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우리를 구원하는 것
‘아직도 믿기지 않아. 그 아이가 에이든 님이었단 사실이…….’
휘황찬란한 본궁을 벗어나 구동궁에 들어서자 이곳의 음울한 분위기가 한층 짙게 다가왔다. 엉성하게 뻗은 나뭇가지가 마차 천장을 슥슥 긁어대는 소리는 소름이 끼칠 정도였다.
창밖으로 구동궁의 뾰족한 첨탑이 보였다. 저곳에서 홀로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에이든이 떠오르자 가슴이 저며왔다.
레인디아는 시선을 바로 했다.
그날도 이렇게 맑은 하늘 아래, 쓸쓸한 바람이 뺨을 스쳐왔다. 계절은 겨울이었다.
* * *
8년 전, 성축일 당일.
레인디아는 태어나 처음 하이락을 방문했다. 그녀의 나이 열여섯 살 때의 일이다. 자비로운 백작 부인은 성축일을 기념하며 레인디아에게도 선물을 건넸다.
“성축일 기간에는 수도에 머물 거란다. 레인디아, 너도 오늘 하루 정도는 마음껏 쉬려무나. 내일부터 다시 바빠질 테니. 아, 그리고 이건 내가 주는 선물이야. 하녀복을 입고 돌아다니는 건 보기 좀 그렇잖니?”
“세상에, 정말 예뻐요. 감사합니다, 백작 부인.”
열여섯에 처음으로 입어본 외출용 드레스였다. 레이스며 장식은 하나도 달리지 않은 단출한 디자인이었지만 레인디아의 눈에는 그 어떤 드레스보다 화려해 보였다.
‘나한테는 너무 과분한 것 같아.’
거울 앞에 서자 맞지 않는 옷을 입은 것처럼 몸이 삐거덕댔다. 역시 제게는 하녀복이 제일 잘 어울렸다. 레인디아는 어색하게 몸을 꼬다 옷을 벗으려 했다.
“얘, 레인디아. 나 대신 심부름 좀 해 줄래?”
백작가에서 근무한 이래 처음으로 받은 휴가 날, 다른 하녀가 백작 부인의 심부름을 부탁했다.
“휴가 날 이런 부탁하기 미안하지만, 정말로 일손이 부족해.”
“네. 물론이죠. 어차피 할 일도 없었는걸요. 그런데 옷을 갈아입어야 해서…….”
처음 얻은 휴가였지만 사실 레인디아는 가고 싶은 곳도, 하고 싶은 일도 없었다.
“괜찮아. 그냥 그대로 다녀와.”
레인디아는 황급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필요한 물건이 적힌 메모를 받아 밖으로 나섰다. 성축일 거리는 각지에서 도착한 관광객들로 붐볐다.
“가죽 공방은 골목에 있구나.”
찾아야 할 가게가 여기저기 흩어져 있어 물건을 절반쯤 구했을 땐 노을이 번지고 있었다. 레인디아가 구입한 물건을 챙겨 어두운 골목길을 빠져나오는데, 가래 낀 목소리로 쑥덕이는 대화가 귀에 들어왔다.
“정말로 경비대가 확인 안 하는 것 맞아?”
“그렇다니까. 봐, 이게 마차 안에 무엇이 들었는지 보증해 주는 도장이야. 이 도장만 찍혀 있으면 검문 없이 바로 통과라고.”
“참 대단한 도장인가 보군. 이 안에 들어 있는 귀한 도련님을 포도주로 탈바꿈할 만큼. 큭큭.”
“쉿. 조용히 해. 누가 듣겠어.”
레인디아는 벽에 등을 붙인 채 흡 숨을 들이켰다. 그리고 그림자가 삐져나갈까 봐 옆으로 살금살금 몸을 움직였다. 다행히 그들은 레인디아의 존재를 눈치채지 못했다.
“이제 출발하자고. 더 지체해선 안 돼.”
“아아, 그래.”
찰싹! 채찍 소리와 함께 바퀴가 굴러갔다. 그제야 레인디아는 빼꼼 고개를 내밀었다. 아이를 납치한 마차가 서서히 멀어지고 있었다.
“시, 실례합니다. 도움이 필요해요.”
“무슨 일입니까?”
“남자 두 명이 아이를 납치했어요. 통행증에 어떤 도장이 찍혀 있는데, 그 도장만 있으면 내용물을 확인하지 않고 바로 통과라고 말하는 걸 들었어요.”
레인디아는 거리로 나가서 가까이 있는 경비원에게 이 사실을 고했다.
“아이코, 저런. 그런 일이 있었습니까? 큰 용기를 내셨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나눌 법한 얘기는 아닌 듯하고. 자리를 옮길까요?”
경비원이 가리킨 곳은 야외에 가판대를 설치한 술집이었다. 그가 레인디아에게 야릇한 시선을 보냈다.
“하하, 다름 아니라 이제 곧 교대 시간이라.”
“아, 아이가 납치되었단 말이에요!”
“아가씨, 그 도장이 얼마나 대단한 건진 몰라도 걱정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겁니다. 성축일 기간엔 치안 유지를 위해 더 엄격히 검문을,”
“노, 놓으세요!”
레인디아는 제 팔뚝을 쓰다듬는 경비원의 손을 퍽 쳐냈다. 그리고 이게 무슨 짓이냐 소리치는 경비원을 뒤로한 채 달리기 시작했다. 수많은 인파를 헤집고 마주친 경비원마다 붙잡고 상황을 설명했지만 그녀의 말을 진지하게 들어주는 이는 없었다.
“납치되었다는 아이와 어떤 관곕니까? 혈연관계입니까?”
“아, 아니요. 저는 그냥……, 목격자예요.”
이번 경비원은 유난히 추궁하는 투로 따져 물었다. 그래서 레인디아는 거짓말을 하는 아이가 된 듯한 기분이었다.
“흐음. 정확한 증거 없이 아가씨의 말만 믿고 성을 뒤질 수는 없습니다.”
경비원의 얼굴엔 피로와 권태가 묻어났다.
“마, 말씀드렸잖아요. 그 통행증을 갖고 있으면 검문을 통과할 거라,”
“자꾸 이러시면 곤란합니다. 가뜩이나 관광객을 통제해야 해서 인력이 부족하단 말입니다. 애초에 혈연관계도 아닌 아가씨께서 남 일에 왜 이리 신경을 쓰시는 건지 이해가 안 됩니다마는.”
그건, 아무도 그 아이를 구해 주지 않으니까요!
레인디아는 목 끝까지 차오른 서러움을 집어삼켰다.
“아가씨께선 할 만큼 하셨습니다. 만약 정말 아이가 납치된 거라면 검문 단계에서 확실히 잡을 수 있을 테니 오늘은 이만 들어가시지요.”
경비원은 그렁그렁한 레인디아의 눈을 보더니 마지못해 위로의 말을 건넸다. 그래. 이 남자에게 화를 낸다 한들 무슨 소용일까. 레인디아는 푹 한숨을 쉬었다.
“……네. 곤란하게 할 생각은 아니었어요. 이 인원을 통제하느라 충분히 바쁘실 텐데, 죄송합니다.”
레인디아는 서둘러 젖은 눈을 훔치고 등을 돌렸다.
경비원들은 하나같이 입을 모아 말했다. 아이가 납치되었다는 명확한 증거를 가져오라고. 그 명확한 증거란 게 무엇일까? 아이의 시체일까? 일이 벌어지고 나서야 부랴부랴 수사를 진행할까? 그런 상상을 하자 목구멍이 조여드는 듯한 통증이 일었다.
“……안 돼.”
이대로 내버려 두면 안 돼.
레인디아는 곧장 성문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찰랑거리는 금발이 납치범의 손아귀에 우악스럽게 붙잡혔다. 레인디아는 나뭇가지에 대롱대롱 매달린 번데기처럼 힘없이 흔들렸다.
“골목에서 누군가 지켜보는 기분이 든다 했어.”
“윽……!”
“쥐새끼가 따라붙었군.”
“노, 놓으세요……! 다, 당신들이, 아이를 납치했다고, 이미 경비대에 전부 얘기했어요!”
“하?”
납치범이 눈을 부라렸다.
“곧, 당신들을 잡으러 올 거예요. 그, 그러니, 아이를 놓아주세요……! 지금이라도 용서를 빌면,”
“푸하하!”
레인디아의 보잘것없는 협박에 납치범이 크게 웃어 젖혔다. 그러더니 레인디아의 몸을 힘껏 밀쳤다.
깡!
레인디아는 철장에 머리를 부딪쳤다. 그 순간 징징거리는 이명이 머릿속을 가득 채우고 눈앞에 자글자글한 얼룩이 번졌다.
“무슨 개소리를 하는 거야! 경비대가 그 말을 믿었으면 너 같은 계집년이 혼자 쫓아오지 않았겠지! 이거 완전 미친년 아니야?”
“아, 으, 아…….”
“허세 부리긴.”
일시적으로 앞이 보이지 않아 레인디아는 손바닥으로 바닥을 더듬거렸다. 납치범은 그런 레인디아의 손등을 콱 짓밟았다.
“악!”
겨우겨우 앞이 보일쯤, 얼굴로 다가오는 검은 부츠를 마지막으로 레인디아의 기억이 끊겼다.
퍽!
“……끄으.”
멀리 있는 횃불에서 흘러나온 빛이 레인디아의 눈꺼풀을 간지럽혔다. 레인디아는 힘겹게 한쪽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심부름 바구니…….’
물건이 담긴 바구니를 내가 어디에 두었더라? 레인디아는 손끝으로 주변을 더듬거렸다. 차갑게 식은 철판의 온도에 그녀는 화들짝 놀라 눈을 번쩍 떴다. 아니, 뜨려 했다. 하지만 걷어차인 반대쪽 눈이 퉁퉁 부어 제대로 떠지질 않았다.
“……여, 여긴.”
그제야 레인디아는 자신이 아이를 납치한 마차를 쫓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마차가 정박한 동안 몰래 문을 따서 아이를 꺼낼 생각이었다. 결국 들키고 말았지만.
“깼어?”
그때, 누군가 물어왔다. 아직 변성기도 오지 않은 앳된 목소리였다. 새우처럼 웅크리고 있던 레인디아는 바닥에 배를 맞댄 채 고개를 들었다. 몸 여기저기가 쑤셔 제대로 일어서지 못할 지경이었다.
눈앞에는 작은 아이가 쭈그리고 앉아 있었다. 눈처럼 하얀 피부와 대비되는 짙은 흑발, 그리고 루비처럼 새빨간 눈을 가진 아이였다. 하마터면 여자아이라 오해할 만큼 고왔다. 마치 거리에서 본 도자기 인형처럼.
‘너무 어려. 열 살? 아니, 아홉 살 정도일까?’
당시 에이든은 열두 살이었지만, 칼라마리가 먹여 온 독약 때문에 왜소한 몸집이었다. 레인디아가 착각한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어쨌거나 열두 살도 무척 어린 나이였다.
“다, 당신이로군요.”
“……나를 알아?”
에이든이 경계하는 눈빛을 보냈다. 레인디아는 어색하게 미소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저들이 아이를 납치했단 얘기를 들었어요.”
레인디아는 힘겹게 몸을 일으켜 에이든 쪽으로 다가갔다.
“괜찮나요? 다친 곳은 없어요?”
레인디아는 조심스럽게 에이든의 몸을 살폈다. 다행히 다친 곳은 없었다. 하기야, 이 작은 몸에 때릴 곳이 어디 있다고. 레인디아는 제 몸의 상처는 까맣게 잊은 채 깨끗한 아이의 몸을 보고 안심했다.
“너, 지능이 모자라?”
“……네?”
뜻밖의 질문에 레인디아는 다소 당황했다.
“아니면 죽고 싶어서 따라온 거야?”
“그, 그게. 저는…….”
레인디아는 자신보다 한참 어린아이의 앞에서 안절부절못했다. 백작 부인의 앞에서 혼쭐이 나던 때와 비슷한 기시감이 들었다.
고맙다는 인사를 바라는 것은 아니었다. 기실, 아이가 이토록 저를 추궁하는 이유도 문득 알 것 같았으니까. 납치범을 때려눕힐 괴력도, 그들을 무력화시킬 무기도, 하다못해 자물쇠를 딸 손기술도 없었다. 레인디아는 그저 저택 안을 반들반들 윤이 나게 닦는 법밖에 알지 못하는 하녀에 불과했다.
‘그러게. 왜 쫓아온 걸까. 정말, 어쩌자고…….’
지금보다 어린 시절, 아마도 눈앞의 아이만 했을 무렵이었나. 밀짚으로 가득 찬 캄캄한 마차 안에서 레인디아는 기도했다. 누군가 어둠 속에 갇힌 저를 구하러 와주길 간절히 꿈꿨다.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지만.
영웅이라도 되고 싶었던 걸까.
아니, 아니야.
그저 내버려 둘 수 없었던 거야.
아무것도 할 수 없단 걸 알면서도, 아무것도 하지 않는 자신을 용서할 수 없었다. 이렇게 쫓아오지 않았더라면 평생 자신을 용서하지 못했겠지.
그래서 손을 뻗었다. 결과는 이 모양이지만.
“또, 똑똑한 편은……, 아니에요.”
레인디아는 푸스스 웃으며 자조했다. 입꼬리를 올릴 때마다 맞은 부위가 욱신거렸다.
“죽을 거야.”
“……네?”
“너도 나도 죽을 거라고.”
“그, 그렇지 않아요. 도망칠 방법이 있을 거예요.”
“아니, 너는 살지도 모르겠어.”
에이든은 시선을 내리깔았다. 레인디아의 시선도 아이와 함께 가라앉았다.
“네? 그게 무슨 말인가요?”
“너를 강간할 거라고 했어.”
화살처럼 내리꽂힌 한마디에 레인디아의 어깨가 들썩였다. 에이든이 슥 고개를 들었다. 레인디아는 여전히 바닥을 바라보고 있었다.
“강간이 뭐지?”
죽이는 건 아닌 것 같은데. 에이든이 눈살을 찌푸리며 중얼거렸다. 무어라 설명해 줘야 할까. 이 어린아이에게.
“……그건요.”
핏기가 가신 입술이 덜덜 떨렸다. 그러나 레인디아는 마치 언제 그랬냐는 듯 평온해진 얼굴을 하고 고개를 들었다. 그녀가 가슴을 꼭 붙잡고 말했다.
“저에게 언젠가 일어날 일이었어요.”
“언젠가 일어날 일?”
“네. 그래서 언제 당하든 딱히 상관이 없는 거죠. 오히려 잘됐어요. 저를 밖으로 데려가면 기회가 생길 테니까요.”
레인디아는 슥 제 발목을 바라봤다. 레인디아와 에이든의 발에는 수갑이 채워져 있었다.
“그때 제가 열쇠를 훔쳐 올게요. 보세요. 이 문, 헐거워서 힘을 주면 열 수 있어요. 다행히 저들은 눈치채지 못한 것 같아요. 그러니 이 수갑만 풀면 우리는 도망칠 수 있는 거죠.”
“강간인지 뭔지를 하고 널 죽이면?”
실로 날카로운 지적이었다.
논파는 불가능해. 그럼에도 레인디아는 활짝 미소 지었다. 자신의 나약함이 아이를 불안하게 만들지 않도록. 지금 이 상황을 타파할 수 있는 건 자신뿐이었다.
약해지면 안 돼. 레인디아는 자신을 격려했다.
“도망칠 수 있어요. 저들도 지금은 잠든 것 같으니 오늘 밤은 아무 걱정하지 말고 푹 자는 거예요.”
“……잠이 안 와.”
에이든은 부루퉁한 얼굴로 대답했다. 처음으로 그 나이대답게 투정을 부리는 모습에 레인디아는 웃음이 나왔다.
“자장가를 불러드릴게요.”
“그런 게 효과가 있어?”
“그러니 오랫동안 구전되는 거겠죠?”
“……들어본 적 없어. 내게 먹힐지도 모르겠는데.”
“저도 누군가에게 불러주는 적은 처음이에요.”
레인디아는 살며시 에이든을 끌어안고 큼큼 목을 가다듬었다. 그리고 꿈속에서 들었던 노랫말을 찬찬히 따라 불렀다. 품 안에 쏙 들어올 만큼 작디작은 아이의 등을 다독이며……. 그러다 먼저 잠든 것은 레인디아였다.
에이든이 잠든 레인디아의 몸을 흔들었다.
“일어나.”
“……읏?”
“열쇠.”
“……이, 이걸 어떻게.”
에이든이 건넨 것은 녹이 슨 열쇠였다. 레인디아는 열쇠를 멀거니 보다가 재빨리 아이의 발목을 살폈다. 억지로 발을 비틀어 뺀 것인지 발목과 발등에 핏물이 맺힐 만큼 까져 있었다.
만약, 아이가 자칫 들키기라도 했더라면.
심장이 철렁 내려앉을 때였다. 에이든이 구석에 둔 수갑에 발을 밀어 넣었다.
“아, 안 돼. 그만두세요! 쓸려서 피가 나잖아요. 왜 다시 수갑을 차는 거죠?”
레인디아가 아이의 손을 저지했다.
“나는 여기 있어야 해.”
“그게 무슨 소리예요?”
“나는 여기서 죽어야 해. 내가 살아서 나타나면 모두가 곤란해질 뿐이야.”
레인디아는 고개를 저으며 아이의 손에서 완전히 수갑을 빼앗아갔다. 대체 누가 이 어린아이의 죽음을 바란단 말인가? 그런 비정한 어른이 존재할 리 없었다.
아니, 그러길 바랐다.
“사라진 아이가 시체로 돌아오는 일이 더 곤란할 거예요!”
레인디아는 목소리를 낮춰 소리쳤다. 그녀는 재빨리 자신의 수갑을 풀었다.
“자. 어서 나가요.”
“나를 데려간다고 해도 방해만 될 거야. 봐, 발목을 다쳐서 제대로 걷기 힘들어.”
레인디아는 말도 안 되는 고집을 부리는 아이를 번쩍 안아 들었다. 몸이 붕 떠오르자 에이든은 본능적으로 레인디아의 목에 팔을 감았다. 고개를 들자 레인디아가 싱긋 미소 지었다.
“그럼 내가 안고 갈게요. 그럼 된 거죠?”
“……500m도 못 가서 쓰러질걸.”
“이래 봬도 힘쓰는 일은 자신 있어요.”
레인디아는 에이든을 단단히 받쳐 안은 채 숲길을 달리기 시작했다. 칼날 같은 바람으로부터 품에 안은 에이든을 지켰다.
“이름이 뭔가요?”
“모르는 편이 나아.”
“후후. 그래요.”
“왜 웃어?”
분명 숨이 벅차서 헐떡이고 있는데, 레인디아의 만면엔 웃음기가 가득했다. 드디어 미친 건가? 제정신이 아닌 줄은 알았지만. 에이든이 생각할 때였다.
“도망치는 데 성공했잖아요! 우리는 자유예요, 모르겠나요?”
“……모르겠는데. 이러다 따라잡힐 수도 있어. 지금이라도 날 버리고,”
“절대로 그러지 않을 거예요.”
레인디아는 에이든의 몸이 으스러지도록 끌어안았다. 그녀의 부드러운 가슴에 아이의 뺨이 뭉그러졌다. 에이든은 눈살을 찌푸리다 될 대로 되란 듯이 제 몸을 맡겼다.
“나중에 후회해도 소용없어.”
“후회할 거였다면 쫓아오지도 않았어요.”
레인디아의 손이 부드럽게 아이의 등을 다독였다. 정말로 하나도 힘이 들지 않았다. 오히려 시간이 흐를수록 힘이 샘솟았다. 레인디아의 삶에 있어 처음으로 느껴본 해방감이었다.
두 사람은 동굴에 몸을 숨겼다.
“힘이 솟는 기분은 일시적인 착각에 불과해.”
“으, 으으…….”
“상식적으로 너처럼 작은 몸집의 여자가 아이를 둘러업고 눈보라를 뚫고 나갈 수 있을 것 같았어?”
“죄, 죄송해요. 저는…….”
성축일을 기념하듯 어둑해진 하늘에서 퐁퐁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이윽고 살을 에는 칼바람이 휘몰아쳤다. 이런 날씨라면 괴한들의 추격을 따돌릴 수 있겠지. 문제는 레인디아와 에이든도 고립되었단 점이었다. 더욱이, 레인디아는 급격한 몸살을 앓기 시작했다.
“기다려. 무언가 몸을 덮을 것을…….”
“끼잉!”
그때, 두 사람이 몸을 숨긴 동굴 안에서 짐승 우는 소리가 들렸다. 에이든은 바위 뒤에 웅크린 새끼 늑대를 발견했다. 죽여서 가죽을 벗겨 쓰기엔 크기가 너무 작았다.
“자.”
“아기 늑대네요. 후후. 귀여워라.”
에이든은 레인디아의 몸 위에 새끼 늑대를 얹었다. 제 몸 위에서 바르작대는 새끼 늑대를 보더니 레인디아가 헤실헤실 웃었다. 저 여자는 왜 자꾸 멍청하게 웃는 걸까. 하지만 저 실없는 웃음이 사라진다면, 에이든은 견디지 못할 것 같았다.
어느새 레인디아의 한쪽 눈은 부기가 빠지고 다른 상처들도 옅어졌다. 그러나 계속 체온이 뚝뚝 떨어졌다.
“안고 있어. 체온을 보존해야지.”
“늑대의 흔적은 없었는데……, 왜 이 아이 혼자 남겨진 걸까요?”
바르작대는 새끼 늑대는 털도 푸석하고 우는 소리에도 힘이 없었다.
“부모가 사냥을 당해 죽었거나, 너무 약해서 버려졌겠지.”
“……가여워라.”
“새끼라 다행이야. 조금만 컸다면 이빨을 드러내서 이렇게 쓰지 못했을 테니까. 죽여야 했을지도 몰라.”
“이곳에 오길 잘했어요. 우리가 오지 않았다면 이 아이는 계속 혼자 남아 있었겠죠? 얼마나 무서웠을까. 외로웠을 거예요.”
“그건 짐승이야. 감정 따위 느끼지 못해.”
두 사람의 대화는 전혀 이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에이든은 신경 쓰지 않았다. 레인디아는 저체온증에 시달리느라 제정신이 아니었다.
한편 레인디아는 그녀 나름대로 깊은 고민에 잠겨 있었다. 자세한 이유는 몰라도 눈앞의 아이는 살기를 포기한 모습이었다. 어째서일까? 울고불고 어리광을 부려도 이상치 않을 나이일 텐데. 마치 죽음을 앞둔 노인처럼 초연한 시선으로 제게 닥친 불행을 방관했다. 남의 일이라도 이 정도로 무감할 순 없으리라.
“……있잖아요.”
레인디아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에이든은 듣지 않는 척, 그녀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제가, 오랫동안 눈을 뜨지 않으면 말이에요.”
레인디아는 자신의 생명이 꺼져감을 느꼈다. 잘은 모르겠지만 만약 죽음의 문턱이 가까이 드리운다면 지금 같은 기분이겠지.
“이 새끼 늑대를 데리고 남쪽으로 걸어가세요.”
그런데도 레인디아가 힘을 낼 수 있던 까닭은 품 안에 아이를 안고 있어서였다. 자신이 아니면 지킬 수 없는 존재. 지켜야만 하는 존재. 그것이 있어서 여기까지 버틸 수 있었다. 그러니 이 새끼 늑대가 아이에게도 그런 버팀목이 되어주길 바랐다.
“그 방향으로 가면, 수도가 나올 거예요.”
“가고 싶지 않아.”
에이든이 자신 없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자신이 향하는 길엔 아무것도 없을 거라 확신하는 표정이었다.
“저는, 그레제 백작가의 영애예요. 그러니 틀림없이 저를 찾으러 온 사람을 만날 수 있을 거예요.”
정말 질 나쁜 거짓말이란 걸 알지만, 어떻게든 아이에게 희망을 주고 싶었다. 하필 성축일 기간에 이토록 많은 거짓말을 할 게 무어람. 레인디아는 힘없이 자조했다.
“꼭, 그러셔야 해요. 알겠나요?”
“……모르겠어.”
에이든은 처음으로 겁에 질린 표정을 지었다.
“왜 그렇게까지 하면서 살아남아야 해? 돈을 원해? 그래서 날 구하려는 거야? 미안하지만 보상금이라면 줄 수 없,”
“아니요.”
차분한 목소리가 아이의 다급함을 부드러이 진정시켰다. 레인디아는 힘겹게 고개를 돌려 에이든을 바라봤다.
“당신이 살기를 원해요.”
“왜?”
“누군가 살아가길 바라는 데 이유가 필요하진 않아요.”
어쩌면, 눈앞의 아이가 아닌 자신에게 해 주고 싶은 말이었는지도 몰랐다. 사창가에서 힘든 시간을 보냈던 어린 시절의 자신에게.
그저 살고 싶어.
나는 여기서 죽을지도 몰라.
하지만 눈앞의 아이는, 너는, 계속 살아가 줬으면 좋겠다.
“안 될까요?”
레인디아는 바닥을 더듬거리며 아이의 손가락에 제 손가락을 걸쳤다. 에이든은 작은 손가락을 오므려 레인디아의 손가락을 움켜쥐었다.
“너도 같이 가.”
“좋아요.”
레인디아는 푸스스 웃었다.
“하지만 피곤해서, 조금……, 자야 할 것 같아요. 걱정하지 말아요. 내일은 꼭 눈을 뜰게요. 그렇게 내일이 오면…….”
내일이 오면 아이가 저를 두고 무사히 고향에 도착하길 바랐다. 애타게 아이를 기다릴 부모의 품으로.
그곳이 네가 있어야 할 곳이니까.
계속 앞으로 나아가줘.
이 잔혹한 운명을 딛고 일어나는 거야.
* * *
“레인디아 아가씨, 도착했습니다.”
마차가 멈췄다. 마부의 말에 레인디아는 화들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이 일을 다시 떠올린 게 얼마 만인지. 거의 처음이었다.
그렇게 다시 눈을 떴을 땐 동굴에서 멀리 떨어진 마을의 여관에 누워 있었다. 우연히 그곳을 지나치던 상단이 그녀를 발견해 목숨을 구해 준 것이다.
‘아가씨, 정신이 드나?’
‘……여기는.’
‘숨을 쉬지 않아서 시체인 줄 알았네.’
‘구, 구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혹시 근처에 어린아이는 없었나요?’
‘으음. 아이는 못 봤고, 전복된 마차는 봤네. 사내 두 명이 타고 있었는데 눈보라를 뚫고 가다 바퀴가 빠졌는지……. 이미 목숨을 잃은 상태더군. 아마도 사냥꾼이었던 모양이야. 마차 안에 빈 철창만 달랑 들어 있었거든. 참 이상하지, 이곳엔 마땅한 사냥터도 없을 터인데. 쯧쯔.’
불행 중 다행히도 납치범들은 눈보라에 휩쓸려 목숨을 잃고 말았다. 레인디아는 정말로 기적같이 목숨을 건졌다. 그렇게 힘겨운 몸을 이끌고 하이락에 도착했을 때, 백작 부부는 이미 수도를 떠나 백작령으로 돌아간 후였다.
그 아이는 무사한 것일까.
그러나 죽었다 살아난 레인디아에겐 갚아야 할 빚이 남아 있었다. 그렇게 그녀는 아이를 끝까지 책임지지 못했단 죄책감을 가슴에 간직한 채, 속죄의 길을 향해 나아갔다. 누구도 반겨주지 않는 백작령으로.
‘그 아이는, 에이든 님은, 이곳으로 돌아온 거였구나.’
레인디아는 삭막한 구동궁의 전경을 바라봤다.
틀림없이 다정한 부모가 아이를 기다려줄 거라고, 그런 헛된 꿈에 사로잡혀 있던 것 같다. 살기를 거부하는 아이의 모습에서 집안이 화목하지 않음을 유추할 수 있었는데도.
등을 떠민 것이다.
살라고, 부디 살아달라고.
‘내가 벼랑 끝으로 내몬 것이나 다름없어. 아아, 얼마나 괴로웠을까.’
카타리나가 들려준 황가의 과거는 너무도 참혹했다. 그 폭풍의 중심에서 홀로 견뎠을 에이든을 떠올리니 더욱 참담한 기분이 들었다.
“에이든 님?”
레인디아는 구동궁을 한참 헤매며 에이든을 찾아야 했다. 그가 침실에서 얌전히 그녀를 기다리지 않았던 까닭이다.
‘아픈 몸으로 대체 어디에 계시는 거지?’
레인디아는 더욱 애가 탔다.
“에이든 님!”
에이든은 복도 끝에 있는 응접실에 홀연히 서 있었다. 레인디아가 예정보다 이르게 도착하자 다소 놀란 표정이었다. 그러나 이윽고 크게 뜬 눈이 평소처럼 가느스름해졌다.
“두고 간 것이라도 있어? 아니면 필요한 것이라든지.”
에이든은 레인디아가 다시 돌아가는 것을 전제로 말했다. 어딘지 쓸쓸함이 묻어나는 표정에 가슴이 조였다. 예전이라면 눈치채지 못했겠지. 한 번도 에이든을 제대로 마주한 적이 없었으니까.
“돌아가지 않아요.”
레인디아는 고개를 저으며 에이든의 앞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힘껏 그를 안아주려는데 벽에 걸린 붉은 눈동자와 시선이 마주쳤다.
“……저건.”
“아.”
에이든은 짧게 탄식하며 벽 쪽으로 몸을 돌렸다. 두 사람이 바라본 곳에는 은빛 털을 가진 늑대 박제가 걸려 있었다. 당장이라도 벽을 뚫고 튀어나올 것처럼 생기가 느껴졌다.
‘저 늑대는.’
레인디아의 기억보다 훨씬 자라 있었지만, 틀림없이 그날 동굴에서 발견한 늑대였다. 새끼가 아닌 완전한 성체였다. 그렇다는 건 이만큼 자랄 때까지 에이든의 곁에 있어 줬단 것일까? 조금 안심이 되는 한편 목만 덩그러니 남아 박제로 남은 모습은 섬뜩했다.
“털이 곱지?”
에이든은 찬찬히 잘린 늑대 머리를 바라봤다.
“길들인 늑대야. 완전한 가축화는 어렵지만 새끼 때부터 사람 손을 타면 짐승이라도 어느 정도 길들지.”
레인디아는 힐끗 에이든의 옆모습을 올려다봤다. 그는 추억에 잠겼다기보단 무감각한 눈빛으로 늑대를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결국 시간문제야.”
“시간문제라니요?”
“짐승은 언젠가 인간에게 이를 드러내고 말아.”
불길한 기운이 레인디아를 엄습했다.
“이 늑대가 누군가를 공격했나요……?”
“제레미가 친구들을 끌고 와 늑대를 자극했지. 허세를 부리며 위협했어. 그러다 결국 한 명이 팔을 물렸고. 상처는 아주 경미했지만 말이야.”
에이든은 천천히 늑대 앞으로 다가갔다.
성체 늑대의 이빨에 물렸는데 가벼운 상처로 끝난 정도라면, 이 늑대는 틀림없이 본능을 억제할 만큼 사람과 깊이 교류했단 소리였다. 하지만 진실이 어떻든 인간이 보기엔,
“하지만 야성은 길들일 수 없단 사실을 보여주기엔 충분한 상처였지. 인간을 문 짐승에게 기회는 없어.”
길들일 수 없는 야성.
어째서인지 에이든은 그 말에 동의하지 않는 듯했다. 그러나 인간을 문 짐승에게 기회가 없단 사실을 말하는 덴 흔들림이 없었다.
“늑대를 죽인 건 나야.”
“……네?”
“다른 사람의 손에 죽느니 내가 죽이는 편이 맞다고 생각했어. 이건 내 소유물이었으니, 처리하는 것도 주인인 내 역할이어야 하지.”
에이든은 늑대에게 이름조차 지어주지 않았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름을 지어주지 않았다고 해서 정말로 단순한 소유물로 여기고 있었을까?
레인디아는 늑대가 성체가 되는 기간과 에이든의 나이를 유추해 봤다. 어림잡아도 열네 살에서 열다섯 살 사이에 일어난 일인 듯했다. 늑대는 그 짧지 않은 시간 동안 그와 함께해 온…… 가족이었을 것이다.
“그날 처음으로 짐승에게도 마음이 있을지 모른단 생각이 들었어. 총구를 겨누면 순진한 눈으로 나를 올려다봐. 자기한테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처럼 말이야. 하지만 아이를 쏠 수는 없잖아.”
바닥을 보며 중얼거리던 에이든이 슥 고개를 들었다.
“늑대는 쏴도 돼.”
에이든이 흔들림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나 그의 붉은 눈동자는 틀림없이 흔들리고 있었다.
“그게 인간과 짐승의 다른 점이지. 짐승을 길들이고 죽일 수 있는 건 인간이 누리는 특권이야. 그 덕에 이렇게 질 좋은 가죽을 얻게 되니까.”
에이든이 팔을 들었다. 그의 손가락이 유려하게 늑대 털 사이를 파고들었다. 문득, 레인디아는 어린 시절 사창가에서 제 몸을 만지던 마담의 손길이 떠올랐다. 그녀는 인간인 레인디아의 몸을 물건 만지듯 대했다.
반면, 에이든은…….
무감정한 목소리와 달리 늑대의 털을 쓰다듬는 그의 손길은, 마치 살아 있는 생명을 만지는 듯한 조심스러움이 묻어났다. 그 선명한 차이가 기어코 눈물샘을 자극했다.
그는 괴물이 아니었다. 단지, 오랫동안 방치되어 타인과 교류하는 법을 모르는, 자신의 감정을 제대로 표출할 줄 모르는, 어린아이의 영혼에서 성장이 멈춘 것뿐이었다.
“에이든 님, 저는……, 당신에게 이런 일들이 일어날 줄 몰랐어요. 그래서, 다 제 잘못 같아요. 제 잘못이에요…….”
무책임하게 살아가라 했던 과거의 못난 자신이 원망스러웠다. 레인디아는 두 손으로 입을 감싸고 흐느꼈다. 에이든은 털을 쓰다듬던 것을 멈추고 레인디아의 앞으로 다가왔다.
“백모님이 내 얘기를 해 줬겠지?”
에이든의 물음에 레인디아의 어깨가 들썩였다. 에이든은 엄지로 레인디아의 눈물을 거두어갔다.
“……죄송해요. 직접 물어볼 수 없었어요. 저는,”
“쉬. 괜찮아. 오히려 기뻐. 디아가 나에 대해 알고 싶어 했다는 점이.”
에이든은 두 팔로 레인디아를 감싸 안았다. 레인디아는 팔 안에 전부 담기지도 않는 에이든의 몸을 어떻게든 끌어안으려 애썼다. 그 작았던 아이가 언제 이렇게 자란 것일까. 그러면서도 에이든의 상처를 건들까 봐 조심스러웠다.
“왜, 왜 더 일찍 말해 주지 않은 건가요?”
“우리의 첫 만남 말이야?”
에이든이 고개를 갸웃했다. 레인디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에이든은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다 입을 열었다.
“우리가 다시 만나고 어느 정도 시간이 흘렀을 땐, 나의 나약한 부분을 보여주고 싶지 않았어. 틈을 보이면 디아가 도망칠 거라 생각했으니까.”
타인에게 약점을 보이고 싶지 않다. 에이든다운 대답이었다. 그러나 레인디아는 더 이상 타인이 아니었다. 이미 서로를 나누는 경계가 흐릿해져 어디부터가 그의 고통이고 어디까지가 자신의 고통인지 구별이 되질 않았다.
에이든의 모든 것을 품에 안아주고 싶었다.
“계속 에이든 님을 오해할 뻔했어요.”
레인디아의 절실한 목소리에 에이든은 눈을 가늘게 떴다.
오해라.
틀린 말은 아니야.
내가 여태 너에게 한 행동은 제정신인 인간이라면 절대 하지 않을 짓이었지.
그렇다고 과거를 후회하지도 않았다. 에이든은 다시 그때로 돌아간다 해도 똑같은 짓을 반복했을 것이다. 자신은 그런 인간이었으니.
“그동안, 얼마나 혼자 괴로웠을지…….”
레인디아는 말끝을 흐렸다.
안타까움으로 물들어가는 새카만 눈동자 앞에서 에이든은 유순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레인디아는 아마도 자신이 키우던 늑대를 죽이며 슬퍼했을 거라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정말로 아무렇지 않았어, 디아. 하지만 네가 나를 가여워해 주는 건 기뻐.’
비로소, 에이든은 괴물은 사랑받을 수 없다는 단순한 진실을 깨달았다. 조금이나마 인간성을 보여줘서 연민을 얻을 수 있다면, 그렇게 너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다면, 기꺼이 연기해 볼까 해.
드디어, 에이든의 오랜 기다림이 결실을 맺는 순간이었다.
너와 내가 진정으로 하나가 되는 것.
“이제 괜찮아. 디아가 곁에 있잖아.”
에이든은 한껏 몸을 낮춰 레인디아의 목덜미에 얼굴을 파묻었다. 그러곤 그녀의 품에 안기지 못할 만큼 거대해진 몸을 유순한 양처럼 비벼댔다. 이 순간 에이든은 양의 거죽을 쓴 새카만 늑대였다. 레인디아의 눈에는 가여운 아이처럼 보였겠지만.
“에이든 님…….”
디아. 나를 더 가엽게 여겨줘.
너를 복종시킬 수 없다면, 차라리 나를 동정하게 만들어서 영원히 붙잡아두고 싶어. 어떠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나의 목숨이라도 내놓겠어.
에이든은 레인디아가 바라는 이상적인 모습을 연기했다.
“사실 과거를 밝히지 못한 가장 큰 이유는, 그 모든 걸 털어놨을 때도 거부당하면 견딜 수 없을 것 같았어. 두려웠던 것 같아. 우리의 첫 단추가 좋지는 않았잖아.”
“아니에요. 이젠 괜찮아요.”
레인디아는 에이든의 목덜미를 부드러이 어루만지며 그의 머리에 입을 맞췄다. 에이든은 눈을 감은 채 레인디아의 입맞춤을 즐겼다.
“절대 에이든 님을 떠나지 않을 거예요.”
에이든이 고개를 바로 하자 더없이 화사한 미소가 그를 향하고 있었다. 마치 잔뜩 금이 간 유리구슬을 비추는 햇살 같았다. 에이든의 영혼도 금이 간 유리구슬처럼 유난히 흠집이 많았다. 그래서일까? 그 흠집 안으로 레인디아의 따스함이 더욱 깊게 다가왔는지도 몰랐다.
그녀의 다정함은 영혼까지 스며든다.
그 다정함. 그 충만함.
오직 너만이 줄 수 있는 거야.
그래서 너는 내게 유일한 존재야, 디아.
에이든은 황홀하게 번지는 빛을 향해 입을 맞췄다. 혓바닥으로 탐욕스럽게 그 빛을 긁어모아 집어삼켰다.
“디아, 너를 안고 싶어.”
“하지만, 상처가…….”
“이깟 상처는 아무것도 아니야. 어제 디아가 잠들었을 때도 침대로 옮기는 데 성공했는걸.”
레인디아는 에이든의 허리를 보며 주저했다.
“에이든 님…….”
“지금 널 안지 않으면 죽을 거 같아. 허락해 줘, 응?”
에이든이 절박하게 애원했다. 이어지는 입맞춤에 레인디아는 그를 받아줄 수밖에 없었다. 자신이 받아주지 않는다면 틀림없이 바닥으로 곤두박질쳐서 산산조각으로 부서질 테니까. 그토록 위태로운 영혼이었으니까.
* * *
“으응, 하, 에이든, 님.”
찔꺽, 질꺽. 찔꺽!
질구를 파고든 손가락 세 개가 활어처럼 팔딱이며 안을 헤집어놨다. 관절이 굽이치며 점막을 으깨고 짓이겨 안에 고인 애액이 찰찰 소리를 냈다.
“디아, 네 안에 처음 손가락을 찔러넣은 남자가 누구야?”
“흐, 흐읏, 에이든 님이요…….”
에이든은 손가락을 빼냈다. 손바닥 안쪽까지 흠뻑 적신 애액이 뚝뚝 떨어졌다. 그의 손가락은 물에 담가 있던 것처럼 쪼글쪼글해졌다. 에이든이 질구에 귀두를 갖다 대며 물었다.
“디아의 안을 처음 파고든 남자는?”
푸욱!
하도 쑤셔대서 너덜너덜해진 소음순이 둥글게 벌어졌다. 레인디아는 밑에서부터 차오르는 감각에 바들바들 몸을 떨었다.
“아, 아아……!”
“어서, 대답해 줘. 응?”
“에, 에이든 님이요……!”
페니스가 반쯤 들어오자 레인디아의 아랫배도 볼록해지기 시작했다. 여기까지 에이든이 들어왔다는 걸 알려주듯이. 송곳 같은 귀두가 질벽을 득득 긁으며 살을 벌렸다. 레인디아는 머릿속이 하얗게 질렸다. 그토록 바라던 에이든의 좆이 제 배 안을 채워 주고 있었다.
“으응, 아, 아앙……!”
“후우.”
에이든이 레인디아의 허벅지를 잡아 올리더니 쿵쿵 허리를 찍어내렷다. 망치로 고기를 다지듯 음부가 으깨지는 기분이었다. 이대로 부서지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좆이 쑥쑥 밀려들어 왔다. 귀두가 바깥으로 빠져나갈 때마다 고여 있는 애액을 삽처럼 긁어냈다. 새로 정액을 쌀 자리를 만들려는 것처럼.
“아응, 아, 아! 깊어, 너무 깊어, 요……!”
생자지가 꾹꾹 밀려들어 와 예민한 돌기를 마구 짓밟았다. 거기다 까슬한 음모가 음핵을 치댈 때마다 철 수세미로 박박 비비는 듯한 통증이 일었다. 하지만 레인디아의 몸은 착실히 흥분하고 있었다.
“큭.”
에이든은 레인디아의 배 속 깊이 씨물을 쏟아냈다.
“디아의 안에, 처음 싼 남자는? 응?”
에이든이 상기된 목소리로 물었다. 레인디아는 몸 안 가득 번지는 열기에 취해 젖은 눈을 깜박였다.
“에이든, 님이요…….”
에이든의 입꼬리가 찢어질 듯 귀에 걸렸다. 에이든은 레인디아의 자궁 깊이 좆을 찔러 박은 채 그녀에게 입을 맞췄다. 레인디아의 숨이 생명수라도 되는 것처럼 게걸스레 제 안으로 집어삼켰다.
“아아, 디아. 디아.”
“으응, 하아, 에이든, 님……! 아!”
뼈와 뼈가 부딪히는 격렬한 교접이 이어졌다.
에이든이 파고드는 만큼 레인디아의 다리가 활짝 벌어졌다. 레인디아의 풍만한 젖가슴은 에이든의 단단한 육체에 짓눌려 납작해졌다. 어디부터 어디까지가 제 몸인지 경계가 희미해지고, 두 명은 두 마리가, 두 마리는 하나의 덩어리로 변했다.
철퍽, 철퍽. 퍽퍽, 퍽!
정액이 그득한 안을 치댈 때마다 젖은 소리가 흩어졌다. 에이든은 자궁 여기저기를 찌르며 두 번째 사정을 준비했다. 마음에 드는 곳을 찾았는지 허리를 깊이 찔러넣고 레인디아를 두 팔로 움켜쥐었다.
“디아를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임신시킬 남자도,”
“에, 에이든 님, 이에요.”
에이든 님뿐이에요. 레인디아는 헐떡이는 숨을 겨우 삼키며 대답했다.
에이든은 레인디아를 더욱 꽉 끌어안았다. 안고 있는 것은 자신인데 그녀의 품 안에 안긴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그것도 사실이었다. 이 가는 허리로, 좁은 구멍으로, 제 분신을 따사로이 품어주고 있었으니까. 언젠가 자신의 새끼도 품어줄 사랑스러운 자궁이었다.
“디아, 너는 내 거야. 그렇지?”
“흐읏, 네. 저는, 에이든 님의 것이에요.”
에이든은 몸부림치듯 레인디아에게 제 몸을 치댔다.
나를 만져줘. 그 부드러운 손으로.
나를 안아줘. 너의 부드러운 두 팔로.
“나도 내 전부를 디아에게 줄게.”
“네, 에이든, 님.”
“에이든.”
“흐읏, 네?”
“에이든이라고 불러줘.”
“네, 에이든.”
네가 이름을 불러주면 너의 안에서 내가 되살아나는 기분이 들어.
“디아. 디아.”
“에이든……. 아!”
에이든은 레인디아의 자궁 안에 자신의 모든 걸 쏟아부었다. 정액이 콸콸 넘쳐흘러 레인디아의 배 속을 가득 채웠다. 아랫배가 서서히 부풀어오는 것을 느끼며 레인디아는 눈을 감았다.
그리고 생각했다.
에이든의 아이를 낳아주고 싶다고.
에이든이 행복하길 바랐다.
진심을 다해.