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물 위의 파문(波紋)
“…….”
“…….”
에이든은 침착하게 레인디아의 허벅지 안쪽을 닦았다. 착상혈치곤 혈액량이 많았다. 그렇다고 유산으로 인한 출혈도 아니었다.
‘생리혈인가.’
피로 번들거리던 허벅지는 금세 깨끗해졌다. 에이든은 소독을 마친 깨끗한 천을 곱게 접어 레인디아의 다리 사이에 끼워 넣었다. 그러곤 그대로 몸을 일으켜 은대야에 손을 담가 핏물을 닦아냈다. 이윽고 그가 젖은 손을 탁탁 털어내며 탁자에 올려둔 시약을 확인했다.
‘생리혈이 맞군.’
결과를 확인한 에이든은 다시 레인디아의 곁으로 돌아왔다.
첫 사정 후, 레인디아가 임신했다고 믿게 하려고 삽입 섹스를 한 적은 없었다. 대신 밤마다 잠든 레인디아의 몸 안에 스포이드로 갓 싼 정액을 짜 넣었다. 그렇게 진짜로 임신시킬 생각이었다. 물론 레인디아의 몸이 허약해서 착상이 어려울 거란 예상은 했다.
‘하필 이 시기에 생리하게 될 줄은.’
그렇다고 달라질 것은 없었다. 에이든은 차분히 상황을 머릿속으로 정리했다.
모성이 문화적인 학습의 결과이든, 여성의 내밀한 육신에 내재한 본능이든, 에이든에겐 중요치 않았다. 임신과 모성이 여성을 붙잡을 수 있는 족쇄로서 오늘날에도 유용하단 사실에 동의할 뿐.
그랬다. 에이든에게 임신이란 레인디아를 붙잡을 수단이었다. 그러니 임신은 다시 시키면 그만이다. 문제는, 레인디아가 임신을 원하느냐 원하지 않느냐였다. 이번 일로 큰 상심을 느낄 테니 이전보다 조심스럽게 접근해야겠지.
“……흐, 읏.”
하늘이 노을빛으로 물들었을 때, 가라앉아 있던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에이든은 숨을 죽인 채 기절한 암컷이 눈을 뜨기만을 기다렸다. 얼마 안 있어 레인디아가 침대를 더듬거렸다.
“에, 이든 님……?”
가라앉은 에이든의 눈이 초롱초롱 빛났다. 아아. 디아. 네가 눈을 뜨자마자 찾는 사람이 나라니. 가슴이 벅차올랐다. 그는 조심스럽게 레인디아의 손을 붙잡아줬다. 웃고 싶지만 지금 같은 상황에서 미소를 지어선 안 되겠지. 최대한 차분히 표정을 갈무리했다.
“응, 디아. 나 여기 있어.”
“……저, 어떻게 된 거죠?”
레인디아는 가물거리는 눈으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에이든은 침대로 올라와 레인디아의 몸을 일으켜 세웠다. 레인디아는 에이든의 가슴에 몸을 기대고 앉았다.
“피가……, 다리에서 피가 흘렀어요…….”
레인디아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레인디아는 휙 고개를 들어 에이든을 바라봤다. 그녀의 검은 눈망울에서 두려움과 간절함이 느껴졌다. 레인디아는 이 모든 게 꿈이길 바랐다.
“그럼 안 되는 거잖아요. 아이는, 어, 어떻게 된 거죠? 이렇게 많은 피가……, 흐르는 게, 정상은 아닐 텐데…….”
창백하게 질린 뺨을 타고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에이든은 눈물을 훔쳐주며 레인디아를 감싸 안았다.
“진정하고 들어, 디아.”
“으읏, 네, 네.”
“임신이 아니었던 모양이야.”
“……뭐, 뭐라고요?”
레인디아는 제 귀를 의심했다. 그리고 부정했다. 안심하는 게 아니라 강하게 부정한 것이다. 그녀의 부정은 아이를 향한 집착에 기인했다. 에이든으로선 더없이 반가운 반응이었다.
“그, 그럴 리 없어요. 에이든 님도, 저도, 그렇게 믿고 있었잖아요. 몸도……, 예전이랑 달라서, 분명히, 아이를 가진 거라고, 저는…….”
레인디아는 차마 제 배를 감싸진 못한 채 허공에서 손을 쥐락펴락했다. 에이든은 한 손으로 그녀의 두 손을 감싸 쥐었다.
“혹시 몰라 디아가 잠드는 동안 검사를 해 봤어. 시약의 색이 변하지 않은 거로 봐선, 임신이 아닌 게 분명해. 착상되지 않은 거지.”
“……그럴 수가.”
레인디아의 고개가 가라앉았다. 오랜 침묵이 이어졌다. 레인디아는 살그머니 에이든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이, 일부러, 저를 위해서 거짓말, 하시는 건 아니고요……?”
에이든은 괴로운 듯 눈썹을 일그러뜨렸다. 그는 두 팔로 레인디아를 꼭 끌어안고 그녀의 목에 얼굴을 파묻었다.
“디아. 나는 그런 일로 네게 거짓말하지 않아.”
“흐, 흐윽. 흐으윽.”
레인디아는 에이든의 머리에 기댄 채 흐느꼈다. 그의 부드러운 머리카락이 레인디아가 흘린 눈물로 흠뻑 젖었다. 이윽고 레인디아는 짐승처럼 오열했다.
“아아아……!”
진심으로 믿었다. 배 안에 또 다른 생명이 움텄단 사실을. 자신도, 에이든도, 진심으로 믿고 있었다. 하지만 두 사람의 바람이 어떻든지 간에 아이는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아이를 잃은 듯한 깊은 상실감에 레인디아의 마음은 무너져 내렸다.
“디아, 괜찮아.”
“흐윽, 으윽, 아아…….”
“쉬. 괜찮아. 괜찮아.”
“아아, 아아아……!”
에이든은 리듬을 실어 레인디아의 몸을 다독여줬다. 레인디아는 젖을 찾는 새끼처럼 그의 안으로 꾸물꾸물 기어들어 왔다. 가냘픈 팔로 통나무 같은 몸통을 어떻게든 끌어안고, 에이든의 가슴에 모든 슬픔을 쏟아냈다.
“…….”
“…….”
조금 진정이 된 레인디아는 여전히 에이든의 품에 기댄 채 누워 있었다. 창백하게 질린 피부는 눈물을 흘린 탓에 붉게 달아올랐다. 눈가도 잔뜩 짓물러 있었다. 에이든은 레인디아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그녀가 먼저 입을 열기만 기다렸다.
“……백작가에서 안 좋은 기억만 있던 것은 아니었어요.”
레인디아는 에이든의 예상을 벗어난 말을 내뱉었다. 그러나 에이든은 일단 차분히 그녀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저는, 단란한 가족의 모습을…… 동경했어요.”
단란한 가족.
남편과 아내, 그리고 그들을 닮은 사랑스러운 자식. 끼니때마다 식탁에 따뜻한 수프가 올라오고, 남편은 아내와 자식들을 위해 나이프로 고기를 썰어주겠지. 겨울에도 사랑하는 가족의 몸을 데워줄 난로는 꺼지지 않을 것이다. 마치 환상에서나 존재할 듯한 단란한 가족.
그러나 한낱 환상이 아니었다. 실제로 존재하지만, 내 것이 아니었을 뿐이다.
“백작가에는, 그곳엔 저의 꿈이 있었어요. 너무나 완벽한 가족이었거든요. 적어도 제가 보기엔 그랬어요. 그렇게 멀리서나마 가족의 정을 느낄 수 있었고, 사생아인 제가 그들의 행복을 훔치는 것 같아 죄스러웠어요.”
불과 얼마 전만 해도 자신은 백작가의 사생아라 굳게 믿고 있었기에, 백작 가족의 행복을 지켜보는 것마저도 양심의 가책을 느껴야 했다.
“하, 한 번도 저를 위해 살아본 적이 없어서. 저는, 지금도 다른 사람을 위해 사는 법만 알아요. 에이든 님의 말처럼 복종하는 법만 배우며 자랐어요. 하지만, 이 아이는, 처음으로…….”
레인디아의 떨리는 두 손이 배를 감쌌다.
“지키고 싶었어요. 행복하게 해 주고 싶었어요. 만약, 평생에 걸쳐 누군가를 위해 살아야만 한다면, 그건 이 아이가 될 거라고, 그렇게, 각오했는데…….”
그토록 그리워하던 어머니의 존재를 되찾았다. 그러나 이제는 존재하지 않는 허상의 아이가 그리웠다. 사무치게. 또다시 서러움이 밀려와 레인디아는 눈물을 닦으려 했다. 하지만 에이든이 그녀보다 먼저 눈물을 닦아줬다.
“잃고 나서야 제가 얼마나 이 아이를 원했는지 깨달았어요.”
레인디아는 목이 멘 목소리로 말했다.
어째서 인간은 잃어버린 뒤에야 소중함을 깨닫는 것일까.
“아직도 아이를 원해, 디아?”
레인디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원해요. 원했어요. 하지만, 내심 힘들 거라 생각했어요. 아니, 불가능하다 여겼어요. 생리 주기도……, 들쑥날쑥하고, 몸도 허약해서. 무엇보다, 저를……, 사생아인 줄 알았던 저를, 사랑해 줄 남자라니. 그런 존재가 있을 리가, 없다고…….”
레인디아는 말끝을 흐렸다. 에이든이 그녀의 턱을 살며시 잡아 들었다.
“일단 하나는 해결됐어.”
“……네?”
“디아를 사랑해 줄 남자.”
에이든은 레인디아의 뺨에 쪽 입을 맞추고 멀어졌다. 레인디아는 젖은 눈을 깜박이며 그를 바라봤다.
“그리고 내가 지어준 약을 계속 먹는 거야. 그럼 언젠가 반드시 아이를 가질 수 있을 거야. 상상이 아닌, 진짜 우리의 아이를.”
에이든은 탁자 위에 올려둔 가루약을 레인디아에게 건넸다. 노스빌리움을 떠나던 날부터 매일 한 번도 빠트리지 않고 먹었던 약이었다. 레인디아는 하얀 가루를 보자마자 침이 고였다. 벌써 씁쓸한 약 맛이 입 안에 번지는 것 같았다.
레인디아는 에이든이 준 가루약을 한입에 털어 넣었다. 그리고 에이든이 준 물로 입가심을 했다. 여전히 입 안에 쓴맛이 돌았다. 몇 번을 먹어도 익숙해지지 않는 쓴맛이었다. 하지만 아이를 잃는 고통에 비할 바가 못 됐다.
‘다시 아이를 갖고 싶어. 아이를 원해. 진짜 나의 아이를.’
레인디아는 고개를 들어 에이든을 바라봤다. 머리보다 몸이 먼저 움직였다. 그녀의 가느다란 팔이 에이든의 목을 감싸 안았다. 입술이 겹쳐진 것은 한순간이었다. 레인디아는 에이든이 제게 그랬던 것처럼 그의 입 안으로 혀를 밀어 넣었다. 에이든은 그녀를 피하지 않고 기꺼이 혓바닥을 문대줬다.
“으읏, 하아, 에이든, 님…….”
“후우. 디아.”
에이든은 레인디아가 내던지는 모든 걸 받아먹었다. 그녀의 떨리는 육신, 들뜬 숨, 타액, 신음, 간절함, 불안함. 그 모든 게 오롯이 자신에게 향하고 있단 사실에 전율했다.
이렇게 매달리지 않아도 나는 절대 널 놓아줄 생각이 없는데. 하지만 기뻐. 너도 내가 아니면 안 되는 거지, 디아. 마치 나처럼 말이야.
“아, 안아주세요.”
다시 아이를 갖고 싶은 간절한 마음이 레인디아의 이성을 녹여버렸다.
“지금은 곤란해.”
“어째서요……?”
“생리 중에 관계는 자궁에 좋지 않아.”
레인디아는 꾹 입을 닫았다. 에이든의 눈에는 마치 늦은 밤까지 더 놀고 싶어 하는 아이처럼 보였다. 하지만 레인디아는 순한 아이라 결코 칭얼대거나 보채지 않는다. 이렇게, 사람을 미치게 하는 표정만 짓지. 물론 에이든은 단단히 글러 먹은 어른이므로 유혹을 거부할 마음이 없었다.
“하지만.”
에이든은 레인디아를 바로 눕히고 그녀의 위에 올라탔다. 핏줄이 툭툭 돋아난 큼지막한 손바닥이 레인디아의 배를 쓸며 올라갔다. 그 농염한 손길에 레인디아는 절로 고개가 뒤로 젖혀졌다.
“좆질만 안 하면 상관없어.”
목덜미에 에이든의 입술이 내려앉았다. 그의 숨결이 불처럼 번졌다.
“쑤시지 않고도 가게 해 줄게. 몇 번이고, 디아.”
에이든이 뱀의 혀로 속삭였다.
* * *
“으응, 흐……!”
에이든은 레인디아의 아랫배부터 쪽쪽 입을 맞추며 올라갔다. 가는 갈빗대 하나하나에 키스를 퍼부으며 가슴 밑의 유난히 말랑거리는 살을 혀로 주욱 핥고 올라가 유두를 입에 물었다.
쭈우웁.
에이든에게 젖을 물린 레인디아는 비비 몸을 꼬았다. 찌르르한 쾌감이 가슴을 주물럭댔다. 젖이 돈다면 이런 기분일까? 가슴 안이 저릿저릿해서 무엇이든 짜내고 싶었다. 곧 에이든이 이러한 욕망을 해소해 줬다.
쪽. 쪽. 쭈웁. 쭈우웁.
에이든은 아무것도 들어차지 않은 젖을 맛나게도 빨아 댔다. 입술로 뾰족해진 젖꼭지를 꼬집어 비틀고 혓바닥으로 푹 찍어 누르고, 다시 그것을 빼내기 위해 앞니를 세워 긁어댔다.
“봐, 디아. 이젠 평소에도 유두가 톡 튀어나와 있어.”
“흐으으…….”
에이든은 아직 건들지 않은 유방을 움켜쥐었다. 그의 말대로 옴폭 들어가 있던 함몰 유두가 볼록 튀어나와 있었다. 또 푸짐한 젖가슴은 커다란 손 밖으로 넘쳐흘렀다. 진짜 아이를 배면 더 커질 것을 상상하자 절로 페니스가 곧추섰다.
“우리 아기가 태어나면 젖을 못 찾아서 헤매는 일은 없을 거야. 눈 감고도 찾을 수 있을 정도야. 유두가 이렇게 큼지막해져서. 다행이지?”
“으, 흐읏, 네에, 다행이에요…….”
레인디아는 헤실헤실 웃으며 대답했다.
가슴에 번지는 기분 좋은 쾌감에, 그녀는 본능적으로 다리를 벌려댔다. 마치 눈앞의 수컷을 유혹하듯이. 에이든은 자꾸만 다시 벌어지는 레인디아의 허벅지를 한 손으로 꽉 다물렸다. 그녀의 다리 사이에서 피어오르는 체향에 피 냄새가 섞여 코안의 점막을 미친 듯이 자극했다. 까딱 방심했다간 저 피로 질척이는 구멍 속으로 페니스를 찔러 박을지도 몰랐다.
“생리 중에 여자는 특히 민감해진다지.”
“……네? 아흑!”
에이든은 레인디아의 양쪽 젖꼭지를 쭈욱 잡아당겼다. 자연스럽게 퍼져 있던 젖살이 원뿔 모양으로 솟아올랐다. 레인디아의 허리도 함께 붕 떠올랐다. 레인디아는 마치 목줄에 끌려다니는 개처럼 몸을 비틀었다.
“그런 몸으로 창조해 놓고 쑤시진 못하게 하다니, 내가 이래서 신을 안 믿는 거야.”
왜 쑤시지도 못하는 시기에 성욕이 들끓는 몸으로 만든 것일까.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이것이야말로 신의 농간이었다.
“으응, 아, 아!”
에이든이 레인디아의 젖꼭지를 요리조리 돌렸다. 강판에 갈리는 듯한 통증이 느껴졌다. 젖꼭지가 이대로 떨어질 것 같았다. 레인디아는 끙끙대며 얼굴을 찌푸렸다.
“아파, 디아?”
“으, 흐읏, 네, 조, 조금……, 많이, 아파요.”
그제야 에이든은 젖꼭지를 놓아줬다. 빨갛게 물든 꼭지는 평소의 두 배는 퉁퉁 부어 있었다. 에이든은 입술을 혀로 훔쳐 촉촉하게 만든 상태에서 젖 한쪽을 입에 물었다. 젖은 입술이 예민해진 살점을 부드럽게 문질렀다. 이윽고 도톰한 혓바닥이 거즈 대신 유두 위를 덮었다.
“흐으, 하아아…….”
아픈 부위를 빨아 대자 전에 없던 쾌감이 몽글몽글 솟아올랐다. 에이든은 젖꼭지가 타액으로 불어 흐물흐물해질 즘에야 입술을 떼어냈다.
“후. 어때, 디아.”
“읏, 뭐가요……?”
레인디아는 가물거리는 눈을 겨우 뜨며 되물었다. 에이든은 씩 웃더니 손가락으로 유두를 튕겼다.
“흐앗……!”
“가슴 잔뜩 괴롭힌 다음 빨아주는 거.”
“조, 좋아요. 좋았어요. 익숙하진, 않지만…….”
레인디아는 수줍게 대답하며 말끝을 흐렸다.
“금세 익숙해질 거야. 아픔 속에서도 쾌감을 찾아내게 될 테니까.”
에이든은 레인디아를 똑바로 바라보며 반대쪽 유두를 입에 물었다. 레인디아도 고개를 숙여 에이든을 바라봤다. 제 가슴에 달라붙어 목울대를 움직이며 젖을 쪽쪽 빨아 대는 에이든. 이따금 혓바닥을 길게 내밀어 유두를 쓸어올리기도 하고, 여기저기 찔러대기도 했다. 그러는 내내 레인디아를 바라봤다. 그의 붉은 혀는 유두를 보지 않고도 어디로 향해야 할지 아는 것처럼 움직였다.
“으읏, 하……. 으으응…….”
할짝. 할짝. 추웁.
레인디아도 시선을 돌리지 않고 에이든을 마주 봤다. 그 붉은 눈을 바라볼수록 이상야릇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만약 에이든이 아기였다면 벌써 젖이 텅 비고 말았을 것이다. 하지만 에이든은 계속해서 원하며 모유가 나오지 않는 젖을 잇몸으로 잘근잘근 깨물어댔겠지.
“으, 흐응, 에이든 님…….”
레인디아는 두 팔로 에이든의 머리를 감쌌다. 마치 제 가슴에 매달린 새끼를 안아주듯이. 그 자연스러운 행위에는 모성이 자리 잡고 있었다. 에이든은 머리를 부드러이 눌러주는 무게감을 느끼며 스르륵 눈을 감았다.
쪽. 쪼족. 쪽.
에이든은 이를 세우지 않고 젖을 빨았다. 혓바닥의 짓궂은 희롱도 사라져서, 아이에게 젖을 주는 연습을 하는 기분이었다. 레인디아는 에이든이 젖을 더 잘 빨 수 있게 살며시 젖 아래를 받쳐 위로 들어 올렸다. 제 몸에 붙어 있는 살덩이지만 어떻게 들고 다녔나 싶을 만큼 묵직했다.
“으응, 흐읏. 으아앙…….”
“후우……. 디아. 왜 자꾸 야한 소리를 내지?”
에이든이 발딱 선 좆으로 레인디아의 몸을 누르며 상체를 일으켰다.
“우리 아이한테 젖 주면서도 이렇게 울 거야?”
“흐읏……! 아, 아니에요…….”
“아니긴. 우리 아기에게 젖먹일 땐 디아의 입에도 내 좆을 물려야겠어. 아무 소리도 못 내게.”
“읏, 그, 그런 건…….”
레인디아는 자신의 유방을 주물럭거리는 손과 에이든을 번갈아 보다 푹 고개를 숙였다. 에이든은 후후 웃으며 침으로 축축해진 젖꼭지에 쪽 입을 맞췄다.
“장난이었어, 디아. 겁먹기는.”
에이든은 한 손으로 바지 안에서 페니스를 꺼냈다. 정액이 가득 차 빵빵해진 기둥 끄트머리에서 선액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내 좆을 볼 수 있는 건 디아뿐이야. 좆을 품을 수 있는 것도, 빠는 것도. 전부 너밖에 할 수 없어. 내 좆은 디아만을 위해 존재하는 거지.”
에이든은 이빨로 레인디아의 아랫입술을 가볍게 잡아당겼다.
“으, 아……!”
“디아의 것, 만져줘.”
에이든은 이제 자신의 페니스를 아예 레인디아의 것이라 칭했다. 레인디아는 머뭇거리다 에이든의 페니스를 붙잡았다. 손바닥 가득 그의 열기가 불처럼 번졌다.
“후우.”
“읏, 흐……. 뜨거워요.”
레인디아는 예전과 달리 집중해서 에이든의 좆을 매만졌다. 도톰한 귀두를 쥐어보기도 하고, 손가락 끝으로 핏줄을 따라 내려가 보기도 했다. 보지 않고 더듬거리는 것만으로도 페니스의 윤곽이 머릿속에 선명히 그려졌다. 이 두께를 기억하는 질구가 어서 넣어달란 듯 빠끔거렸다.
“더, 더 커지고 있어요…….”
레인디아가 다소 놀란 눈을 하고 묻자, 에이든이 푸흐흐 웃었다. 평소에도 잘만 빨아놓고 새삼스럽게 놀라는 모습에 다시금 자지가 불끈거렸다. 에이든은 두 손으로 레인디아의 뺨을 감싸고 그녀를 빤히 바라봤다.
“어디까지 커지나 계속 흔들어 봐.”
“흐으……, 네…….”
“아. 디아의 손. 기분 좋아. 평생 잡혀 살고 싶어.”
에이든이 살며시 눈을 감았다. 풍성한 속눈썹이 나비처럼 사뿐히 가라앉았다. 레인디아는 마치 예술 작품을 감상하는 기분으로 에이든을 바라봤다. 그의 잘생긴 미간이 점점 좁아지고, 살짝 벌어진 입술 사이로 그르렁대는 신음이 흘러나왔다. 손바닥 안의 핏줄은 터질 것처럼 씰룩였다.
“하아. 후우…….”
“……에이든, 님.”
제 손으로 흥분하는 에이든이 참으로 사랑스럽게 느껴졌다. 그를 더욱 만족시켜주고 싶단 욕심도 일렁였다. 레인디아는 더욱 빠르게 팔을 흔들었다. 아랫배를 긁으며 올라오는 사정감에 에이든의 손에도 힘이 실렸다. 그의 커다란 손아귀 안에서 레인디아의 뺨이 뭉그러졌다.
“아……!”
에이든이 휙 고개를 젖혔다. 그의 도드라진 목젖이 간헐적으로 떨렸다. 그리고, 뜨거운 정액이 레인디아의 젖가슴을 향해 쏟아졌다. 몇 줄기는 뺨과 입 안으로 튀었다. 레인디아는 입으로 들어온 정액을 긁어모아 냉큼 집어삼켰다.
“하아. 후…….”
어느새 에이든은 푹 고개를 숙인 채 숨을 고르고 있었다. 레인디아의 두 배에 달하는 어깨가 눈에 띄게 오르락내리락 움직였다. 레인디아도 그를 따라 헐떡였다. 어째서일까. 그저 절정에 달하는 모습을 눈앞에서 지켜봤을 뿐인데 덩달아 숨이 가빠졌다.
“마치 모유가 흐르는 것 같아.”
“……네? 읏!”
어느새 숨을 고른 에이든이 레인디아의 젖가슴을 빤히 바라봤다. 레인디아도 함께 제 몸을 훑다 황급히 두 팔로 가슴을 감쌌다. 에이든이 뿌린 정액이 유두에 묻어 주르륵 흐르는데, 그의 말처럼 맺힌 모유가 떨어지는 것 같았다.
“왜 감싸고 그래? 부끄러워?”
“읏, 그게…….”
“이리 와. 디아도 기분 좋아져야지.”
에이든은 레인디아의 팔을 잡아 내리고 유두를 입에 물었다. 정액이 묻은 것은 아랑곳하지 않고 맛있게 유두를 깨물어댔다. 제 정자를 양념 삼아 말캉한 살덩이를 굴렸다. 다시 시작된 자극에 레인디아는 마치 처음인 것처럼 흐느꼈다.
“으으응.”
아직 벗지 않은 속옷 안으로 에이든의 손이 쑥 밀려들어 왔다. 둥글게 다듬은 손톱이 수풀을 가르고 들어왔다. 속옷이 터질 듯 부풀어 올랐다. 에이든은 생리혈을 흡수하는 천을 건들지 않으며 손가락 끝으로 클리토리스를 굴렸다.
“아, 아앙……!”
젖가슴에 몰려 있던 흥분감이 순식간에 다리 사이로 쏠렸다. 동그란 음핵은 당장이라도 터질 것처럼 탱글탱글 부풀어 올랐다. 물기가 없어 생살이 쓸리는 듯한 통증이 번지는데, 그보다 큰 쾌감이 미친 듯이 빠르게 육신을 감싸 안았다.
“하으, 아아……!”
클리토리스를 문지르는 손길이 점점 농밀해졌다. 레인디아는 아릿한 쾌감에 눈이 간지러웠다. 눈꺼풀이 경련할 때마다 퐁퐁 샘솟은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이렇게 손가락으로 살살 굴려주면 보지를 꽉꽉 쪼여댔는데 말이야. 지금은 그걸 못 느끼니 안타까워.”
“흐으, 아아아……!”
“지금도 열심히 조이고 있겠지? 응? 디아.”
에이든은 발발 떨리는 레인디아의 턱을 살짝 깨물고 흔들었다. 마치 들개 새끼가 어미에게 투정을 부리는 것처럼.
“흐, 흐으……, 아, 아무, 것도 안 들어 있어서, 허전해요…….”
“허전해도 오늘은 어쩔 수 없어. 질 안의 점막끼리 자글자글 비벼지는 느낌에 집중해 봐.”
“흐, 흐으응, 모, 모르겠어요. 아으, 앙……!”
에이든의 말처럼 레인디아의 내벽은 힘껏 수축하고 있었다. 또 강한 허기를 느끼는지 질구멍이 피가 새지 않도록 덧댄 천을 좆 대신 쪽쪽 빨아 댔다. 레인디아는 마치 재갈을 문 죄인처럼 밑으로 천을 씹어대며 신음했다.
“흐으, 하아, 아응……! 아, 아!”
“이리 와.”
에이든은 한 손으로 레인디아의 목덜미를 감싸고 입을 맞췄다. 다급하게 입술을 끼워 맞춘 것치곤 혓바닥이 쑥쑥 잘만 밀려들어 갔다.
“으응, 후응, 으응…….”
“하아, 후, 으음.”
에이든은 질구를 건들지 못하는 만큼 다른 구멍을 미친 듯이 탐했다. 목젖에 닿을 정도로 혓바닥을 밀어 넣고 귓구멍을 쑤시고 투명한 눈물을 흘리는 눈꺼풀에 몇 번이고, 몇 번이고 입을 맞췄다. 어느새 레인디아의 얼굴은 개새끼가 핥은 것처럼 에이든의 타액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정조대라도 채워둔 기분이군.’
에이든은 통통해진 음핵을 마구 두드리며 생각했다. 고작 음부를 덮은 천 한 겹이 쇠로 만든 정조대처럼 강력한 효과를 발휘할 줄이야.
마음 같아선 당장 좆을 찔러 박고 싶었다. 하지만 레인디아의 자궁에 아기씨가 잘 자리 잡기 위해선 자궁에 무리가 가는 짓은 최대한 피해야 했다.
“아, 아아……!”
에이든은 음핵만을 자극해 레인디아를 절정으로 이끄는 데 성공했다. 이미 몇 번이나 해 봐서 익숙한 행위였지만, 이렇게 가버리는 레인디아의 모습은 보고 또 봐도 질리지 않았다.
“좋아, 디아?”
에이든이 샐쭉 웃으며 물었다.
“아, 아으아……!”
레인디아는 온몸의 관절을 오므리며 쾌감을 받아들이느라 제대로 대답하지 못했다. 에이든에겐 충분한 대답이었다.
“하아아.”
아릿한 절정이 찾아왔고 레인디아의 몸이 물에 흠뻑 젖은 솜처럼 늘어졌다. 풍만한 젖가슴이 그녀의 숨결을 따라 찬찬히 오르락내리락했다. 에이든이 별안간 레인디아의 골반을 붙잡았다. 은근한 악력에 레인디아가 살며시 눈을 들어 올리자,
“앗……! 아, 안 돼요! 바, 방금 가서, 아앙! 그만……!”
또다시 손가락 아래 깔린 음핵이 싹싹 비벼지며 쾌감이 불처럼 번졌다.
“계속 갈 수 있잖아, 디아.”
새삼스럽게. 그의 유려한 입매가 비틀렸다.
“천으로 막아놨는데도 젖은 냄새가 솔솔 올라와. 그만큼 느끼고 있는 거지?”
“으으응, 앙, 아앙!”
끽. 끽. 끼익!
음핵을 문지르는 것뿐인데도 추삽질을 하는 것처럼 침대가 흔들렸다. 둔덕 위에 피어난 음모는 어느새 에이든의 팔뚝에서 흘러내린 땀으로 흠뻑 젖어버렸다. 에이든이 팔을 흔들 때마다 땀이 팟팟 튀었다.
“흐으으, 아응, 시, 싫어요, 손으로만, 계속, 아앙, 가기 싫, 어……!”
질벽이 수축하며 비벼지는 만큼 배 속이 허전했다. 에이든의 우람하고 훌륭한 페니스로 밑을 꽉 채우고 싶은 본능이 여체를 압도했다. 차라리 박히고 싶었다. 하반신이 너덜너덜해질 때까지 박히고픈 욕망이 거세게 일었다. 레인디아는 밋밋한 배를 움켜쥔 채 할딱였다. 레인디아의 눈빛에서 간절함을 읽은 에이든은 입술로 그녀의 목을 애무하며 속삭였다.
“지금 내가 좆 안 넣어준다고 아쉬워할 거 없어. 디아의 피만 멈추면 온종일 박아넣고 있을 거니까. 그렇게 몇 달 후에는 말이야, 뒤뚱뒤뚱 걸어야 할 만큼 배가 부풀어 있을 거야. 기대되지?”
“으으응, 흐으, 아아……!”
“걱정하지 마. 그때가 되면 내가 디아를 안고 다닐 테니까.”
“으, 흐으으……!”
“그러니 지금은 계속 가자, 디아. 옳지.”
“아!”
그 순간, 눈앞에서 새하얀 불빛이 깜박였다. 몇 번인지 모를 절정이 그녀의 의식을 바닥까지 끌어내렸다.
“으음…….”
레인디아는 세상모르는 얼굴로 잠들어 있었다. 속이 비칠 것처럼 투명한 피부를 보고 있자면, 조금 전 침대에서 음란한 신음을 질질 흘리던 여인이란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새하얀 천이 레인디아의 이마에 송골송골 맺힌 땀을 거두어갔다. 에이든은 젖가슴과 잘록한 배에 튄 정액들도 꼼꼼히 닦아냈다. 마침내 그의 손이 속옷까지 내려갔다. 손바닥을 처박고 하도 흔들어대서 속옷이 헐렁하게 늘어나 있었다. 밑으로 살짝 잡아당기자 천을 꼭 깨물고 있는 음부가 고스란히 드러났다.
“아주 꽉 깨물고 있네.”
천을 살짝 잡아당겨 봤지만 질구에 박혀 있어 쉽게 빠지지 않았다. 에이든은 살며시 눈살을 찌푸렸다.
“디아. 내 좆도 아닌 걸 이렇게 열심히 물고 있는 거야?”
“으으응.”
깊은 잠에 빠진 레인디아가 살포시 눈살을 찡그렸다. 에이든은 피식 웃으며 살살 천을 잡아당겼다. 팔이 떨어지도록 음핵을 비벼주는 동안 어찌나 열심히 오물오물 먹은 것인지 속으로 말려들어 간 천이 끝도 없이 빠져나왔다.
“으, 음…….”
마침내 질구가 천을 뱉어냈다. 마치 속을 게우듯 핏물이 섞인 애액도 질질 흘러나왔다. 에이든은 끄집어낸 천으로 질구를 슥 훔쳐 올렸다. 오랫동안 건들지 않아 부기가 빠진 질구는 몇 번을 빠끔거리다 다소곳이 닫혔다. 그러나 구멍 주변은 생리혈이 얼룩덜룩 묻어 있었다.
“후우.”
에이든은 그 붉은 구멍을 바라보며 젖은 천 사이에 제 좆을 끼워 넣었다. 마치 갓난아이를 감싼 포대기처럼, 생리혈이 묻은 천이 에이든의 페니스를 감쌌다. 에이든은 그대로 좆을 흔들기 시작했다.
“읏, 하아……, 아.”
핏물이 찬 레인디아의 자궁을 쑤시는 것보단 못할 테지만, 그녀의 안에서 흘러나온 애액이 좆에 들러붙는 감촉은 아찔했다.
“큭.”
마침내 긴 포물선을 그으며 날아간 정액이 레인디아의 몸 위로 후드득 떨어졌다. 기껏 열심히 닦아준 보람이 사라졌지만, 에이든은 정액으로 다시 더럽혀진 레인디아의 육신을 보며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사정을 마친 좆은 여전히 딱딱하게 발기해 있었다. 질 안으로 들어가기 전엔 쉬이 수그러지지 않겠단 듯이 몸의 주인에게까지 반항하는 모양새였다. 에이든은 이번엔 맨손으로 페니스를 쓸었다. 마치 처녀지에 들어갔다 나온 것처럼 핏물이 배어났다.
에이든이 연달아 사정하는 순간, 레인디아의 질구에서도 생리혈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 * *
그렇게 며칠이 지났다.
에이든의 극진한 보살핌으로 레인디아도 차츰 안정을 찾아갔다. 아이를 잃은 상실감은 도리어 그녀의 모성에 불을 지폈다. 에이든으로선 만족스러운 결과였다. 두 사람은 둥지를 튼 부부 새처럼 늘 함께했다. 레인디아는 매일 에이든과 산책하러 나가 햇볕을 쬐고, 그가 주는 음식을 기꺼이 받아먹고, 잠들기 전 잊지 않고 가루약을 삼켰다.
‘우리 아이를 위해서도 건강한 상태를 유지해야 해.’
레인디아는 그 어느 때보다 자신의 몸을 소중히 여겼다. 저만의 몸이 아니란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훗날 사랑하는 아이가 자리 잡을 소중한 보금자리였다. 레인디아는 결심했다. 돌아가신 어머니를 위해서도 반드시 행복해지겠다고.
“미안해, 디아.”
“괜찮아요. 저는 여기서 기다릴 테니 마음 놓고 다녀오세요.”
어느 날, 에이든은 레인디아를 두고 자리를 비워야 했다.
지난 명예재판의 문서화 작업이 끝나 에이든의 최종 확인만이 남은 것이다. 황실에 보관되는 공식적인 문서이니만큼, 에이든은 사소한 것 하나까지 직접 검수에 들어갔다. 훗날 이 일로 레인디아의 삶에 문제가 발생하는 걸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서였다.
“최대한 빨리 돌아올게.”
“네.”
레인디아는 싱그러운 미소를 띤 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도 에이든은 한참을 주저하다 겨우 발걸음을 뗐다. 레인디아는 그런 에이든이 몹시 사랑스럽게 느껴졌다.
에이든이 사라지자 레인디아는 소파에 앉아 황립 도서관에서 빌려온 책을 펼쳤다. 레인디아를 알아본 사서는 황족과 고위 관료만 들어갈 수 있는 열람실을 흔쾌히 개방해 줬다. 그곳에서 찾은 의서(醫書)였다. 황궁 여인의 교육을 위해 만들어진 의서라 약제에 대한 설명이 그림과 함께 상세히 설명되어 있었다.
‘내 문제를 에이든 님에게만 맡길 수는 없으니까.’
레인디아는 훗날 아이를 갖게 된다면 슬기롭게 헤쳐나가길 바라는 마음에 한 줄 한 줄 정독했다.
똑똑.
레인디아가 찻잔을 반쯤 비울 즘 바깥에서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오랜만입니다, 레인디아 아가씨.”
“반가워요, 산첼로 경.”
산첼로였다. 그는 품 안에 무언가를 든 채 레인디아의 어깨 너머를 살폈다.
“그나저나 에이든 님은 안 계신 겁니까?”
“네. 에이든 님은 잠시 자리를 비우셨어요.”
“아아, 최종 직인을 찍는 게 오늘이었지요, 참.”
산첼로는 퍼뜩 깨달은 얼굴로 고개를 바로 했다. 레인디아는 산첼로가 들고 있는 상자를 바라봤다. 에이든의 심부름을 하러 왔으나 길이 어긋난 듯싶었다.
“그 물건은 에이든 님께 드릴 건가요?”
“앗, 이것은…….”
산첼로는 상자와 레인디아를 번갈아 보다 고민에 잠겼다. 상자 안에는 레인디아의 자궁을 튼튼하게 해 주는 약의 재료가 들어 있었다. 그의 고민은 오래가지 않았다. 숨겨야 할 독약도 아닐뿐더러 레인디아가 약을 먹는 모습을 본 적도 있기에 흔쾌히 상자를 건넸다.
“결례가 안 된다면 에이든 님께 전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레인디아 아가씨께서 드시는 약을 만드는 데 쓰이는 재료들입니다.”
“물론이죠. 제가 전달해드릴게요.”
레인디아는 상자를 건네받았다.
“꾸준히 약을 드시면 곧 좋은 소식 있으실 겁니다. 에이든 님은 어릴 적부터 황립 연구소에서 뛰어난 업적을 남기셨지요. 그만큼 의학 분야에 있어선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분이십니다.”
“좋은 말씀 감사해요. 또, 저 때문에 먼 길을 와주신 것도요.”
“아닙니다. 저야말로 이렇게 두 분을 도울 수 있어 영광이지요.”
산첼로는 싹싹하게 대답했다. 비록 두 사람의 첫 단추는 어긋났을지언정, 마침내 행복한 미래로 나아가는 모습에 흐뭇한 마음이 들었다. 이 젊은 연인의 행복은 황후 카타리나의 행복이었고, 카타리나의 행복은 곧 산첼로의 행복이었던 까닭이다.
“그럼 저는 또 할 일이 있어서 이만.”
산첼로는 두 사람의 앞날을 축복하며 돌아갔다.
레인디아는 찻잔 옆에 상자를 내려두고 뚜껑을 열었다. 다섯 개로 나누어진 칸마다 약재가 켜켜이 쌓여 있었다.
‘어라. 이 꽃은 책에서도 본 적이 있어.’
레인디아는 읽던 책을 펼쳤다. 역시나 그녀가 책에서 본 꽃으로, 부인병에 두루 사용되는 약재였다. 효능은 생리혈을 맑게 해 주며 생리불순에 도움이 된다고 적혀 있었다.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단, 임산부에겐 섭취를 금한다.”
탁.
레인디아는 재빨리 책을 덮었다. 마치 도둑질을 하다 걸린 사람처럼 숨이 가빠졌다. 그녀는 천천히 숨을 골랐다. 혹 다른 약재와 착각한 것은 아닐까, 다시 책을 펼쳐 그림과 꽃의 모양을 자세히 대조했다. 틀림없이 책에 적힌 꽃이었다. 하지만 도저히 납득할 수 없어 경고문을 몇 번이고 재차 확인했다.
“설마, 다른 약재들도……?”
레인디아는 펄럭펄럭 책을 넘겨 나머지 약재의 효능도 찾아냈다. 그중 두 개 역시 자궁 건강에 도움이 되나 산모에게 섭취를 금하는 약재였다. 약에 들어가는 다섯 개의 재료 중 세 가지나 산모에게 먹여선 안 되는 약재였다.
어째서? 라는 의문이 드는 순간,
“……윽.”
머리에 이는 현기증에 레인디아는 이마를 움켜쥐었다. 비틀대던 그녀의 몸이 소파 위로 털썩 무너졌다. 레인디아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파랗게 질린 손끝이 눈에 띄게 떨렸다.
‘임산부는 먹으면 안 되는 약인데……, 왜 에이든 님은 내게 그 약을 먹인 거지? 아이를, 없애려고?’
아니. 아니다. 그랬다면 다른 약을 먹였겠지.
처음부터 에이든의 목적은 하나였다.
레인디아의 자궁을 튼튼하게 만드는 것. 그리고 그 튼튼해진 자궁에 제 아이를 배게 하는 것.
‘진정하고 들어, 디아. 임신이 아니었던 모양이야.’
에이든의 목소리가 마치 어제 일처럼 선명히 떠올랐다. 그의 흔들림 없는 표정이 눈앞에 되살아났다. 인사불성이 된 저를 안심시키기 위해 애써 차분한 척한 것이라 생각했다. 이제 와 생각해 보면 아니었다. 에이든은 마치 모든 일을 알고 있던 사람처럼 태연했다.
“……나를 속인 거야. 내가, 임신을, 안 했단 사실을…… 처음부터 알고 있었어.”
발끝에 구멍이 뚫려서 온몸의 피가 빠져나가는 듯했다. 가죽만 남은 몸이 붕 떠올랐다가 순식간에 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레인디아의 손끝이, 턱이, 팔뚝이, 부들부들 떨리기 시작했다. 거의 경련에 가까웠다. 레인디아는 꽉 조여드는 목을 붙잡고 헐떡였다.
‘어떻게 당신이……, 변했다고 생각했는데……!’
변해?
아니야.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어.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았다.
우리의 무대는 그대로였고, 손에 들린 대본도 전과 같았다.
사냥꾼의 손바닥 위를 빙글빙글 달리고 있는 가여운 사슴 한 마리.
“……뭘, 기대한 거지.”
그 순간, 소용돌이치던 머릿속이 순식간에 개운해졌다.
아니, 정확히는 텅 비어버렸다. 예전처럼 무언가 부서진다든가 끊어지는 듯한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더 망가질 것도 없었으니까. 이미 레인디아의 마음은 걸레짝처럼 너덜너덜해진 지 오래였다. 모든 의지가 꺾인 자리에서, 레인디아의 영혼 역시 서서히 죽어갔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저 멀리서 발소리가 들렸다.
쫓기는 듯한 발걸음 소리는 문에 가까워질수록 조용해졌다. 레인디아는 그 이유를 알았다. 이 시간엔 레인디아가 늘 짧은 낮잠을 자서, 그런 저를 깨우지 않으려고 걸음을 늦춘 것이다. 하지만 빨리 오고 싶은 마음 역시 억누를 수 없어 달린 것이고.
그래서?
천진난만한 아이 같은 모습을 사랑스럽게 여겨야 하는 것일까?
나에게 그런 짓을 저지른 남자에게?
“디아?”
조심스레 저를 부르는 목소리에 레인디아는 스르륵 고개를 들었다.
“깨어 있었구나.”
에이든이 문 앞에 멈춰 서서 멋쩍게 웃었다.
그 모습을 보며 레인디아는 생각했다. 때때로, 당신은 지금처럼 정말 살아 숨 쉬는 듯한 표정을 짓곤 한다고. 두꺼운 눈썹을 찌푸리며 입꼬리를 말아 올릴 때, 나는, 당신이 나와 같은 인간이라고 믿게 된다.
아니, 믿었다.
“재판과 관련된 문서는 황궁의 지하 금고에 보관될 거야. 내 허락이 없으면 누구도 문서를 열람할 수 없고,”
에이든은 상황을 설명하며 다가왔다. 마치 잠자리에서 아이에게 동화를 읽어주는 듯한 나긋나긋한 말투. 그런 목소리를 듣고 있으면 보호받는 기분이 들곤 했다. 하지만 전부 착각이었다. 레인디아는 말아 삼킨 입술을 깨물었다.
레인디아의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을 때까지, 에이든은 그녀의 변화를 눈치채지 못했다.
“자고 있을 줄 알았는데, 설마 날 기다린 거야?”
에이든이 손을 뻗으며 물었다.
“미안해서 어쩌…….”
찰싹!
레인디아는 다가오는 손바닥을 쳐냈다.
에이든의 말도 파열음과 함께 끊겼다.
“…….”
“…….”
에이든은 지금쯤 레인디아의 뺨을 어루만져야 할 손이 그녀에게서 더욱 멀어지자 어안이 벙벙해진 모습이었다. 그러나 쉬이 이를 드러내지 않았다. 에이든은 그답게 한발 물러나 상황을 관조하듯 주위를 싹 훑었다. 이윽고 에이든의 시선이 약재가 담긴 상자와 의서가 놓인 테이블에 닿았다.
“……산첼로가 다녀갔군. 약에 대해 어떤 얘기를 들은 모양이지? 아니면, 직접 알아냈거나.”
에이든은 빠르게 상황을 파악했다.
“마, 만지지 말아요.”
레인디아는 몸과 입이 따로 노는 사람처럼, 한참이 지나서야 제 행동에 부연 설명을 했다.
에이든은 고개를 바로 해 레인디아를 바라봤다. 시체처럼 창백하게 질린 피부와 달리, 부릅 든 두 눈이 빨갛게 충혈되어 있었다. 그 서슬 퍼런 분노를 마주하자 에이든의 마음은 도리어 차분해졌다.
내 거짓말이 들통난 모양이구나. 이제 너는 무척 화를 내겠지, 디아. 그렇다면 나는 기다리는 수밖에 없겠어. 네가 모든 분노를 쏟아낼 때까지.
“다, 당신, 어떻게, 저한테 이럴 수 있죠……?”
에이든의 예상처럼 레인디아의 얼굴이 괴롭게 일그러졌다. 충혈된 두 눈에 투명한 눈물이 가득 차올랐다. 그러나 저 깊은 곳에서 올라온 분노가 눈물마저 말려버렸다. 꺼져버린 촛불이 심지를 태우며 타오르듯, 죽어 있던 레인디아의 영혼이 거세게 요동쳤다.
그 분노의 촉매는, 다름 아닌 깊은 배신감이었다.
에이든에게 한 번도 느껴본 적 없는 감정이었다.
두려움이나 실망은 익숙했지만 배신감이 든 건 처음이었다.
눈앞의 에이든은 전과 같았다. 하나도 변하지 않았다. 하지만 자신은 변했기에. 레인디아는 에이든이란 남자를 온전한 인간으로서 받아들였기 때문에, 믿음이 부서진 자리에서 처음으로 피어난 배신감은 그녀의 이성까지 집어삼켰다.
“당신을 믿었어요. 저를……, 구원해 줬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어떻게, 이런…….”
에이든이 슥 팔을 들었다.
“디아. 진정하고,”
“만지지 말라고 했잖아요!”
레인디아는 그 어느 때보다 앙칼지게 소리치며 또다시 다가오는 손을 쳐냈다. 그녀는 걷는 법도 잃은 것처럼 소파에 두 다리를 올리더니 등받이에 몸을 파묻은 채 부들부들 떨었다. 그녀는 실성한 사람처럼 중얼거렸다.
“최악이에요. 당신 같은 남자는, 당신이란, 당신이란 인간은……!”
레인디아의 몸이 점점 굽어들었다. 그대로 쓰러질 것 같던 고개가 우뚝 멈추더니 에이든을 노려봤다.
“이 괴물!”
당신은, 인간도 아니야.
“당신은 괴물이야! 이 거짓말쟁이! 제가, 임신했다고 믿게 해서, 족쇄를 채운 거였죠? 이런 남자였어, 알고 있었는데……!”
“디아, 진정해. 넌 지금 너무 흥분했어.”
“당연하죠! 누가 제정신이겠어요! 당신 같은 괴물에게 몇 달을 잡혀 있었는데……! 아, 아니, 당신 말이 맞아요. 그 일을 겪고도, 당신과 함께하려고 했어요. 그래요, 전 제정신이 아니었던 거예요.”
제정신인 여자라면 괴물과 가정을 이루는 게 가능하다고 생각할 리 없겠지. 아아, 자신은 얼마나 어리석었던가! 레인디아는 어리석은 판단을 한 자신을 혐오하며 치를 떨었다.
“디아, 내 얘기를 들어.”
그때 에이든의 두 손이 덥석 레인디아의 어깨를 붙잡았다.
“듣고 싶지 않아요! 당신은 입만 열면 거짓말이잖아요!”
레인디아는 에이든의 손에서 벗어나려 몸부림쳤다. 그러나 제 둥근 어깨에 내려앉은 에이든의 손바닥은 아교를 발라 붙인 것처럼 꿈쩍하지를 않았다. 짐승처럼 소리치던 레인디아는 제풀에 지쳐 푹 고개를 숙였다. 헉헉, 가쁜 숨만 내뱉던 입술이 빠끔 벌어졌다.
“……하지만, 그런데도 믿어버려요.”
바스러진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당신이 해 준 말들을, 진심으로……, 믿게 된단 말이에요. 그래서, 당신이 위험한 거야.”
레인디아가 힘겹게 고개를 들었다. 그녀는 마치 물에 빠진 생쥐처럼 흠뻑 젖어 있었다. 땀인지 눈물인지 모를 것들이 반들거렸다. 물기 어린 입술이 빠끔 벌어졌다.
“배, 백작 부인과, 나를 상처입힌, 사람들과……, 당신이, 뭐가 다른지 모르겠어요. 당신도 똑같아요. 구원자를 자처하지만, 결국, 제게 목줄을 걸 뿐이죠.”
흠뻑 젖은 두 눈은 아직도 짜낼 눈물이 남아 있었다. 차오른 눈물로 눈앞이 흐릿해져서 에이든이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감히 예상이 갔다. 소름 끼칠 만큼 차분하게 상황을 지켜보고 있겠지. 감정이 없는 괴물처럼. 그리고 저의 연약한 틈을 찾아내면, 그 틈을 잡아 벌려 다시 깊숙한 곳에 자리할 것이다.
“어떻게, 아이마저, 날 붙잡을 수단으로……, 이용할 수 있는 건지, 믿기지 않아요.”
그렇게까지 해서 붙잡을 만큼 자신이 가치 있는 존재인지 묻고 싶은 마음보다, 자신에게 아이가 얼마나 소중한 존재였는지 알면서 어떻게 그 마음을 이용할 수 있는지를 묻고 싶었다. 이 순간에도, 레인디아는 에이든을 이해해 보고 싶었다.
“나와 가정을 이루고 싶은 게 아니었나요……?”
“당연히 디아와 가족이 되고 싶어. 그 마음에 거짓은 없어.”
에이든의 목소리엔 흔들림이 없었다.
아아. 나는 이토록 출렁대는데.
당신의 한마디에 온 촉각을 곤두세우며, 이토록 망가져 가는데…….
“후후후…….”
레인디아의 입에서 난데없는 웃음이 흘러나왔다.
재판장에서 실성한 사람처럼 웃던 비릴리안의 마음이 얼핏 이해가 갔다. 사람이 견딜 수 없는 충격을 받으면 이렇게 되는구나. 그리고 깨달았다. 나는, 완전히 마음이 망가진 거라고. 에이든과의 관계도 더는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넌 것이라고.
레인디아는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 전부 거짓말이에요. 차라리, 다정하게 대해 주지 말지 그랬어요. 계속 끔찍하게 굴지 그랬냐고요. 그랬다면, 당신을 믿지도 않았을 테고 이렇게 배신감에 치를 떨지도 않았을 거야.”
레인디아는 꾹 입술을 깨물었다. 이윽고 고개를 들어 에이든을 쏘아붙였다.
“당신이 날 사랑할 리 없는데!”
눈물이 모두 휘발된 탓에 저를 보는 에이든의 얼굴이 한눈에 들어왔다. 그 순간, 에이든의 표정은 그 어느 때보다 사납게 일그러져 있었다. 마치, 어떻게 자신에게 그런 말을 할 수 있냐는 듯, 시뻘건 두 눈이 레인디아에게 묻고 있었다.
“내가 디아를 사랑할 리 없다고?”
에이든의 목줄에 핏줄이 불거졌다.
그가 레인디아의 어깨를 누르며 서서히 몸을 일으켰다.
“몇 번이고, 몇 번이고 말했잖아. 나는 디아를 사랑한다고.”
레인디아의 고개도 에이든을 따라 올라갔다. 한계까지 추켜세운 목이 뻣뻣했다. 더는 그의 표정이 보이지 않았다. 샹들리에를 등진 에이든의 얼굴에 칠흑 같은 어둠이 내려앉았기 때문이다. 으드득, 이가 갈리는 소리가 났다. 레인디아의 귀에는 마치 뼈를 씹어먹는 소리처럼 들렸다. 어느새 제 여체를 감싸버린 거대한 그림자에 본능적으로 압도됐다.
“그래. 디아를 속인 건 맞으니 변명은 하지 않겠어. 그런다고 달라지는 건 없을 테니.”
에이든은 치솟는 분노를 삼킨 뒤, 한층 정갈해진 목소리로 말했다.
레인디아에겐 결코 잊을 수 없는 끔찍한 경험을 에이든은 아무렇지 않게 과거의 일로 치부했다. 이런 남자가 악이 아니면 무엇이란 말인가.
“하지만 내 진심을 의심하면 안 되지.”
에이든이 목을 감싼 머플러에 손가락을 찔러넣었다. 그 모습을 보자 레인디아는 예전의 악몽이 되살아났다. 처음으로 저택을 도망친 날, 별장에 저를 가둬두고 옷을 벗던 에이든의 모습이…….
“이번에야말로 제대로 알려줄게. 내가, 디아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머플러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레인디아의 시선도 고꾸라졌다. 그러나 그녀는 다시 시선을 올리는 대신 에이든의 발목을 뚫어져라 바라봤다.
“디아, 나는 널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든 할 거야.”
그래요. 당신은 또 날 범할 생각이겠죠. 그렇게 아득한 쾌감에 우는 법밖에 모르는 살덩어리로 만들 생각이겠지.
하지만 이번엔 달랐다. 레인디아는 흔들리는 마음을 다잡고 결심을 굳혔다. 그리고 앞으로 자신의 몸을 어떻게 움직여야 할지 수도 없이 머릿속으로 반복했다.
“흣!”
레인디아는 재빨리 몸을 굽혔다. 에이든의 바지를 거두어내고 그의 발목에 붙어 있던 단도를 낚아챘다. 그대로 바닥을 기듯 도망쳐 그의 뒤에 섰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변주곡은 진혼곡으로 바뀌었다.
지휘봉을 든 것은 레인디아였다.
“허억, 헉……!”
손에 쥔 칼날에 레인디아의 얼굴이 비쳤다. 레인디아는 꿀꺽 침을 삼키며 칼을 바로잡았다. 뒤늦게 상황을 파악한 에이든이 제 발목을 매만지더니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거대한 육체는 끝도 없이 늘어나 존재감을 과시했다.
에이든은 레인디아를 마주 보고 서더니, 저를 향한 칼날을 뚫어져라 바라봤다.
“화가 난 거지?”
에이든이 슥 팔을 벌렸다. 그는 마치 십자가에 박히기 직전의 순교자와 같은 모습으로 다가올 응징을 기다렸다.
“좋아. 찔러. 그래서 디아의 화가 풀린다면, 원하는 만큼 찔러도 돼.”
“……아니야.”
레인디아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니야. 아니라고요! 저, 저는, 당신에게 복수하고 싶은 게 아니란 말이에요!”
에이든은 눈살을 찌푸렸다. 그럼 왜 단검을 빼앗은 것이지? 에이든은 레인디아의 떨리는 숨결과 흔들리는 동공을 눈빛으로 더듬으며 그녀의 속내를 파악하려 했다.
“당신이 그랬죠. 재판이 끝나면……, 저는 자유라고.”
“더는 유효하지 않아.”
에이든이 다가오려 하자 레인디아가 검을 다잡으며 소리쳤다.
“다가오지 말아요!”
그럼에도 에이든은 성큼성큼 그녀에게 걸어왔다. 레인디아는 뒷걸음을 치다 칼날을 제 목에 겨누었다.
‘당신을 찌르다니. 그런 게 가능할 리 없잖아요.’
레인디아는 그렁그렁해진 눈으로 에이든을 바라봤다. 이건 효과가 있었는지 에이든이 우뚝 멈추었다.
“떠날 거예요. 내 의지로 당신을 영원히 떠날 거예요!”
에이든은 미동 없이 굳은 채 레인디아를 바라봤다. 모든 감정이 거세된 것 같은 표정이었다. 반면 레인디아는 무기를 든 주제에 오들오들 떨고 있었다. 에이든이 떨고 있다고 생각될 만큼.
“…….”
“…….”
그렇게, 생각했다. 에이든에게 자신의 불안감을 투영한 것이라 생각했으나 착각이었다. 그것은 에이든의 감정이었다. 에이든 역시 꽤나 당황한 모습이었다. 그는 침을 삼키는 것조차 조심스러웠다.
“하지 마, 디아.”
바짝 마른 입 안을 침으로 축인 에이든이 어렵게 입을 열었다.
에이든은 레인디아의 손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그것은 손잡이 8cm, 칼날 길이 17cm의 단검으로 성인 남성이 사용한다면 곰 가죽도 찢을 수 있을 만큼 날카롭게 벼려진 무기였다. 특히나 일주일에 한 번 날을 갈기 때문에 칼끝은 더없이 날카로웠다.
어제가 바로 그날이었다. 에이든은 의식처럼 칼날을 갈던 과거의 자신이 원망스러웠다. 어째서 저토록 날카롭게 다듬은 것인가. 그래, 그때는 저 칼날이 레인디아의 목에 닿을 줄 몰랐으니까.
“다가가지 않을게.”
에이든은 두 손을 낮게 들어 올린 채 천천히 몸을 낮췄다. 서서히 굽던 무릎은 땅을 박차고 달려들 수 있을 높이에서 멈췄다.
레인디아의 체구와 힘을 가늠했을 때, 살가죽을 뚫는 건 불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조금 전 제 발목에서 검을 빼앗아간 움직임은 예상치 못했다. 그녀는 몹시 흥분한 상태였다. 그렇다면 평소 이상의 힘을 낼 수 있었다. 지금 달려가면 막을 수 있을까?
하지만 저 역시 흥분한 상태라면?
레인디아가 제 목에 칼을 겨눈 모습을 본 순간부터, 어쩐지 손끝에 감각이 희미해졌다. 에이든은 자신의 몸 역시 떨리고 있음을 인정했다. 지독한 현기증이 일었다. 배 속의 장기가 엉망으로 뒤엉키는 듯했다.
“일단, 칼부터 내려놔.”
“시, 싫어요. 그럼 제게 다가올 거잖아요……!”
레인디아는 칼날을 더 높이 들어 올렸다.
털썩.
에이든은 지면을 박차고 튀어 나갈 생각을 포기한 채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더욱 고분고분해진 목소리로 레인디아를 설득했다.
“……그곳은 급소야. 찔리면 죽어.”
급소라는 말에 레인디아의 어깨가 흠칫 떨렸다. 그러나 레인디아는 여전히 자신의 목에 겨눈 칼날을 바로 하지 않았다.
“나, 날 따라오면요, 그땐 정말 죽어버릴 거예요.”
“…….”
“그것만이 당신과 내 지긋지긋한 악연을 끊을 유일한 방법이니까요……!”
스스로 목숨을 끊겠다고?
흥분한 사람의 머리에서 나온 발상치곤 탁월했다.
에이든은 순수하게 감탄했다.
그리고 아주 순수하게 두려웠다.
인간은,
반드시,
죽는다.
누구도 거스를 수 없는 종의 법칙 앞에서 에이든은 납작 엎드렸다. 그는 감히 레인디아를 마주 보지도 못한 채 푹 고개를 떨궜다. 이 순간, 진정으로 신의 존재를 믿게 됐다. 제 앞에 복수의 화신이 재림했으니. 그 잔혹한 여신께서 자신의 목숨을 바쳐 불경한 이를 복종시키고자 하노니.
“……디아, 인간은 죽어. 죽은 건 되돌릴 수 없어.”
“알아요. 누구보다 잘 알아요.”
“팔이라도 묶을까? 원하는 대로 할게. 그런 짓은 하지 마.”
보이지 않는 사슬이 제 몸을 칭칭 감은 듯했다. 에이든은 감각이 희미해진 두 팔을 들어 겨우 제 목덜미에 얹었다. 정말로, 레인디아가 목에 칼날을 겨누고 있는 것인가? 믿기지가 않았다. 언제나, 죽고자 하는 것은 자신이었기에.
네가 이러면 안 되는 거잖아?
“제가 바라는 건, 당신이 그대로 멈춰 있는 거예요.”
레인디아는 천천히 뒷걸음쳤다.
“……그래. 꼼짝 안 할게.”
“내가 죽길 바란다면 가까이 오세요. 시체가 된 내 몸에 키스를 하든, 끌어안고 잠이 들든, 신경 쓰지 않을 테니까요. 아니, 차라리 시체가 낫지 않겠어요? 당신이 원하는 건 그 여자를 닮은 인형일 뿐이니까!”
레인디아가 부르짖었다.
어째서인가. 에이든을 떠나야 하는 순간, 그를 벗어나려고 마음먹은 순간, 애써 외면해 온 질투심이 스멀스멀 기어 나오는 까닭은.
“……디아, 나는,”
“고개 들지 말아요! 더는 아무 말도 말아요! 제가, 여길 떠날 때까지 그대로 멈춰 있으란 말이에요……!”
레인디아는 한 손으로 단검을 붙잡아 제 목에 겨눈 채 다른 손을 등 뒤로 뻗었다. 그녀는 물건에 걸려 넘어지지 않게 뒤로 뻗은 손을 휘적거렸다. 천천히 걸어간 끝에 문에 등이 닿았다. 레인디아는 문손잡이를 돌려 열었다.
끼이익.
문이 열리는 소리에 에이든의 큰 몸이 들썩였다. 그러나 그는 마치 잘 훈련된 개처럼 꿈쩍하지 않았다. 아니, 오랫동안 동굴에 갇힌 채 지내 눈 부신 빛이 두려운 은둔자처럼 고개를 처박았다.
처음으로, 레인디아는 눈앞의 에이든이 초라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그런 감상에 젖을 때가 아니었다.
레인디아는 재빨리 문을 닫고 복도를 달렸다.
“……아니야, 디아.”
에이든은 바닥에 고개를 박은 채 중얼거렸다.
한때는 레인디아의 분노마저 달콤하게 느껴지던 적이 있었다. 그러나 이젠 아니었다. 쫓아가면 죽을 거라고? 그렇다면 차라리 저 칼날이 제 심장을 찔러주길 바랐다. 그래서 이 영원히 끝나지 않을 고통으로부터 해방해 주길 바랐다.
그러나 잔혹한 여신은 구원을 바라는 이의 바람을 들어주지 않고 더욱 멀어질 뿐이었다.
“나는, 살아 있는 너를 원해.”
에이든의 목소리가 카펫에 부딪혀 바스러졌다.
목을 감싼 손이 덜덜 떨렸다. 그는 천둥소리에 겁을 먹고 이불에 숨은 아이처럼 그렇게 한참을 웅크리고 있었다.
멀어지는 발소리를 그저 듣기만 했다.
무력함이 그의 영혼을 졸라맸다.
“허억, 헉. 헉……!”
“세상에, 아가씨. 무슨 일이세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리던 레인디아는 코너를 나오던 시녀들과 부딪힐 뻔했다. 시녀들은 레인디아의 손에 들린 단검을 보더니 소스라치게 놀랐다. 레인디아는 머뭇거리다 바닥에 살그머니 단검을 내려놨다.
“아, 아가씨! 레인디아 아가씨!”
등 뒤에서 저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레인디아는 쫓기는 사람처럼 달리고, 또 달렸다. 바닥에 엎드린 채 쓸쓸히 홀로 남은 에이든의 모습을 어떻게든 머릿속에서 떨쳐내려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