

“하나만 더 넣자, 응?”

“……네, 네.”

레인디아는 달달 떨며 대답했다.

그녀의 순종적인 대답에 에이든의 눈이 호선으로 휘었다. 이윽고 이미 꽉 들어찬 질벽 안으로 세 번째 손가락이 꾸물꾸물 기어들어 왔다. 내벽이 쩍쩍 벌어졌다. 이미 들어 있던 손가락이 서로를 짓이기며 점막을 찔러댔다.

“아, 아아, 아……!”

머리채라도 잡힌 것처럼 레인디아의 머리가 뒤로 젖혀졌다. 동시에 가슴이 넓게 펴지며 젖가슴이 시트에 짓눌렸다.

“디아, 이제 손가락 세 개도 먹을 수 있는 몸이 됐네?”

에이든이 귓바퀴에 입술을 파묻고 속삭였다. 레인디아는 끄, 끄, 앓는 소리를 내다 베개 위로 풀썩 무너졌다. 질 안에 조약돌을 품고 있는 것 같았다. 손가락 세 개가 내벽 안에서 자글자글 비벼졌다. 아랫배가 뜨겁고 눈가는 시큰거렸다.

‘아파. 아파…….’

아랫도리가 얼얼했다. 레인디아는 얼얼한 음부를 향해 본능적으로 움직이는 손을 멈칫하며 베개를 꽉 움켜쥐었다.

“너무 좁아서 쑤시는 건 힘들겠어.”

“으, 네……? 하앗……!”

레인디아의 질문은 신음으로 탈바꿈했다. 에이든은 손가락을 세워 내벽을 긁기 시작했다. 그것도 동시에 세 손가락을 움직이는 게 아니라 각자 건반을 두드리듯 따로 놀았다.

“안쪽이 점점 미끄러워지고 있어. 느껴져, 디아?”

“응, 으읏, 하아, 아!”

더는 에이든의 질문이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깊은 안쪽에서 애액이 찰랑찰랑 차오르고 있었다. 이윽고 에이든의 손가락이 벌린 길을 따라 주르륵 미끄러져 흘렀다. 뜨거운 물이 제 손을 흠뻑 적시자 에이든의 입이 찢어질 듯 벌어졌다.

에이든은 다른 손으로 벨트를 끌렀다. 속옷을 내리기 무섭게 양물이 튕기어 나왔다. 에이든은 제 손가락을 꽉 물고 놓아주지 않는 음부를 보며 수음했다.

“으으응.”

“하아. 디아…….”

분홍빛을 띠는 고운 살결은 도톰한 음부부터 앙증맞게 다물린 항문까지 길게 이어졌다. 에이든은 그 어여쁜 색채를 황홀하게 바라봤다. 제 사타구니에 달린 불그죽죽한 육괴가 저 사랑스러운 살덩이에 푹 박힐 걸 생각하자 등골이 찌릿했다.

“아, 나도 빨리, 후우……, 디아의 보지에 넣고 싶다.”

“아으읏!”

에이든은 중얼거리며 레인디아의 목덜미에 얼굴을 파묻었다. 레인디아의 엉덩이와 허벅지에 귀두가 닿을 때마다 혈관이 툭툭 불거졌다. 그가 슥 시선을 내리자 무언가 그녀의 밑을 막고 있었다. 제 손가락이었다.

“내 손가락인데 왜 이렇게 거슬리지?”

“으, 으응, 하아, 아!”

“그냥 확 부러뜨리고 싶어. 난 디아의 보지가 다칠까 봐 여태 좆도 못 넣고 기다리고 있는데.”

흥분한 에이든은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했다. 헛소리에 불과한 주절거림에 공포가 엄습했다. 레인디아는 일순간 정신이 돌아와 저도 모르게 밑을 꽉 조였다. 그 자극에 에이든의 팔뚝에 핏줄이 불거졌다. 좁은 질 안을 비비던 손가락이 이제는 안을 푹푹 쑤시기 시작했다.

“아앙! 아, 안, 안 돼, 요, 으응, 망가져요, 아……!”

“아니야. 디아, 망가질 리 없잖아? 내가 디아의 몸을 함부로 대할 것 같아?”

그랬다면, 빌어먹을, 진작 박았지.

에이든은 속으로 욕지기를 삼키며 제 좆을 뜯어낼 기세로 흔들었다. 반대쪽 팔도 마찬가지였다. 마치 좆으로 변한 것처럼 레인디아의 내밀한 구멍을 마구 쑤셔댔다. 바깥으로 애액이 찰팍찰팍 소리를 내며 사정없이 튀어 올랐다.

“아!”

짧은 교성과 함께 질구가 마구 경련했다.

절정이었다.

에이든은 손가락을 두 개만 남겨두고 질벽을 빠르게 쑤셨다. 버겁지만 익숙한 두께에 움직임이 수월해졌다. 에이든은 노련하게 레인디아의 스폿을 짓눌렀다. 배꼽 아래에 방광을 등진 곳.

“아, 안 돼, 요, 그만, 그만, 아, 아앙……!”

레인디아는 허벅지를 꽉 오므렸다. 정원 가위처럼 꽉 다물린 허벅지살이 뭉개졌다. 동시에 내벽도 더욱 좁아졌다.

“시, 싫어, 그만, 계속 가기, 싫어요, 아아!”

“계속 가.”

어느새 에이든은 제 좆을 흔들던 것도 잊고 레인디아의 밑구멍을 쑤시는 데 집중했다.

“으응……!”

절정 뒤에 또 다른 절정이 찾아왔다.

너무나 급작스러운 쾌감에 번개가 내리치는 것처럼 눈앞이 연신 번쩍거렸다. 동굴처럼 벌어진 입 안에서 붉은 혓바닥이 까딱였다. 에이든은 레인디아의 얼굴을 잡아 돌려 입을 맞췄다. 쾌감에 굴복한 몸은 뻣뻣하게 굳었지만, 혓바닥은 요리조리 에이든의 혀를 피하기 바빴다. 에이든은 그것을 강제로 낚아채 쭈압쭈압 빨아 댔다.

“흐으으…….”

뽁 소리를 내며 입술이 떨어졌다. 혓바닥이 퉁퉁 부어 얼얼했다. 에이든은 몹시 만족한 눈으로 그녀의 혓바닥을 감상했다.

그가 슥 뒤를 돌아보자 레인디아의 발가락이 오므라들었다 펴지길 반복했다. 그러다 유난히 활짝 벌어진 새끼발가락만 혼자 발발 떨렸다. 에이든은 그 사이에 검지를 꾹 찔러 박아 새끼발가락을 감쌌다.

“흐읏.”

에이든이 관절을 꺾기라도 할 줄 알았는지 레인디아가 겁먹은 소리를 냈다. 그제야 에이든은 잡고 있던 발가락을 놓아줬다.

“디아, 나 좀 봐.”

에이든은 손가락을 넣은 채 레인디아의 몸을 돌렸다. 점막이 함께 빙그르르 돌아갔다. 마치 배 속의 장기까지 함께 돌아가는 기분이었다. 레인디아는 흠뻑 젖은 눈을 가물거리며 에이든을 바라봤다.

“하아. 하으으…….”

“예뻐, 정말 예뻐. 어쩜 이렇게 사랑스러울까?”

붉게 달아오른 뺨에 손이 얹어지더니 무수한 키스가 쏟아졌다. 에이든은 질리지도 않는지 레인디아의 입술을 물고 빨았다. 그녀의 고른 치열 구석구석에 제 흔적을 남겼다.

에이든이 언젠가 제게 질릴 것으로 생각했지만 오산이었다.

오히려 에이든은 시간이 흐를수록 과도하게 흥분했고 이성을 잃어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좆이 질벽을 꿰뚫지 않았단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에이든이 고자는 아니었다. 그의 좆은 육괴에 걸맞게 늘 꼿꼿이 곧추선 채였다.

레인디아는 에이든의 늘어진 좆을 본 기억이 없었다. 에이든이 바지를 내리기만 하면 발기한 좆이 튀어나와 제 몸을 몽둥이처럼 두드렸다. 마치 그게 원래 모양인 것처럼. 잠들기 전에도 발기해 있었고, 눈을 떠도 발기해 있었다. 다행인 건 침실을 나갈 때만큼은 오른쪽 허벅지에 얌전히 수납되어 있단 사실이었다. 그마저도 레인디아의 몸을 물고 빨아 정액을 몇 발 뽑아낸 뒤에야 가능한 일이었지만.

“오늘도 무리겠지?”

에이든은 조심스럽게 손가락을 빼냈다. 손가락이 빠져나가기 무섭게 점막이 자글자글 오므라들었다. 마치 처음의 모양을 복구하려는 것처럼. 에이든은 키스마저 멈추고 두 팔로 레인디아를 꼭 끌어안았다.

레인디아의 부드러운 육신과 에이든의 단단한 근육질 사이에서 여실히 발기한 좆이 뭉개졌다. 레인디아의 살가죽 위로 선액이 뚝뚝 떨어졌다. 그 선연한 감각에 레인디아는 치를 떨었다.

“도무지 익숙해지질 않네. 종일 손가락을 넣고 있을 수도 없고 말이야. 그렇다고 내 몸이 아닌 다른 걸 넣고 싶지도 않고.”

에이든의 말뜻을 이해한 레인디아는 창백하게 질렸다.

“디아, 나 아직 못 쌌어.”

“흣……?!”

에이든이 레인디아의 귀를 질겅질겅 깨물며 말했다. 레인디아는 조용히 겹쳐진 몸 사이로 손을 집어넣었다. 그렇게 귀두를 쥐려 할 때였다. 에이든이 벌떡 몸을 일으켰다.

“그거 말고.”

“……이, 입으로 해드릴게요.”

레인디아는 이런 행위에 익숙해진 자신이 경멸스러울 지경이었다. 하지만 다른 방도가 없었다. 부스스 일어난 레인디아는 퀭한 눈을 하고 에이든의 가랑이 사이로 엉금엉금 기어갔다. 에이든은 그 모습이 야해서 하는 짓을 가만히 바라보다 레인디아가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기며 귀두를 입에 머금을 즘 턱을 들어 올렸다.

이것도 아닌 건가?

텅 빈 눈동자에 불안이 엄습했다. 검은 눈동자가 이리저리 방황하다 폭 가라앉았다.

“발.”

“……네?”

“발바닥으로 해 줘.”

에이든은 결코 제 몸에 질리지 않았다.

나날이 새로운 자극을 찾아 헤매는 하이에나 같았다. 신대륙을 발견한 탐험가처럼, 그는 여러 방식으로 레인디아의 몸을 샅샅이 발라먹었다.

“안 돼? 그럼, 내가 디아의 겨드랑이에 좆을 끼워 넣고 문지르는 건? 그건 괜찮아?”

에이든이 레인디아의 양쪽 겨드랑이를 엄지로 꾹 짓눌렀다. 레인디아는 물에 빠진 참새처럼 푸드덕 몸을 떨었다.

“어느 쪽?”

“……바, 발로.”

레인디아가 바들바들 떨며 대답했다. 하지만 발바닥으로 뭘 어떻게 해달란 건지, 도무지 상상이 가질 않았다. 여전히 혼란스러운 레인디아의 얼굴을 보던 에이든이 콧등에 쪽 입을 맞추며 속삭였다.

“괜찮아. 내가 알려줄게.”

* * *

“디아의 발바닥 엄청 부드러워.”

레인디아는 에이든을 마주 보고 앉아 발바닥의 오목한 부위로 그의 좆을 비벼댔다. 하필이면 전라 상태로 가랑이가 벌어져 기분이 이상했다. 지면에 닿는 게 자연스러운 발이 허공에 둥둥 떠 있으니 자꾸만 헛발질하듯 미끄러졌다. 그때마다 레인디아는 재빨리 다리를 들었다. 다행히 그녀의 어설픈 애무에도 에이든은 발정 난 개처럼 헐떡이기 바빴다.

“아, 기분 좋아.”

에이든이 가쁜 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

레인디아는 발가락으로 어설프게 귀두를 모아쥐었다. 발가락 사이로 선액이 울컥 차올랐다. 익숙하지 않은 움직임에 발에 쥐가 나고 허벅지가 경련하듯 떨렸다. 하지만 겨드랑이에 에이든의 좆이 박히는 것보단 나았다. 그는 마치 제 몸의 모든 구멍과 살 사이에 좆을 밀어 넣을 작정인 듯했다.

“디아의 구멍도 빠끔거리네. 내 요도처럼.”

“흣!”

레인디아의 발바닥이 엑스 자 모양으로 교차하며 미끄러졌다.

“아. 다시 닫혔다. 혹시 내가 말해서 그래? 귀여워.”

에이든은 더욱 유심히 레인디아의 사타구니 사이를 바라봤다. 그의 시선이 느껴져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레인디아는 살며시 두 손으로 음부를 가렸다. 에이든이 픽 웃었다.

“이미 보여줄 만큼 보여주고 숨기는 거야?”

레인디아는 에이든이 다시 입을 열기 전에 재빨리 발바닥으로 좆을 붙잡았다. 다소 조급하게 좆을 문질러주자 에이든이 앓는 소리를 흘렸다.

“아, 거기. 좋아. 귀두 아래.”

레인디아는 최대한 발끝의 움직임에 집중해서 귀두 아래의 옴폭 들어간 부분에 엄지를 찔러넣었다. 귀두갓을 따라 둥글게 굴리자 에이든의 잘 짜인 복근이 움찔움찔 떨렸다. 보기 좋게 둔덕진 가슴도 더욱 팽팽하게 부풀었다. 마치 온몸이 발기하는 것 같았다.

“읏, 아…….”

에이든은 눈을 감고 신음했다. 그의 짙은 눈썹 사이에 골이 져 야성적인 분위기를 풍겼다. 그러나 역시 어설픈 발짓으론 사정이 힘들었다.

‘꽉 조여드는 압박감이 필요해.’

문제는 아직 디아의 밑이 준비가 되지 않았단 점이다.

에이든은 불현듯 딱 달라붙어 있던 레인디아의 허벅지를 떠올렸다. 덜덜 떨리는 엉덩이 아래로 역삼각형 모양의 구멍이 뻥 뚫려 있었다. 좆을 넣기 충분한 구멍이었다.

그는 예고 없이 일어나 레인디아의 몸을 뒤집었다. 놀란 레인디아가 소극적으로 몸부림쳤다. 에이든은 그녀를 손쉽게 제압했다.

“엉덩이 들고 허벅지 붙여. 옳지.”

레인디아는 주춤거리며 엉덩이를 든 뒤 허벅지를 모았다. 둥근 엉덩이와 꽉 다물린 허벅지 사이에 역삼각형 모양의 틈이 만들어졌다. 마치 이 안에 넣어달란 듯이 틈새가 벌름거리는 것 같았다. 에이든은 입맛을 다시며 좆을 손에 쥐었다.

뚫린다.

소리 없는 공포가 엄습했다.

레인디아는 비명을 억누르며 시트에 얼굴을 뭉갰다.

발바닥 애무가 어설펐던 탓일까, 아니면, 오랜 기다림에 지친 것일까? 에이든은 결국 오늘 저를 안을 작정인 듯싶었다. 레인디아는 눈을 감고 다가올 고통을 대비했다.

“후우.”

그러나 서서히 벌어지는 건 질구가 아니라 허벅지였다. 의아함을 느낀 레인디아가 살며시 눈을 굴렸다. 두툼한 귀두가 꽉 다물린 허벅지 틈 사이를 벌리며 슬금슬금 전진했다. 갈라진 음부 사이를 스친 좆은 레인디아의 배꼽 위까지 닿았다. 마치 제 몸에서 돋아난 좆 같았다. 레인디아는 경악하며 눈을 감았다.

“처음 데려올 땐 뼈밖에 없었는데 살이 제법 붙었어.”

에이든은 가볍게 레인디아의 엉덩이를 내려쳤다.

찰싹!

“으응!”

하얀 엉덩이 위로 붉은 손자국이 올라왔다. 세게 때린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연약한 살점은 조금만 힘을 주어 잡아도 흔적이 남았다. 에이든은 그게 좋았다. 자신이 빨고 쥐면 족족 흔적이 남는 몸이 너무나 사랑스러웠다.

에이든은 마치 그림을 그리기 전 캔버스를 쓰다듬듯 레인디아의 등줄기 주욱 쓸어올렸다.

“허억!”

레인디아는 고개를 젖히며 신음했다. 에이든이 그녀의 목덜미를 붙잡더니 퍽퍽 허릿짓을 하기 시작했다.

“으, 으……?”

에이든의 무자비한 허릿짓에 맞춰 레인디아의 몸이 앞뒤로 흔들렸다. 바닥으로 처진 가슴도 정신없이 출렁거려 괴로웠다. 레인디아는 뒤로 납작 엎드려 좆을 받는 기분이었다. 멀리서 본다면 명백한 후배위 자세였다. 다만 에이든의 좆이 질구멍이 아닌 허벅지 틈새에 박혔단 것만 제외하면.

‘뜨거워. 쓰라려.’

비벼지는 허벅지 안쪽이 얼얼했다. 질과 달리 애액이 나오지 않아 오직 에이든의 좆에서 흘러나온 선액에만 의지해야 했다.

에이든은 계속해서 팍팍 살을 치댔다. 그 반동이 자궁까지 전해져 아랫배가 얼얼했다. 실로 엄청난 힘이었다. 그리고 지칠 줄을 몰랐다. 수풀이 무성한 정글처럼 빡빡한 음모에 살이 쓸려 레인디아의 엉덩이에 채찍질 같은 자국이 남았다.

“아, 아……!”

어느새 레인디아는 덩달아 신음을 내뱉었다. 에이든이 좆을 찔러 박으면 입 밖으로 신음이 툭툭 튀어나왔다. 너무나 격렬한 움직임이었다. 도저히 따라갈 수가 없었다. 그저 흔들리는 것뿐인데 저택을 한 바퀴 돈 것처럼 숨이 찼다.

‘그만, 하고 싶어, 싫어. 정신이 이상해, 내 몸이, 이상해, 안 돼. 싫어……!’

허벅지 안쪽이 미끌미끌했다. 에이든의 선액 때문만이 아니었다. 레인디아는 그것이 제 몸에서 흐른 애액임을 직감적으로 알아챘다. 에이든도 알고 있을까? 슬쩍 뒤를 보자 그는 눈을 감은 채 레인디아의 허벅지 안쪽을 파고드는 데 여념이 없었다. 그러다 자꾸만 벌어지는 허벅지가 거슬렸는지 두 손으로 꽉 붙잡기까지 했다.

레인디아는 시트에 젖은 눈을 문질러 닦았다.

“하아. 디아. 읏. 디아. 디아…….”

등 뒤에서 들리는 에이든의 거친 숨소리에 귀가 녹아내릴 것만 같았다. 이런 상황 속에서 레인디아 역시 흥분하고 있었다.

‘이상해.’

그 순간 레인디아의 턱과 입에 정액이 튀었다. 허벅지에 꽂혀 있던 귀두에서 정액이 쉴 새 없이 뿜어져 나왔다. 레인디아의 젖가슴이며 갈빗대며 매끈한 아랫배까지 정액이 뿌려졌다. 이윽고 점점 닿는 거리가 줄어들다 사정이 멈추었다.

“하아…….”

느른한 숨소리와 함께 허벅지를 쥐고 있던 손이 떨어졌다. 허벅지 양옆엔 붉은 손바닥 자국이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에이든은 좆을 빼내 레인디아의 엉덩이 위에 툭 올려놨다. 땀과 선액, 애액, 그리고 정액으로 번들거리는 붉은 육괴가 마지막 남은 정액을 찍찍 토해냈다. 웅덩이처럼 고인 정액은 레인디아의 하체가 무너지자 엉덩이골을 훑으며 주르륵 흘렀다. 이윽고 빠끔거리는 질구 안으로 들어가기 직전 에이든이 그녀의 몸을 바르게 눕혔다.

“흐으으…….”

레인디아는 상기된 얼굴로 앓는 숨을 토했다.

에이든은 침대에 널브러진 천을 주워 레인디아의 질구를 북북 닦아줬다.

“왜 이렇게 흠뻑 젖었어?”

“……으, 아…….”

“누가 보면 내가 씨물이라도 뿌려준 줄 알겠네.”

벌어진 질구 안으로 천이 얕게 들어왔다. 점막이 쓰라렸다. 다행히 천은 더 이상 침투하지 않고 바깥으로 빠져나갔다.

에이든은 정액으로 번들거리는 레인디아의 입 주변을 닦아줬다. 그렇게 천천히 자신이 남긴 흔적을 닦으며 내려갔다.

* * *

구름이 붉은 달을 휘감아 저택에 완전한 어둠이 내려앉았다.

“내일은 일찍 저택을 떠나서 늦게 들어올 거야.”

에이든은 레인디아를 품에 안은 채 말했다. 레인디아는 조용히 에이든을 올려다봤다.

“……어딜 가시는 건가요?”

“노스빌리움에서 선약이 있거든.”

노스빌리움. 아가씨와 앤이 있는 곳이었다. 그곳에 가면 도움을 청할 수 있을까? 설마, 그들 앞에서도 저에게 집착하진 않겠지. 그러나 섣불리 데려가 달라고 할 수 없었다.

“물론 내게는 디아가 제일 중요해. 어때, 가지 말까?”

역시나 에이든에게 레인디아를 함께 데려간단 선택지는 없었다. 대신 함께 저택에 남는 선택지는 있었다. 그것이 더 최악이었다.

“저는, 상관없어요. 하지만 가셔야 하지 않을까요? 중요한 선약 같은데…….”

“그렇겠지. 내가 없어야 도망치기 쉬울 테니까.”

레인디아는 흡 숨을 들이켰다. 잔뜩 긴장한 레인디아를 보던 에이든은 후후 웃으며 속삭였다.

“동기 부여는 중요해. 인간은 목적이 있어야 살아갈 수 있거든. 거창할 건 없어. 단순히 먹고 살기 위한 것도 목적이지. 내가 요즘 사는 이유는 디아 때문이야.”

에이든은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줬다. 레인디아의 머리카락은 확연히 보이진 않아도 아주 조금씩 자라고 있었다. 이 머리가 다시 허리까지 닿을 때쯤엔 이곳을 떠날 수 있을까? 레인디아는 확신할 수 없었다.

“디아도 새로운 삶의 목적을 찾았으면 좋겠어.”

에이든은 손가락 사이에서 레인디아의 귓불을 굴렸다.

“어때? 이참에 하녀를 그만두고 내 곁에서 자유롭게 사는 거야.”

“그럴 수 없어요, 그래선, 안 돼요.”

내내 조용하던 레인디아가 어렵게 입을 열었다. 귀를 만지던 손이 우뚝 멈추었다.

“왜? 그 집안에 빚이라도 있어? 내가 갚아줄게.”

“……돈 문제가 아니에요.”

“그럼 용서받지 못할 죄라도 지은 거야?”

레인디아의 몸이 움찔 떨렸다.

“가방 안에 든 책을 봤어. 죄의 아이, 였던가.”

“제, 제 물건……에 함부로 손대지 말아 주세요.”

“물건이랄 것도 없지. 전부 쓰레기뿐이었는걸.”

“읏……!”

레인디아는 푹 고개를 숙였다. 그녀는 잔뜩 풀이 죽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에이든 님의 눈엔 보잘것없어 보여도 제겐 그것들이 전부예요.”

깨끗하게 관리한 하녀복과 낡은 코르셋, 그리고 구시대의 사상으로 여겨지는 책 한 권. 그것은 단순한 물건이 아니었다.

레인디아의 삶 자체였다.

그녀가 이 땅에서 오롯이 소유할 수 있는 전부였다.

“내가 준 것들이 더 좋아.”

에이든이 단호하게 말했다. 그의 목소리엔 자신감이 실려 있었다. 너무나 명백한 사실이었으니까.

“너는 그걸 가질 자격이 있어, 디아.”

그러나 이건 사실이 아니었다. 자격, 이라니. 백작가의 사생아인 내게 인간다운 삶을 살 자격이 있을 리가.

레인디아는 얼굴에 드리운 그늘에 슬픔을 숨긴 채 지그시 입술을 깨물었다.

“더 가까이 와.”

그때 에이든이 두 팔로 레인디아의 몸을 끌어당겼다. 그의 가슴에 파묻히자 심장 소리가 들렸다. 쿵쿵 뛰는 심장은 제 가슴에 든 것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크기는 좀, 아니, 많이 크겠지. 고른 심장 박동 소리에 에이든도 저와 같은 인간임을 실감했다. 그런데도, 왜 이토록 다른가.

레인디아는 도저히 눈앞의 남자를 이해할 수 없었다. 그건 에이든도 마찬가지일 테지. 우리는 너무 다른 삶을 살았다. 그가 말하는 삶의 목적이 생길 일도 결코 없을 것이다. 레인디아는 이 남자의 욕망을 따라가는 것만으로도 숨이 벅차 몸과 마음이 너덜너덜해질 정도였다. 여전히 탈출의 희망이 보이지 않아 절망은 가속했다.

“도망갈 생각은 마. 내가 없는 동안 경비를 두 배로 늘리라고 했어.”

에이든이 레인디아의 등을 다독이며 말했다.

“경비견은 디아의 냄새를 기억해서 물지 않을 거야. 하지만 늑대는 달라. 늑대의 야성은 길들일 수 없거든. 디아의 맛있는 냄새를 맡자마자 달려들걸.”

길들일 수 없는 야성. 그건 에이든도 마찬가지였다. 이 남자는 괴물 같았다. 늑대처럼 제게 달라붙어 뼈를 드러낼 기세로 여린 살을 샅샅이 핥지 않았는가.

“내일은 최대한 빨리 돌아올게. 오늘은 이만 자자.”

에이든은 레인디아의 이마에 쪽 입을 맞췄다.

“잘 자, 디아.”

그는 레인디아의 몸을 그물처럼 꽉 움켜쥔 채 눈을 감았다. 이윽고 색색이는 숨소리가 들렸다. 레인디아만이 불편한 듯 몸을 뒤척이다 어렵게 그의 가슴팍에 얼굴을 파묻었다.

내일이 오면 어떻게 해야 좋을까.

고민과 함께 밤이 깊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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